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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x type=”note”]학교를 떠난 뒤에는 선생님도 교과서도 없이 살아가는 우리들. 성공 스토리와 자기계발서가 쏟아지지만 어쩐지 다른 세상 이야기 같습니다. 함께 살아가는 이들의 생각에 귀 기울여 보면, 내가 찾던 해답을 발견할 때도 있습니다. 같은 고민을 하는 이웃에게 위안을 얻을 때도 있죠. ‘생각 읽기’, 우리 주변 사람의 생각을 읽고 다시 생각해보는 시간입니다. (편집자)[/box]

내가 페이스북에서 친구 맺고 있는 1,600여 명 가운데 가장 잉여로운 사람이 있다. 그는 기술의 흐름에 관심을 두고 과학의 대중화에 대한 글을 쓰며 클래식, 재즈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과 미술작품 감상을 즐긴다. 틈나는 대로 트래킹을 하며 커피와 와인 등 기호 식품에 대한 식견도 수준 이상이다. 북적대는 서울에 비하면 모든 것이 여유로운 동네인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고양이를 기르며 살고 있다.

1999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알라딘 US 설립을 함께하다가 일 년 반 전에 ‘조기 은퇴’를 선언한, 자유로운 ‘잉여족’ 이형열 씨를 만났다. (이형열 씨는 지난 4월부터 약 두 달간의 일정으로 서울에 머물고 있다.)

그에게 인터뷰를 청한 것은 우리 마음속의 로망이기도 한 ‘한국을 떠나 살기’와 ‘조기 은퇴의 비법’에 대해 듣고 싶어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시간여 이야기를 나눈 후에 든 생각은 그는 한국에서 ‘함께’ 살고 있으며 ‘조기 은퇴’라는 형식을 빌어 ‘다음’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형열
이형열

운동권 ‘낭인’으로 살았던 이십 대

“지금 오십 대 중반기로 접어드는 사람들이 다 그랬겠지만, 저의 이십 대는 사회의 변혁기에 ‘민주화’라는 설익은 사명감을 품고 낭인처럼 떠돌던 시기였습니다.”

1979년 서울대에 입학한 그는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 운동이 벌어지고 휴교령이 내려지면서 공장에서 일했다. 어떤 조직적인 활동이었다기 보다는 겨울방학 때 러시아 혁명사를 읽고 난 후 ‘민중들의 삶에 가까이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후에는 ‘언더써클(지하조직)’ 학림의 조직원으로 세미나를 조직하고 정세분석 등 활동을 했다. 곧 운동권에 대한 대대적인 수배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도망자 신세가 그리 고달프지만은 않았다. 지인들의 자취방을 전전하다 입주 과외 (사실 이것도 불법이었지만) 자리를 소개받아 나름 ‘등 따시고 배부르게’ 지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두 명씩 친구나 선배들이 도망 중에 붙잡혀 군대에 가게 됐고, 그 역시도 1982년 입대로 ‘도바리’ 생활을 마감하게 됐다. 그러나 그의 방랑 생활은 입대로 마무리되지는 않았다. 그가 평범한 학생으로 돌아가기까지는 그로부터 6년여의 세월이 더 걸렸다.

“제게는 민주화 운동도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고등학교 때까지는 듣도 보도 못했던 새로운 세계관에 끌렸던 것이고, 뭔가 새로운 것을 조직해서 만들어 나가는 일이 나를 활기차게 만들었습니다.”

학교보다는 바깥세상에 더욱 호기심을 자극하는 일이 많아서일까. 그는 제대 후에도 택시를 몰며 운수 노조를 만드는 일에 참여했다. 택시기사로 민주화 운동을 벌이다 분신했던 박종만 열사의 미망인과 추모 사업회 활동도 했다.

1988년 6월 항쟁 이후 노동 현장에서 나온 그는 그동안의 민주화 운동에 대해 스스로 반성을 하면서 그해 가을에 3학년 1학기로 복학을 했다. 1990년 여름에 졸업하기까지 그의 대학 생활은 청춘을 불사르며 세상의 곳곳을 몸으로 부딪쳤던 경험까지를 포함해서 십 년 넘게 지속하었다.

‘서른 즈음에’ 컴퓨터에 빠지다

1988년 늦깎이 학생으로 복학한 후 6개월은 공부에 매진하며 열심히 학생으로 충실한 삶을 살았다. 대학원 진학도 생각했다. 그런데 세미나 발제용으로 PC를 산 것이 화근이었다. 당시 16비트 AT 컴퓨터를 산 이후 컴퓨터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벗어나려 발버둥 칠수록 더욱더 깊이 빠져드는 늪과 같았다.

286 AT 컴퓨터

“대학원 시험공부를 할 때였죠. 집에 있으면 컴퓨터 앞에서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있다 보니 집을 떠나 고시원에서 공부하자고 결심을 했어요. 그런데 공부하다가 지루해지면 부근의 ‘동방서적’에 가서 어느새 컴퓨터 책을 읽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더라는 겁니다!”

그렇게 도저히 컴퓨터에서 벗어나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드디어 대학원까지 포기하고 컴퓨터의 길을 택하게 됐다.

그가 컴퓨터에 빠지게 된 것은 사소한 사고로부터 시작됐다. 컴퓨터를 사고 얼마 되지 않아서 무엇을 잘 못 만졌는지 컴퓨터가 포맷됐다. 까만 화면에 커서만 깜박거릴 뿐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화면은 두려움 그 자체였다. 무거운 본체를 들고 용산을 오고 가기를 몇 번씩 했다. 그랬더니 (귀찮았던지) 용산 컴퓨터 상가에서 OS를 다시 까는 방법을 가르쳐 줬다. ‘복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받쳐주니 겁날 것이 없었다. 급기야는 컴퓨터를 조립하는 수준에 까지 이르게 됐다.

“그 당시 글을 쓰는 사람들도 컴퓨터를 사기 시작했는데, 컴퓨터를 잘 모르니까 자꾸 제게 물어왔습니다. 어떤 것을 사야 하느냐는 조언부터 들어 드리다가 나중에는 컴퓨터를 만들어 드리는 단계가 됐죠. 인문 쪽에 계신 분들 가운데 제 손을 거친 컴퓨터를 쓰시는 분들이 정말 많았습니다. 최영미 시인의 컴퓨터도 제가 조립해 드렸어요!”

한두 번 취미로 시작한 것이 본업이 되기 시작했다. 컴퓨터 조립으로 돈을 벌기 시작했고 1991년부터는 컴퓨터 강의도 시작했다. 컴퓨터 문외한인 사람들에게 알기 쉽게 컴퓨터의 원리를 가르쳐 주는 칼럼을 연재하다가 책도 냈다. [컴퓨터 한 달만 미쳐보자]라는 책으로 ‘컴퓨터 도사’의 이미지를 굳히게 된 것. 책을 출간하면서 출판사 디딤돌 사장님과 가까워졌고 회사를 합쳐 디딤돌에서 전산실을 만들고 컨설팅과 벤처 투자에도 관여하면서 그렇게 다가올 또 다른 운명의 물결에 조금씩 휩싸이고 있었다.

도미(渡美)와 인터넷으로 책 나르기

‘한국을 떠나 사는 것’에 대한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을 했다.

“사실 저는 이민을 결심한 적은 없었어요. 그냥 우연한 기회에 미국에 가게 됐고 그곳이 편하게 느껴졌고 하고 싶은 일이 생겨서 열심히 했고, 그렇게 좀 오랫동안 그곳에 살고 있을 뿐이죠.”

기술의 발전과 그 흐름에 관심을 두게 되면서 그는 컴덱스(COMDEX; 80~90년대 컴퓨터 산업의 흐름을 주도했던 전시회), 북 엑스포(BookExpo) 등을 열심히 쫓아다니며 ‘선진문물’을 익히는 데 주력했다. 미국은, 그에게는 지적 호기심을 채워주는 정보의 샘물인 셈이었다. 1990년대 이런저런 기회로 미국을 자주 드나들면서, 왠지 그곳이 편안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고 했다.

“90년대만 하더라도 미국엔 신기한 것이 많았죠. 라스베가스 호텔들의 인테리어나 장식들, 호텔마다 벌이는 쇼들은 새로운 경험을 던져 줬던 것 같습니다. 비단 라스베가스 뿐 아니죠. 아무 서점에나 들어가서 잡지만 펼쳐도 폰트의 비주얼이 달랐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얕은 지식을 가지고 우려먹으며 산다는 생각이 들던 즈음이어서, 무언가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우연히 회사가 투자한 회사에 머물 기회가 생겼고 6개월 정도 후에 MBA 공부를 해볼까 고민하던 차에 한국에서는 IMF 구제금융을 요청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물론 그때 접고 서울로 돌아올 수도 있었지만, 그냥 그곳에 머물렀다. 꼭 그곳에서 살겠다는 뜻은 없었다. 다만 그는 어느 거리에나 재즈가 흐르고 갤러리가 가까이에 있는 곳, 와인을 상대적으로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곳이 그저 좋았다. 무엇보다 나이를 따지지 않고 상대를 존중해주는 사람들의 인식도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요인이었다고 회상했다.

MBA 대신 MCSE(Microsoft Certificated System Engineer) 자격증을 따서 사설 학원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던 중 사업의 기회를 만나게 됐다.

운동권 동지로 알게 된 조유식 씨가 1998년 미국에 머물면서 아마존과 같은 인터넷 서점을 만들겠다고 해서 아이디어를 보태다가 사업 파트너로 참여하게 됐다. 한국 알라딘 설립(1999년 7월)에 이어 그해 12월, LA에서 알라딘 US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미국의 한인 커뮤니티에 ‘인터넷 서점’은 정말 요긴한 서비스였다. 2010년 외교통상부 자료에 의하면 재미 한인의 수는 210만 명을 넘어섰는데 주요 도시 중심으로 흩어져 있는 소규모 서점으로는 이들의 ‘한국 책’에 대한 다양한 수요를 맞출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근처에 서점에 가도 볼 책이 없고, 볼 책이 없다 보니 책을 읽지 않는 악순환이 반복되던 시기였다.

사업의 핵심은 미국 전역에 흩어진 한인 교포나 유학생들에게 알라딘 US의 존재를 알리는 일이었다.

“인터넷을 쓰면서 책에 대한 수요가 가장 많은 층을 공략했습니다. 바로 학교였습니다. 야후! 디렉토리 서비스에서 미국 전역의 주요 대학 리스트를 만들고 각 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단과 별로 한국인들의 성, 김(Kim), 이(Lee), 박(Park)…… 이런 식으로 검색해서 약 4만 명의 DB를 만들었습니다. 이들에게 알라딘 US를 소개하는 이메일을 보냈죠.”

‘노가다’ 이메일 마케팅은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알라딘 US에서 책을 사본 사용자들에게 감사 편지도 많이 받았다. 한 사용자는 오랜만에 소설책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며 장문의 메일을 보내기도 했다.

초기 3년간은 투자 비용이 많이 들어서 적자를 기록했지만, 점차 사용자가 확보되고 재방문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면서 그 이후 10년은 지속적인 흑자를 기록했다. 무엇보다도 책을 통해 교포들이 다시 한국과의 끈을 잇게 됐다는 점에서 뿌듯함을 느꼈다.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보니 알라딘 US는 본질은 문화 사업인데 너무 물류에만 초점을 맞췄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오프라인에서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서점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2003년부터 지속해서 서부에 네 곳, 동부에 세 곳에 알라딘 서점을 냈죠.”

그는 오프라인 서점을 여는 일에 직접 나섰다. 일곱 개의 서점을 내고 나니 서서히 지치기도 했고 일의 재미도 줄었다. 앞으로 남은 날들을 어떻게 살아야 하나를 고민하기 시작한 때가 이 무렵이었다.

이형열
이형열

조기 은퇴, 다음 여정의 방향을 찾는 과정

“2012년 12월 말로 하던 일을 그만두었는데 저를 잘 아는 선배가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 그럴 때도 되었지. 십 년 주기로 삶을 포맷하고 새로운 길을 찾는 사람들이 있지!’ 이전까지는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데, 생각해보니 그게 맞는 말 같았습니다.”

알라딘 US에서 손을 떼고는 다른 일을 시작하지 못했다. 그는 ‘조기 은퇴’라고 자신의 상태를 표현했지만, 그것은 오히려 앞으로 꽤 많이 남은 후반부 인생의 방향을 찾는 과정이라고 읽힌다. 그런 범상치 않은 결정을 하게 된 것에 대해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2000년대를 넘어서면서 뭔가 새로운 흐름이 오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우리 생활이 전면적으로 디지털화되면서 모바일 생태계가 만들어지고 있음을 알고는 아이폰 4가 출시될 때는 일부러 새벽부터 줄을 서는 부지런도 떨어 보았다. 거대한 모바일 생태계가 분명 세상의 변화의 한 축인 것만은 틀림없었지만, 그게 전부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1980년대 후반처럼 무조건 기술의 트렌드에 몰입할 수 없었다.

“노무현 대통령 서거에서 충격을 많이 받았던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누가 시킨 것은 아니었지만 내 이십 대를 바쳐 민주화를 위해 나름 노력했고, 또 세상이 좋아지고 있다는 것에 위안을 받기도 했는데 이명박 정부 이후 한국 지배 세력은 너무나 속물화되고, 일반 대중들은 살기 힘들어지는 등 상황이 악화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간이 흘러도 좋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할 수 없었죠.”

이런 정신적인 좌절이 그의 인생의 향방을 (모바일 세상이라는) 거대한 기술의 흐름에 집중할 수 없게 했다는 것이다. 그는 사실 미국에 거주했지만, 인터넷 서점 사업을 하면서, 한국에서 유행하는 책의 흐름을 뒤쫓으며 살았다. 책의 흐름은, 사회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아 한국 사회의 변화를 그대로 느끼며 생활했던 여파였는지도 모른다.

“이제까지 내가 알아왔던 민주화, 사회를 보는 시각을 재정립해야 한다는 자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것이 알라딘 US 이후 서둘러 다른 일을 시작하지 않고 ‘조기 은퇴’를 선언한 이유라고도 할 수 있겠죠.”

조기 은퇴를 선언하고 그가 시작한 것은 공부였다. 인간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을 둘러싼 환경과 우주에 대해서, 평소 자신이 관심이 있었던 자연과학에 대해서,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해외 석학들의 책을 읽다 보니 레퍼런스로 거론된 책을 다시 찾게 되고,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읽고 싶은 책, 읽어야 할 책이 생겼다. 1년에 약 100여 권을 읽으며, 페이스북을 통해 생각을 나누며 그렇게 그는 다음 여정의 방향을 찾는 일에 전념하고 있다.

“사람들이 제게 조기 은퇴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묻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일하는 이유는 돈을 벌고, 생계를 꾸리기 위한 것이 첫 번째 이지만, 일 이외에 하고 싶은 것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특히 한국 남성들은 지위에 대한 편향을 버릴 수가 없어서 나이 들어 일을 그만두고 노바디(nobody)로 돌아가는 것을 못 견뎌 하죠.”

그는 노바디의 불안을 가지고 있지 않다. 덕분에 그냥 알고 싶은 것을 탐구하는 존재로 살아갈 수 있는 여유를 얻었다. 이 혼란의 시대에 ‘한국 정치’가 주는 절망감에 대해, 적어도 상식적인 민주 시민의 관점을 제시하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바람을 지키면서, 책 속에서 길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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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댓글

  1. 그냥 돈 많아서 이제 하고싶은거 하겠다는거 아니에요? 자세히 읽으면 다른 내용인가?

  2. 팬입니다 책펏캐좀 다시 해주심 안되나요? 어쩌다책읽기 듣다가 독서취미를 다시 찾게 되었는데요

  3. 선배님이라고 부르고싶네요 선배님 팟캐는 가식없는 열정과 명랑을 전염시켜줘요 팟캐좀 다시 해주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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