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x type=”note”] 진보넷에서 활동하는 신훈민 변호사는 2015년 4월, 세월호 1주년에 즈음해 집회에 나갔습니다. 그로부터 5개월여가 지난 2015년 9월의 어느 날, 신 변호사는 경찰 전화를 받습니다. 집회와 관련해 피의자 신분으로 경찰서에 나와 조사를 받으라는 전화였죠.
어떻게 하면 ‘제대로’ 조사받을 수 있을까? 세월호 집회 피의자 신분으로 변호사가 직접 쓰는 경찰 조사 체험기. 이 생생한 체험담이 유사한 일을 겪을 수도 있는 독자께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편집자)
[/box]
고민이 많았다.
- 진술할 것인지
- 변호사를 대동하고 갈 것인지
- 인정신문에 응할지
- 수사자료표에 지문을 찍을지 등등
경찰서 정문에서 뭐라고 말할지도 고민이다. 예전에는 접견 온 변호사라고 하면 됐는데, 이번에는 뭐라고 말해야 하는지.
진짜로 안다는 것
경찰서에 가봤고 절차도 알고 있으면서(게다가 변호사인데) 왜 고민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모르면 당황한다. 당황하면 실수하고, 실수하면 후폭풍이 있다. 내용에 앞서, 절차는 완전히 숙지해야 한다.
단순히 글로 아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보듯이 모든 상황을 이미지로 그릴 수 있어야 한다. 경찰서에 들어가 조사받고 나오기까지, 모든 상황을 시뮬레이션하듯 머릿속에서 자유자재로 가지고 놀아야 한다.
그래야 아는 것이고 실수가 없다. 지난 글과 이번 글 그리고 다음 글까지 꽤 길게 시시콜콜 이것저것 기록하(려)는 이유는 이런 이미지화 작업을 돕기 위해서다.
인정신문에 응해야 할까?
[box type=”info”]인정신문(人定訊問)이란 조사받으러 온 당신이 경찰이 찾는 바로 그 사람인지를 확인하는 절차다. 이름, 나이, 주소, 직업 등을 확인한다. (형사소송법 제241조 참조)[/box]
인정신문은 피의자신문의 일부다. 당연히 진술 거부할 수 있다. 다만, 여기에서 진술 거부하면 경찰이 영장을 받아서 강제로 지문 찍고 본인 확인한다. 우리는 지문 찍는 데 익숙하지만, 한국처럼 전 국민의 지문 정보를 저장하는 국가는 그리 많지 않다. 다른 나라는 지문을 수집하더라도 범죄자나 외국인으로 한정한다(이와 관련된 인권 침해는 별개 주제라서 여기서는 다루지 않는다).
2013년 집회시위 관련 세미나에서 들은 이야기다. 집회 중 연행된 어떤 분이 인정신문에 응하지 않았다. 경찰이 영장을 발부받아서 그분 손가락을 붙잡고 강제로 지문을 찍고 신원을 확인하려 했다. 그분은 엄지손가락 지문을 병뚜껑으로 그었다. 지문 날인을 못 했다. 세미나를 주관하던 박OO 변호사는 인정신문과 관련해 가장 충격적인 경험이었다고 했다.
“인정신문 절차에 저항하는 분들이 있다. 변호사는 이런 이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연행된 분들에게 어떤 선택을 했을 때 어떤 절차로 진행되는지 가능한 한상세히 설명해야 한다. 선택은 당사자의 몫이다. 그리고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최대한 존중해야 한다.”
‘내가 잘못한 것이 없는데 내가 누구인지 말해야 할까?’ 고민했다. 하지만 인정신문까지 거부할 생각은 없다.
1. 이름
우선, 내가 나라는 사실(?!)은 알리기로 했다.
2. 연락처
향후 형사 절차를 위해서 알려주는 게 편하다. 연락이라도 잘 되어야 뭘 대응하지 않겠나. 핸드폰 번호 알려줘도 집으로 우편물이 가겠지만, 우편물은 최소화해야 한다. 너무 자주 오면 가족들이 걱정한다.
3. 수사자료표: 지문 찍느냐 마느냐
조사가 다 끝나면 수사자료표 작성을 위해 전자장치에 지문을 찍으러 간다. 피의자신문조서에 지문 찍는 걸 말하는 게 아니다. 피의자신문서조서에는 지문 찍을 필요 없다. 도장을 가져가지 않으면 서명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형법상의 범죄’와 ‘다른 여러 범죄(집시법 위반 포함)’로 조사받는 때에는 수사자료표에 지문을 찍게 되어 있다. “형의 실효 등에 관한 법률”이다. 법에 규정이 되어 있지만, 이것만은 하고 싶지 않았다.
인정신문에 응하고 신분증 보여주면서 ‘너희가 조사하려는 그 사람이 내가 맞다’는 것은 충분히 확인해줬다. 신분증에 내 사진이 있고, 경찰이 알고 있는 핸드폰 번호가 내가 들고 있는 그 핸드폰이다. 이미 ‘내가 너희가 찾는 그 사람이라는 것’을 의심할 바 없이 깔끔하게 확인해줬는데도 도대체 왜 지문까지 찍어야 하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지문 찍기에는 응하지 않기로 했다. 물론 여기에 응하지 않아도 영장 발부된다고 알려졌다. 영장이 발부되면 응할 생각이다. 나는 영장 집행에 협조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냥 수사자료표에 지문 날인 하는 것은 너무 화가 났다. 왜 지문 정보까지 가져가니?
임의수사는 ‘경찰에 협조’하는 것일 뿐!
3일 동안 고민하고 이런저런 경우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를 확정했다. 경찰 조사 날짜를 다음 주로 잡았지만, 결심이 섰으니 빨리 가고 싶다. 시간이 있으면 고민만 늘어난다. 연락 왔던 번호로 전화했다. (이 상황에서도 혹시나 보이스피싱은 아니었을까 일말의 기대를 품었다.)
체포 영장이 없는 상황에서 경찰 연락을 받고 조사에 협조하는 건 임의수사다. 이러한 임의수사가 수사의 기본 원칙이다. 영장 발부 받아서 강제로 수사하는 건 극히 예외에 속한 일이어야 한다.
임의수사라면 조사 받을 시간을 옮겨도 상관없다. 피의자신문 작성하던 도중이라도 수사관이 고압적으로 행동하거나 불쾌하게 한다면 집에 와서 민원제기하면 된다. 임의수사는 자발적으로 수사에 협조하는 것이기 때문에 경찰이 뭐라고 할 수 없다. 요컨대 어떤 이유로든지 조사받을 시간을 옮기는 것은 고민거리가 아니다.
경찰에 전화하다
“OO경찰서, OOO수사관입니다.“
“OOO수사관 계신가요?”
“OOO수사관 외근 중입니다. 무슨 일 때문인가요?”
“조사받으러 가기로 한 신훈민이라고 합니다. 다음 주에 조사받기로 했는데, 이번 주로 시간을 옮기고 싶습니다. 연락이 안 될까요?”
“그 문제는 제가 뭐라고 확답 드릴 수가 없고, 연락처 알려주시면 전달하겠습니다.”
“네. OOO-OOOO-OOOO 신훈민입니다.”
1시간쯤 후에 담당 수사관한테서 전화가 왔다.
“신훈민 씨인가요?”
“네. 조사 시간을 옮겼으면 합니다. 이번 주 수요일에 가능하신가요?”
“가능합니다. 그럼 오후 어떠신가요?
“네. 그날 가겠습니다.”
“네. 지능팀으로 오시면 됩니다. 본관 말고 밖에 있습니다.”
수요일이다. 조사받기로 한 날이다. 시간 비워뒀다. 결정했던 사항은 다시 복기했다. 조사받기 3시간 전에 전화가 왔다. 담당 수사관이다.
“신훈민 씨죠?”
“아. 네.”
“오늘 조사받으러 오시기로 했는데 (…) 방금 OO범죄 조직을 잡아서 오늘 도저히 시간이 안 될 것 같습니다. 너무 정신이 없습니다. 다른 날짜 안 될까요? 죄송합니다.”
“(아. 젠장. 시간도 비우고 준비 다 했는데) 네. 알겠습니다. 그건 심각한 범죄니까, 그 사건 먼저 처리하셔야죠. 이해합니다. 언제 가면 될까요?”
“이번 주는 O요일과 토요일이 가능하고, 다음 주는 O, O, O요일이 가능합니다. 언제가 좋으신가요?”
“음… 그냥 이번 주 토요일에 가겠습니다.”
“네.”
준비 다 했는데, 갑작스러운 날짜 변경이다. 뭐. 내가 한 번 옮겼으니. OO사건이라는데 내가 양보해야지.
드디어 경찰서에 가다
토요일 아침이다. 부모님께는 일하러 간다고 말했다. 주말에도 종종 사무실에 나간다. 지하철 타고 경찰서로 갔다. 경찰서 정문이다. 정문에 있던 경찰이 묻는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지능팀에 조사받으러 왔습니다.”
“네.”
간단하다. 제일 큰 건물로 향했다. 1층에 안내 데스크가 있다.
“지능팀이 어디인가요?”
“밖에 있습니다. 저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아. 네.”
깜박했다. 담당 수사관이 지능팀이 밖에 있다고 알려줬는데, 실수다. 자연스럽게 행동하려고 했지만, 긴장했나 보다. 긴장을 풀려면 친한 사람과 대화하는 게 제일 좋다. 아무 이야기나 하면 된다. 자판기에서 음료수 하나 뽑고 배OO 변호사님한테 전화했다.
“배 변호사님. 저 훈민입니다.”
“오. 신변~ 주말에 어쩐 일인가요?”
“경찰서에 조사받으러 왔다가 전화했습니다.”
“하하하. 같이 가줘요? 이것저것 다 말하고 오는 거 아니에요?”
“아닙니다. 그냥 진술 거부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게 좋겠죠?”
“음. 그게 좋을 것 같습니다.”
“네, 그런데 저 기소되면 변호사님께서 변론해주시는 거죠?”
“서OO 변호사님이 하기로 한 것 아닌가요?”
“아뇨. 그건 농담이었고요. 제가 첫 형사사건에서 변호사님 손잡고 변호인으로 활동했으니 제가 피고인이 되는 첫 형사사건도 변호사님이 해주셔야죠.”
“알겠습니다~ 조사 잘 받으세요.”
“네.”
전화 끊고 조사받을 준비가 완료되었는지 차분히 복기했다. 이런! 도장을 놓고 왔다(아효~). 피의자신문조서 작성하고 도장을 찍어야 한다. 도장이 없으면 경찰은 지문을 찍으라고 한다. 지문 찍을 필요 없다. 서명하면 된다. 그런데 서명한다고 그러면 경찰이 싫어한다. 불필요한 논쟁을 없애려면 도장 챙기는 게 편하다. 깜박했다. 법령 설명하고 지문 대신 서명하면 된다고 설명해야겠다.
지능팀 앞이다. 내부에서 열어줘야 하는 자동문이다. 옆에 버튼을 눌렀다.
“누구신가요?”
“조사받으러 온 신훈민이라고 합니다.”
“네. 들어오세요.”
(3편에서 계속)
[divide style=”2″]
후기 + 경찰 수사 관련 추천 책
글 쓰는 게 쉽지 않다. ‘변호사’와 ‘변호인’을 가려서 써야 하는데 내 맘대로 ‘변호사’로 통일했다. 일상생활에서는 중요하지 않다. ‘변호사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만 알면 된다. 그러나 눈에 계속 밟힌다. 이것뿐이겠는가. 변호사의 도움을 받으려면 돈을 내야 한다. 이 사실은 어느 타이밍에 써야 할까? 이런저런 고민을 안고 글을 쓴다.
경찰 수사에 관한 배경 지식을 쌓고 싶다면, 다음 신문 연재와 책을 추천한다.
- 금태섭 변호사의 [현직검사가 말하는 수사 제대로 받는 법]
- 주진우 기자의 [주기자의 사법활극]
- 민변의 [쫄지마 형사절차]
금태섭이 쓴 한겨레 연재 기사는 금 변호사가 검사일 때 썼고, 누구나 읽기 쉬워서 추천한다(비록 연재가 중단되긴 했지만). 주진우의 책도 읽기 좋다. 다만, 사족(자기 자랑)이 조금 많다.
민변의 책은 오늘을 살아가는 시민이 읽어야 할 필독서다. 법을 전혀 모른다면 조금 어렵게 느껴질 수 있지만, 이해 가는 부분을 중심으로 반복해서 읽으면 좋겠다. 금 변호사와 주 기자의 책은 [쫄지 마 형사절차]를 읽기 위한 준비운동이다. 이 정도는 알아야 한다. 법치를 강조하면서도 법이 숭고한 무엇인 양 저 멀리 쫓아버린 법치국가 대한민국이 문제다.
사람마다 사건마다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다 다르다. 그래서 변호사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 글 역시 개인적인 경험담 정도로 이해하면 좋겠다. 정답은 아니다.
잘 읽었어요. 3편도 기대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