‘옥수동 트러스트’ 장상미(신비)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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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왕가위 르네상스’의 출발점이자 곧바로 그 정점이 된 영화 [아비정전] (1990)에는 ‘영원한 1분’에 관한 장면이 나온다. 아비(장국영)가 수리진(장만옥)을 꼬시는 장면. 아비는 수리진에게 잠깐 시계를 보라고 한다. 둘은 한동안 시계를 바라본다. 얼마나 지났을까. 아비가 수리진에게 말한다.
“1960년 4월 16일 오후 3시. 우린 1분 동안 함께 했어. 난 잊지 않을 거야. 우리 둘만의 소중했던 1분을. 이 1분은 지울 수 없어. 이미 과거가 됐으니.”
그리고 수리진은 쓸쓸한 어조로 자신에게 독백한다.
“그는 이 1분을 잊겠지만, 난 그를 잊을 수 없었다.”
영화는 그리고 음악은 누군가가 그 영화을 보면서 함께 흘러간 시간, 그 음악을 들으며 함께 꿈꿨던 시간을 언제든 다시 불러온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와 음악은 우리 시대의 ‘타임머신’이다. 왕가위의 영화와 왕걸의 노래는 나에게 언제든 90년대를 당장에 불러온다.
왜 갑자기 [아비정전] 타령이냐고? ‘지금은 사라진 어느 동네’에 관해 나는 이야기하고 싶으니까. 내가 직접 들려주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 사라진 동네를 “그저 기록하고 싶었다”는 한 사람, 오랫동안 시민단체에서 활동가로 일했고, 지금은 개인 작업실이자 주말 동네 책방인 ‘어쩌면 사무소’를 운영하며 책도 쓰고, 번역도 하는 ‘신비’ 혹은 ‘장상미’가 ‘지금은 없는 동네’에 관해 이야기해줄 주인공이다.
지난주 목요일 저녁, 정말 오랜만에 ‘어쩌면 사무소’를 들러, [지금은 없는 동네: 옥수동 트러스트]에 관해 그 책을 만든 신비(장상미)와 대화했다. 이 글은 그 대화를 정리한 것이다.
- 2017년 9월 20일 (목), 서울 약수동 ‘어쩌면 사무소’
- 인터뷰이: 신비(장상미), 인터뷰어: 민노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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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동 트러스트?
드라마 [서울의 달] 배경이었다고 하는 달동네 옥수동. 끝없는 재개발의 도도한 행진으로 사방이 아파트숲으로 변해가고 있는 가운데, 거의 마지막 남은 13구역의 재개발이 최근 확정되었다. 2011년 들어서는 주민들이 속속 이사를 가면서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는 옥수동 달동네의 마지막 모습을 발걸음 닿는대로 기록한다. 2011년 9월부터. @sinbi
옥수동을 기록하자는 아이디어는 짝꿍으로부터 나왔고, 옥수동 트러스트라는 이름은 내셔널트러스트 운동에의 오마쥬로 붙여보았다.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은 시민들의 자발적인 자산 기증과 기부를 통해 보존 가치가 높은 자연환경과 문화유산을 확보하여 시민의 소유로 영구히 보전하고 관리하는 시민운동을 의미한다. 이 운동은 산업혁명을 통해 급격한 경제 성장을 이룩했던 영국에서 1895년 시작되었다. 당시 영국은 무분별한 개발과 자연환경 파괴 그리고 자연?문화유산의 독점적 소유에 의한 각종 사회문제가 발생하였다. 물질적 풍요가 인간의 존엄과 삶의 질을 개선할 수 있다는 환상이 사라질 즈음, 시민들 스스로 내셔널 트러스트(National Trust)를 탄생시켰다.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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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속 옥수동을 보면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긴 하지만, 가장 가까이는 내가 어릴 적에 살던 유년을 다시 만나는 것 같은 감정이 들기도 한다. 사라져버린 추억의 공간 같은 감정이랄까. 내 유년의 왕국은 왕십리 달동네였다.
아직 있는 동네이기도 하다.
– 추억에 갇힌 공간은 아니라는 의민가. 현재형의 공간이란 의미? 그런데 왜 책 제목은 ‘지금은 없는 동네’인가.
아직 여전히 서울에는 책 속 옥수동 같은 동네가 있다는 의미에서는 ‘아직 있는 동네’지만, 책 속 옥수동에만 한정하면, 그 옥수동은 지금은 다 사라졌다.
없어지는 게 안타깝다거나 하는 그런 감정이 지배적인 감정은 아니(었)다. 옥수동에 좋아서 온 것도 아니었다. 아니 좋고 싫고를 떠나서 서울 생활 8년 만에 겨우 지상으로 올라왔는데, 2년 만에 다시 반지하로 내려가야 하는 마음은 좋지 않았다(신비는 당시 어쩔 수 없이 옥수동 반지하 방으로 이사 온 상황. – 편집자).
그래서 이 동네, 애정이 있거나 특별한 감정이 있는 건 아니었고, 그저 나에겐 머무는 곳이었다. 시민단체 활동가로 바쁘게 일하면서 그저 잠만 자는 곳이었다. 가끔 뒷산에 올라가긴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러다가 안식년을 맞았고…
– 그럼 옥수동 트러스트를 하겠다고 생각한 특별한 계기나 사건이 있었나.
그런 건 없다. 그때 몸이 아파서 쉬었고,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반년쯤 지날 무렵 동네에 본격적인 재개발 분위기가 일기 시작했고, 같이 살던 친구가 ‘동네가 다 사라지기 전에 사진으로 남겨보면 어떻겠느냐’고 가볍게 권했다. 나도 쉬는 중에 무리하지 않으면서 평소에 좋아하는 ‘기록하는 일’을 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막상 프로젝트를 시작하고보니 동네에 안 가본 곳이 참 많더라. 3년을 살았는데도…
– 산책에 관해 말하면, 나는 골목 산책을 참 좋아한다.
늘상 하는 게 산책이고, 걷는 걸 좋아하니까. 특별히 의미를 부여한 건 없다. 그저 평소 안 가본 골목으로 가 보고. 여기저기 보고 하는 식이었다.
– [옥수동 트러스트]와 같은 기록에 대해 어떤 이들은 가난한 달동네 사람들의 초라한 삶을 ‘추억팔이’로 전시하는 게 아니냐고 비판하기도 하는데.
옥수동은 내가 들어왔을 때 이미 재개발 붐이 한창이었다. 삶의 공간으로서 기존 동네는 이미 깨어지고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내 프로젝트는 거기 살던 사람들의 삶 자체를 기록한 게 아니고, 그 흔적이랄까, 물리적인 공간으로서 옥수동의 골목과 건물에 주목한 거다.
추억을 자극하기 위해 가난을 전시하는 행위는 어떤 의미로선 의도한 가치관을 전하려는 시도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런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 동네를 없애지 말자고 주장한 것도 아니고, 그럴 생각도 없었다.
그저 이 공간을 기록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저 내가 마침 사는 곳이었고, 희한한 주거 양식이 많았다. 한 뼘 차이나게 옆집과 이웃해 있는 집도 있고. 무엇보다 내가 그런 집에 살았다. 그걸 기록하고 싶었던 거다.
– 예상 외로 아주 건조하다.
원래 그랬다. 특별한 의도가있는 건 아니니까. 7,80년대의 급성장하는 서울이라는 도시는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고, 생존을 위해 옥수동 같은 달동네를 형성한 사람들이 그런 노동력을 제공했다. 급격한 산업화가 몰고온 끔찍한 고난도 많았겠지만, 어쨌거나 거기서 먹고살고 일부는 부를 축적하기도 했을거다.
나는 가난한 동네를 아련하게 비추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저 내가 우연히 있는 곳, 그런데 참 특이한 곳, 그 공간을 그저 기록했을 뿐이다. 막연히, 기록을 해두어야할 공간이라고 느낀 것 자체에 무언가 의도가 들어있었을 수는 있겠지만.
– 하지만 책을 만들면서 어떤 감정이나 정서가 형성되지 않나.
두 가지다. 우선, 나에게 중요한 전환점이 된 시기를 보낸 동네라는 것. 그런데 사라져버렸다는 것. 그렇다고 다시 거기에 살고 싶다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사라진다는 것에 대한 그런 애잔함은 있다.
또 하나는 ‘도시에 대한 권리’ 개념을 주창한 프랑스 학자 르페브르(Henri Lefebvre)의 질문이다.
“이 도시의 권리는 누구에게 있는가?”
토지나 주택의 소유권을 갖지 않은 사람들은 엄연히 주민으로 살고 있어도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 건물주들의 집합인 조합과 재개발에 투여될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투자자들만이 주민이 된다.
결국, 돈 없는 사람들은 여기서 다시 쫓겨날 수밖에 없다. (도시의) ‘주인’이라는 것과는 어떤 접점도 없는 사람들, 나를 포함해서. 그래서 책을 만들면서 약간 분노가 일기는 했다. 같이 살던 친구와 나는 시민운동을 하면서 재개발에 관해 듣거나 경험한 것이 어느 정도 있는 편인데도 만만치 않은 상황을 겪었다. 소송도 당했고.
동네에 이재에 밝은 이들도 있었겠지만, 하루 벌어 먹고 사는 사람들 중에는 속절없이 밀려난 이들이 많았을 거다. ‘내가 그런 일을 당하다니’라기보다는 그런 일을 멀쩡히 방치하거나 심지어 지원하는 사회에 화가 났다. 사회과학적 교양이나 지식이 아니라 내가 몸소 체험으로 ‘주거권’이라는 걸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 시간이었다.
– 옥수동 달동네 집들은 형태상 어떤 특징이 있나.
한 뼘이라도 더 확보하려는 방식으로 집이 올라갔다. 그래서 특이한 집들이 많다. 1층, 2층의 지붕 방향이 다 제각각인 집도 있다. 어떤 집은 위로 올라갈수록 커지는 집도 있다. 대지의 형태나 방위, 일조권 같은 걸 이야기할 틈이 거의 없다.
– 비정형적이면서, 소시민적 욕망이 투영된 공간… 대개 보기에 좋지 않고, 예쁘지않은 공간인데, 나는 이런 공간에 더 매력을 느낀다. 고등학교 때 강남(역삼동)으로 이사했는데, 그 커다랗고 반듯한 건물들이 위압적이었던 기억이 난다.
예쁘지 않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예쁨이 느껴지긴 했다. 그 욕구들이 솔직하게 투영되니까. 그 한뼘이라도 늘려려는 욕구. 그게 스스로 이뤄지고, 성취된 공간. 어떻게든 머리를 짜내서, 실패를 겪으면서 만들어진 공간. 어떤 건축가도 만들어낼 수 없는 그런 공간.
– 책을 만들면서 가장 즐거웠던 순간이랄까. 보람을 느낀 순간이랄까.
펀딩을 했다. 그 이유는 두 가지. 하나는 마감을 정해야 책을 끝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또 다른 하나는 책을 다 만들어놓고 독자에게 보여주기보다는 만드는 과정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다. 펀딩 사이트인 텀블벅에 업데이트도 한번씩 올리고, 그러면 또 누군가가 후원을 하고.
특히 책을 만들기로 결심한 최근 1~2년이 아니라 옥수동 트러스트를 처음했던 6, 7년 전의 활동을 기억하는 사람들, 그런 이들이 자신의 페이스북이든 트위터에 옥수동 트러스트에 관해 글을 적는 걸 보는 것. 그 하나하나가 참 즐거웠다. 내 개인적인 프로젝트이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볼까 궁금하기 마련인데, 그걸 미리 맛보는 즐거움이 있었다.
– 독자들은 각자 소감이 다르겠지만, 책을 만든 작가로서는 이런 부분은 좀 봐주었으면 좋을텐데 하는 바람이 있을 것 같은데.
그런 바람이 있는 줄 몰랐는데, 책을 배포하고 나서야 확인한 게 있다. 여러 사람에게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거다. (뭔가?) 책의 마지막에 이런 문장을 썼다.
“바라건대, 누구나 각자의 옥수동을 만나기를. 소진된 몸과 마음을 채워서 그 힘으로 서로를 찾아낼 수 있기를. 그렇게 다른 미래를 그려나갈 수 있기를.”
여기에 대한 반응이 있었다. 지금 자신이 사는 곳 혹은 살았던 곳을 내가 ‘옥수동 트러스트’로 기록했던 것처럼 나름의 방식으로 기록하고 싶다는 이야기다. 그런 얘기를 동시에 몇 명에게서 연달아 들으며 굉장히 감동했다.
– 책 종이질이 참 좋다.
어울리는 종이를 선택을 했을 뿐.
– 몇 부나 찍었나.
120부.
– 제작비는 얼마나 들었나.
책 인쇄비만 따지면 150만 원.
– 다른 걸 따지면 적자겠네?
100만 원 정도 적자. 리워드 비용, 택배비, 편집 인건비는 내 사비로, 내 몸과 시간으로 충당했다. 60부 정도가 후원자들께 전달됐다. 나머지 60부 정도가 남았다. 나머지를 팔면, 100만 원 적자가 50만 원으로 줄지 않을까 기대 중이다.
– 투여된 (노동) 시간은?
물리적으로 쓴 시간은 석 달 풀타임 정도? 그 전에 조사하고, 사진 찍고, 그런 시간들은 2, 3년 정도인데, 그건 풀타임은 당연히 아니고.
– 책을 만들기로 결심한 건 언제?
책을 만들기로 생각한 건 2016년 12월. 새 단지 입주가 시작됐다는 기사를 접하고 나서다. 그동안 동네에 가보지 못했다. 생각하는 것도 힘들었다. 그런데 새 아파트가 완공이 되었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들어온다고 하니까, 이제는 정말 없어진 거지, 그 동네가. 뭔지 모르겠지만, 정말 없어진 것, 현실이 된 것, 오히려 그렇게 과거형이 되어버리니 그 동네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어졌다.
– 왜 굳이 종이책으로 만들었나.
일단 개인적으로 이 기록에 관해서 마침표를 찍고 싶었고, 온라인에 게시된 형태가 아니라 종이책으로 나와았을 때 마침표가 될 것 같았다. 그리고 ‘도서관’에 책을 넣고 싶었다. ISBN이 있는 책은 국립중앙도서관 서고에 영구보존하게 되어 있다(도서관법 20조 참조).
그래서 ‘정말 기록’으로 남길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사적인 기록에 마무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제대로 된 형태로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급히 출판등록을 하고, ‘어쩌면’ 출판사를 설립해 책을 냈다.
– 다른 계획은.
작년부터 다른 출판사와 함께 옥수동과 어쩌면사무소에 관한 책을 쓰고 있었는데, 그걸 가을에 마무리할 예정이다.
– 그럼 비슷한 책 아닌가.
[지금은 없는 동네]는 동네에 관한 기록이고, 가을에 나올 책은 삶의 방식에 관한 책이라서 주제가 다르다. 옥수동은 그 이야기가 시작되는 공간적인 무대다.
– 찍었던 사진들 중에서 꼭 한 장면을 꼽자면.
종이 책을 기준으로 보면 137~149페이지까지의 풍경. 마지막 겨울. 2013년 2월에 쫓겨났는데, 그때 마침 엄청 함박눈이 내렸다. 동네가 철거 직전이라서, 집에 엑스표가 그려지고… 공가(빈집)로 빨간 페인트로 적혀지고…
굉장히 험악해진 상태였는데, 눈이 내리면서 순간적으로 온 동네가 신비로울 정도로 아름답게 변했다. 그때 잠시지만, 굉장히 들떠서 감동했다. 여기 저기를 눈 맞으며 돌아다니면서 정신없이 사진을 찍었다.
– 가장 많이 쓴 사진기는.
아이폰3GS. 근사한 사진을 남기는 것보다는 그 장소를 온라인 지도 위에 영구 보존하기 위해서 위치 정보와 함께 기록하는 게 일차 목표였다. 지금은 디지털 카메라도 위치 정보를 남기는 걸로 아는데, 그때는 아이폰밖에 없었다. 이후에도 그 시기에 갖고 있던 스마트폰만으로 찍었다.
– 스토리를 의도적으로 배제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사람의 모습, 가령, 동네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이라든가, 한가하게 볕을 쬐는 할머니라든가… 이런 사람의 모습을 찍고 싶은 생각이 들지는 않았나.
그렇지는 않았다. 그리고 찍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아까 이야기한 그런 이유로. 그리고 사람들이 동네에 별로 없었다. 가게도 다 나가고. 아직 남아 있는 가게가 있을 때, 남아 있는 가게라도 한번은 들어가봐야겠고 생각했지만, 이미 많이 늦었었다.
서울에 올라와서 (시민단체) 활동에만 몰두하느라 이웃을 제대로 사귀어 본 적이 없었다. 옥수동에서 동네를 돌아보기 시작한 시점에는 이미 사귈 이웃이 별로 남아있지 않았고. 적어도 대상이 사람이라면, 서로 사귐이나 공감대가 없는 상태에서 함부로 찍는 사진은, 민노씨가 질문했던 것처럼, 추억팔이나 일방적 전시가 되기 십상일 거다.
최근 서울 중구에서 주민 동의없이 ‘쪽방촌 체험 프로그램’이란 걸 기획해서 뭇매를 맞았는데(참조: 한국일보), 정말 끔찍한 기획이라고 생각한다. 옥수동 트러스트는 건물과 골목 같은 물리적 공간의 기록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거기 사는 주민의 모습을 동의 없이 함부로 찍지 않으려 했고, 단지 건물이나 물건, 풍경이라고 해도 사생활을 침해하는 지점이 발생하지 않을지 의식적으로 피하면서 조심조심 작업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이 기록에 어떤 감정적인 의도를 부여하지 않으려는 내 태도 자체에서 쓸쓸한 느낌을 받는 건 사실이다. 지금은 없는 동네가 그때는 과연 정말로 존재했던가, 하는 질문이 남는다. 그래도 당시에는 그게 최선이었다고 생각한다.
– 사진 저작권을 포기했다고 들었다.
옥수동 트러스트의 사진은 처음부터 CC-by(저작권자만 표시하면 맘껏 이용할 수 있게 하는 일종의 약속, 라이센스 표시)로 공개했다. 이번 책 작업을 하면서 그 사진을 전부 퍼블릭 도메인으로 공개하기로 했다. By도 이제는 필요없다고 생각했다. ‘여기’에 프로젝트 당시 운영했던 블로그, 사진 위치정보를 읽어 뿌려주는 구글 지도, 그리고 사진 폴더 전체를 공개해두었다.
– 종이 책을 사고 싶으면?
종이 책을 보기 원하는 분을 위해서는 위에 설명한 ‘옥수동 트러스트’ 웹페이지에 ‘주문하기’ 메뉴를 넣어두었다. 오프라인에서는 어쩌면사무소, 그리고 옥수동과 인연이 있는 동네 서점 두 곳(프루스트의 서재, 목수책방)에 입고해두었으니 방문하면 실물을 보거나 구입할 수 있다. 펀딩 후원자 중에 9/30일 전북 남원 시내에 서점을 여는 이가 있어서 거기도 보냈다(알아가는 책가게).
– 끝으로 독자에게.
마음에 닿는 것을 특별히 해석하거나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그저 기록하는 것이 굉장히 과정도 즐겁고, 돌아봤을 때 당시에 몰랐던 감정이나 상태를 보여주는 것 같다. 그런 작업을 누구든 하나씩 해보면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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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가 마무리될 즈음 [섬]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하지만 오래된 기억이라 정확히 어떤 구절인지는 몰랐다. 신비에게도 ‘[섬]의 어떤 구절이 떠오른다’고만 말했다. 그래서 인터뷰를 정리하면서 그 구절을 찾아봤다. 그 문장들로 마무리를 대신한다.
“저마다의 일생에는, 특히 그 일생이 동터 오르는 여명기에는 모든 것을 결정짓는 한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을 다시 찾아내는 것은 어렵다. 그것은 다른 수많은 순간들의 퇴적 속에 깊이 묻혀 있다. 다른 순간들은 그 위로 헤아릴 수 없이 지나갔지만 섬뜩할 만큼 자취도 없다.
결정적 순간이 반드시 섬광처럼 지나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유년기나 청년기 전체에 걸쳐 계속되면서 겉보기에는 더할 수 없이 평범할 뿐인 여러 해의 세월을 유별난 광채로 물들이기도 한다.”
– 장 그르니에, [섬], ‘공(空)의 매혹’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