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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런던 올림픽 유도 -90kg 결승. 긴장함이 가득 엿보이는 쿠바의 곤잘레스 선수와는 달리 담담하고 의연해 보이는 한국의 송대남 선수가 경기장에 들어섰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끈질긴 5분간의 경기가 시작되었다. 경기 중 작전 지시를 하던 정훈 감독을 심판은 경기를 방해했다며 퇴장시켰다.
경기는 연장전으로 돌입했고, 송대남 선수는 감독의 도움 없이 혼자서 경기를 풀어나가야 했지만, 연장전 시작 10초 만에 상대 선수에게 ‘안뒤축감아치기’ 기술을 걸어 성공시키며 경기는 끝이 났다. 선수로서는 노장인 서른넷의 나이, 수많은 도전 속 현역 생활을 마감하는 그의 ‘마지막 경기’에서 ‘올림픽 금메달 획득’을 확정 짓는 순간이었다.
‘낙법’에 이끌린 유도 천재
송대남 선수는 금오초등학교 3학년 당시 우연히 유도부 선수들의 ‘낙법’ 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 모습에 반하여 유도부 가입을 했다. 학교에 유도부가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체육관이 아닌 학교에서 바로 엘리트 (체육특기생) 선수로 사는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는 유도 입문 1년 만에 교보생명컵 전국 어린이 유도 대회에 참가하게 되었고, 대회에서 동메달을 획득하였다.
“유도 입문 1년 만에 출전한 전국 대회에서 입상하고 나니, 어린 마음에 저 자신에게 엄청난 재능이 있다고 믿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송대남 선수는 자신감, 그리고 패기로 똘똘 뭉쳐 있었다. 그렇게 초등학교 때부터 두각을 나타내었던 송대남 선수는 유도 명문인 경민중학교에서 스카우트를 받아 진학하여 소년체전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는 등 최고의 유망주로 떠올랐다. 그러나 경민고등학교에 진학 후, 2학년이 되어 허리 부상을 당하며 1년간 재활을 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는 ‘유도의 서울대’라는 용인대부터 시작하여, 한국체대, 한양대 등에서 지명을 받지 못했고, 유일하게 지명해주었던 청주대학교에 ‘선택 없이’ 진학하게 되었다.
“중학교 시절 내내 제가 이겼던 선수들이 저를 제치고 용인대에 진학하게 되는 걸 보며 저는 굉장한 우울감에 빠졌습니다. 청주대 유도부는 당시 마이너리그 수준의 실력이었고, 학업을 중시했습니다. 대학에 진학하면서 부상이 회복되었고, 꼭 용인대에 진학한 선수들을 이기고 싶었습니다.”
송대남 선수가 청주대 재학 당시 청주대 유도팀에서는 하루 1~2회 단체 훈련이 전부였으나, 그는 개인훈련까지 하루에 4번 훈련을 하며 대학교 2학년이 된 후에는 용인대, 한체대, 한양대 선수들을 차례로 이기고, 1999년 추계전국대학유도연맹전(-66kg급)에서 청주대 출신 최초로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그 외에도 청주대 재학 중 2000년 전국체전에서 은메달(-73kg급), 2001년 추계전국대학유도연맹전(-73kg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송대남 선수는 ‘유도=용인대’라는 정석과 편견을 깬 인물 중 한 명으로서 엘리트 선수의 대학 지명에 대한 의견을 밝혔다.
“언제든지 확고한 목표가 있다면 학벌은 문제가 되지 않다고 생각하며, 목표를 꼭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불운, 부상 그리고 파벌
2000년, 송대남 선수가 청주대 2학년 시절, 국가대표 유도 대표팀 감독이었던 박종학 감독은 청주대 유도팀 감독 시절 직접 스카우트했던 송대남 선수를 국가대표 1진 선수 파트너로 발탁했다. 그렇게 처음 1진 선수의 파트너 훈련 선수로 태릉선수촌에 입촌한 송대남 선수는 2년 후, 대학교 졸업반이 되었을 때,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입상을 하면서 당당히 정식 국가대표 선수로 발탁 되었다.
하지만 송대남 선수는 당시에도, 지금도, 지독했던 ‘불운의 아이콘’으로 기억된다. 매번 큰 시합을 앞두고 부상 당했다. 부상이 아직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2004년 아테네 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권영우 선수에게 패하면서 올림픽에 출전하지 못했다. 군 복무도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 메달 획득 혜택을 받지 못하여 국군체육부대(상무)에서 마쳤다. 2006년 도하 아시안 게임 직전엔 발목 부상 당했다.
대중에게 잘 알려진 이원희 선수(2004년 아테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최민호 선수(2008년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김재범 선수(2012년 런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조준호 선수(2012년 런던 올림픽 동메달리스트) 등에는 공통점이 있다. 모두 ‘용인대’ 출신 유도 선수라는 것이다.
과거 조준호 선수도 모 팟캐스트에 출연해 ‘용인대 출신 파벌이 존재한다’라고 언급한 적이 있으며, 유도에서 UFC로 전향한 추성훈 선수는 국내 유도 파벌로 인해 일본으로 귀화하였으며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81kg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당시 상대 선수는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의 용인대 출신인 안동진 선수였다. 역시 ‘유도계 파벌의 피해자’로 알려져있다.
송대남 선수는 올림픽이나 아시안 게임을 제외한 국제 대회에서는 좋은 성적을 거두며 2007년까지 -81kg급에서 세계 랭킹 1위에 오를 만큼 최강자였다. 그러나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출전권을 두고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신성’으로 떠오른 김재범 선수에게 고전했다. 1차, 2차 선발전에서 송대남 선수는 우승했다. 마지막 3차이자 최종 선발전 결승에서 김재범 선수와 30분이 넘는 혈투 속에서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결국 그는 3:0 심판 전원일치 판정패로 경기에서 졌다. 찜찜한 경기였다.
당시, 국가대표 감독을 비롯해 모든 심판의 80%가 용인대 출신으로 채워져 있었다. 국내 대회에서 판정으로 갔을 때, 많은 경우, 생각할 겨를도 없이 심판은 일제히 용인대 출신 선수에게 판정승 깃발을 들었다. 이것을 겨냥한 듯, ‘꼭 넘겨서 포인트를 획득해야 이긴다’라는 생각의 송대남 선수와는 달리 용인대 출신의 상대 선수는 전방의 공격이 아닌 방어로만 경기를 대했고, 그 결과 경기는 판정으로 이어졌다.
당시 경기 상황을 ‘파벌이 작용했다’고 극단적으로 치부할 수는 없지만, 송대남 선수에게는 인생이 걸려있는 올림픽 최종 선발전에서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보지 못했다고 생각이 들기에 ‘상처’와 ‘억울함’으로 남은 경기 중 하나다. 당시 심경을 송대남 선수는 이렇게 말한다:
“청주대 재학 시절 용인대 선수와 시합을 하며 매번 논란의 여지 없는 기술로 넘겨야 한다는 압박 때문에 많이 힘들었습니다. 지금은 여러 논란으로 비디오 판독뿐 아니라 체육회 상임 심판 제도 등이 도입되며 경기 운영 방침이 많이 개선되었습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김재범 선수가 메달을 획득하는 모습을 보며 마음 한편이 시려왔지만, 송대남 선수는 알았다. 자신이 한층 성숙한 선수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언제나 강한 라이벌이었기에 국제대회보다 국내대회가 어려웠던 상대였고, 서로와의 경쟁을 통해 발전할 수 있었다. 송대남 선수는 유도 경기장에서는 모두가 승을 거둘 수 없음을 안다. 승자가 있으면 패자가 있기 마련이다.
“제가 오늘의 경기에서 승자였다 하더라도 내일 다시 패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자만도 하지 말아야 하고, 실망도 할 필요가 없다고 저 자신을 다독이며 훈련했습니다.”
부상보다 힘들었던 체중 증량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국가대표 최종 선발전은 공교롭게도 어버이날 치러졌다. 그는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에 6개월간 유도복도 입지 않고, 방황하는 나날을 보냈으나 이내 털고 일어나 훈련에 돌입했다. 그러나, ‘불운의 아이콘’ 송대남 선수의 부상은 이어졌다. 2010년 도쿄 세계선수권을 앞두고는 전방십자인대가 파열되었다.
“십자인대가 파열되었지만, 메이저 대회에 참가하고 싶어 재활 훈련에 돌입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3회전에서 탈락했습니다.”
2012년 올림픽이 1년 8개월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과감하게 수술을 결정했다. 무릎 십자인대를 잇고 연골 봉합 수술을 하는 위험하고도 큰 수술이었다. 수술 후, 재활을 통해 재기하는 과정까지 그에겐 고통스럽고 힘겨운 하루하루였다. 그러나 송대남 선수의 곁엔 소중한 가족이 있었다.
송대남 선수 부모님의 헌신과 지원은 어마어마했다. 식당을 운영하셨던 송대남 선수의 부모님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내내 부모님께서 유도팀의 학부모 회장직을 맡으며 시합 때마다 유도팀 선수들 모두의 음식을 준비해주셨다. 송대남 선수가 국가대표에 발탁된 이후에는 국제대회에 출전할 때마다 전라남도 완도에서 전복을 직접 공수받아 죽을 만들어 포장해서 보내주셨다. 지금이야 온라인 쇼핑몰이나 홈쇼핑이 시스템이 잘 구축된 시대이지만, 당시엔 송대남 선수의 부모님이 얼마나 많은 정성이 들였는지 상상이 가는 대목이다. 송대남 선수는 그렇게 믿어주고 지원하는 부모님과 가족들을 실망하게 할 수 없었다.
“항상 믿어주고 힘이 되어주었던 가족이 있었기에 포기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은 가족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송대남 선수는 이 시기에 원래 체급이었던 -81kg급에서 -90kg급으로 체급을 올렸다. -81kg급에는 김재범 선수가 더욱 견고하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고, 송대남 선수는 김재범 선수와의 경쟁을 피해 상대적으로 단기간에 세계 무대에서 복귀할 수 있는 묘안을 생각한 것이었다. 송대남 선수는 최대한 이른 시일 안에 회복하고, 근육을 단련해 인대를 강화하고 -90kg으로 체중을 증량하여 승부를 띄우기로 했다.
유도는 평균적으로 체급경기이기에 체중을 감량하고 시합한다. 그래야 시합 당일 자신의 체급에서 3~4kg을 불리고 시합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송대남 선수는 하루에 4번씩 훈련하다 보면 아무리 많이 먹어도 체중이 불지 않았다. 양으로 3kg을 먹어도 훈련하면 땀으로 다 배출되었다. 근육량을 키우기 위해 매일 지옥 같은 근력 강화운동을 4시간씩 했다.
“체급을 올렸기 때문에 키도 작고, 신체조건이 유럽 선수들보다 불리한 걸 알았기 때문에 근력운동만 정말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하루에 스테이크 10장 이상씩 먹으며 식단 조절을 했습니다. 하루에 2만 칼로리 정도를 먹었습니다. 당시 손연재 선수의 한 달 칼로리 섭취량이 제 하루 칼로리 섭취량이었지요. 이러한 저의 노력과 의지 때문인지 저의 장기(위) 소화능력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최고의 은퇴 선물이 된 올림픽 금메달
-90kg급으로 체급 전환에 성공한 송대남 선수는 2012년 런던 올림픽 국가대표 최종 선발전에서 무난하게 선발되었다. 나이 서른넷. 여느 선수보다 제일 노장이었고, 몇몇 지도자나 트레이너보다도 나이가 많았다. 언론에서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깜짝 금메달’이라는 말과 달리, 출전한 7체급의 7명 모두 금메달 후보였다. 그만큼 힘든 훈련을 잘 이겨냈고, 모든 선수가 자신감 넘쳤다. 정훈 감독 역시 당연히 예상했고, 누구보다 믿었다. 런던 올림픽 8강전에서 송대남 선수는 당시 세계랭킹 1위였던 일본 선수를 만났다.
“8강전에서 일본 선수와 경기에서 저는 ‘매트에서 죽는다’는 각오로 들어갔습니다. 상대 선수가 저보다 긴장을 더 많이 한 상태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는 ‘부모를 죽인 원수’라고 생각하고 시합에 임했습니다.”
결승 경기보다 8강 경기를 포함한 본선 경기들은 유도 선수와 팬들 사이에서 ‘인생 최고의 경기’로 뽑힌다. 결승에 진출하여 경기가 진행되었을 때, 이례적으로 정훈 감독은 퇴장당했다. 전술을 지도해줄 수 있는 감독이 퇴장당하는 것은 송대남 선수에게 심적으로 불안감과 부담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까지 대비해 지난 시간 하루에 수백 번 수천 번 반복해왔던 반복훈련과, 새벽부터 심폐지구력훈련, 웨이트훈련 등 그가 해온 정직한 훈련들은 기술로 이어졌다. 생각보다 몸이 빠르게 움직여 반응한 것이었다.
상대인 쿠바 선수가 송대남 선수의 전광석화 같은 ‘안뒤축감아치기’ 기술이 걸리며 넘어가자, 송대남 선수의 승을 알리는 심판의 손이 번쩍 올라갔다. 퇴장당한 정훈 감독이 환호하며 경기장 안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2000년 처음 국가대표 2진 선수로 발탁되어 국제 대회는 꾸준히 나갔어도 그렇게 올림픽과는 인연이 없던 그가, 12년 만에 첫 올림픽 출전에, 금메달을 획득한 것이었다. 송대남 선수의 은퇴 경기이자 현역 선수 생활이 화려하게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송대남 선수는 경기장에서 내려와 정훈 감독에게 큰절했다. 가장 힘들었던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국가대표 최종 선발전 탈락 후 처음 만나, 2010년 십자인대 수술 후, 가장 길을 찾을 수 있도록 안내해준 지도자, 사랑하는 아내의 형부이자 가족. 유도 인생에서 바늘과 실 같은 존재. 그의 인생의 가장 큰 행운…. 그 마음을 아는 정훈 감독 역시 맞절로 송대남 선수의 인사를 받았다. 아름답고 또 훈훈한 광경이었다.
선수 생활만큼 인정받은 지도자 능력
2012년 런던 올림픽이 끝난 후, 송대남 선수는 2016년 리우 올림픽 남자 유도 국가대표 지도자로 발탁되었다. 송대남 선수에서 ‘코치’가 되었다. 송대남 코치는 초등학교 입문 당시부터 선수로 은퇴할 때까지 모든 지도자에게서 영향을 받았다고 기억한다. 특별히, 국군체육부대에서 복무 당시 4년 주기인 군인올림픽 개인 단체 금메달을 획득하며 연금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그 뒤엔 국제대회에서의 시합과 능력을 키워준 전만배 감독이 있었으며, 그에게서 지도자가 지녀야 할 능력도 배웠다. 정훈 감독도 빼놓을 수 없다. 정훈 감독은 항상 서로 의지하는 유도인생의 동반자이다. 송대남 코치는 이런 분들을 통해 선수들과 소통하고 신뢰할 수 있는 지도력을 배우고, 느꼈다.
지도자로 활동하기 시작하며 가장 우선시한 것은 지나간 선수 생활을 현 선수들에게 비추어 생각하지 않는 것이었다. 오로지 원점에서, 선수들의 관점에서,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 오를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을 연구했다.
“코치를 하면서 선수들이 다쳤을 때 가장 마음이 안 좋았습니다. 올림픽 전, -100kg급 조구함(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은메달리스트)선수가 저와 똑같은 부상 입고 와서 눈물을 흘리는데 무엇보다 제가 겪어보았기 때문에 누구보다 힘든 건 저 자신인 것을 알기 때문에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누구보다 선수 시절 부상을 많이 겪었고, 부상으로 인한 슬럼프도 많이 겪은 송대남 코치였다. 그는 개인적인 견해로 선수들이 슬럼프를 겪을 때는 최고의 선수들만이 슬럼프가 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항상 스스로 이겨내도록 기다려 주었다. 또한, 슬럼프도 최고의 선수들에게 오는 특권이라고 여기며 선수들을 독려했다.
“저는 유도 실력도 중요하지만, 인성을 중요시하는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안창림 선수는 일본에서 생활하다가 한국 문화를 접하게 되었던 선수였기에 더 많이 신경 써서 인성적인 부분을 지도해주었습니다.”
담당 선수로 코치를 맡았던 곽동한 선수와 안창림 선수와는 깊은 인연과 남다른 애정이 있다. 곽동한 선수의 경우, 송대남 코치가 선수 시절 곽동한 선수가 대학교 재학 당시 훈련 파트너로 만나 발전해 나가는 모습을 봐왔던 선수였으며, 안창림 선수는 일본에서 넘어와 처음 대표팀에 합류했을 때부터 지도했다. 두 선수 모두 주기술도 송대남 코치가 선수 시절의 주기술과 똑같은 ‘왼쪽 업어치기’다.
2016년 리우 올림픽에서 안창림 선수는 메달 획득에 실패하고, 선수촌으로 돌아와 송대남 코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눈물을 쏟았다. 안창림 선수는 2016년 리우 올림픽이 폐막한 몇 달 후, 송대남 코치에게 장문의 메시지를 보냈다. 내용은 “꼭 2020년 도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해 송대남 코치의 목에 걸어주겠다”는 약속이었다. 안창림 선수는 현재 국가대표로 발탁되어 2020 도쿄올림픽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2016년 리우 올림픽에서 -66kg급의 안바울 선수가 은메달을 획득했으며, -90kg급의 곽동한 선수가 동메달을 획득했다. 송대남 코치는 여러 유망주의 배출과 올림픽에서의 두 메달 수확으로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올림픽 결승에서 만나는 한국과 중국 선수
2016년 리우 올림픽에서 정훈 감독은 유도 불모지였던 중국 남자 유도팀에서 사상 첫 동메달 획득을 하며 세계적인 지도력으로 주목받았다. 그의 훈련법은 언제나 그랬던 한국식 훈련 방법이었다. 자연스럽게 한국 대표팀과의 지도자 계약이 끝나고 중국 대표팀에서 제안이 들어오자, 세계적인 명장을 꿈꾸게 되며 송대남 코치는 중국행을 수락했다.
중국 역시 한국과 같이 국가대표 선수들은 입촌하여 훈련하는 선수촌 생활을 한다. 그러나 중국은 공산주의 나라인 만큼 철저한 제재가 있으며, 심지어 코로나19에 감염 걱정이 전혀 없을 정도로 안전하다. 하지만 철창만 없을 뿐, 격리된 채 훈련만 한다. 한국과 비교하면 식단, 의료, 훈련시설은 진천선수촌이 월등히 우수하다. 훈련 기구 등이 오래된 것들이 많으며, 의사도 없어 약물치료는 없고 침술과 소염제 정도가 전부이다. 식단도 뷔페식인 진천선수촌과는 달리 오직 중국식으로 중국 선수들에게는 잘 맞을지 몰라도 뿌리부터 한국인인 송대남 코치 입엔 맞지 않아 고생이다.
중국 유도 남자, 여자 국가대표 총감독을 맡은 송대남 ‘감독’은 중국유도협회에서 유일하게 한국어 통역사를 고용해주어 선수들과의 소통은 문제가 없다. 하지만 중국 선수들의 유도 수준은 현저히 낮다. 그렇기에 한국 국가대표 선수들의 경우에는 각각 맞는 훈련을 하면 되었는데, 그런 눈높이 훈련은 어려워하고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 처음부터 기본에 충실한 훈련을 시키고 있지만, 한국식 체력훈련이나 한국 선수 특유의 ‘헝그리 정신’을 계속 지도하고 있다.
“제 지도 철학은 ‘인기 있는 지도자가 되지 말자’입니다. 훈련 시간에서 만큼은 선수들이 저를 생각할 때 ‘욕이 나올 정도로 엄하게 훈련 시키자’라고 다짐합니다. 그것이 선수를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송대남 감독이 처음 중국 유도 국가대표팀의 감독으로 부임했을 때, 선수들의 안 좋은 습관을 너무 많이 보았다. 선수들은 ‘목표의식’이 없었기 때문에, ‘왜 힘든 훈련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이해를 하지 못하였다. 훈련시간에 이어폰을 끼고 노래를 듣는 선수가 있기도 했고, 밤에 선수촌을 이탈해 술을 마시고 들어오는 선수, 점호시간 지나 선수의 방을 불시에 방문했더니 여자 선수와 함께 있는 남자 선수…. 등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이후 하락세를 걷고 있는 중국 유도 국가대표팀이었다. 송대남 감독은 오랫동안 고질적으로 자리 잡아 왔던 이런 문제들을 통제하고 고쳐나가는 것이 가장 어려웠는데, 선수들이 조금씩 나아지고, 발전하는 것을 보며 보람을 느끼고, 훈련하고 있다.
타국의 국가대표 감독으로서 모국을 응원해야 하지만, 또 모국 선수를 이기게 지도해야 하는 상황에 있는 송대남 감독은 경기에 들어서면 국적을 떠나 제 선수가 어떤 나라의 선수이건 상대 선수는 적이기 때문에 정정당당히 승부에만 임해야 한다는 마음이다. 그 상대가 곽동한 선수나 안창림 선수여도 넘겨서 이겨야 하며, 이러한 승부가 진정 아름다운 것이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올림픽 결승 경기에서 각각 다른 나라의 선수들이 같은 한국인 지도자의 지도를 받으며 전 세계인 앞에서 경기를 펼친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고 멋집니다. 우선 지도자로서 도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이루고 나면 또 다른 목표를 세우고 정진할 것 같아요. 꼭 지켜봐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