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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아래 첫 학교, 태기분교 이야기 

  1. 세월은 추억을 남기고, 학교는 사랑을 남기다
  2. 추억은 따뜻하고, 기억은 촉촉하다
  3. “태기산에 가면 밥도 공짜, 집도 공짜”
  4. 태기산 화전 마을의 창세기
  5. 태기리 화전마을의 주택 변천사
  6. 천 년 원시림을 불태우는 거대 화전(火田)의 불길
  7. 낯설고 신기한 강원도의 ‘제5 계절’
  8. 궁즉통의 묘수, ‘덤벙짠지’를 아시나요?
  9. 태기산 ‘약초 한우’ 목장의 추억
  10. ‘하늘 아래 첫 학교’ 꿈은 이루어진다
  11. ‘처녀 선생님’은 길 잃은 선녀가 아니었어요
  12. 학교의 힘, 정식 학교의 힘
  13. ‘시작이 반’이라는 만고의 진실
  14. 학교는 추억의 보물창고
  15. 태기리 1966, 그해 겨울은 따뜻하였네
  16. ‘하늘 아래 첫 학교’ 서울까지 대서특필
  17. 희미한 ‘옛 학교’의 그림자
  18. 삶의 고통을 어루만진 세월의 선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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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잔 다르크 같은 ‘처녀 선생님’ 정체

참 신기합니다. 스물네 살 처녀가 1965년 9월에 밑도 끝도 없이 태기산 산마루 화전마을을 찾아가 아이들 현황을 살펴보고, 오직 ‘학교를 세워야 한다’는 일념으로 속칭 ‘맨땅에 헤딩’하듯 맨주먹으로 시작한 일이 정식으로 교육청의 학교 인가를 얻고, 불과 1년 반 만에 건평 100평, 교실 4개짜리 번듯한 학교 건물까지 세우고, 마침내 1968년 6월 10일 정식으로 개교식까지 치르는 기적을 일으켰으니 말입니다.

도대체 무슨 신통력이 있는 걸까요. 정말 옥황상제가 잔 다르크 대신 비밀리에 보낸 특무비서라도 되는 걸까요. 혹은 시시콜콜 뒤를 도와주는 가문과 혈연의 영향력이 막강했던 것일까요. 아니면 주위에 고비마다 제갈공명처럼 탁월한 지혜로 막힌 물꼬를 터주는 귀인(貴人)이라도 있었던 것일까요.

아니었습니다. 이명순(李明順) 선생님은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에 해당합니다. 부지런한 농부 아버지의 뚝심을 이어받았다고나 할까요. 부친은 일제 강점기에 척박한 함경도 고향을 떠나 강원도 평창으로 이주하여 평생 땅을 일군 농사꾼이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으로 유명한 바로 그 봉평입니다. 이명순 선생님은 봉평에서 광복 몇 해 전에 1남3녀 가운데 셋째로 태어납니다.

이명순 선생님의 젊은 시절 모습
이명순 선생님의 젊은 시절 모습

‘보릿고개’라는 말이 맹위를 떨치는 시절이었으나, 고향의 살림살이는 “밥걱정은 안 할 정도”의 여건이었다 합니다. 게다가 당시는 남존여비 차별이 극심하여 여자아이에게는 아예 학교 문턱도 밟아보지 못하게 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한글로 자기 이름을 쓰지 못하는 할머니들이 가슴을 치는 한 맺힌 사연이 바로 저 남존여비로 말미암은 까닭입니다. 심지어 부잣집에서도 여자아이의 공부를 막는 경우가 허다하였습니다. 어쩌면 이명순 선생님(이하 존칭 생략)의 ‘학교 설립’ 의지는 저런 맹목적인 시대 분위기에 대한 반작용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백성을 가르치는 집’ 육민관(育民館)과의 인연

다행히 부친은 여자아이를 차별하지 않는 열린 분이었습니다. 이명순 어린이는 공부도 잘 해서 몇 차례 월반(越班)[footnote]학생의 성적이 뛰어나 상급 학년으로 건너뛰어 진급하는 일. 학습 능력이 뛰어난 학생은 교과 과정을 단축할 수 있게 만든 제도이다.[/footnote]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지러운 세상이 다시 발목을 잡았습니다.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의 여파로 학교 건물이 박살이 났고, 부득이 학교는 문을 닫았습니다. 부친은 전쟁의 발톱을 피해 평창군 봉평에서 횡성군 둔내면 화동리, 태기산 아래로 이사를 합니다.

가뜩이나 여자의 학업을 가로막는 답답한 시대, 이대로 공부의 연이 끝나는가 하였는데, 그래도 다행히 둔내에 있는 초등학교에서 전쟁 기간 동안의 세월을 월반으로 보상을 해주어(실제 학업 기간 2년 반 만에) 국민학교 졸업 자격을 인정받고, 원주여중으로 진학을 합니다. 그리고 여중 2년을 마치자마자, ‘특대생(特待生)’[footnote] 학업과 품행이 우수하여 수업료 면제 따위의 특전을 받는 학생.[/footnote]으로 추천을 받아 원주에 있는 육민관고등학교로 월반 입학을 합니다.

육민관고등학교
육민관고등학교

육민관고등학교는 이명순 학생에게 세상을 대하는 새로운 방식에 대하여 눈을 뜨게 해줍니다. ‘육민관(育民館)’은 직역하면 ‘백성을 가르치는 집’이라는 뜻으로, 일곡(逸谷) 홍범희(洪範憙)[footnote]1917년 경북 선산 출생으로, 서울 보성전문학교(지금의 고려대)와 일본 주오대학(中央大學) 법학부 졸업. 1946년 3월 15일 사학재단 ‘육민관’ 설립, 제헌 국회의원·내무부차관·체신협회 부회장 역임. 국민훈장 무궁화장 수훈.[/footnote] 선생이 1946년 설립한 강원도 최초의 사학재단입니다. 1949년에 육민관중학교, 1952년에 육민관고등학교를 개교하였고, 한국전쟁이 끝나면서 ‘국제연합 한국재건단(UNKRA)’의 원조와 제1야전군사령부의 도움을 받아 새로 학교 건물을 신축합니다.

이 건물은 지붕을 씌운 현관 포치(Porch)[footnote]비바람을 막을 수 있도록 건물 본체 앞으로 돌출하여 지붕을 씌운 현관. 차를 대는 곳이자 방문객이 집주인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공간이다.[/footnote]를 정면 파사드(Facade)[footnote]건축물의 메인 출입구가 있는 전면부를 일컫는다. 건축의 ‘얼굴’로서 건물 전체의 인상에 강한 영향을 끼친다.[/footnote]에 돌출시켜 배치하고, 양 옆으로 측면 건물을 각각 16° 정도씩 뒤쪽으로 꺾어서 전체 외양이 마치 항공기의 날개 형태를 방불토록 설계를 하였습니다. 이 같은 독특한 평면과 고유한 탄생 사연을 인정받아, 2017년 12월 5일 대한민국 등록문화재 제702호로 지정되었지요.

육민관고등학교 창육관 (등록문화재 제702호)
육민관고등학교 창육관 (등록문화재 제702호)
독특하게 돌출한 창육관 포치
독특하게 돌출한 창육관 포치

당시 전후 복구사업은 전 국민의 숙원이어서, 육민관의 학생들도 시멘트며 목재 등 건축자재들을 나르는 봉사활동을 했다 합니다. “달밤에 세숫대야며 양동이로 개울에서 돌을 주워다가 운동장에 옮겨놓고 그랬어. 나중에 표창장도 받고…….” 어쩌면 이때의 기억이 훗날 태기산 학교 설립의 에너지원이 된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러고 보면 육민관과 이명순의 인연은 만날 수밖에 없는, 보이지 않는 필연의 끈으로 이어진 운명적 관계가 아닌가 싶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새로 개교를 하였으니 적극적으로 우수 학생을 모집해야 하는 학교와, 전쟁 통에 아슬아슬하게 학업의 길이 끊길 뻔하였다가 기적처럼 특대생에 뽑힌 학생. 그런 인연 덕분이었을까요. 교내 생활관 실장을 맡기도 했던, 매사에 적극적인 이명순과 그런 모범생을 뿌듯해 하는 설립자 홍범희 교장선생님의 애정이 훗날 태기산으로 이어질 정도로 도탑고 훈훈합니다.

졸업을 앞두고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원주 어느 단체의 사무직 직원 자리를 추천을 받는데, 웬일인지 이명순은 그 자리를 사양합니다. 게다가 사양의 변이 조금 묘하고 엉뚱합니다.

“뭔가 의미 있고, 보람찬 봉사 일을 하고 싶어서…….”

■ 뼛속까지 ‘상록수정신’의 후예

‘시대정신’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어느 시대든 풀어야만 하는 과제와 의미가 있는 법이고, 그러기 위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적절한 사상과 철학이 등장하기 마련입니다. 그 같은 기운들이 모여서 대세를 이루는 커다란 에너지의 흐름이자 활동들. ‘대항해시대’로 불리는 16~18세기 유럽에는 ‘도전정신’이 팽배하였고, 산업혁명의 폭발적 생산에 따른 빈부격차 문제에 직면한 19세기 영국에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주창하는 ‘공리주의’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공리주의가 과도하게 적용되면서 ‘다수의 횡포’가 문제가 되자 20세기는 ‘개개 인권의 소중함’을 설파하는 ‘실존주의’가 떠올랐고요.

정조 때의 핵심 화두는 ‘서얼(庶孼)[footnote]서자 얼자를 아울러 이르는 말. 서자(庶子)는 양반 남자와 양민 여자 사이에서, 얼자(孼子)는 양반과 천민 여성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이른다.[/footnote] 혁파’였고, 흥선대원군 때는 ‘척사(斥邪)’[footnote]글자 자체로는 ‘사악한 것을 물리치다’라는 뜻으로, 고종 때 빈번하게 국경과 해안선을 침범해오는 러시아·영국·프랑스 등 서양 오랑캐를 배격하고 물리치라는 의미이다.[/footnote]와 ‘쇄국(鎖國)’[footnote]다른 나라와의 통상과 교역을 금지함.[/footnote]이었으며, 일제 강점기의 시대정신은 ‘독립운동’과 ‘상록수운동’이었죠. 국내에서 시작된 ‘무력 독립항쟁’의 불꽃은 압록·두만강을 건너 만주와 중국·러시아 등지에서 뜨겁게 피어올랐고, 국내에서는 심훈의 소설 「상록수(常綠樹)」로 인해 촉발된 계몽주의가 전근대적인 조선을 일깨우자며 전국으로 퍼져나갔지요. 그렇게 뿌리를 내린 ‘상록수정신’은 한국전쟁 이후의 복구사업과 70년대 농어촌 ‘새마을운동’으로 면면히 이어지게 됩니다.

이명순 학생이 육민관에서 배운 가장 두드러진 개념이 바로 ‘상록수정신’과 궤를 같이하는 ‘봉사활동’이었습니다. 어찌된 연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유난히 ‘4H구락부(俱樂部)’[footnote]‘클럽’의 일본식 음역어. 초기 ‘4H클럽’의 원래 이름.[/footnote]며 ‘적십자운동’ 혹은 ‘야학’ 같은 활동에 마음이 끌리더라는 것입니다. 그런 활동이 어찌나 좋았던지 여동생 이한자까지 육민관고등학교로 진학하도록 설득을 합니다. 그리고는 둘이서 함께 자취를 하면서 새벽에 신문을 돌리고 낮에는 학교생활을 합니다.

“신문 돌리는 게 생활비 벌자는 궁여지책이었지만, 그보다도 더 좋았던 것은, 신문을 읽으면서 세상을 좀 더 큰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는 거였어요.”

신문

이때부터 신문 읽는 것이 평소 습관이 됩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신문배달과 과외 등을 하면서 장래에 대하여 여러 가지 모색을 합니다. 한동안은 ‘4H구락부’ 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동각(同覺)’이라는 일종의 농촌계몽운동을 알게 됩니다. ‘동각(同覺)’은 ‘같은 생각’이라는 뜻으로, 주로 강원도 지역을 중심으로 활발했던 ‘상록수운동’의 후예쯤에 해당합니다. 평소 진취적인 스타일의 양학(洋學)도 가르치고, 특히 명사를 초대하여 강연을 개최하는 방식으로 정신적인 측면을 강조한 것이 특징이었다고 합니다.

■ 아버지 육성으로 처음 들어본 함경도 쌍욕

그러다가 1965년 가을 우연히 신문을 통해 태기산 산등성이를 중심으로 펼쳐진 ‘강원도 화전민 정착사업’ 뉴스를 읽게 되었습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다양한 ‘5개년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여 언론을 통해 대대적으로 홍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개발계획 가운데 하나가 바로 횡성 태기산의 ‘강원도 화전민 정착사업’이었던 것이지요.

게다가 신기하게도 부친의 집이 태기산 바로 아래, 횡성군 둔내면 화동리였습니다. 봉평과 둔내는 평창군과 횡성군의 경계를 나누는 면(面)으로, 평창군의 가장 서쪽 접경이 봉평이요 횡성군의 가장 동쪽 접경이 둔내이며, 바로 그 사이에 태기산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어릴 적부터 봄이면 이웃 언니들과 나물을 캐러 오르내리던 산이 바로 태기산이었으니, 이명순의 눈에 태기산 뉴스가 얼마나 반갑고 신기하였을까요.

태기산에서 내려다본 화동리
태기산에서 내려다본 화동리

바로 채비를 하고 태기산 아래 화동리 집으로 달려갑니다. 오랜만에 향수도 달랠 겸 며칠 묵으며 동네 사람들에게 태기산 상황을 귀동냥으로 짚어보고는, 새로 먼동이 밝는 대로 태기산에 올랐던 것입니다. 그렇게 아이들 현황을 살펴보고 주민들과 학교 이야기를 마치고 돌아오자, 이번에는 집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부친이 노발대발 폭발을 하신 것이었습니다.

“소 팔고 논 팔아서 공부시켜주니까, 가라는 시집은 안 가고, 무슨 학교 타령이냐며, 함경도 쌍욕을 마구 퍼부으시는 거라. 어휴, 북한 욕이 좀 걸걸해. 아주 그런 난리가 없었어요. 그래도 세상에 자식 이기는 부모가 어디 있나요. 결국 나중에 학교 운영하면서 태기리 마을에 방 얻어 지낼 때는 아이들 먹이라며 쌀가마니도 보내주시고, 미역이며 고기 등속을 챙겨 보내며 몸 상할까 걱정도 해주시고 그랬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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