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우 포인트] 콩가루 ‘축협’, 버럭질 ‘국회’, 무지와 무능과 권위주의의 아수라장 속에서 박지성이 이끄는 축구 개혁은 험난하다. 그런데 한국보다 더 ‘X판’이었던 프랑스. 그들은 어떻게 개혁에 성공하고 월드컵 우승까지 차지할 수 있었을까. 2010년 그때 그 시절 프랑스 국회의 ‘기록’을 잠시 돌아보자. (⌚6분)

지난달 30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는 대한축구협회(KFA)를 상대로 청문회를 열었지만 성과는 없었다.
2026 FIFA 월드컵 실패를 포함해 퇴보하는 한국 축구 원인을 진단하고 해법을 모색하는 자리여야 했지만, 국회의원의 막무가내 윽박만 축구 팬 뇌리에 남은 하루였다. 한 의원이 국가대표팀 코치를 상대로 “왜 졌느냐”고 반복해 쏘아붙이는 장면은 한 편의 코미디였다.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도 2010년 내부 분열과 초유의 항명 사태로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에서 ‘1무 2패’라는 처참한 성적표를 받아야 했다.
경기 패배보다 국가대표 선수들의 인성 결여와 막장 행태는 국민들의 분노를 사기 충분했다. 당시 대통령 사르코지가 직접 ‘축구 총회’를 지시했을 정도로 단순한 스포츠 문제를 넘어선 국가적 비상 사태였다.

이게 왜 중요한가.
- 국회의원 호통만 남은 우리 청문회와 달리, 프랑스는 유의미한 결과물을 남겼다.
- 프랑스 하원 문화교육위원회는 프랑스 축구협회(FFF) 회장 장피에르 에스칼레트(Jean-Pierre Escalettes)와 대표팀 감독 레이몽 도메네크(Raymond Domenech)를 불러 청문회를 개최했는데, 핵심 인물들의 솔직한 증언을 끌어내기 위해 비공개로 진행하되, 속기록을 남겨 대중에 공개했다.
- 패배 사실에만 집착, 감독 한 명에게 모든 책임을 지우고 끝내는 청문회가 아니었다. 의회는 기록을 통해 사태 이면에 깔린 구조적 결함을 짚어냈다.
- 청문회 이후 문제 의식을 확장한 프랑스 하원은 프랑스 스포츠 체질 개선 백서(보고서 N° 4395)를 발간하며 스포츠 생태계 전반의 지배 구조를 개선하고자 했다.
프랑스 대표팀에는 무슨 일이?
- 한국은 2023 아시안컵 대회 과정서 주장 손흥민과 이강인이 다퉜다는 사실에 발칵 뒤집혔지만, 2010년 프랑스 선수단의 막장 갈등에 비견할 바는 못 된다.
- 프랑스 축구협회는 2010 남아공 월드컵 시작 전부터 차기 대표팀 감독(로랑 블랑)을 내정해 언론에 공개했다. 현 감독 도메네크의 권위는 무시한 처사였다. 협회와 스태프들의 과잉 보호와 편의로 대표팀 선수들은 온실 속 화초처럼 성장하여 통제가 매우 어려운 상태였다.
- 월드컵 조별리그 멕시코전 하프타임 도중 도메네크가 공격수 니콜라 아넬카에게 전술적 지시를 내리자 아넬카는 격렬하게 반발하며 욕설을 뱉었다. 도메네크는 후반 시작과 함께 아넬카를 교체했는데, 스포츠 전문 일간지 ‘레키프(L’Équipe)’는 라커룸 대화 내용을 1면에 실었고, 사태는 일파만파로 커졌다. 단, 훗날 도메네크는 아넬카가 자신에게 욕한 것은 아니라고 한 다큐멘터리(‘감독들’, 2018)에서 밝혔다.

치욕의 버스 파업 사태.
- 주장 파트리스 에브라를 비롯한 선수들은 팀 내부 비밀을 언론에 흘린 프락치를 찾아 복수하는 것에만 매달렸다. 축구협회는 아넬카의 ‘공식 퇴출’을 결정했고, 선수단은 항의 의사 표시로 단체로 버스 안에 틀어박혀 내리지 않고 파업을 벌였다.
- 75세의 에스칼레트와 도메네크가 버스에 올라타 국가대표의 의무와 사태 심각성을 호소하며 45분간 설득했으나 선수들은 벽처럼 요지부동이었다. 에스칼레트는 청문회에서 선수단을 “버릇없고 썩어빠진 아이들”로 지칭하며 자신의 50년 축구 인생이 그 순간에 무너졌다고 회고했다.
- 당시 취재진이 프랑스 대표팀 버스 앞을 둘러싸는 등 전 세계 이목은 ‘프랑스 내부 분열’에 한 데 모였다. 도메네크는 비정상적 상황을 끝내기 위해 선수들 손에서 파업 성명서를 빼앗아 언론 앞에 직접 낭독했다.
- 도메네크는 청문회에서 선수들의 바보 같은 행동을 빨리 끝내기 위함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성명서를 읽으면서 내가 그들의 파업에 동조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제대로 밝히지 않은 건 큰 실수”라고 회고했다.
- 희대의 불협화음이 월드컵 기간 내내 터져 나왔으니, 청문회가 아니고서야 비난 여론을 잠재우긴 어려웠을 것. 물론, 청문회 개최 명분이 단지 여론 악화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유소년 윤리·도덕 교육’ 부재라는 구조적 문제를 화두로 던진 자리였다.
왜 국가가 축구에 개입하는가.
- FFF는 비영리 사단법인이다. 국가로부터 프랑스 축구에 대한 독점적 권한을 위임받은 공공서비스 수임 기관 지위다. 단순한 스포츠 단체를 넘어, 막대한 세금과 공적 재원을 지원 받고 청소년 교육 등 공적 책무도 수행한다.
- 프랑스에서 축구는 1만 8,000개의 아마추어 클럽과 200만 명이 넘는 등록 선수를 거느린 압도적 1위의 스포츠다. 수많은 청소년이 여기에 포함돼 있다. 국가대표팀 태도와 규율이 프랑스 청소년 교육 및 사회적 가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봤다.
- 하지만 FFF는 스폰서십과 미디어 중계권을 통해 영리도 추구해야 하는 딜레마에 놓여 있다. 스포츠 공공성과 상업주의를 모두 좇아야 하는 상황이다. 한국 축구협회도 비영리 사단법인으로서 마찬가지 지위와 상황에 놓여 있다.
청문회가 남긴 것.
- 청문회 참석자들은 유소년 선수들이 너무 이른 나이(15~17세)에 가족을 떠나 축구 아카데미에 입소하고, 성인이 되기 전에 거액의 연봉을 받으며 해외 클럽으로 이적하는 시스템을 지적했다. 이 과정에 최소한의 책임감이나 애국심을 가르치는 도덕·시민 교육이 누락됐고, 돈과 물질을 좇는 게 당연시됐다는 문제의식이었다.
- 에스칼레트는 “지도자는 더 이상 단순히 코너킥을 차거나 트래핑을 가르치는 데 만족해서는 안 된다”며 “축구의 기술적 동작을 넘어 (도덕 및 인성 등) 기본적 요소들을 가르치는 교사가 돼야 한다”고 했다.
- 릴리앙 튀람 같은 은퇴한 축구 전설들을 전국 연령별 대표팀 유스 세션에 투입해 조국과 유니폼에 대한 사랑을 가르치는 ‘정신 교육 상설화’가 대안으로 논의되기도 했다.
- 지도자 교육 과정 개선, 감독 선임 과정의 투명성과 시스템화, 대표팀 지원 기구의 전문성 제고 등의 구조 개혁이 논의됐을 뿐 아니라 비영리 공적 영역인 축구협회(FFF)의 지배 구조를 무너뜨리고 협회를 장악하려는 거대 자본의 ‘적대적 인수합병(OPA)’을 막기 위한 대책까지 토론 주제로 거론됐다.

스포츠 체질 개선 백서로
- 2010년 월드컵 사태 직후 프랑스 하원 문화교육위는 대표팀과 프랑스 축구협회(FFF) 내부에 나타난 심각한 지배 구조적 결함을 검토하기 위해 위원회 내에 전담 워킹 그룹을 설치했다.
- 프랑스 의회는 워킹그룹 조사를 진행하면서 FFF가 노출한 리더십 붕괴와 의사 결정 마비 등 문제가 단지 축구라는 종목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프랑스의 117개 공인 스포츠 협회 모두 FFF와 법적으로 완전히 동일한 지배 구조를 공유했다.
- 청문회에서 드러난 프랑스 축구 위기를 발판 삼아 프랑스 체육계 전반에 민주성, 투명성, 효율성, 여성 참여율 보장, 임원 연임 제한 등을 요구하고, 고령화 해결책을 폭넓게 제안하는 공식 보고서를 2년 뒤인 2012년 2월 발표했다.
대한민국 국회가 부끄러운 이유.
- 프랑스는 2010년 청문회 이후 거버넌스 개혁 논의로 이어졌고, 이후 2016년 유로 준우승, 2018년 월드컵 우승, 2022년 월드컵 준우승, 2026년 월드컵 4강을 달성하며 계속 승승장구했다.
- 한국은 4년 뒤에도 하루짜리 ‘청문회 호통’으로 쇼츠 영상만 만들 것인가. 정부와 국회, KFA의 각성이 필요하다. 새 판을 짜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논해야 할지, 그것도 정하지 못한 모습이다. 국가대표 코치에게 “왜 졌느냐”고 따지는 국회의원의 억지는 입법기관의 무지와 게으름을 상징한다.

- 문화체육관광부는 지난달 ‘2002 월드컵 영웅’ 박지성과 이영표 중심으로 K-축구 혁신위원회를 출범시켰다. 혁신위는 기대와 달리 회의록 미작성으로 입길에 오르내렸고, 위원장 박지성은 “혁신을 위해서는 각 위원들 발언이 다 중요한데 모두를 다 기록하면서 진행하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 축구 팬 관심이 쏠린 혁신위인 만큼 신중함을 기하겠다는 취지로 해석되지만, 프랑스 사례에서 알 수 있듯 ‘기록’은 개혁을 위한 첫 걸음이다. 다양한 생각과 의견이 더 많이 공유되어야 한국 축구가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