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x type=”note”]이 글의 모티브는 슬로우뉴스에서 발행한 ‘장애인 비하 표현’에 관한 칼럼(‘병신이라는 말, 장애인 같다는 말을 자주하는 너에게)에 쓰였던 패럴림픽 선수 사진입니다. 사진은 (필자의 비판에 공감하고 동의하는바) 해당 칼럼에서 삭제한 상태입니다만, 이 글에서는 본문의 맥락을 독자가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합니다. (편집자) [/box]
여성을 ‘김치녀’라고 부르지 말자는 기사나 칼럼에서 여성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올림픽에서 장대높이뛰기 하는 이신바예바 사진을 첨부하는 일은 본 적이 없다. 남성 사례를 생각할 때도 남성에 관한 칼럼이나 기사에서 남성을 일반적으로 대표하는 이미지로 우사인 볼트 사진이 올라와 있으면 매우 어색할 것 같다.
장애인과 패럴림픽 이미지
그런데 장애인이 등장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장애인을 상징하는 모습은 패럴림픽[footnote]Paralympic Games; 신체적 장애가 있는 선수가 참가는 국제 운동 대회. 흔히 ‘장애인 올림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footnote]에서 장애인 선수가 역동적으로 경기하는 모습이 대부분이다. 혹여나 그게 아니면 성공한 장애인 유명인사 사진이다. 이 이미지에서 공통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한 마디로 표현하기 어렵지만, 장애와 싸우고, 장애와 투쟁하고, 장애를 물어뜯고, 그래서 장애를 이기고, 장애를 극복하고, 뭐 그런 것이다.
이게 장애인에게는 사실 X 같은 상황이다. 그런데 이게 더욱 X 같은 상황인 것은 의식 있다는 사람 대부분도 이 상황의 X 같음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병신’이나 ‘장애인 같다’는 말을 쓰지 말자는 칼럼을 쓴 친구나 이 칼럼을 편집한 매체(슬로우뉴스)나 좋은 누구다. 그런데 이 좋은 누구조차도 이 X 같음을 인식하지 못했다면 아주 심각한 일이 아닐까. 또한, 이 좋은 누구를 탓할 일도 아니게 되며.
그림을 그려보자. 추석 명절에 온 친척이 모였다. 스포츠 뉴스에서 패럴림픽에 나가 분투하는 장애인 선수들의 모습을 보도한다. 그때 모든 이들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렇게 말한다고 생각해보라.
‘자신의 장애와 싸워서 이기는 인간승리의 모습을 봐, 얼마나 아름답니?’
그때 구석에 있는 장애인에게 무슨 말을 덧붙일까. 너도 장애와 싸워서 이길 수 있다고, 어깨를 툭툭 두드리면서 말할 수도 있다. 도저히 싸워서 이길 수 없을 만큼 모질고 모진 장애와 함께 살아가는 이에게는 네가 그저 숨 쉬고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장애와 싸우는 것이고, 그것을 통해 모두가 감동을 한다는 말을 붙일지도 모르겠다. 덕담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직접 경험하면 다 X발 X 같은 말이다.
장애는 싸움이나 극복의 대상이 아니다
우선 장애는 싸워지는 게 아니고, 극복되는 것도 아니다. 장애와 싸우면 장애인의 장애가 사라지고, 장애를 극복하면 장애인이 비장애인이 되는가. 장애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다. 장애를 이길 수 있는 장애인이 어디 있는지 알려달라. 장애인은 그저 장애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장애인들이 자기 장애를 밉고 어렵고 고통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때가 단 한 순간도 없다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런데 장애인들은 그러다가 이 장애가 나의 일부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려는 사람들이다. 그 일부를 왜 극복하는가. 비장애인 당신은 당신의 오른팔을 극복하려고 하는가. 비장애인 당신은 당신의 왼쪽 다리와 싸워 이기려고 하는가.
또한, 장애인은 비장애인에게 감동을 주려고 살아가는 이들이 아니다. 사는 게 퍽퍽하다 보니까 온갖 자기계발의 서사가 이 세계에 범람한다. 그 서사의 기본 구조는 역경에 처한 상황에서 의지로 조정 가능한 변수를 조정해서 결국, 그 역경을 극복해내는 것이다.
X 같은 사실은 장애인 중에서 의지로 조정 가능한 변수를 지닌 사람은 아주 소수라는 것이고, 다시 말해 패럴림픽 등으로 고정된 이미지처럼 역경을 극복하기 위해서 의지적인 자기계발을 지속할 수 있는 장애인은 매우 소수라는 것이다. 대부분은 혼자서 그럴 능력이 없다. 그렇다면 이들은 숨을 쉬며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비장애인의 눈에 눈물 흐르게 하는 존재로서 가치 있는 이들인가?
이렇게 X발 X 같은 말이 어디 있나.
패럴림픽 이미지의 폭력성
장애인들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장애인들을 불쌍히 여기고 감동받아 눈물 흘리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들이 맞닥뜨리는 역경을 사회가 적극적으로 수정하고 그래서 역경을 역경 아니게 만드는 것이다. 휠체어가 다닐 수 있게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고 저상버스를 마련하고, 그 이후에는 살아가는 것이 장애인이나 비장애인이나 다를 것이 있나.
장애인은 자신의 생을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지 비장애인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소비되는 사람이 아니다. 비장애인의 말초적 감정을 자극하는 이른바 ‘장애 포르노적 존재’가 되기 위해 장애인은 살아가지 않는다. 필요한 것은 장애인이 행복할 수 있게 사회의 문턱을 조정하는 것이지 장애인에게 자기극복의 이미지를 덧입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장애인들의 불우한 삶이 장애인 개인의 의지 부족인 것처럼 채색할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결국, 장애인에게 패럴림픽 선수의 이미지를 덧입히는 것은 장애인의 삶에 대한 사회의 책임을 외면하고 장애인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는 것이며, 구체적 장애인 당사자에게 이 이미지는 아주 자주 잔혹한 폭력으로 다가온다. 심지어 패럴림픽과 전혀 상관없는 장애인의 일상을 다루면서까지 패럴림픽의 이미지를 사용하는 그 문제가 말이다.
‘조심’하는 게 아니라 ‘함께’ 싸워주길
한국 사회가 패럴림픽을 소비하는 방식이 아주 저열해서, 이제는 패럴림픽 자체를 보이콧하고 싶은 심정이다. 어떤 장애인은 어떤 비장애인과 마찬가지로 운동을 통해 자기를 실현하고 싶어 하고, 그렇다면 사회가 할 일은 앞서 말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를 위한 장애인 스포츠의 제반 환경을 마련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장애인 스포츠의 현실은 절규가 나올 만큼 X 같으면서 패럴림픽의 이미지만을 장애인에게 강요하는 이 사회는 얼마나 우스우냐. 그 이미지를 강요하는 것이 슬프다는 것을 모르는 이 사회는 또 얼마나 구슬프냐.
마지막으로 노파심에 다시 말하지만, 누군가를 탓하고 싶지는 않다. 이제 3년차 장애인으로서 장애인으로 살아보지 않았으면 몰랐을 일이 정말 많다. 살아보지 않은 비장애인은 당연히 모를 일이다. 그래도 어쩌나. 비장애인들이 모르더라도 X 같은 일이 많이 일어나고, 비장애인이 모르기 때문에 어느 순간은 X 같다고 말하는 것인데.
그저 간절한 바람은 ‘참 조심해야겠어요.’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 비장애인이 조금 조심한다고 장애인들에게 X 같은 세상이 바뀌는 건 하나도 없고, 비장애인이 조심하는지 감시하기 위해 장애인이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저 들어주기를 바라고, 그 목소리에 공감하고 동의한다면, 그저 함께 싸워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