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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아래 첫 학교, 태기분교 이야기 

  1. 세월은 추억을 남기고, 학교는 사랑을 남기다
  2. 추억은 따뜻하고, 기억은 촉촉하다
  3. “태기산에 가면 밥도 공짜, 집도 공짜”
  4. 태기산 화전 마을의 창세기
  5. 태기리 화전마을의 주택 변천사
  6. 천 년 원시림을 불태우는 거대 화전(火田)의 불길
  7. 낯설고 신기한 강원도의 ‘제5 계절’
  8. 궁즉통의 묘수, ‘덤벙짠지’를 아시나요?
  9. 태기산 ‘약초 한우’ 목장의 추억
  10. ‘하늘 아래 첫 학교’ 꿈은 이루어진다
  11. ‘처녀 선생님’은 길 잃은 선녀가 아니었어요
  12. 학교의 힘, 정식 학교의 힘
  13. ‘시작이 반’이라는 만고의 진실
  14. 학교는 추억의 보물창고
  15. 태기리 1966, 그해 겨울은 따뜻하였네
  16. ‘하늘 아래 첫 학교’ 서울까지 대서특필
  17. 희미한 ‘옛 학교’의 그림자
  18. 삶의 고통을 어루만진 세월의 선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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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맞아? 옥수수도 안 되고, 고랭지 배추도 안 되고

태기산 산마루의 화전(火田) 불길은 이후로도 몇 해 동안 계속 피어올랐습니다. 한편에서는 이미 잿더미가 되어버린 골짜기에 새로 밭을 일구기 시작하였습니다. 초목에 물이 오르기 시작하는 봄부터 첫눈이 오는 초겨울 사이에는 골짜기에 불을 붙이기가 힘들어지므로, 사람들은 대부분 계단밭 개간에 투입되었지요. 위에서부터 아래로 계단식 비탈밭이 시나브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먼저 개간한 밭부터 작물을 심기 시작하였습니다. 벌써 두세 해 동안 배급 밀가루를 주식으로 견뎌온 주민들은 밭이 내어줄 싱싱한 농산물을 잔뜩 기대하였지요. “하도 밀가루만 먹으니까, 나중에는 수제비에서 ‘밀가루 비린내’가 나더라고.”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이를 악물어가며 견디어낸 주민들이 희망에 부풀어서 밭에 작물을 심었건만, 태기산은 결코 쉽게 곁을 내주는 산이 아니었습니다.

전쟁 뒤 원조의 대명사가 된 밀가루
전쟁 뒤 원조의 대명사 밀가루

강원도의 상징 농산물로 꼽히는 옥수수부터 엉망이었습니다. 감자는 토양에 따라, 고도에 따라 되다말다 하는 형편이었습니다. 해발 1200m 전후의 산마루 고원에 자리 잡은 태기리는 바람이 심하였고, 안개랑 비도 오락가락, 기후마저 녹녹치 않았습니다. 10월 중순이면 첫눈이 내리고, 11월 초부터는 내린 눈이 얼기 시작합니다. 4월이 되어야 땅이 녹아서 삽날을 받아주었고 5월 초부터 간신히 농사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한여름에도 날이 궂으면 추워서 바지저고리를 입고 다녀야 했고, 며칠 연이어 비라도 쏟으면 방이 눅어서 불을 때야 할 정도였습니다.

안개의 지존, 태기산
안개의 지존, 태기산

한랭한 기후라서 제격이라던, 대관령이며 진부령이며 저 유명한 ‘강원도 고랭지 배추’도 무슨 조건이 어긋났는지 태기산에서는 잘 자라지 않았습니다. 배추는 영 속이 여물지 않아 김장용 수확을 포기하였고, 그나마 볕이 좋은 골짜기에서 겨울을 넘긴 배추들 일부만이 봄동처럼 초봄 겉절이로 쓰였다 합니다. 고추며 가지며 고구마 등 흔한 밭작물들도 다들 몸살을 앓았습니다. 콩을 심어도 열매가 맺히지 않았습니다. 주민들 대부분이 메주콩을 살 돈도 어려웠거니와, 산 너머너머 동네의 장터에서부터 콩을 지게에 짊어지고 한나절을 걸어서 귀가하는 산길도 참 부질없는 고생이었지요. 그러다 보니 태기리 사람들 상당수가 장 담그는 일도, 두부를 만드는 일도 포기한 채 살았더랬습니다.

다만 하나, 어찌된 영문인지 무 농사만큼은 소문난 풍년이어서 ‘태기산 무’하면 인근에서는 제법 유명세를 떨칠 정도였습니다. 길이도 굵기도 어른 다리만 하였다 하니, 어쩌면 ‘무 다리’라는 속된 표현의 출처가 태기산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가난의 선물, 붕시레미와 버무래기

된장·고추장도 마음껏 먹지 못하는 태기리의 현실. 당시 주민들이 궁색한 먹거리에 얼마나 진저리를 쳤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안간힘의 레시피가 몇 가지 있습니다.

제일 흔한 것이 수제비였습니다. 초년에는 이렇다 할 반찬도 없어서, 국물에 맨 수제비만 익혀 먹는 집이 태반이었다 합니다. 수제비 국물에 감자라도 몇 조각 섞어 띄운 건 몇 해 뒤의 모습이고요. 고추·마늘·파 따위의 양념거리도 언감생심(焉敢生心), 간신히 소금으로 간을 맞추는 정도였습니다. 간장도 구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참다못해 간장 흉내를 냈다는 레시피가 있습니다. 당시 유행했던 군것질거리 중에 캐러멜이 있었지요. 소금물을 끓이다가 까만 캐러멜을 넣으면 빛깔도 거무죽죽해지고 국물도 조금 걸쭉해져서 진간장 비슷한 맛이 되었다 합니다.

위아래 몇 집이 모여서 손이 조금 많이 가는 칼국수를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봄이면 수제비·칼국수에 이런저런 나물이 함께 끓었고, 여름과 가을에는 노루궁뎅이버섯이며 참싸리버섯·흐르레기버섯(목이버섯), 잔대와 더덕 같은 귀한 식재료들이 아낌없이 가마솥에 다이빙을 하였습니다. 양념도 소스도 없었으니, 졸이거나 굽거나 어찌 조리해볼 방법 자체가 난망하였던 것입니다. 겨울에는 나무 속껍질을 벗겨 수제비죽을 쑤기도 하였고요. 올무에 걸린 토끼들이 단백질을 보충해주는 행운도 드물지 않게 있었다 합니다.

노루궁뎅이버섯, 싸리버섯, 흐르레기버섯 (위부터)
여름과 가을, 수제비와 칼국수에 넣어 먹었던 노루궁뎅이버섯, 싸리버섯, 흐르레기버섯 (위부터)

해가 지나자 밀가루를 비축했다가 장에서 간장·고추장·된장도 구하고, 감자·메밀·옥수수 따위 부식거리로 바꿔다 먹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수제비국에 옥수수 가루를 넣으면 ‘옥수수죽범벅’이 되었습니다. 표준어에는 이름이 보이지 않는 ‘붕시레미’라는 음식도 있었습니다. 감자를 숟가락으로 얇게 긁어서 수제비와 함께 끓이다가 적당히 익어갈 즈음에 건더기를 건져내어 나무주걱으로 눌러 다진 뒤 그걸 다시 자작하게 졸이는 조리법입니다.

‘감자버무래기(감자버무리)’도 태기리의 인기 메뉴였습니다. 버무리는 ‘여러 가지를 한데 뒤섞어 만든 음식’을 말하는데, 감자버무리는 팥과 감자를 삶아 함께 찧어서 버무리는 것이 가장 흔한 방식입니다. 한데 태기리에서는 팥이 귀하였으니, 밀가루와 옥수수가루가 팥을 대신하였지요. 밀가루와 옥수수가루, 그리고 으깬 감자를 버무려서 밥솥에 얹어 쪄내면 허기를 속일 만한 훌륭한 간식거리가 되었습니다.

■ ‘도토리찐빵’의 위험한 진실

끼니 자체가 보릿고개 같았으니, 아이들 간식은 애당초 투덜거릴 계제가 못되었지요. 그래도 그 틈바구니에서 어머니들은 아이들 먹일 꾀를 짜냈습니다. 밀가루와 함께 나눠준 배급품 가운데 통조림이 몇 가지 있었습니다. 정어리와 미트볼 등이 산동네까지 도착하는 경우는 가뭄에 콩 나듯 하였고, 그나마 가루분유 깡통은 제법 자주 얼굴을 보였습니다. 이게 의외로 훌륭한 간식이 되었습니다.

“양재기에 물을 끓여 가루분유를 붓고 저어주면 익으면서 젤리처럼 굳는데, 그걸 칼로 잘라서 말리면 그럴싸한 과자가 돼요.”

술빵도 아이들이 좋아하는 인기 간식이었지요. 술빵은 밀가루 반죽에 빵을 만들기 위해 부풀리는 ‘이스트’ 효모를 넣는 대신에 막걸리를 이용합니다. 그래서 빵이 익으면 술 냄새가 그윽하게 퍼져서 이름도 ‘술빵’이에요. 물론 빵을 익히는 동안 알코올은 다 날아가서 아이들 먹거리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찐빵 이야기도 재미있습니다. 태기리에는 워낙 먹거리가 부실하다 보니 앙꼬로 넣을 식재료가 마땅치 않았던 거예요. 그래서 탄생한 것이 ‘도토리찐빵’입니다.

도토리묵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도토리묵을 만들기 위해 먼저 도토리가루를 만듭니다. 도토리에는 독이 있어서, 식용으로 바꾸려면 독을 우려내야 합니다. 그래서 햇볕에 잘 말린 도토리의 껍질을 벗기고 깨끗이 손질하여 3~4일 동안 큰 함지박에 담아 물에 불려줍니다. 흐르는 물이 제일 좋고, 아니면 아침저녁으로 함지박을 휘저어 우러나온 갈색 물을 버리고 깨끗한 물로 바꿔줍니다.

나흘 정도 갈색 물을 뽑아내주면 수분이 스며들어 도토리가 두 배 정도 통통해집니다. 그걸 곱게 갈아서 면포에 담아 함지박 물에 담가두면, 하룻밤 지나 말갛게 앙금이 가라앉습니다. 그 도토리 앙금을 하루 정도 말렸다가, 뭉쳐진 덩어리를 다시 잘게 부수면 도토리가루가 되어 장기 보존이 가능하게 됩니다. 그걸 필요할 때마다 꺼내어 물에 개어서 묵을 만드는 것이 도토리묵 제조법입니다.

그런데 각박한 태기리의 일상에서 저렇게 손이 많이 가는 도토리묵을 해먹을 여유는 턱도 없었겠지요. 그래서 함지박에 며칠을 우려서 독을 빼낸 도토리를 통째로 아몬드처럼 그냥 찐빵 속에 넣었다고 합니다. 소나무 둥치를 구해다가 속을 파서 절구를 만들어 찧은 도토리를 앙꼬로 쓰기도 했고요.

그런데 이 도토리가 대형 사고를 칩니다. 먹거리가 워낙 부족하다 보니, 주민들은 너나없이 도토리를 많이 수확했습니다. 도토리의 별명이 ‘산곡(山穀: 산에서 나는 곡식)’이라 하여 조선시대부터 흉년의 대표적인 구황(救荒) 식품으로 불리기도 했구요. 그런데 아이들이 맛있게 먹은 기억만 믿고, 독을 우려내는 과정을 모른 채 배가 터지도록 도토리를 먹은 것입니다.

“익혀 먹으면 되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구워 먹기도 하고, 가마솥에 몇 바가지씩 쪄서 먹기도 했는데…. 지금도 도토리묵이라면 아예 쳐다보지도 않아요”(최춘옥).

도토리, '산속의 곡식'이라고 하여 '산곡'이라고 불린다.
도토리, ‘산속의 곡식’이라고 하여 ‘산곡’이라 부른다.

■ ‘무방비 우주’에 방치된 아이들

한영자 씨는 버섯을 잘못 먹고 죽을 고비를 넘긴 케이스입니다. 10살 무렵의 일이었어요. 단추버섯 혹은 버튼버섯이라 부르는 버섯은 식용입니다. 태기리에서는 ‘오버단추버섯’이라고 불렀습니다.

“물 뜨러 가는데 나무 등걸에 버섯이 보이는 거예요. 딱 보니 오버단추버섯이라. 냉큼 따먹었지요. 그리고 돌아와서 물동이에 물을 채워놓고 쉬어야지, 하던 참인데 갑자기 온몸이 따끔거리는 거예요. 하도 가렵고 따가워서 마당에서 데굴데굴 굴렀어요. 어째 색이 조금 붉다 했어요.”

비슷하게 생긴 독버섯이었던 거지요. 하필 어머니가 배급 타러 산 넘어 간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답니다. 한참동안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을 치고 있는데 어머니가 돌아오셨습니다. 부랴부랴 ‘야매 의사’ 아저씨를 불러서 양귀비 주사를 한 대 맞고나서야 발작이 멎었다고 합니다.

꿀을 따먹겠다고 벌에 쏘여가면서 벌집을 파헤친 아이도 있었습니다.

“벌이 윙윙 거리길래 아, 저 벌집을 파내면 꿀을 먹을 수 있겠구나, 하고 오소리처럼 땅을 파들어가는데, 여기저기 벌 쏘인 자리는 퉁퉁 붓고…, 죽는 줄 알았지요. 벌집에 꿀도 없고……”(최춘수).

말벌의 일종인 땅벌이었습니다. ‘땡삐’ ‘오빠시’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독이 독한 종류로 꼽힙니다. 꿀을 먹지 않고 나무 수액이나 과일 즙을 먹으니, 당연히 집에 꿀을 모으지도 않습니다. 목숨을 건 헛고생이었던 거죠.

야생 열매도 식용이라고 해서 마냥 안전한 것이 아니거든요. 누구는 다래를 너무 많이 따먹고는 평생 잊지 못할 설사병을 경험하였고, 누구는 머루를 과식했다가 혓바닥이 갈라져서 고생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꽈리를 많이 따먹었다가 속에서 신물이 올라오고 배탈이 나서 며칠을 몸져누웠던 누구도 있었고요.

태기리 아이들에게 태기산은 에덴동산이자 동시에 맹수 우글거리는 세렝게티 초원, 혹은 독충이 득실거리는 열대우림 밀림과도 같았습니다. 마을을 조금만 벗어나도 넝쿨 우거진 무성한 수풀 속에 산딸기와 으름, 돌배와 개복숭아, 버찌와 오디 등 먹을 것이 넘쳐나는 식당이자 놀이터인 동시에 독버섯과 독과일, 독사와 늑대·멧돼지가 출몰하는 거친 야생이었으니까요.

그렇지만 어른들은 모두 제 생계에 쫓겨 아이들 챙길 여유가 없었습니다. 나무에 깔려서, 골짜기 아래로 발을 헛디뎌서, 제무시 산판 차가 뒤집혀서…, 태기리는 몇 달에 한 번씩 사망·중상 사고가 빈번히 발생하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생존전쟁의 최전선이었습니다. 아이들에게는 교육은 그만두고라도, 일상의 안전사고조차도 챙겨주지 못하는 거친 ‘무방비 우주’였던 것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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