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어엿한 성년의 나이.
[장도리]도 올해로 20년이다.
경향신문에서 [장도리]를 연재하는 박순찬 작가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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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5월 15일 오후
- 서울 합정역 인근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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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소개.
경향신문에서 [장도리]라는 만화를 그리는 박순찬이다.
– ‘장도리’가 벌써 20년이다.
일본에서는 [유리가면]이 40년 연재하다가 잠시 중단되었다고 하는데, 신문만화는 하나의 드라마를 계속 이어가는 것은 아니고, 하루하루 끝나기 때문에 내가 20년 동안 뭔가 끌어왔다는 느낌은 별로 안 든다. 생각해보면 나도 참 무던하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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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도리의 탄생
– 처음 시작했던 때를 회상하면.
처음 신문 연재를 시작했을 때는 무척 힘들었다. 신문은 만화 잡지와는 다르니까. 만화 잡지를 사는 독자들은 당연히 그 만화잡지를 보고 싶어서 사는데, 신문은 세상이 어떻게 굴러가나 확인하기 위해 산다. 독자의 선택이긴 하지만 사회적으로 좀 강제적인 측면이 있다. 그게 처음에는 아주 부담스러웠다.
– ‘장도리’ 캐릭터 어떻게 태어났나.
내가 일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종이신문을 많이 읽던 시절이다(1995년). 독자층도 초등학생부터 어르신까지 다양했다. 그래서 나는 그 다양한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걸 그려야겠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가장 평범한 사람의 보편적 인식이 뭘까 생각했다. 이렇게 자문했다.
상식적인 보통 사람이라면 어떻게 세상을 볼까?
그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할까?
최근 재밌게 본 미드가 [덱스터]다. 하지만 내가 텍스터 같은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신문만화를 그릴 수는 없지 않나. 물론 [덱스터]는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라는 비보편적인 캐릭터를 통해 누구나 느낄 법한 보편적 감성에 접근한다. 하지만 신문만화에서 그런 형식적 파격을 취하기는 어렵다.
젊은 시절에는 극화를 꿈꿨다. 신문 연재를 하면서 어려웠던 건, 독특한 캐릭터를 만들어 창작하고 싶은 욕망을 누르고, 보편적인 사람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 점이 가장 어려웠다.
– 주인공 이름이 ‘장도리’다.
장도리라는 이름에 의미를 많이 두려고 한 것은 아니고, 사람들이 편하게 느끼는 이름으로 뭐가 있을까 생각하다가 짓게 된 거다. 그 당시 트랜드가 ‘왈순아지매’, ‘나대로 선생’ 등등 편한 이름들이었다. “장도리”라는 이름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 영화 [올드보이]의 장도리 싸움 장면처럼 강한 느낌을 의도하진 않았나.
장도리는 의자도 만들 수 있고, 집도 만들 수 있고, 뭔가를 만들 수 있는 익숙한 생활 도구다. 하지만 그런 의미를 의도한 건 아니고, 친근하고, 쉽게 발음할 수 있는 어감 때문에 ‘장도리’로 정한 거다. 영화 [올드보이]의 그런 장도리는 아니다. 영화가 훨씬 뒤에 나오기도 했고. (웃음)
– ‘장도리’의 분노는 개인적인가 직업적인가.
사람들이 사안에 따라 분노하는 모습은 다 제각각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 개인의 철학과 취향에 따라 다르고, 살아온 경로에 영향을 받기도 한다. 내가 하는 일은 많은 사람들에 적용될 수 있는 사회적 문제를 소재로 다룬다.
그래서 개인적인 분노를 작품에 개입하는 것은 경계한다. 가능하다면 개입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래야 사안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분노의 감정이 생기더라도 더 객관적으로 더 과학적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한다.
– 작가로서의 박순찬과 저널리스트로서의 박순찬은 서로 충돌하나.
처음에는 충돌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 둘을 나누는 건 인간의 관념일 뿐이다. 둘은 서로 조화로울 수 있다고 본다. 고전을 보면, 저널리즘적 기록으로도 또 개별 작품으로도 훌륭한 것들이 많다.
– [미생] 같은 장편을 작업하고 싶다는 생각은?
욕심은 당연히 있지.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따라주고 있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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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많이 놀고 대신 고민하는 사람
– 작업의 노동 강도는.
신문만화를 그리는 작업이 노동은 맞는데, 정시에 출근해서 만화를 작업해야 하니까 노동자인 측면이 있지만, 개인적으로 작가는 그냥 작가로 본다.
– 작가와 노동자는 다르다?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한다. 작가는 노동자들이 노동하느라 놓친 세상, 반복적인 일상에서 보지 못한 무엇인가를 ‘대신’ 봐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작가는 통상적인 노동자와는 다른 관점으로 봐야 하지 않나 싶다. 겉으로 보이는 그 일이 다는 아니니까. 쉬고 있을 때도 앉아 있을 때도 뭔가를 생각해야 하니까. 노동자를 대신해서 여유 시간을 가지고, 그 시간에 노동자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보여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진심인가? 선민의식이라고 독자에게 욕먹겠다. (웃음)
진심이다. 개인적으로 작가는 노동자를 대신해서 더 여유를 갖고 더 놀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웃음) 그런데 무슨 특권을 주장하는 게 아니라 그만큼 작가로서의 사명감과 의무감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 마감하고 나면 아쉬움이 남을 때도 있을 것 같다.
정도는 다르지만 마감하고 나면 뭔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상황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마감하면 다시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처음에는 그런 아쉬움이랄까, 독자에 대한 미안함이랄까 그런 게 아주 심했다. 앞서 말했지만, 독자들에게 강제로 떠넘기는 그런 기분,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은 그런 마음… 그런데 이 일도 오랫동안 하면서 스트레스를 피하는 방법도 생기고 그러더라.
– 스트레스 줄이는 노하우?
복합적인 건데, 독자와의 소통도 누적되고, 독자 생각을 조금씩 더 알고, 처음에는 독자들 생각을 몰라서 두려웠는데, 조금씩 독자들 생각을 알게 되고, 조금씩 친해지고, 부담도 덜해지고. 스트레스를 줄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다시 생각하지 않는 거다.
처음에는 정말 오랫동안 생각을 했다. 내가 왜 이렇게 그렸지? 며칠 동안 고민하고, 자책하고… 처음에는 그랬는데, 조금씩 실수와 아쉬움을 인정하고 다음에 잘해야겠다는 방향으로 바꿔 갔다. 후회해봤자 변하는 건 없으니까. 매일매일 연재하는 사람은 스트레스가 누적이 되면 작업 전체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
– 아주 공감한다.
예전에는 인터뷰 요청에 거의 응하지 않고 피했다. 인터뷰라는 게 큰 방송사나 신문사들은 이미 방향을 잡고 온다. 인터뷰이가 하는 말과 상관없이 이미 정해진 방향으로 인터뷰이의 코멘트를 딴다. 그런 걸 생각하면 내가 한 인터뷰도 안 본다. 속상하기도 하고. 그랬던 시절이 있다.
– 20년이다. ‘노는 게 중요하다’ 했는데, 회사에서 안식년이라도.
그런 건 없을 것 같다. (웃음) 지금은 주 5일 작업하는데, 이렇게 일주일에 이틀 쉬는 것도 얼마 안 됐다. 초기에는 쉬는 날도 휴가도 없이 매일 나온 적도 있다. 신문만화를 그리는 작가들은 휴가 가기 전에 미리 작품을 그려놓고 갔었다. 가령 정기 휴가 가기 전에 일주일 치 그려놓고 간다든가.
– 작가는 놀아야 한다더니 (…)
신문만화 작가에게 휴가가 처음으로 생긴 게 박재동 선배가 처음이다. 박재동 선배가 휴가 가면 아예 지면에 작품을 싣지 말자고 했다. 미리 다 그려놓고 가면 그게 무슨 휴가냐면서. 한겨레신문사가 이를 수용해서 처음으로 휴가다운 휴가가 만들어졌다고 하더라. 신문 만화가 인권이 그때 처음 만들어졌다. (웃음)
– 20년 동안 연속으로 가장 오래 쉰 건.
추석 연휴를 끼고 한 2주일 정도 쉰 게 가장 오래 쉰 기억이다. 독자와의 약속도 있고 해서 길게 쉬지는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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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 공채로 20대에 경향신문사에 입사하다
– 20대에 ‘만화가 공채’로 경향신문사에 입사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경향신문에 들어갔다. 당시에 경향신문사에서 기자와 함께 만화가를 공채했다. 그때만 해도 신문만화가 인기가 많아서 박재동 선배나 김상택 선배, 왈순아지매(정운경), 나대로 선생(이홍우) 등… 오랫동안 연재하는 인기 작가들이 많았다. 경향신문 만화가 공채에도 지원자가 200명 넘게 몰렸다.
– 입사 전후한 개인 상황은.
그때만 해도 대학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만화를 그리려고 했던 때였고, 특히 SF에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돈 많은 집안도 아니고, 만화가로 정식 데뷔한 것도 아니라서. 내 처지를 생각하면 당장 취업해야 하니까. 그래서 여러 가지를 준비했었다. 언론사도 그중 하나였고, 마침 경향신문사에서 만화가 공채한다니까 응시한 거다.
– 특채인 줄 알았는데 의외다. 당시 만화가 공채 방식이 궁금하다.
시험장에서 직접 만화를 그려보라고 하더라. 필기시험은 없었다. 경향신문 근처에 있는 중학교에서 200명 넘는 응시생들과 함께 시험을 봤다. 한두 시간 정도. 나는 당시 성수대교 붕괴 사건을 소재로 만화를 그렸다.
– 이렇게 신문만화를 오래 할 거라고 생각했나?
처음에는 당연히 이렇게 오랫동안 신문만화를 그릴지 몰랐다. 아까도 말했지만, 장편 극화를 하고 싶은 생각은 여전하다. [만화 박정희]도 그렇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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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도리, 창작의 비밀
– 작화 방법이 궁금하다. 김낙호(capcold)는 세 가지 특징을 지적한다.
- 리듬감 있는 지문 (예: “청수, 만수, 백수” 2008년 11월 10일 자)
- 시각적 패러디 (예: ‘절규’vs. ‘기쁨의 눈물’, 2008년 11월 3일 자)
- 과거 사건와 현재 사건의 병렬 (예: “멸치, 홍어, 도다리, 과메기…후식은 콩밥”, 2008년 12월 1일 자)
모든 것은 맥락이 닿아야 한다.
라임을 살리는 것도 단순히 기술적인 라임 자체가 아니라 그 맥락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얼마 전 시리아 내전을 겪고 있는 4살 소녀의 사진이 트위터를 통해 화제가 된 적 있다. 내전 중인 시리아와 여전히 분단 중이면서 레드컴플렉스에 시달리는 코리아를 교차했다. 억지로 라임을 살리는 건 별 의미가 없다. 방식이 우선이 아니다. 중요한 건 ‘발견’이다.
맥락을 통해 “소재를 다시 발견”하는 게 중요하다.
어떤 사회 문제가 있다. 가령, 연쇄살인범이 있다고 치자.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살펴봐야 한다. 연쇄살인범의 뇌 구조에 문제가 있는지 의학적으로도 분석해볼 수도 있고, 사회 구조적인 모순도 찾아볼 수 있다. 과연 그 살인범이 정글에서 살았다면 살인을 했을까. 그렇게 다각도로 질문하고, 그 원인을 찾아보고, 그 원인을 연결해 그려내는 것, 그것이 작가의 몫이다.
그러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하다. 여유가 필요하다. 독자들은 여유 시간이 없어서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을 작가가 ‘발견’해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일상을 돌아보고, 사회를 돌아보게 하는 게 작가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그런 차원에서 전업 작가에게 세상을 성찰할 여유 시간을 확보해줄 수 있는 사회적 보호와 지원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작업으로만 먹고 살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주는 일이 중요하다.
– 현실은 정반대다. 배고픈 작가들이 너무 많다.
작가들에게 ‘니가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어쨌든 알바라도 해서 돈을 벌어라’는 시각이 많다는 걸 안다. 작가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이 곱지 않은 것, 잘 안다. 작가를 게으른 룸펜 정도로 취급한다. 그런 시각에는 찬성할 수 없다. 작가가 세상을 ‘재발견’할 수 있도록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 지원이 필요하다고 본다.
전업 작가의 작업이 돈이 된다 안 된다를 떠나서 소중한 작업으로 인식해야 한다. 그래야 사회 전체적으로 다양한 시각을 보여줄 수 있고, 또 사회 전체가 좋은 시각을 유지할 수 있다고 본다.
– 작가만 전폭 지원하면 다른 쪽에선 박탈감을 느낄 수도?
인식의 문제다. 캐나다는 만화를 그리고 싶다고 구청에 작업 계획서를 내면, 사무실을 내주고, 생활비 주면서 작업을 지원한다. 작가를 지원하는 게 사회적으로 얼마나 중요한지를 나라가 인식하고 있다는 거다. 우리는 ‘니가 정말 그리고 싶으면 알바하면 되잖아’라는 식이다. 작가 지원 때문에 다른 노동자들이 박탈감 느낀다? 그런 걱정을 하려면 아직 멀었다.
–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 혹은 가장 아쉬움이 남는 작품은.
매일 매일 작업하는 거라서 딱히 어느 한 작품이 기억에 남는다거나 그런 건 없고…
좀 다른 이야기로, 사람들이 잘 모르는 건데, “이태백”(이십대 태반이 백수)이라는 표현은 내가 장도리에서 처음 썼다. (웃음) 세계일보에서 ‘우라까이'(베끼기)하고 또 조선일보에서 쓰고… 그렇게 해서 퍼졌다. 그때만 해도 ’20대 태반이 백수다’라는 건 놀라운 일이었고,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IMF 전후의 청년 취업난을 표현했는데, 지금처럼 인터넷으로 장도리가 돌던 시절도 아니라서 장도리에서 쓴 표현이라는 걸 사람들이 잘 모른다. (웃음)
– 소재 발굴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발견하기도 하지만, 주로 신문이나 인터넷 미디어를 통해서 소재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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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만화에 관하여
– 영향받은 작가는?
앞서 신문에 만화를 연재하던 선배들의 작품을 교과서 삼아 참고했다. 박재동 선배뿐만 아니라 내가 4컷을 그리기 때문에 특히 “왈순아지매”를 많이 참조했다. 비슷하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웃음) 실제로 영향도 많이 받고, 많이 참조했다.
– 후배들도 장도리에 영향을 받을 텐데.
장도리가 신진 작가들에게 영향을 준다면 기쁜 일이다.
– 신문만화의 특성은 무엇으로 보나.
신문만화를 ‘시사만화’라는 장르로 보기도 하는데, 시사만화는 독립적인 장르로 보기가 어렵다고 본다. 왜냐하면, 다른 만화도 시사를 다룰 수 있으니까. 시사만화를 다른 직업군, 별개의 장르로 구별하는 경향이 있었고, 차별화하려는 의도도 있었는데, 이건 시대적인 배경과 관련해서 생각해야 한다.
우리 사회는 역사적으로 시사적인 것을 다루지 못하는 환경이었다. 어릴 적에 읽은 만화로 윤승원 선생의 [요철 발명왕]이었다. 그 만화에 어떤 장면이 있었느냐면, 등장인물이 천장을 뚫고 올라가면, 천정이 뚫리면서 쥐가 우르르 떨어져 내려오는 평범한 장면이 있었다. 그런데 그 장면은 검열로 수정됐다. 그냥 천장을 뚫지 않고 사람만 올라가는 거로.
왜 그랬을까?
쥐가 쏟아져 나오는 것은 한국이 못 산다는 거로 해석될 수 있으니 그런 장면을 그리면 안 된다는 거였다. 지금으로선 황당하지만, 그런 시대가 오래 지속됐다. 그런 환경에서 정치적인 문제, 사회적 이슈를 만화가가 다룰 수 있었겠나.
상대적으로 신문이라는 공간 안에 있는 시사만화는 그런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표현이 허용된 셈이다. 그래서 독자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숨 쉴 수 있는 공간으로 생각했던 거고. 그래서 신문에서만 볼 수 있는 시사만화를 장르로 생각하고, 주목하는 경향이 생긴 것으로 본다. 하지만 지금은 신문만화만을 시사만화라고 부를 필요는 없다고 본다. 웹툰에서도 시사적인 이슈를 다루고 있지 않나.
신문에서 연재한다고 시사만화라고 하지 말고, 그냥 ‘신문만화’라고 하면 된다.
– 검열로부터 우리 사회는 자유로워졌을까. 아직도 방심위와 같은 국가기관이 검열적 행위를 한다.
과거 한국사회와 비교해 보면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는 자유가 있다. 물론 지금도 제약은 존재한다고 본다. 그것들에 저항하고, 또 제약이 생기고. 하지만 기술의 발전으로 제약의 방식이 달라지긴 했다.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정치권력보다 자본에 의한 제약이 촘촘하게 존재한다고 본다.
그래서 과거보다 극복하기 힘든 면도 있다. 자유롭기 위해선 우선 그런 제약과 억압을 인식하는 것이 필요한데, 생활 속에 촘촘하게 이식한 자본권력의 제약을 인식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 촘촘하고, 미시적인 억압들을 인식해야 그 억압을 극복할 수 있다. 인식이 중요하다.
소비 자체가 강요당하는 측면이 있다고 본다. 어떤 패턴으로 소비하는지에 관한 고민도 필요하다. 아이폰이든, 삼성폰이든 일방적으로 강요당하는 소비, 스스로 선택한다고 생각하지만 결국은 선택권이 없는 수동적인 소비, 그 패턴을 인식해야 한다. 거기에서 출발해야 자유로운 의사를 표현할 수 있다고 본다.
– 관련해서 후배 작가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우선 내 작업이 후배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면 그것보다 좋은 일은 없다. 정말 하고 싶은 말은 더이상 시사만화가 별도 장르로 따로 존재하는 건 아니라는 거다. 다양한 소재를 다루면서도 얼마든지 시사적인 것을 함께 끌어낼 수 있다.
정치를 특별한 것으로 생각하고 자기 검열하는 것이나 시사만화를 특별한 영역으로 구별하지 말고, 자기 스스로 사회적인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다면 좋겠다. 미술이든 문학이든 순수와 참여로 영역을 구별하고, 이를 당연히 생각하는 건 권력의 통제를 따른 것에 불과하다. 정치를 특수한 것으로 생각하지 마라. 그렇게 소재와 상상력을 제한하면 다룰 수 있는 게 없다.
– 경향신문 논조와 장도리 작가로서의 자율성이 충돌하는 때는 없었나.
아시다시피 경향신문사는 사원 주주 회사다. 언론사주가 따로 있거나 재벌 소유가 아니다. 그러다 보니 신문사가 소수 집단의 당파적 논조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과거 한화 시절도 있었지만, 그때와 비교하면 굉장히 다양한 논조를 담는다. 그 다양성이 논조라면 논조인데, 특정 정파의 논리를 띠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유롭다. 특정 논조를 걱정하지 않는다. 한화 소유였던 시절도 있었고, 혼란기도 있지만, 지금은 많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하지만 사원 주주 회사로 전환한 직후에는 혼란기가 있었다. 예를 들어 ‘황우석 사태’ 때에는 ‘황우석 교수를 지켜야 한다’는 식 칼럼이 경향신문에 실렸는데, 나는 피디수첩을 지지하는 만화를 그렸다. (웃음)
– 당시 심경은? 99:1의 싸움이었는데.
힘들었다. 항의전화도 많이 받았다. 소위 ‘황빠’로 불리는 분들께 엄청난 인신공격을 받았다. 황우석은 앞으로 한국을 먹여 살릴 사람인데, 황우석을 공격하는 것은 비애국이고, 한국을 망치는 매국노라고 취급했다.
나는 황우석을 공격한 게 아니라, 좀 더 냉철하게 사실 파악을 하자고 했을 뿐이다. ‘골목길 조심하라’는 식 협박을 많이 받았다. 만화를 그리는 것도 조심스러웠고. 당시 신문 칼럼은 황우석 옹호 의견으로 도배되던 시기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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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과 모바일
– 디지털 시대다.
20년 동안 미디어 환경의 변화를 직접 몸으로 체험했다. 정말 엄청나게 변했다.
입사했던 1995년만 해도 경향신문사는 납 활자를 썼다. 활판을 만들어서 납활자로 조판해서 신문을 만들었다. 내가 입사했던 1995년에 그 납 활자가 사라졌으니 내가 그 마지막을 직접 목격한 셈이다. 그리고 납 활자 기술을 가진 분들은 퇴출당했다. 당시로써는 고급 기술이었는데 시대의 변화로 퇴출당한 거다. 그 뒤에 워드로, 디지털로, 모바일로 변화하고.
내가 입사하기 전 20년은 납 활자가 기술적으로 큰 변화 없이 지배했던 시대였는데, 내가 언론에 몸담은 20년은 미디어가 숨 가쁘게 변화하는 시대다. (웃음)
– 그 변화의 방향에 대해선.
인류가 불을 발견할 때를 연상해보자. 불은 무기가 될 수도 소중한 도구가 될 수도 있지 않나. 그렇게 생각한다.
– 디지털 혹은 모바일 시대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
긍정적으로 보면, 많은 사람들과 소통이 가능해졌다. 신문과 방송이 지배했던 시대엔 나오면 끝이었다. 독자나 시청자로선 그저 일방적으로 받아들여야 했고, 반론을 펼 여지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거의 실시간으로 독자가 기사에 반응하고, 의견을 남긴다. 기사 본문보다 오히려 댓글이 더 중요할 정도로 독자의 생각이 중요해졌다.
장도리는 특히 인터넷을 통해 많이 유통되는데, 종이신문만 있었을 때와는 달리 독자의 반응을 직접 접할 수 있는 게 좋다. 예전엔 마감하고도 반응을 알 길 없었는데, 지금은 많은 독자들의 반응을 접하고 있다.
– 독자에게 영향받는가
당연히. 물론 내가 인식하지 못한 부분도 있을 거다. 다양한 영향을 받으면 받을수록 좋다.
– 소재에 대한 청탁과 제보도 많을 것 같다.
가끔 메일로 오는데, 수용하지 못하고 있다. 개인적인 제보가 많아서.
– 모바일은 작업에 어떤 영향을 미치나.
일단 나만 해도 작업할 때 컴퓨터를 켤 때보다 모바일을 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나도 장도리를 모바일로 본다.
신문연재 만화는 보통 4컷인데, 일간신문에서 짧은 시간에 내용을 쉽게 접할 수 있는 구성이 4컷이기 때문에 그 형식이 생겨난 거다. 모바일에서도 마찬가지다. 하루에 한 번 만화를 제공하는 것도, 짧은 시간에 볼 수 있는 것도 똑같다. 그런 면에서 큰 차이는 없지만, 아무래도 종이신문으로 보는 것과 모바일로 보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경험의 차이를 만들어 내겠지.
– 언론사가 편집을 통해 구현하는 프레임(틀)이 사라져 간다. 컨텐츠 소비가 원자화하는데.
종이신문에서 신문만화는 보통 맨 마지막에 있는데, 그건 사회면이 마지막에 있기 때문이다. 사회면이 2, 3면에 있었을 때는 신문만화도 2, 3면에 있었다. 신문에 실린 기사를 보는 것은 편집으로 재구성한 사회를 보는 것이다. 신문은 본질에서 언론사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것이니까. 그렇게 편집된 틀에서 이런저런 기사를 본 후에 만화로 정리하는 그런 편집 취지였던 것 같은데, 지금은 편집권 자체가 독자의 선택으로 넘어갔다.
디지털 시대, 모바일 시대는 독자들이 직접 컨텐츠 (소비 방식을) 편집하는 시대다. 독자들은 자신이 중요한 걸 보는 시대라고 생각한다. 소셜 서비스도 그렇고, 포털도 그렇고, 독자에게 떠먹여 주는 측면이 있으니 종이신문 시절이나 지금이나 무슨 큰 차이가 있느냐고 볼 수도 있는데, 지금은 예전보다는 기사의 중요도 판단이 독자에게 넘어간 것은 틀림없다고 본다.
– 좀 이견이 있는 게, 자극적이고 빠른 컨텐츠가 더 많이 유통된다. 독자의 선택권은 형식적으로만 존재하는 것 같고.
과도기인 것 같다. 독자들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게 됐지만, 자유로움에는 혼란이 동반되기 마련이다. 전문가들이 좀 더 연구해야 한다고 본다. 올바른 방향이 무엇인지를 좀 더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다만, 과거처럼 언론 종사자 소수가 프레임을 주도해 가기보다는 많은 사람들의 의견과 독자의 자율적인 편집권이 존중받는 방식으로 미디어 소비의 방향을 잡아가면 좋을 것 같다.
– 인식의 지평을 확장하는 방법론이랄까. 노하우? 조언?
개개인의 노력도 중요하겠지만,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노동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노동하지 못하는 잉여, 이른바 백수 그룹들도 여유가 없다. 일을 하지 못하더라도 삶의 여유를 가질 수 없다. 일을 하지 않더라도 뭔가 스펙을 쌓아야 하고, 뭔가를 준비해야 한다.
한국은 여유를 여유로 누릴 수 있는 세계관이 확립되지 못한 세계다.
그래서 소수의 의도에 따라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뭔가를 준비해야 하고, 스펙을 쌓아야 한다. 주어지는 뉴스만 볼 수밖에 없다. 책을 읽고, 여러 정보에 관해 생각할 시간이 너무 없다. 그러다 보니까 획일적이고, 쏠림도 생긴다.
– 어떤 미디어를 가장 많이 접하나.
다양한 미디어를 접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여러가지 인터넷 미디어를 접하려고 노력한다. 독자들의 댓글도 중요한 미디어로 본다.
– 미디어에 쓰는 시간은 얼마나 되나.
시간 나는 대로 한다. 신문도, 영화도… 시간이 많이 부족하다. 미디어의 홍수 시대라서. 나오는 것을 그때그때 살펴보는 것도 힘들 것 같다.
– 한가한 시간에는 주로 뭘 하나.
아까 이야기했던 것처럼 나는 신문만화를 그리는 작가다. 신문만화와 직접 관련이 없어 보이는 여가 활동, 카페에서 책을 읽거나 신문을 보거나 모바일로 미디어들을 살펴보는 것들도 남들이 보기엔 빈둥거리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나에게는 여가이면서 작업 준비다. (웃음)
– 그런 작업 준비로서의 여가 말고 취미는.
시계 만들기. 그리고 살사.
– 독자와 만남을 마련할 생각은 없나.
그런 게 의미가 있는 경우는 가수나 배우 같은 연예인 아닐까. 얼굴을 봤을 때 의미가 있는 경우 말이다. 독자와의 만남을 가진 적이 있고, 그런 만남을 통해 캐리커처도 그려주고 그랬는데, 직접 만났을 때 독자들이 별로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다. (웃음)
– 온라인 활동은? 적극적 소통은?
다른 작가들도 막상 번개를 치면 잘 안 온다고 하더라. (웃음) 온라인 방식과 오프라인 방식은 다른 것 같다.
– 친한 작가는.
동네 가까운 곳에 굽시니스트가 살아서 가끔 함께 밥을 먹는다.
– 웹툰에 대해선.
인쇄술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게 디지털 문화의 기술. 출판은 일본과 비교하면 부족했는데, 디지털로 인해 만화가 발전했다. 고무적으로 본다.
– 공급이 너무 많다. 연예인 되는 것만큼 만화가 되기가 힘들다.
예전에 일본도 만화 공모 경쟁률이 수천 대 일이었다고 한다. 만화를 하고 싶은 사람들이 그만큼 많았다. 여러 부작용이 있을 수 있지만, 지금 우리나라에 웹툰을 하려는 사람이 많은 것은 만화가 발전할 수 있는 토양을 제공한다는 측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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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백? 호칭 인플레다
– 화백이라면 표현을 싫어한다고 했는데.
신문 연재를 시작할 때(20대)부터 나를 ‘화백’이라고 하더라. 수십 년 작품 활동을 한 사람들에게 그런 어감, 화백에서 느껴지는 어떤 경륜이 있는데. 신문에 만화 그리는 사람이라고 20대 청년에게 화백이라고 하더라.
신문의 권위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화백’이라는 표현을 의도적으로 쓰는 것 같다. 한편으로는 뜬금없이 처음부터 화백이라고 하니까. ‘날 갖고 노나? 놀리나?’ 그런 생각을 해본 적 있고, 이용당하는 것 같은 느낌도 있고 그랬다.
– 화백은 ‘신문사’의 권위를 빌린 표현이다?
만화가면 만화가지 장르나 직종을 그 안에서 구별할 필요도 없는 건데, 나는 만화가인데. 굳이 특별한 용어를 만들어 소통에 불편만 초래한다.
– 그럼 어떻게 부르면 좋을까.
그냥 작가 혹은 만화가로 부르면 되지. “박순찬 씨” 이래도 되고. (웃음)
– 호칭 인플레가 좀 심하긴 하다.
한국사회의 특성이다. 사장이나 이사나 교수나 다 ‘님’을 붙인다. 많은 신문사에서는 일부러 ‘님’이라는 호칭을 붙이지 않는 것으로 안다. ‘장관님, 차관님…’ 이렇게 님을 붙이면 취재에 장벽이 생길 수 있으니까. 그게 옳다고 본다.
– 왜 호칭 인플레가 생겼다 보나.
우리 사회는 ‘날 무시해?’ 이런 것에 아주 민감한 것 같다. 주체성이 부족해서 그 반동으로 컴플렉스가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주체적으로 문화를 만들고, 향유하고, 이런 게 부족하다. 미술도 외국에서 들여와야 인정받고, 외국 유학해야 대우받지 않나. 우리가 생활 속에서 우리 삶을 쓰고 그리는 것이 무시당하고. 주체성이 결여된 것 같다. 그래서 그 반동으로 컴플렉스가 강해지고.
내적으로 자존감을 형성하기 힘든 사회다 보니 호칭에 의미를 부여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 호칭과 관련한 에피소드가 있다면.
한번은 어떤 분께서 공식 자리에서 나를 소개하면서 ‘만화가’로 호칭해서 죄송하다고 했다. 그게 왜 죄송한 일인가? 만화를 그리는 건 같은데 왜 신문에 그리는 20대 작가에게는 화백이라고 하고, 만화 잡지에서 만화 연재하는 20대 작가에게는 화백이라고 하지 않나.
내가 겪은 일은 아니지만, 인터넷에 우스개로 떠도는 이야기 중에 미국인과 한국사람이 어쩌다가 싸움이 붙었는데, 싸우다 말고 불쑥 한국사람이 미국인에게 이렇게 소리쳤다고 하더라.
‘하우 올드 아 유?’
그래서 그 미국인이 나중에 싸우다 말고 왜 갑자기 나이를 묻는지 너무 황당했다고 인터넷에 올렸다고 한다.
– 새로운 작업을 하는 데 ‘장도리 작가’라는 게 부담으로 작용하기도 하나.
독자들이 장도리를 그리는 작가에 대해 생각하는 이미지가 있다. 뭔가 고정된 이미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장도리에 요구하는 것도 분명히 있다. 그게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본다.
– 지금은 덜하지만, 예전엔 검사와 판사를 ‘영감’으로 호칭했다.
존경의 호칭이라기보다는 권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러는 거 아닌가. 잘 보이기 위해서라든가 그런 대접을 받게 함으로써 국가권력에 이용당하는 측면도 있다고 본다. 화백이라는 호칭도 호칭이든 뭐든 대우를 함으로써 어떤 신문의 특정을 논조를 선봉에 세워서 활용하는 그런 측면이 있었다고 본다.
– 과거(…?) 독재 정권이 검사를 권력의 주구로 세웠던 것처럼?
사안에 따라 논조가 극단적으로 갈리는 경우가 있다. 신문사의 진영 논리를 시각적으로 감각적으로 전달하는 첨병으로 신문만화를 활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 신문의 논조를 극대화하고, 표면적으로 보여줄 수 있으니까. 어떻게 보면 기자도 그렇지만, 만화가는 특히 더 신문사에 이용당할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호칭이나마 ‘화백’이라고 대우하는 것 같기도 하다.
– ‘화백’이라는 호칭이 이율배반이라는 건가.
신문만화가를 작가 개인으로 존중하지 않고, 언론사의 도구로 일종의 저격수로 활용한 측면이 역사적으로 적지 않다. 그러면서 ‘화백’이라고 호칭으로는 대우하는 것은 이율배반적인 측면이 있다. 호칭은 화백인데, 용도는 저격수나 총알받이인 거지. 그래서 화백이라는 호칭은 진정한 권위나 존중의 표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 실제 사례를 예시하면.
돌아가신 분이라서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신경무 작가 같은 경우. 조선일보에서 자신의 논리를 내세우는 첨병으로 세운 경우가 아닌지 생각해볼 만한 사례인 것 같다.
– 우리의 호칭 문화가 소통을 방해한다고 보나.
호칭으로 표현되는 사회적 지위나 하다못해 ‘나이’가 서로에게 소통의 장벽을 만든다. 사람이 나이를 먹고, 지위가 올라갈수록 스스로 고립되고, 꼰대가 되기 쉬는 건 그래서다. 마음을 터놓고 소통할 사람이 점점 더 사라진다. 스스로 고립된다. 그런 게 너무 안타깝다. 그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것 같다. 젊은 친구들도 나이에 대해 민감해 하는 것 같고. 나이를 알고 나면 대화가 달라지고.
– 우리 사회가 여전히 권위적이긴 하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만화나 그림 그리는 사람을 ‘환쟁이’라고 부르며 경시하던 사회다. 뭐냐면, 한국이 텍스트 중심 문화다 보니까 텍스트 외의 감각적인 것, 만화나 음식, 음악에 대해 경시하는 문화다. 그런 인식이 조선시대 500년 동안 이어진 나라고, 여전히 잔존해 있다고 생각한다.
– 지금은 만화가가 꿈인 청년들이 많다. 시대가 달라졌는데.
디지털 미디어 환경으로 돌입하면서 텍스트 위에 영상이나 소리, 요리라고 할 정도로 감각에 대한 권위가 높아진 시대라고 본다. 그래서 만화에 대해서도 인정하게 된 것 같다. 디지털 덕을 보는 것 같다.
종이가 지배했던 시대에는 텍스트가 왕이었다. 그림도 인쇄가 제대로 안 되던 시대니까. 디지털 시대 이전에 일본 만화가 발달한 것도 종이 인쇄술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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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도리 20년
– 장도리 20년에 대한 평가에 대해선.
과분한 평가를 받았다. 고맙게 생각한다. 기대하는 것은 현재 우리가 처한 현실에 대해서 독자들이 국민들이 할 말이 많다는 거다. 그걸 장도리가 그 목소리를 대신 내주는 것에 대해 평가한다고 생각한다.
할 말이 많다는 것은 문제가 많다는 거고, 사회에 모순이 많다는 거다. 그래서 장도리에 대한 평가가 마냥 기분 좋은 것만은 아니다. 장도리 만화의 특성상 사회 모순이 심화할수록 더 좋은 평가를 받는 속성이 있어서.
– 20년 후에 어떤 작가로 기억되고 싶나.
하루하루 최선을 다할 뿐이다. 지금 당장 고민하는 게 급선무다.
– 앞으로 계획은.
계획을 세우고 일하는 것은 아니라서… 다른 방식의 표현을 생각하고 있다. 단행본 표지로 작업한 것들이 있는데, 좀 더 보완해서 전시회를 해볼까 구상하고 있다. 장도리와는 별개의 작업이다.
– 혹시 글 쓸 생각은 없나.
잘 쓰면 했지. 여러 가지 욕심은 있다. 하지만 어떤 일이든 시간과 노력이 뒤따라야 하는 거라서.
– 슬로우뉴스와 함께 실험적인 작업을 해보면 좋겠다.
진지하게 생각해보겠다.
– 끝으로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
애독자도 있고, 악플러도 있는데, 어쨌든 ‘장도리’라는 신문 만화는 인간을 미시적으로 섬세하게 다루는 작품은 아니고, 시대와 사회를 개괄적으로 거시적으로 보는 만화다. 사회에 대한 대략적이고, 함축적이며, 상징적인 표현이다. 많은 것을 네 컷에 담으려면 개괄적으로 상징화할 수밖에 없다.
많은 독자들이 ‘장도리’를 관심 있게 지켜본다는 건 우리 사회를 개괄적으로나마 통찰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독자들에게는 우리 사회를 통찰하고 싶은 바람과 욕구가 있다. 그 점이 고맙다.
독자들이 그런 관심을 이어주길 바라고, 작가들도 사회적인 문제를 다룬 작품들을 더 많이 생산해주길 바란다. (끝)
전 SNS에 장도리가 올라오는 걸 보면서 작가님을 알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근거 없이 나이가 그렇게 많지 않으신 줄 알고 있었는데 젊은 생각이 담겨진 만화를 보다보니 그렇게 느낀 것 같네요. 앞으로도 좋은 만화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이태백 설명에서 ’20대 태백이 백수다’라는 부분이 있는데 20대 태반이 백수다 아닌가 싶습니다. 혹여 오타라면 수정 부탁드립니다.
철옹성 님께
아이코!
여러 번 검토(온라인 맞춤법 검사기…)했는데도 아직 오타가 남아 있네요.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박순찬 정도면 충분히 정치적, 논쟁적인 인물인데 저런 인터뷰이에게 비판적인 질문이 전혀 없어서 영양가도 재미도 없군요. ‘때문에’ 조선일보가 인터뷰했다면 둘 사이의 ‘충돌’덕에 재미는 물론 영양가도 있었을 겁니다. 좋아하는 사람(혹은 같은 편)이 같은 편을 인터뷰 하는 건 이래서 별 재미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