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곳을 지날 때 언젠가 와 본 곳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처음 보는 대상을 이전에 보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을 데자뷔라고 부른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데자뷔란 길에서만 체험하는 현상이 아니다. 신문에서 방송에서 우리는 날이면 날마다 예산과 관련한 데자뷔를 경험할 수 있다.
예산낭비라는 이름의 데자뷔
언젠가 눈여겨봤던 예산낭비 사례가 시시때때로 되풀이된다. 언젠가 분노를 느꼈던 호화청사 건립 문제, 언젠가 혀를 끌끌 찾던 민자 도로, 언젠가 황당해했던 손님 없는 지방공항, 언젠가 외국에도 이렇게 아무런 감시도 받지 않는 쌈짓돈이 있을까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던 특별교부금과 특별교부세와 특수활동비……
예산낭비만 그런 게 아니다. 1년을 단위로 예산주기를 따라가 봐도 데자뷔의 연속이다. 국회예산정책처가 해마다 결산분석보고서에서 지적하는 예산낭비 유형을 보자. 필요성·공익성 결여, 유사·중복사업, 집행실적 부진, 과다·과소 편성, 사업성과 미흡, 법령 위반, 사업계획 부실, 유사중복사업, 법·제도 미비, 목적 외 사용, 집행관리 부적절, 국회 지적사항 미반영…… 해마다 이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정부가 내년도 예산안을 국회에 제출하고 나서 지적받는 문제점은 무엇일까. 십중팔구 법적 근거가 미비한 사업에 예산을 편성하고 집행부진 사업에 버젓이 또 예산을 편성하고, 사업계획도 제대로 안 된 사업에 예산을 달라 하고, 터무니없이 과다·과소 편성해놓았을 것이다.
부처마다 넘쳐나는 비슷한 이름의 중복사업들
정권 핵심부 ‘관심 사업’으로 제목을 뽑은 비슷비슷한 중복사업들이 정부부처마다 넘쳐나는 것도 오랜 전통이다. 심지어 이명박 정부부터는 4대강 사업 예산 규모를 적게 보이게 하려고 공기업에 떠넘겨 놓고 ‘눈 가리고 아웅’하는 ‘선진화’된 재정기법까지 등장했다. 시간에 쫓겨 예산안은 통과될 테고 다음 해가 되면 우리는 또다시 어디선가 많이 보던 ‘결산 해보니 이런 문제가 나타났다.’는 기사를 보게 될 것이다.
왜 우리는 해마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하는 문제를 되풀이해야 하는 것일까. 구내식당에 비유하자면 우리는 여태 맛없는 반찬 나와도 미안하다는 사람 하나 없고 ‘리필’도 안 되는, 성분표시도 제대로 안 되는 곳을 이용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우리가 낸 돈으로 맛있는 한 끼를 즐길 방법을 고민할 때도 된 것 아닌가? 국민소송 혹은 납세자소송이라고 부르는 제도를 도입하자는 운동은 바로 그런 고민에서 출발한다.
예산 감시 운동의 시작
국민한테서 거둔 세금을 제대로 쓰려면 재정운용 역시 민주주의에 근거해야 한다는 ‘재정민주주의’ 시각에서 볼 때 2000년은 특별한 시기로 기억에 남아 있다. 그해 8월 예산감시운동에 한 획을 그은 제1회 밑빠진독상 시상식이 열렸고, 10월에는 처음으로 납세자소송을 법원에 제기했다. 대상은 모두 동일했다. 바로 숱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1999년 하남시장이 강행한 하남국제환경박람회였다.
“함께하는 시민행동”이 제1회 밑빠진독상을 하남시에 준 것은 하남국제환경박람회로 인해 발생한 186억 원의 예산낭비를 지적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하남민주연대와 함께하는 시민행동, 참여연대 등 3개 시민단체가 주도해 하남시장을 상대로 제기한 납세자소송은 잘못 집행한 예산을 강제로 환수해야 한다는 행정소송이었다. 하남시가 박람회 부채상환을 위해 보조금으로 집행한 186억 원은 당시 하남시 예산의 10%가 넘는 거액이었다.
법원은 2001년 5월 하남시민들이 원고로서 자격이 없다며 각하결정을 내렸다지만 애초에 승소가 목표가 아니었다. 67개 시민단체는 납세자소송을 제기하고 2개월 뒤인 2000년 12월에는 납세자소송특별법안 제정을 국회에 청원한다. 이 법안은 이주영 한나라당 의원이 2001년 3월 큰 수정 없이 납세자소송법안으로 대표 발의하는 성과로 이어졌다.
특히 2002년 대통령 선거 당시 각 후보에게 입법촉구활동을 벌인 결과 2003년 2월 노무현 정부 인수위원회는 국정과제에 국민소송제 도입을 포함시켰고 그해 7월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회가 국민소송제 도입을 중점추진과제에 넣었다. 다양한 논의를 거쳐 2006년 5월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가 국민소송법 시안을 작성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법제화로 이어지지 못했다. 관료집단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이명박 정부에선 이에 대한 변변한 논의조차 없었다.
국민소송은 예산의 공공성을 높일 수 있는 효과적 수단
납세자소송 혹은 국민소송 제도는 국가기관 등이 위법하게 예산을 집행한 행위에 대해 국민이 직접 시정과 환수를 요구하는 공익소송을 말한다. 행정소송법상 민중소송 조항과 국가재정법 제100조에 근거를 두고 있다.
재정이란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수단이며 그렇게 돼야 한다. 그렇게 본다면 ‘예산이란 정부 관료들이 알아서 편성하는 것이고 국회는 대충 책상 몇 번 두드리다가 지역구 예산 받은 뒤 통과시켜 주는 것’이라는 자세가 설 자리는 어디에도 없다. 그런 점에서 국민소송은 예산의 공공성을 높일 수 있는 매우 효과적인 방안이 될 수 있다고 법제화를 준비하는 이들은 강조한다. 국민소송을 통한 공론화를 통해 ‘투명성’을 높이고, 예산낭비 감시를 통해 ‘주민참여’를 높일 수 있으며, 소송 결과와 예방 효과를 통해 ‘공공복리’에 이바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06년 시작된 주민소송제도는 실효성이 떨어져
그동안 지방자치단체 예산낭비에 대한 공익소송은 여러 차례 있었지만 2009년 지방의회 의정비 과다인상에 대한 부당이득 반환청구소송이 승소한 것 정도를 빼고는 실효성 있는 조치가 나온 적이 없다. 2006년 처음 도입된 주민소송제도는 지나치게 엄격한 제한조항 때문에 실효성이 떨어진다.
시민단체 문제 제기와 노무현 정부 당시 지방자치 관련 제도개혁 덕분에 주민소송제도가 도입됐다. 하지만 주민소송만으로는 부당한 예산집행을 막아내기에 한계가 너무 많다. 무엇보다 국가 차원에서 벌어지는 예산 문제는 대상 자체가 안된다. 강원 알펜시아, 인천 은하월미레일, 한강 세빛둥둥섬 등 인허가권자에 대해 업무상 배임 등 고발이 있었지만 대부분 무혐의 종결된 것도 별도 제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반증한다.
다시 한 번 국민소송제 제도화 노력이
주민소송 제도 개혁과 별개로 예산 낭비에 대한 직접 공익소송을 제기하자는 운동은 15년이 됐지만, 번번이 결실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번에는 다르다”는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 무엇보다 4대강 사업이나 지자체 재정악화 등 예산낭비에 대한 국민의 비판의식이 높다.
국회 상황도 변수다. 17대와 18대에 이어 19대에도 관련 법안을 제출했던 이상민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이 되었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야당 간사인 김현미 새정치민주연합 의원도 지난해부터 준비과정을 거쳐 조만간 법안을 제출할 계획이다.
국민소송제도는 국가와 지자체, 공공기관 등의 모든 행정 행위에 대한 외부감시와 통제 장치가 될 수 있는 데다 공익제보를 활성화하는 효과가 있다. 게다가 국민이 예산집행을 직접 평가하고 문제를 제기한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에도 부합하고 예산절감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국가재정법 제100조는 예산 불법지출에 대한 국민감시를 선언적으로나마 규정하고 있다.
국민소송제로 4대강 사업의 책임을 물어보자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에서는 조직적으로 주민소송 지원과 국민소송제 제도화 노력을 펼치고 있다. 조수진(변호사)은 “관료집단뿐 아니라 국가 예산을 통해 사사로이 이익을 취하려는 기득권 집단을 극복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말한다. 그는 국민소송제도 활성화를 위해서는 최초 소송 제기자에 대한 적절한 보상금 지급, 내부고발자 보호, 소송 관련 행정정보공개 의무화 등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2000년 소송 당시 실무자로 참여했던 나라살림연구소 소장 정창수는 국민소송제가 예산낭비를 사전에 예방하기 위한 중요한 해법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는 “이미 16대와 17대 국회에서 법안이 발의됐고, 참여정부 당시 인수위원회와 사개추위에서도 심도 있게 논의했던 사안”이라면서 “의지만 있다면 새 정부에서 충분히 제도화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환경운동연합 사무총장 염형철은 “4대강 사업을 보면, 법원·검찰·공정거래위원회 등 수많은 국가기관 중 한 곳만이라도 정상적으로 작동했다면 이렇게 될 수가 없었다”면서 “국기기관을 두고 굳이 국민소송이 필요하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box type=”info” head=”미국 ‘허위청구방지소송’을 주목하라”]
국민소송제와 관련해 가장 눈여겨봐야 할 사례는 미국에서 찾을 수 있다. 미국은 연방정부에 부당하게 손해를 입힌 자(사람이나 기관)를 대상으로 한 허위청구방지 소송이 이미 19세기부터 활발했다. 독일이나 프랑스, 영국에서도 단체소송, 월권소송, 시민소송 등 이름으로 비슷한 제도가 있다.
허위청구방지 소송은 주로 연방정부에 사기납품으로 손해를 끼친 기업이나 이를 공모한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손해배상 소송이다. 남북전쟁(1861~1865) 당시 군수품 납품업자들이 불량 군수품을 납품해 폭리를 취하자 링컨 대통령이 주도해 1863년 허위청구방지법(FCA)을 제정했기 때문에 ‘링컨법’이라고도 부른다.
이 법은 소송 남용이 사회문제가 되고 군수업자들의 로비로 규제가 약화하는 바람에 20세기 들어 한동안 유명무실해졌지만 1980년대 들어 군납비리가 증가하자 1986년 법 개정을 통해 다시 규제를 강화했다. 1987년부터 2011년까지 25년 동안 허위청구방지 소송 건수가 7,843건이나 됐고 국고로 환수한 예산액은 203억 달러(약 21조 원)이나 될 정도로 예산낭비와 부정부패를 막는 데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피고는 패소가 확정되면 정부에 입힌 손해의 3배에 해당하는 금액에 더해 부정청구 건당 최소 5,000달러에서 최대 1만 달러에 이르는 민사상 벌금을 추가한 금액을 지불해야 한다. 환수액 중 최소 10%에서 최대 35%는 소송을 제기한 사람에게 보상금으로 지급한다.
허위청구방지 소송은 ‘퀴탐(qui tam)소송’이라고도 하는데, 라틴어로 ‘자기 자신을 위해서 일뿐 아니라 왕을 위해서 소송을 제기하는 사람’이라는 라틴어에서 유래했다. 이 소송을 제기하는 사람 중에 공익제보자가 많아서 ‘공익제보자 소송’이라고 하는 별칭도 갖고 있다.
미국에선 연방정부와 주정부, 기초자치단체(카운티·타운)를 상대로 한 납세자소송도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이 제도는 1847년 뉴욕시장을 피고로 하는 납세자소송을 처음으로 인정하고 같은 해 매사추세츠 주정부가 지방자치단체의 예산남용에 대한 납세자소송을 인정하는 법을 제정한 게 뿌리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1968년 연방대법원 판결을 계기로 연방정부의 재정지출이 적법한지 다툴 수 있는 납세자소송도 가능하게 됐다.
미국 납세자소송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을 점령한 연합군사령부가 1948년 이 제도를 주민소송이란 이름으로 도입했고, 우리나라에서도 이 제도를 본뜬 제도를 시행 중이다. 하지만 미국·일본과 비교하면 소송 요건을 너무 까다롭게 규정하는 바람에 실효성이 극히 떨어진다는 비판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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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소송 제도도입운동 경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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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x type=”note”]이 글은 2010년 10월20일 미디어오늘에 기고한 예산낭비 데자뷔…문제는 ‘공적통제’와 2014년 7월 23일자 서울신문 기획기사 줄줄 새는 국가예산… 국민이 직접 환수할 수 있는 장치 만들자를 바탕으로 일부 수정 보완했음을 밝힙니다. (필자)[/bo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