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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잘 알려지지는 않지만, 일제강점기 기생충학과 관련되어 가장 중요한 사건을 꼽으라면 바로 ‘영흥 에메틴 중독 사건’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식민지를 대상으로 한 열대의학 및 의료권력의 확대/개입 그리고 이에 대한 주민들의 조직적인 저항과 시민사회단체의 참여가 어우러져 있는 사건이기 떄문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폐흡충에 집중한 일본

다른 식민지 경영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일본 역시 풍토병, 특히 기생충 질환과 열대의학 관심이 많았다. 일본은 19-20세기 자국 내 주혈흡충 연구 및 관리를 통해 상당한 기술을 쌓아 왔으며, 열대의학이 식민지 경영을 위해 필수적인 학문영역임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 조선에서 일본이 집중한 것은 말라리아와 폐흡충(폐디스토마)이었다.

[box type=”info” head=”폐디스토마”]
[동물] 편형동물 폐흡충과에 속한 기생충을 통틀어 이르는 말. 몸은 길이 7~16밀리미터, 너비 4~8밀리미터이며, 몸빛은 홍갈색이다. 사람 및 그 밖의 포유류의 폐에 기생하며, 제 1중간 숙주는 다슬기, 제 2중간 숙주는 민물에 사는 게 등이며, 사람이 이를 날것으로 먹으면 감염된다. 학명은 Paragonimus westermani이다.

출처: 다음 사전[/box]

당시 기록을 살펴보면 연간(1925-40년 사이) 말라리아 환자가 10만여 명씩 발생한 것으로 되어 있어 가장 심각한 문제였고, 폐흡충 환자는 1916년 기준으로 39,401명이었다. 하지만 1927년 연구에 따르면 전체인구 대비 약 230만 명가량이 폐흡충 감염자일 것으로 추산되어 심각한 보건 문제로 대두했다.

또한, 말라리아보다 폐흡충 관리에 총독부가 집중하기 시작한 것은, 1896년 키네네가 금계랍이라는 이름으로 수입 되어 들어와 저가에 시중에 유통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말라리아 치료제인 키니네가 대량 유통되고 접근성이 높아지면서, 말라리아로 인한 치사율은 1~2% 남짓으로 낮아졌다. 반면 폐흡충 환자의 비율은 상대적으로 낮았지만, 마땅한 치료제가 없어 치사율이 25%대로 매우 높았기 때문에 매년 천여 명 이상의 사망자를 발생시키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폐홉충 치료 이유로 여성과 아동을 노역에 동원

식민당국은 1916년 4월, ‘전염병 및 지방병 연구과’를 신설하고, 1920년에는 ‘조선전염병 및 지방병 조사위원회’를 설치하였다. 비록 이 연구과가 콜레라 예방이나 재귀열, 이질, 성홍열 등 전염병 전반에 대한 연구 및 예방을 담당하고 있기는 했지만, 가장 직접적인 계기는 폐흡충 때문이었다. 훗날 총독부의원장의 회고를 보면 ‘조선의 풍토병인 폐디스토마를 박멸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한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1920년대 이전만 하더라도 폐흡충증에 적용할 수 있는 효과적인 치료제가 없었다. 그래서 폐흡충의 중간숙주가 되는 다슬기를 제거하는 방식이 주로 사용되었다. 1915년에는 여름 한 철 동안 폐흡충 감염이 심했던 함경남도에서만 84,000여 명을 동원하여 다슬기 700석(1석이 80kg가량이라 치면 약 50~60톤가량), 1916년에는 67,000여 명을 동원해 350석(20~30톤가량)의 다슬기를 채취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노역에 동원된 것은 대부분 여성과 아동들이었으나, 이를 기반으로 식민지 의학의 공공성을 확보하고 정당성을 획득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의료 서비스 핑계로 조선인을 생체실험에 동원

1915년 이후 염산에메틴(acid emetine)이 흡충류에 살충효과를 보이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화학요법을 보다 적극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에메틴 주사로 90%대의 높은 치료율을 보이기 위해서는 일회요법이 아니라 지속적인 투여가 필요했다. 과량 투여할 경우 권태, 보행곤란, 소화불량 같은 비교적 경증의 부작용뿐 아니라 심장쇠약이나 심장마비로 인한 사망까지 이를 수 있다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따라서 식민당국은 이 치료법을 보다 다듬을 필요가 있다고 느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식민당국에서는 에메틴 치료법을 권장하기 위해 주사제에 각종 국고보조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폐흡충증의 치료를 위한 에메틴 주사 장면 (1927년)
폐흡충증의 치료를 위한 에메틴 주사 장면 (1927년)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더불어 영흥 지역에서 일어난 에메틴 주사 사건을 이야기하기 전에 당시 의료 체계를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19년 삼일운동 이후 일본은 중앙권력을 지방으로 이양하기 시작한다. 더불어 상당수의 의료인력 임명 및 감독, 허가의 주체가 총감에서 도지사로 이양되면서 의료 재정운영의 책임 역시 지방 당국으로 떠넘겨졌다. 겉보기에는 도립의원이나 공의의 수가 늘어난 듯 보이지만, 국고 지원이 줄어들면서 도립의원들은 실질적으로 수익 위주의 경영을 진행하게 된다. (190년 후의 모습과 겹쳐 보이는 것 같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지방 의료 상황은 날이 갈수록 악화하는 상황에서 시혜적인 의료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명분으로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한 에메틴 임상시험 – 사실은 생체실험인 – 을 진행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일본은 사건 은폐를 시도, 취재 및 집회 금지

함경북도 위생과에서는 폐흡충 치료를 위해 1927년 3월 1일부터 17일까지 약 100여 명의 주민들을 대상으로 에메틴 주사를 투여했다. 하지만 투여받은 환자 중 절반이 중독 증상을 보였고, 3월 22일에는 동아일보에 18일 4명이 사망하였으며, 20일에 2명이 추가 사망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비슷한 시기 전남 해남에서도 에메틴 투여가 이루어졌는데, 환자 48명 중 3월 21일부터 26일 사이 6명이 사망했다. 갑작스러운 환자들의 죽음에 가족들은 격분했으나, 경찰국에서는 갑작스러운 추위로 감기에 걸려 폐렴으로 발전해 사망한 것이라 공식 입장을 발표했다. 당국에서는 약간의 위로금을 유족들에게 전달하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 지으려 했으나, 오히려 유가족들은 더욱 격분하여 경찰서를 습격하기도 했다.

유가족은 경찰국의 발표를 믿을 수 없다며 경성에 있던 조선인 의사들의 단체인 한성의사회에 진상조사를 의뢰했다. 그동안 26일 1명이 더 사망하여 사망자는 총 7명으로 늘어났다. 한성의사회는 환자들이 중독 증세를 보였다는데 초점을 맞추어, 본래는 1회 1그램 미만이 최대사용량인 에메틴을 환자에 따라 2그램에서 3그램까지 투여하였다는 증거를 확보했다. 무엇보다 본래 무료로 치료에 참가할 수 있다는 말을 바꾸어 중도에 포기하는 사람에게는 매일 70전씩 약값을 계산해 받겠다며, 사람들의 이탈을 강제로 막은 정황도 발견되었다. 한성의사회는 ‘임상 진단한 결과 중독증상이 현저함에 자에 통지함’이라고 대책강구회에 정식 통보하였다.

영흥지역 주민들은 책임자 탄핵과 처벌을 강력하게 요구하였으나, 당국은 조선통치에 해가 된다며 기자의 취재활동부터 각종 강연회 및 집회들을 모두 금지했다. 28년 3월, 사망자의 미망인 중 한 명이 위생과장, 의사 5명 등에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걸었으나, 법원에서 사건을 무혐의 처리하고 공판 비용까지 원고에게 청구함으로써 분란의 소지를 만들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이렇게 에메틴 사건을 둘러싼 논쟁이 활발하던 27년 4월 2일, 총독부 위생과는 각도에 에메틴 주사를 중지하도록 명령했다.

공공성 훼손하는 식민지 의료 권력에 대항한 역사적 사건

이후 흡충류에 적당한 치료제가 없다는 이유로 조선에서 30~40년대에는 이전보다 더 널리 쓰이게 되면서 에메틴 사용의 정당성을 획득한 듯 보였다. 또 1927년 사망한 환자들은 선의에서 시도되었으나 무지로 인해 희생된 사람들이라는 관점을 낳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 본토의 사정을 보면 내부적으로는 에메틴 사용을 극도로 제한하며 40년대까지 주로 중간숙주의 박멸에 계속 집중했던 것과는 극명하게 비교된다. 즉 에메틴에 대한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투여를 강행한 것은 식민지 주민들에 대한 인명을 경시했으며, 제국에 필요한 의학지식을 쌓기 위함이었음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에메틴 중독 사건은 식민지 의료 권력에 맞선 지역 주민들의 저항, 이에 호응하여 조선인 의사 단체 및 기타 시민 단체의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연대하여 부당한 의료정책과 맞서 싸웠다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중앙에서 지역으로의 행정권력이 이양되고, 지방의 재정부담이 늘어나며 의료의 공공성이 훼손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사건이라는 점, 또한 부당한 의료정책과 주민 및 의사사회의 조직적인 저항이었다는 점에서 2014년의 지금에도 나름 시사해 주는 점이 많은 사건이 아닐까.

참고문헌

  1. 대한감염학회. 한국전염병사. 군자출판사, 2009.
  2. 신규환. “지방병 연구와 식민지배” Korean J Med Hist 18 (2009): 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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