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7월 25일 민주당 전당대회 첫날인 월요일 밤 미셸 오바마의 연설은 뜻하지 않은 대히트였다. 오죽했으면 “힐러리 클린턴이 못하고 있는 부분을 미셸 오바마가 채워줄 수 있다”면서 퍼스트레이디가 힐러리 캠페인을 적극적으로 도와야 한다는 말이 다 나올까.
미국 대통령은 맞벌이 직업이다. 현대의 미국 대통령 부인은 옛날처럼 예쁘게 웃고 손을 흔드는 현모양처만으로는 안된다는 사실을 지난 월요일 밤, 미셸 오바마가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차기 퍼스트레이디가 되려고 하는 멜라니아 트럼프가 얼마나 자격 미달인지 비참할 만큼 잔인하게 보여준 연설이었다.
불과 며칠 만에, 미국은 물론이고, 한국에서도 전문이 번역되어 화제가 되고 있지만, 미셸 오바마의 연설은 언론이 월요일에 가장 기대하던 연설은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조연이 관심을 가로챈 셈이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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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오바마의 연설이 그날 가장 기대되는 연설이 아니었다는 이유는 이렇다.
미셸의 역할은 ‘징검다리’
우선 민주당 전당대회의 연사진은 첫날부터 화려했다. 데미 로바토, 에바 롱고리아 같은 유명한 라틴계 스타들은 물론이고, 여성 대통령 후보로 이름이 오르내리던 크리스틴 질리브랜드 상원의원, 말솜씨 뛰어나기로 소문난 앨 프랭큰 상원의원, 샌더스 지지자로 유명한 코미디언 사라 실버만으로 분위기를 띄우고,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과 버니 샌더스가 늦은 밤, 마지막에 등장해서 첫날의 대미를 장식할 예정이었다.
청중과 언론의 관심은 불같은 연설로 청중을 휘어잡을 것으로 예상되는 워런 상원의원과 힐러리의 지지를 얼마나 적극적으로 밝힐 것인지를 알려줄 마지막 연사 버니 샌더스에 쏠려있었다. 무엇보다 그날은 사실상 샌더스가 생중계되는 언론에서 마지막 연설을 하는 고별인사의 날이나 다름없었다.
퍼스트레이디 미셸 오바마는 그 중간, 그러니까 워런 상원의원 바로 앞에 들어가 있었다. 말하자면, 할리우드 스타들의 연설이 끝난 후 누구나 기다리는 무게 있는 연설(워런, 샌더스)로 가기 위한 적당히 무게있는 ‘징검다리 연사’가 미셸 오바마였던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미셸 오바마가 아무리 똑똑하다고 해도 미국인들이 그녀가 좋아서 버락 오바마를 뽑은 건 아니지 않은가.
짧지만 강렬하고 감동적인 연설
역사적인 게티스버그 연설은 원래 주 연사가 링컨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아는가? 그날 행사에서 사람들이 가장 기대하던 연설은 당시 최고의 연설가였던 에드워드 에버릿(Edward Everett)의 연설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에버릿의 2시간 동안의 연설 대신 3분짜리 링컨의 연설 만을 기억한다.
미셸에게는 제한적이지만 분명한 역할이 있었다. 1) 힐러리 클린턴처럼 여성이고 2) 2008년 선거 때 만 해도 남편에 대한 힐러리의 공격으로 힐러리와 빌 클린턴을 아주 싫어한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돌았던 미셸이 힐러리를 지지했을 때 나올 효과는 각별하기 때문이다.
물론 ‘오리지널’이 나와서 지난주에 있었던 멜라니아의 연설문 표절 사건을 일깨워주는 덤도 있었지만, 미셸의 연설은 멜라니아의 표절 파문이 있기 훨씬 전에 결정되었다.
미셸 오바마의 연설은 짧았다. 5장짜리 원고에, 시간은 (박수받는 시간까지 다 계산해도) 15분을 넘지 않는 연설이었다. 하지만 구성은 완벽에 가까웠다. 퍼스트레이디는 선출직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리 똑똑하고 능력이 있어도 자신의 업적이나 주장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큰 호응을 얻기는 힘들다. 미셸과 미셸의 연설문 작성자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딸들에 관한 이야기로 연설을 시작했다. 사상 첫 흑인 대통령으로 백악관에 들어간 오바마 가족과 그 딸들의 이야기로 공감을 끌어내다가, 1/3지점에서 ‘여성’인 힐러리 클린턴의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이런 식이다:
“어린 아이였던 우리 딸들이 백악관에서 성숙해지는 시기(formative years)를 보내면서 훌륭하게 자랐다.”
앞으로 4년, 8년 동안 그런 시기를 보낼 지금의 어린아이들이 어떤 롤모델을 보면서 자라야 하겠는가? 즉, 연설을 듣는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트럼프가 롤모델인가, 힐러리가 롤모델인가?’라고 자문하게 한다.
그리고 힐러리의 강인함과 사명감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8년 전 후보지명을 받지 못했지만, 화를 내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대신 국무장관으로서 나라에 봉사했다는 것. 힐러리는 여자라는 이유로 옷을 어떻게 입느니, 어떻게 웃느니 같은 개인적인 공격을 받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나라를 위해 일했다고 강조하고, 내 딸들을 비롯해 자라나는 세대에게 보여주고 싶은 롤모델이라고 호소했다.
이 접근법의 절묘함은 힐러리 클린턴의 모든 문제, 즉 월스트리트와의 관계, 이메일 게이트 등의 이슈로부터 ‘여자’와 ‘직업 정신’ 그리고 ‘롤모델’로 청중의 관심을 돌린다는 데 있다. 즉, 힐러리가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 것은 여성과 다음 세대, 그리고 역사의 문제라고 강조한 것이다.
힐러리의 ‘문제들’은 사라지지 않겠지만, 대통령이 될 자질을 충분히 갖춘 힐러리의 역사적 의미는 아무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로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묵묵히 해내는 사람들이 그런 세상을 만들어낸다는 것이 미셸의 호소였다. 그러면서 트럼프라는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고도 트럼프를 정조준해서 자격을 비교했다.
완벽한 전환: ‘딸’에서 ‘힐러리 클린턴’으로
글은 전환이 중요하다. 특히 청중의 반응이 즉각적인 연설문은 더욱 그렇다. 미셸의 연설은 그런 문제를 딸들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힐러리 개인의 성격과 업적을 이야기하고, 거기에서 역사적인 역할을 끄집어내는 전환이 완벽했다.
특히 “나는 매일 아침 노예들이 지은 집(백악관)에서 잠을 깬다”는 말은 청중들의 마음속을 깊이 파고들었다. 미셸은 대학교 졸업식 연설에서 이미 그 말을 한 적이 있다. [footnote]스탠드업 코미디언들이 자주 꺼내놓는 레퍼토리가 있듯, 연설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성공했던 표현들을 모아서 다시 사용한다.[/footnote] 세상은 발전하고, 우리 후세들은 우리보다 나은 세상을 살아야 하는데, 그런 발전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개인적인 경험에서 끌어낸 것.
이 대목에서 컨벤션 센터에 감동이 퍼져나가는 게 눈에 띄게 보였고, 일제히 기립박수를 시작했다. 중계를 보던 내가 미셸 오바마의 연설이 대성공이라고 확신한 것이 이 대목이었다.
연설문에서 30년 전의 힐러리의 말을 인용한 것도 눈길을 끈다.
“한 아이를 기르기 위해서는 온 마을이 함께 노력해야 한다.”
“It takes a village to raise a child.”
이건 힐러리가 퍼스트레이디로 있을 때 사용하고 책으로도 나온 말이다.[footnote]이 잠언은 아메리칸 인디언 오마스 족에게 전해져 오는 격언이다.[/footnote] 누군가의 말을 인용하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큰 찬사인 동시에, 개인적인 공감을 표현하기에 좋은 방법이다. 그날 컨벤션 센터에 모인 사람들 중에 그 문장이 힐러리의 말인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이 문장을 인용한 것은 힐러리를 향한 미셸의 ‘윙크’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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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연설의 탄생, 그 숨은 주역
그런데 그런 문장을 가져온 것이 미셸의 솜씨일까? 내 생각에는 연설문 작성자가 발휘한 센스다. 누가 작성했는지를 알면 더욱 분명해진다.
멜라니아 트럼프가 베낀 미셸의 2008년 연설을 포함해 미셸 오바마의 연설은 사라 허뤼츠(Sarah Hurwitz, )가 지난 8년 동안 작성해왔다. 흥미로운 것은 허뤼츠는 2008년 오바마의 후보 지명이 있던 전당대회 때 미셸의 연설문을 작성한 것이 미셸과의 첫 작업이었고, 그 전까지는 힐러리의 연설문 담당이었다는 사실이다.
힐러리가 후보 지명을 받는 데 실패하자, 허뤼츠는 다음 일자리를 찾아야 했고, 당시 28세 신동으로 소문난 버락 오바마의 연설문 작성자인 존 패브로가 미셸 오바마에게 허뤼츠를 천거한 것으로 알려졌다. 클린턴 부부는 2007, 2008년 경선 내내 오바마의 경험 부족을 지독하게 공격했고, 미셸 오바마는 그 과정에서 힐러리 클린턴을 아주 싫어하게 되었는데, 그 사나운 공격의 말을 다듬어준 허뤼츠를 자신의 연설문 작성자로 뽑은 것이다. 적장을 모셔온 셈이다.
허뤼츠는 처음에는 미셸이 자신을 경계할 거로 생각했단다. 하지만 첫날 90분 동안의 만남으로 솔직하게 원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소통하는 미셸의 스타일을 이해하게 되었고, 그 뒤로 8년 동안 함께 일해온 것이다.
버락 오바마가 존 패브로라는 20대의 청년을 미국 대통령 연설문 작성자로 채용한 것이나, 적이었던 힐러리를 위해 일했던 허뤼츠를 퍼스트레이디의 연설문 작성자로 채용한 것은 철저히 능력만을 보는 미국의 프로페셔널리즘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연설문 작성자들이 작업하는 모습이다. 버락 오바마와 미셸 오바마를 따라 다니면서 모든 이슈를 이해하고, 길게 대화하고, 서로의 사유를 ‘교감’한 상황에서 각종 행사와 상황에 맞는 연설문을 작성하고, 그 초안을 전달받으면 읽고, 수정해서 넘겨주고, 다시 수정하기를 여러차례 반복하면서 연설문을 완성해 나간다.
그리고 그 과정을 반복하면서 대통령과 퍼스트레이디의 사고방식과 스타일을 익히게 되는 것이다. 이쯤 되면 연설자와 연설문 작성자는 한 몸처럼 사고하게 된다.
흥미로운 대목:
버락 오바마는 마지막까지 문구를 뜯어고치는 성격이고, 미셸 오바마는 연설 몇 주 전에 연설문을 완성한 후에는 여간해서는 고치지 않고 계속 연습해서 외워버리는 성격이라고 한다.[footnote]참고: 버락 오바마의 힐러리 클린턴 지지 연설 (임예인 번역)[/footnote]
위대한 연설은 그렇게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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