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존 베이너의 사퇴
하원의장 존 베이너가 “(2015년) 10월 말 사퇴하겠다”고 발표했다.[footnote]존 베이너는 2015년 9월 25일(미국 현지 시각 기준) “10월 말 사퇴하겠다”고 밝혔다.[/footnote]
베이너의 사퇴로 공화당은 당분간 혼란에 빠지겠지만, 그의 사퇴는 문제가 발생한 원인이 아니라 더 큰 문제로 인해 초래된 결과다. 우선 현재 출사표를 던진 공화당 대선 후보 중 상위 3명이 한 번도 선출직을 수행해본 적이 없다. 더불어 하원의원 수십 명이 선출된 지 5년이 되지 않았다. 이런 사실은 미국의 의회정치가 얼마나 격변하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존 베이너는 누구인가 왜 사퇴하는가
존 베이너(John Boehner)는 하원의장(House Speaker)이다. 물론 의장은 다수석을 차지한 당에서 나온다. 2010년 말, 공화당이 하원을 장악하면서 의장석을 빼앗아왔고, 민주당 낸시 펠로시(Nancy Pelosi)의 뒤를 이어 베이너가 의장이 되었다.
다소 딱딱해 보이는 인상과 달리 눈물이 많고[footnote]존 네이버는 공개석상에서 눈물을 자주 보였다. 미국에서는 아주 드문 일이다.[/footnote], 그러면서도 현실적인 타협의 정치를 할 줄 아는 인물이다. 무엇보다 하원의장이라는 역사적인 책무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의회라는 기관과 제도(institution)를 지켜내는 것을 사명으로 생각하는 책임감 있는 정치인이라는 게 중론이다.
문제는 공화당이 대격변을 겪고 있다는 데 있다. 공화당은 2009년에 시작된, 복지 축소를 주장하는 티파티(Tea Party)라는 보수운동세력과 그 뒤에 숨은 보수 재력가들의 도움으로 2010년 신참 의원을 다수 당선시켰고, 그 결과 다수당이 되었다. 그리고 그 풋내기 의원들이 캐스팅보트를 쥐었다.
따라서 중도에 해당하는 베이너는 처음부터 극렬보수인 티파티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힘없는 의장이었다. 워싱턴에서는 베이너가 가장 힘든 직책을 가지고 있다고들 한다. 민주당에서는 “우리와 딜(deal)을 하려면 공화당 표를 모아오라”고 하고, 공화당 우파들은 “민주당과 타협하면 우리는 표 안 준다”고 버티는 바람에 꼼짝 못 하는 상황에 자주 처했다. 당 원내세력의 ‘어른들’이 새파란 의원들에게 휘둘리는, 현대사에 유례를 찾기 힘든 혼란이다.
많은 이들이 그러한 변화를 미디어 환경의 변화에서 찾는다. 과거에는 ‘뒷방’에서 유권자의 요구와 다른 합의를 보는 것이 가능했지만, 이제는 사실상 24시간 뉴스가 돌아가고, SNS가 발달해서 의원들의 일거수일투족이 생생하게 중계되기 때문에 그런 ‘뒷거래’가 불가능하다.
특히 2010년에 당선된 공화당 신진세력들은 재정적 후원자들에게 맹세(pledge)를 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민주당과의 정치적 타협을 마치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것처럼 생각한다. 이쯤 되면 정치가 아니라 종교에 가깝다. 기독교세력이 이들을 후원하는 것이 반드시 우연은 아니다.
2013 연방정부 폐쇄
그런 대립이 극에 달했던 것이 2013년의 연방정부 폐쇄였다.
- 미디어오늘(박상현) – 최악의 순간을 대하는 오바마와 박근혜의 차이 (2015. 7. 3.)
- 슬로우뉴스(deulpul) – 한 방으로 끝내는 미국 연방정부 폐쇄 이해하기 (2013. 10. 2.)
- 슬로우뉴스(T.K.) – 미 연방정부 셧다운 일기: ‘오마바케어’에서 공화당 백기 투항까지 (2013. 10. 22.)
일명 ‘오바마케어’라고 불리는 의료보험법 개정안을 포기하지 않는다고 예산안 통과를 거부, 정부를 폐쇄했지만, 궁극적인 승자는 오바마였다. 그 극한의 대립을 겪으면서 베이너는 무능한 의장이라는 소리를 당 안팎에서 들어야 했다. 물론 억울한 일이다. 두 손이 묶여있었으니까.
그 극렬 세력(“the crazies”)이 이번에는 가족계획연맹(Planned Parenthood)에 대한 정부지원 중단을 요구하며 또 다시 정부 폐쇄를 위협하고 있다. 베이너는 2년 전의 일을 똑같이 반복하면서 협상력이 전혀 없이 양쪽에서 욕을 먹게 된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제 이 짓을 그만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베이너의 전격적인 사퇴 발표에 베이너를 ‘오바마와 타협한 배신자’ 정도로 취급하던 우파들은 환호성을 질렀고, 공화당 원내 지도부를 전부 새로 짜는 작업에 들어갔다.
베이너 사퇴가 대선에 미칠 영향
그렇다면 대선에 미칠 영향은 무엇인가? 중도파가 물러나고 극렬주의자들이 기세를 올리면 후보 중에서도 테드 크루즈가 탄력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크루즈는 원래부터 베이너와 대립각을 세우던 극렬주의자들의 대표다. 그러나 (예측은 금물이지만,) 트럼프가 경선에서 승리하기 힘들 듯, 크루즈가 경선에서 승리할 가능성은 낮다.
그럼 대선에서는 궁극적으로 누구에게 유리한 상황인가?
부시와 거의 똑같은 지지층을 가지고 있으면서 부시보다 토론 실력이나 대중 호소력이 높은, 그래서 지지율이 상승 중인 마르코 루비오가 장기적인 이득을 볼지 모른다. 루비오 역시 베이너와 대립각을 세운 인물이니, 베이너를 밀어낸 세력이 크루즈의 승리를 장담 못 할 경우 루비오에게 달려갈 가능성이 있다.
젭 부시가 약한 토론, 연설 실력으로 실망을 안겨주기 전까지 공화당 중추 세력의 사랑을 받았던 이유는 그가 크루즈나 미셸 바크먼, 랜드 폴처럼 극단적이고 종교적인 자세로 협상을 거부하는 정치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베이너까지 잃은 중도파는 그런 어른스런 후보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
마르코 루비오는 그런 기대에 부응할 후보일까?
2. 떠오르는 신성 마르코 루비오
흔히 하듯 대선주자들을 주식에 비유하면, 경선에 참여하는 건 상장(IPO)을 하는 것과 같다. 그렇게 봤을 때 젭 부시가 큰 액수로 상장했다가 대책 없이 하락하고 있는 대형주식이라면, 마르코 루비오(Marco Antonio Rubio, 1971년 5월 28일 ~ 현재)는 저평가된 액수로 상장해서 조금씩, 그러나 꾸준히 상승하고 있는 우량주다.
루비오가 이미지 구긴 사연
젊은 나이에 플로리다에서 상원의원이 되어 워싱턴에 진출한 마르코 루비오는 메이저리그(전국 무대) 데뷔 첫 경기에 실수해서 이미지를 구긴 일이 있다. 사연은 이렇다:
미국에서는 대통령의 연두교서(State of the Union Address)가 한 쪽에게만 일방적인 기회를 주는 불공정한 면이 있기 때문에[footnote]흔히 “불리 펄핏(bully pulpit; 공직의 권위)”이라고 부른다.[/footnote] 야당에 대통령 연설에 바로 뒤이어 방송으로 조목조목 반박할 시간을 준다(연설문은 미리 공개되기 때문에 반박을 준비할 수 있다).
그렇게 반박문을 발표하는 자리는 대통령의 대척점에 설 수 있다는 점에서 젊은 정치인에게는 중요한 데뷔 기회가 되고, 따라서 ‘뜨는 정치인’에게 그 기회를 허용할 때가 있다. 연설 능력이 뛰어나기로 소문난 루비오는 그렇게 2013년에 기회를 잡았는데, 그 자리에서 생방송 처음 해보는 사람처럼 실수를 저질렀다. (루비오 패러디 이미지에 빠지지 않는 음료수통을 물고 있는 모습은 여기에서 유래했다. – 편집자)
낭중지추, 재능은 결국 드러나는 법
물론 그렇게 이미지 구긴 일은 있었어도(다른 토론 때 봐도 입이 쉽게 마르는 체질 같다), 낭중지추[footnote]낭중지추(囊中之錐); 주머니 속의 송곳. 재능과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언젠가 드러나게 마련이라는 뜻.[/footnote])라는 사자성어처럼, 연설·토론 실력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번 경선과정에서 발견한 새로운 사실이 있다. 루비오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침착하고 진지하게 준비된 후보라는 것이다.
어느 기자는 “공화당에서 후보 시절의 오바마와 가장 닮은 후보”라는 (공화당 후보에게는) 칭찬 아닌 칭찬을 했다. 계획을 철저하게 세운 후에 선거운동 중에 지지율이 낮다고, 혹은 지지율이 오른다고 부화뇌동하지 않고 처음 계획을 꾸준히 이행한다는 뜻이다.
연설을 잘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 해야 할 말을 정확하게 해서 청중의 고개를 끄덕이게 하고,
-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피해서 쓸 데 없는 오해나 공격을 피하고,
- 이야기를 하면서 에너지를 쌓다가 뒷부분에서 청중들의 가슴을 찌르는 한 마디로 감동을 선사해야 한다.
감동마저 안겨주는 멋진 토론 솜씨
루비오는 주어진 1분 내에 이런 명문을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이다.
히스패닉 유입을 싫어하는 공화당 상원의원으로서 “미국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이 선거운동 중에 스페인어로 연설해서 되겠느냐”는 공격은 히스패닉인 루비오로서는 어떻게 대응해도 지는 게임(lose-lose)이다. 그걸 빠져나가는 루비오의 솜씨를 보라.
게다가 마지막에 공화당 지지자들이 사랑하는 미국의 가치를 자신에게 가르쳐 준 할아버지가 그 모든 이야기를 스페인어로 했다고 이야기하는 루비오는 청중에게 ‘아!’하는 감동을 준다. 그리고 공화당이 사랑하는 가치를 강조하면서 끝맺는다.
동영상의 마지막 1초도 놓치지 말고 봐야 한다. 나머지 후보들, 심지어 그런 공격을 한 트럼프까지, 자신들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다. 다른 후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라. 가장 민감한 이슈에 관해 토론하면서 자신과 경쟁하는 후보들이 생방송에서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는 건, 그야말로 재능이다.
루비오 vs.(&) 부시
루비오와 지지층이 겹치는 건 젭 부시다. 그런 부시가 꾸준히 지지율을 키우고 있는 루비오를 공격하지 않는다면 그건 선거운동을 포기한 거다. 그래서 이제 서서히 루비오를 향한 포문을 열고 있다. 하지만 젭 부시는 루비오가 항상 존경하는 자신의 멘토라고 찬양하던 인물이다.
루비오는 부시의 공격에 “선거에서는 진심이 아니라도 그런 공격을 하게 된다”며 어른스럽게 대답하고 넘어갔다. 물론 틀린 말이 아니다. 바로 위의 동영상에서 마지막 5초쯤부터 젭 부시의 표정을 보라. 마치 수제자를 보는 듯한 감탄과 애정이 가득 담겨있다(부시도 스페인어로 연설하는 사람이라는 사실도 고려해야 한다.)
자신이 큰 그릇임을 입증하면서, 동시에 부시가 탈락할 경우 자신에게 돌아오게 될 현재의 부시 지지자들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려는 자세다. 힐러리가 샌더스를 강하게 공격하지 못하는 이유와 다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