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냐의 북라이딩] 한국 현대사를 쉽고 흥미진진하게 살펴볼 기회, 정사와 야사를 한꺼번에! ‘이해찬 회고록’ (⌚7분)

500쪽 넘는데, 술술 넘어가는 책은 드물다. 회고록이라는 장르 자체는 무척 재미있거나 지루할 수 있는데 이번에는 거의 한달음에 다 읽었다. 감동과 설렘, 짜릿함과 그리움, 놀라움이 이어졌다. 내가 정치인 회고록에 이렇게 설레발을 치게 될지 몰랐다. 하지만 한국 현대사를 이보다 쉽고 흥미진진하게 살펴볼 기회는 많지 않다. 대한민국 민주화 역사의 주역이 허심탄회하게 풀어주는 정사와 야사를 한꺼번에 다 본 기분이다. <이해찬 회고록>이다.

영화 같은 인생
일단 인생 자체가 영화다. 충남 청양 시골에서 인문계 진학도 생각하지 않던 소년이 서울대에 들어갔다. 그런데 사실 수학 수업에서 F 학점 둘, 쌍권총을 차고 좌절한 뒤 반수해서 사회학도로 변신했다. 그가 수학 포기자였던 덕분에, 아버님이 아들의 수학 학원비를 대주지 않은 덕분에 우리 현대사도 바뀌었다. 칠 남매 중 다섯째인 그에게 공부해라, 명문대 가라는 압박은 없었지만, 박정희 유신 이후 휴교령으로 집에 가자 “학생들이 데모도 하지 않고 다들 고향에 갔느냐”고 호통치신 아버지 덕분에 인생 경로가 바뀌었다. 어른이 된 이후 그의 인생은 민주화 운동과 역사를 함께 한다.
시절은 내내 잔인했다. 1971년 대선 서울에서 DJ는 120만 표를 얻었다. 박정희는 80만 표였다. 유력 정치인에 대한 탄압이 얼마나 가혹했는지 이제 우리는 알고 있다.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으로 DJ가 사형을 선고받을 때 이해찬은 10년 형을 받았다. 정작 그가 털어놓는 감옥에서의 수기는 잔잔한 웃음을 자아낸다.
법대로 따져서 2,200kcal 맞춘 수감자 식단 개선을 요구한다든지, 운동과 목욕을 쟁취해 내는 과정에서 그는 감옥 내 대장이었다. 언제 어디서든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었다. 그는 함께 목욕하면서 냉수마찰 하는 문익환 목사님께 감탄했고, 박용길 장로님과의 러브스토리를 수십 번 들어야 했다고 고백한다.

등장인물, 꽤 많은 대하드라마
촘촘하고 구체적인 그의 회고는 등장인물이 꽤 많은 대하드라마. 함께 했던 이름이 하나하나 나올 때마다 그 시절을 상상하게 한다. 무역회사에 취직했다가 불의에 반발해 그만둔 뒤, 번역과 출판으로 버티던 시절에는 뉴욕타임스 아사히신문 신간 소개를 탐독하면서 히트작들을 냈다. 이 회고록을 펴낸 돌베개 출판사가 그때 만들어졌다.
해직 기자들이 만든 ‘종각번역실’에서 정연주 등을 만나고, 신동아 기자 하다 쫓겨난 김언호가 한길사를 시작하는 걸 지켜봤고, 리영희 등과 대구탕집에서 술 한잔 나누었다. 조정래 선생 부인 김초혜 시인을 알게 된 사연 등 등장인물이 화려한데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민주화 투쟁 동지 중 처음 결혼한 유흥준의 이야기, 명절이면 세배하러 다니던 문익환 목사님, 백기완, 송건호 선생님과의 인연. 사실 그도 한겨레 기자가 될 뻔했다. 민주화 세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생생하다.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대통령까지 당대 리더의 여정에 전략가, 정책 참모, 공동 주역으로 민주 정부의 기둥이 된 인물이다. 그는 지난 50여 년을 두 개의 꿈을 위해 불살랐다. 1987년까지는 ‘대한민국의 민주화’의 꿈을 향해 달려왔고, 그 이후 삶은 ‘민주적 국민정당 건설’’이 목표였다. 그가 정치에 나선 이유였다.

회고록인데도 반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이해찬을 잘 몰랐나 보다. 회고록은 편파적이고 일방적일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해도 판단력과 실행력, 일잘러 면모에 반하지 않을 수 없다. 1982년 전두환의 유화정책으로 풀려났을 당시 다들 유학 가라고 할 때 그는 싸우기로 결심했다. 박정희 유신도 7년밖에 안 갔는데 전두환도 오래 못 갈 것으로 판단했단다. 역사의 진보를 믿는 통찰력이다. DJ가 1987년 패배 이후 도와달라고 했을 때 판단도 남다르다.
TK 기반 극우 보수 세력이 집권하고 PK 기반 보수가 제1야당인 상황에서 개혁적 야당이 없으면 급진주의로 갈 수밖에 없고, 특히 호남이 급진으로 가도 괜찮을지 반문했다. 그가 평민당을 살려야 한다고 결단하고 현실 정치로 뛰어드는 순간이다. 사람이 없어서 출마했다가 서른여섯에 국회의원이 된 이후 7번 당선됐는데 소속 정당 이름이 계속 바뀌었다는 것도 한국 역사다.
젊은 이해찬은 연설을 잘 못했다고 한다. 그의 일잘러 면모는 남들 하는 방식 대신 다른 길을 찾아내는 것에 있다. 연설 대신 소모임으로 고비를 돌파하고 관록 있는 민자당 김종인을 꺾고 끝내 당선됐다. 참고로 김종인은 훗날 더불어민주당 대표로서 2016년 총선에서 이해찬을 공천 배제했고, 이해찬은 무소속으로 세종시에서 당선됐다. 정치에 관해 관심과 호감이 많지 않은 독자도 정치에 빠져들게 만드는 인생이다.

보좌관, 해결사, 저승사자, 교육부장관 그리고 총리까지
그 시절 첫 보좌관 유시민과 벌이는 일들도 스펙타클하다:
“여러분. 안기부 예산 얼만 줄 아십니까? 우리나라 전체가 예산의 10%입니다. 그런데 이 한 장으로 예산을 심사하라고 합니다.”
안기부 특활비만 해도 2,000억 원에 달한다는 사실도 밝혀내는 과정이 박진감 넘친다.
그는 언제 어디서든, 해결사였다. 회고록에 따르면 언제나 아무도 안 가본 길을 갔다. 서울시 정무부시장 시절, 시정 계획서조차 없는 서울시 일하는 방식을 바꿨다. 일이 진척되지 않자, 아예 보고서 양식을 변경, 지난주에 한 일, 이번 주 하는 일. 다음 주 할 일을 챙겼다. 단순한 아이디어가 성과를 만들었다.
당시 그의 별명이 저승사자였다. 서울시가 보유한 현금 시재가 2조 원인데 금리 2%로 묶여 있는 걸 보고, 10% 해준다는 다른 은행 제안서를 받았다. 곡절 끝에 7%대로 이자를 올려 연간 800억을 아꼈다. 초선 시절 국회 예결위 하면서 공부 힘들게 한 덕분에 숨겨진 예산 찾는데 정통했다고 그는 자평했다.
교원 정년 단축하면서 예산 4조 원이 필요했는데, IMF 이후 금리가 낮아진 것을 활용, 국채 이자에서 숨어있는 5조 원을 찾아낸 이야기도 기막히다. 학교 건축비가 아파트보다 비싸다는 것이 이상해 담당자를 교체했더니 표준설계도 문제를 꺼냈단다. 그때까지는 학교 100개 지으면 100개의 설계도를 발주했다. 이후 도시형, 농촌형, 대형, 소형 표준설계로도 학교 건축 비용을 대폭 감축했다.

DJ가 교육개혁은 교육 쪽 인연 없는 이해찬이 좋겠다고 해서 교육부 장관이 된 사연도 극적이다. 1992년, 1997년 대선에 이어 DJ에게 이래저래 써먹기 좋은 사람이었다고 회고하지만, 일잘러를 내버려두는 리더가 어디 있나. 그는 교육부를 탐구하며 토요일 오후마다 정책 토론에 나섰다. 처음부터 잘됐을 리 없다.
그는 제대로 의견 낸 이를 승진시켜서 토론을 활성화했다. 이른바 ‘이해찬 세대’에 대한 해명도 살펴보자. 당시 모의고사 한번 보면 출제 업체에서 교장 50만 원, 주임 30만 원, 교사 20만 원 커미션을 줬다. 이해찬은 모의고사 횟수를 연 10회에서 4회로 확 줄였다. 커미션 시장이 흔들렸지만, 학력 저하 논쟁도 불붙었다. 수시 시스템은 그에게도 아쉬움을 남겼지만 지금도 이어지는 BK21 사업은 연구하는 대학의 토대가 됐다.
예나 지금이나 안기부와 검찰, 경찰이 한 짓들도 회고로 남겼다. <소셜 컨플릭트>, 사회주의를 비판한 우익 학자의 책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사회주의자라고 몰아붙인 검사가 나온다. 안기부 특활비 문제를 파고들 때, 부산국세청이 장인어른을 납치하다시피 데리고 새벽 4시에 그의 집으로 들이닥쳤다. MB 시절 그의 주변을 탈탈 털던 이 중 하나는 우병우 검사다.
다른 사건으로 구속된 친구에게 “이해찬에게 2억 줬다고 불어라” 괴롭히다가 말을 듣지 않자 1억 원, 5000, 나중에 500만 원 줬다고 압박한 사연은 코미디. 그의 뒤통수를 세게 친 원세훈 국정원장의 행태 등도 기록으로 남았다. 이해찬은 2018년부터 당정 협의 공무원 분위기 달라졌다는 점도 회고로 남겼다. 강남 3구, 특목고, SKY 중심의 보수적 엘리트 카르텔이 사회를 좌지우지하는 것을 우려했다. 한덕수와 최상목 같은 엘리트 계보가 어떻게 움직일지 지켜보지 않을 수 없다.

“못한 것은 또 하면 돼요”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
유신 이후 50여 년 내내 한국 현대사 중심에 있었던 만큼 온갖 비사도 넘쳐난다. 1997년 여름 YS가 각 당 정책위 의장을 청와대로 초청했을 당시 이해찬은 600억 달러는 되어야 하는 외환보유고가 500억 달러라며 우려를 전했다. 담당 관료는 괜찮다고 했지만 4개월 뒤 IMF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그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DJ에 대한 호감으로 도와주겠다고 먼저 나서 특사를 보냈다. 우리 정부는 그에게 30억 달러를 빌려달라고 했다. 사실 200억 달러 정도 빌려주려고 했던 특사는 머쓱했다.
우리가 서울시장을, 경기도지사를 직접 뽑도록 지방선거를 주장한 것도 이해찬이었다. 노태우 중간평가 놓고 DJ가 협상할 때 설득해 밀어붙였다. 조직이 살아야 정당이 살기 때문에 지방선거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1995년 서울시장 선거에서 지지율 5%인 조순 후보를 끝내 당선시킨 사연도 놀랍고, 그 조순이 훗날 민주당을 이끌고 민자당과 합당해 ‘한나라당’으로 작명한 장본인이란 것도 한국 정치의 아이러니다.

7선이나 이어갔지만 당내 알력은 그에게도 늘 힘들었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당 대표에서 물러났을 때는 오히려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가 “전쟁을 앞두고 장수를 바꾸는 것을 보고 승리를 확신했다”는 고백했다. 이해찬은 “2012년의 시대정신은 평화와 복지”였다며 박근혜의 경제민주화 구호를 높이 평가했다. 민주당 쪽에는 명료한 우리의 메시지가 없었다는 뼈아픈 회고다.
떠나신 이후에야 재발견해서 미안하다. 하지만 이제라도 알았다는 것이 중요하다.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선진국이 되기까지 헌신한 분들을 기억하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확인하는 여정이다. 우리는 실패할 수 없다.
“나는 정치도 민주화운동의 연장에서 시작했어요. 민주적 정당을 만드는 것이 목표였지. 아직 걱정스러운 바도 있지만 조금씩 발전해 온 것 같아요. 이제 DJ 가 하신 말씀을 조금 느껴요.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 운동을 하면서 실패는 해도 좌절하지는 않았잖아요. 정치를 하다 보면 목표들을 성취하지 못할 때가 있어요. 못한 것은 또 하면 돼요. 실패가 아니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