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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는 여전히 한국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대륙’이다. 그 이미지도 여전히 세렝게티 초원이나 기근, 내전 같은 피상적 이미지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아프리카는 수억 명의 사람이 수십개의 국가 위에서 살아가는 ‘현실의 대륙’이며, 독립 이후에도 구체적인 수많은 지명과 인명, 사건이 얽히며 만들어나가는 이야기로 가득하다.

앞으로 아프리카 현대사를 형성해나간 ‘영걸’들을 위주로 이 지역을 더 가깝게 느껴지게 할 만한 이야기를 소개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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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영걸전 

  1. 서아프리카 삼국지: 프랑스령 삼국의 엇갈린 운명
  2. 동아프리카 쌍벽: 케냐타와 니에레레
  3. 콩고의 순교자 루뭄바: 독립에서 암살까지
  4. 현대 에티오피아의 아버지, ‘군신’ 메넬리크 2세
  5. 셀라시에, 타락한 계몽군주의 처참한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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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아프리카처럼 드라마틱한 사건 전개는 없었지만, 동아프리카에서도 독립 직후 유사한 흐름들이 생겨났다. 즉, 냉전기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경쟁, 해안과 수도의 엘리트내륙 농민의 갈등, 종교와 민족 차이로 인한 갈등 등은 아프리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한 풍경이었다.

그중에서 좋은 비교가 되는 두 인물이 바로 케냐의 국부 조모 케냐타탄자니아의 국부 줄리어스 니에레레다.

케냐와 탄자니아 (구글 지도 합성)
케냐와 탄자니아 (구글 지도 합성)

 

[dropcap font=”arial” fontsize=”33″]조모 케냐타[/dropcap](스와힐리어: Jomo Kenyatta, 1889년 ~ 1978년 8월 22일)는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인데, 성공회 선교학교를 통해 교육을 받았고, 그리하여 영국으로 건너가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많은 식민지 지도자가 그러했듯 영국은 그에게 아프리카 민족주의를 깨닫게 해주는 장소기도 했다.

심지어 그는 소련에 방문하여 동방노력자대학에서 교육 받기도 했고, 자신과 비슷한 출신의 민족운동가들을 이끄는 지도격 인물로 일찌감치 성장한다. 한편으로 그는 유명 인류학자 말리노프스키의 제자로 들어가 자신이 속한 키쿠유족의 문화를 기술한 [케냐 산을 바라보며: 키쿠유 족의 인생] (1976)이라는 책을 쓴 학구파이기도 했다[footnote]이 책 외에도 조모 케냐타가 쓴 책은 다음과 같다.

  • [나의 키쿠유 국민들과 완곰베 추장의 일생] (1971년)
  • [쓰라림 없는 고통: 케냐 국가의 창립] (1973년)
  • [케냐: 분쟁의 땅] (1971년)
  • [우후루의 도정: 케냐의 진보] (1968년 ~ 1970년)[/footnote]
조모 케냐타, 그의 말년 모습 (1978,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https://en.wikipedia.org/wiki/Jomo_Kenyatta#/media/File:Jomo_Kenyatta_1978.jpg
조모 케냐타, 그의 말년 모습 (1978,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케냐타는 고향으로 돌아와 민족운동에 다시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당시 동아프리카에서는 좋은 토지를 백인이 독점하고, 현지인을 소작 노동자로 고용하는 형태의 경제가 자리잡은 상태였다. 민족과 계급이 섞인 이런 불평등으로 많은 아프리카인이 큰 불만을 품었고, 1950년대 민족운동이 성장하는 핵심 조건이기도 했다. 케냐에서는 이것이 리프트밸리(Rift Valley)를 중심으로 일어난 ‘마우 마우 운동’으로 벌어졌었다.

사실 영국식 교육을 착실히 받은 엘리트로서 케냐타는 마우 마우 운동에 부정적이었다. 특히 마우 마우 운동이 키쿠유족을 중심으로 유혈사태로 번져나가자 그는 이 운동이 급진화되면서 영국 당국과의 사이가 불필요하게 악화될 것을 우려했다. 그러나 케냐타가 마우 마우 운동에 부정적 의견을 표했는데도, 영국 당국은 그를 체포한 뒤 재판을 거쳐 수감시켰다. 그가 소련에서 교육 받은 이력이 먼저 문제가 되었고, 키쿠유 족과 케냐 지역의 지도자로서도 케냐타가 상징적 지위를 얻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조치들은 마우 마우 운동을 더 격렬하게 만들었고 끝내 더는 식민지를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한 영국은 리프트밸리의 백인 정착민들로 하여금 토지를 포기하게 했고, 정부도 종국적으로 케냐에서 완전 철수했다. 이후 풀려난 케냐타는 상당한 권위를 지니게 되었고, 곧 신생 케냐의 지도자로 등극한다.

독립 선언을 하는 조모 케냐타와 마우마우 봉기의 지도자 무사 음와리아마(Musa Mwariama) (출처 불명)
독립 선언을 하는 조모 케냐타와 마우마우 봉기의 지도자 무사 음와리아마(Musa Mwariama) (출처 불명)

 

[dropcap font=”arial” fontsize=”33″]줄리어스 니에레레[/dropcap](Julius Nyerere, 1922년 4월 13일 ~ 1999년 10월 14일)의 이력도 비슷하다. 탕가니카 지역 부족장의 아들이었던 그는, 토착 엘리트를 친영파로 양성하고자 했던 영국 식민 당국의 후원 아래 우간다에서 교사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니에레레는 거기에 영국 에딘버러 대학교에서 더 공부할 기회도 얻었다.

케냐타와 마찬가지로, 영국에서 그는 서아프리카, 동아프리카, 자메이카 등지에서 온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니에레레는 영국에서 대체로 편안히 생활했기에, 이 시기의 경험은 그가 독립 후 민족 화합 정책을 펴게 하는 데도 영향을 끼쳤다.

젊은 시절의 줄리어스 니에레레 (1965, 퍼블릭 도메인)
건국 이듬해인 1965년 43세의  줄리어스 니에레레 (퍼블릭 도메인)

1952년 고향으로 돌아온 니에레레는 역시 탕가니카를 중심으로 한 민족 운동 단체를 설립했다. 여기서는 케냐의 마우마우 운동 같은 격렬한 유혈 분규가 벌어지지는 않았다. 이는 간디의 사상에 영향을 강하게 받은 니에레레가 지도력을 발휘해 비폭력 운동을 전개했기 때문이었다. 아마 백인 이주민이 집중적으로 정착한 곳이 탕가니카보다는 케냐여서 그랬을 수도 있을 것이다(이 지역은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는 독일의 식민지였다). 그리하여 니에레레 주도 하에 탕가니카는 케냐보다 좀 더 부드럽게 독립을 쟁취할 수 있었다.

독립 직후 케냐와 탕가니카가 처해 있던 상황은 비슷했다. 우선 지역적 문화 차이가 있었다. 동아프리카는 수백년 동안 인도양 무슬림 상인들이 활약해오던 지역이었고, 그래서 해안 지역의 무슬림들과 내륙 지역의 애니미즘, 혹은 기독교 신자들로 나뉘어 있던 상황이었다. 여기에 더해 영국 식민지 시절 진출한 인도인들도 상업적 주도권을 확보해놓고 있었다. 거기에 외부 세계와 긴밀히 연결된 아시아계가 비교적 잘 뭉쳤던 데 반해 현지인들은 분열되어 있었다. 과거부터 오랜 기간 다퉈온 수많은 부족들이 이제 ‘케냐’ 혹은 ‘탕가니카’라는 이름으로 한 나라의 국민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공통점이 있었지만, 케냐와 탕가니카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이는 조모 케냐타와 줄리어스 니에레레의 노선 때문에 발생한 차이였다. 케냐타는 먼저 케냐의 농업 경제를 진흥시키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영국 출신 전문가들의 활약 아래, 케냐의 수출 농업이 크게 성장했다. 나이로비는 번영하는 동아프리카의 상업 중심지이자 대도시로 발전했다.

이처럼 케냐타가 국제무역과 시장경제를 주로 활용하고자 했던 반면 니에레레는 아프리카 사회주의의 이상에 감되어 있었다. ‘제3세계’ 운동가로서 니에레레는 냉전 구도에서 소련에 일방적으로 구애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소련의 경험을 연상시키는 여러 정책들을 실시했다. 스와힐리어로 ‘연대’를 뜻하는 ‘우자마(Ujamaa) 운동’이 바로 그것인데, 농업집단화와 집단농장을 중심으로 한 정착촌 건설을 통한 탄자니아의 현대화를 추구했다(이 무렵 인근 섬나라 잔지바르와 합병하면서 탕가니카는 ‘탄자니아’가 되었다).

우자마 (출처 불명)
우자마 (출처 불명)

케냐 vs. 탄자니아

경제 면에서 두 국가는 상대방을 의식하면서 일종의 체제 경쟁에 돌입했다. 그리고 결과는 너무 자명하게도, 케냐의 압승이었다. 탄자니아의 우자마는 여타 제3세계 사회주의 경제정책들이 그러했듯이 비효율을 양산했고, 탄자니아의 농업은 되레 큰 타격을 입었다. 그래도 우자마와 아프리카 사회주의의 이상이 해외의 원조단체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가 탄자니아는 시의적절한 지원을 받을 수 있었고, 다행히 기근을 겪는 사태까지는 벌어지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독립 이래로 꾸준한 성장을 이어온 케냐와는 대조적인 경험이었다.

하지만 사회적인 면에서는 조금 그림이 달라진다. 케냐의 성장이 인상적이긴 했어도, 사회적으로 불만이 계속 누적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이유는 독립 이후 이전보다 훨씬 거세진 종족 갈등에 있었다. 조모 케냐타는 자신이 확보할 수 있는 수익성 높은 직위에 자신이 신뢰할 수 있는 키쿠유족 인사들을 주로 기용했다. 거기에, 백인 정착민이 빠져나간 자리를 키쿠유족 토지 소유자들이 채우면서 토지 불평등도 전혀 바뀜이 없었다.

이는 다른 부족들에게는 굉장히 큰 불만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케냐에서 키쿠유족과 경쟁할 여력이 있는 루오족이나 칼렌진족 출신 인사들이 이에 반발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들은 공정한 토지개혁과 인사를 주장하면서 케냐타 통치에 점점 저항하기 시작했고, 토지를 둘러싼 종족 갈등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키쿠유(Kĩkũyũ) 족의 기. 키쿠유 족은 건국 이후 권력을 독점하면서 타 종족과의 갈등을 초래했다.
키쿠유(Kĩkũyũ) 족의 기. 키쿠유 족은 건국 이후 권력을 독점하면서 타 종족과의 갈등을 초래했다.

반면 탄자니아경제가 실패했지만, 그 대신 사회적 성과를 거두는 데는 성공했다. 우자마 운동은 실패한 농업집단화 프로그램만 있던 것은 아니고, 서로 다른 종족으로 구성되어 있던 탄자니아인들을 공통의 정체성으로 만들어내고자 한 다양한 사회 프로그램들도 포함하고 있었다.

니에레레는 모두가 공유하는 토착 전통을 탄자니아 정체성의 구심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는 동아프리카 지역의 상업 공용어인 스와힐리어를 탄자니아의 국어로 채택한 언어 정책에서 가장 큰 효과를 거두었다. 종족 간 협력과 정체성 혼용이 장려되었으며, 국제 원조를 통해 설립한 각종 공공 학교를 통해 탄자니아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키워줄 민족주의 교육이 이어졌다.

동아프리카 삼인중. 왼쪽부터 니에레레, 오보테, 케냐타
동아프리카 삼인걸. 왼쪽부터 니에레레, 오보테, 케냐타 (출처 불명)

케냐타와 니에레레 이후 

케냐타와 니에레레가 퇴장할 무렵부터 케냐와 탄자니아의 운명은 다시 한번 달라졌다. 1978년 케냐타가 죽자, 칼렌진족 출신다니엘 아랍 모이(Daniel Toroitich arap Moi, 1924년 9월 2일 ~ 2020년 2월 4일)가 정권을 획득했다. 칼렌진족을 비롯한 비 키쿠유족 인사들은 그 이전부터 토지개혁과 공정한 분배 등을 주장하고 있던 터였다.

하지만 모이는 흔한 아프리카 지도자답게, 그 같은 요구 사항을 모두 묵살했다. 대신 그는 집권 엘리트들(승자연합)을 칼렌진족으로 전면 재편하고, 발전한 케냐 경제에서 돈을 모을 수 있는 모든 경로를 칼렌진족 인사들의 이권 통로로 만들었다. 따라서 모이 통치기에는 인프라를 비롯한 각종 공공재 운영 상태가 악화되었고, 순항하던 케냐 경제는 아프리카 경제가 가장 어렵던 시기인 1980년대를 맞이하여 악화되었다.

카냐타 이후 집권해 다니엘 아랍 모이(1979,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https://en.wikipedia.org/wiki/Daniel_arap_Moi#/media/File:Daniel_arap_Moi_1979b.jpg
카냐타 이후 집권한 칼렌진족 출신의 다니엘 아랍 모이는 집권층을 칼렌진족으로 전면 재편했고, 국가 경영은 악화일로를 걷는다. (1979,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이는 잠재되어 있던 종족 갈등을 더욱 크게 늘렸고, 모이가 권력을 내려놓은 뒤에도 루오족, 칼렌진족, 키쿠유족 간의 갈등은 계속해서 심해졌다.

특히, 케냐가 민주주의로 이행한 것이 사태를 더 악화시켰는데, 선거가 실질적으로 부족 지도자들의 이권을 대리하는 장이 되버리면서 각종 부정부패과 유혈 사태가 선거 때마다 발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2017년에도 그 같은 갈등은 끊이질 않아 1년 가까이 부정선거 논란으로 정치가 마비되기도 했었다. 비록 지금은 새로운 권력구조 개편안이 종족 간 합의를 통해 채택되어 안정화되었지만, 이 문제는 앞으로도 케냐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반면 탄자니아는 상대적 안정을 구가했다. 물론, 독립 이후 꾸준히 성장하던 케냐가 21세기에는 동아프리카의 경제적 중심지이자 중국의 주요 투자처로 발돋움하면서 눈부신 성장을 거둔 것과 달리 탄자니아의 경제 성적표는 그렇게 좋지 못하다. 1인당 GDP로 2019년 기준 케냐는 2천 달러를 넘긴 반면 탄자니아는 여전히 1,100 달러에 불과하다(두 국가 모두 대체로 5-6%대 성장을 구가하고 있다는 점에서 탄자니아도 인근 국가들보다는 사정이 훨씬 좋긴 하다). 이는 탄자니아가 시장경제로 전환한 것이 1985년이라, 두 국가의 출발선이 결정적으로 달랐던 데서 기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탄자니아는 케냐와 같은 대규모 민족 분규는 적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컨대, 지역의 부족 지도자가 어떤 정당과 연을 맺고 있는지에 따라 사회 서비스를 누릴 수 있는 수준이 천차만별인 케냐와 달리 탄자니아는 비교적 고르게 분배되어 있다고 평가 받는다. 이 같은 요소들이 탄자니아를 더 안정된 사회로 만드는 데 공헌했을 것이다. 탄자니아도 여러 아프리카 국가들이 겪는 고질적 문제에 고통 받고 있지만, 적어도 많은 아프리카 국가들을 구렁텅이로 빠트린 민족분규와 내전의 소용돌이에서는 상대적으로 자유롭다는 점은 상당한 장점이자 줄리어스 니에레레 최대의 업적이라고 하겠다.

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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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탄자니아-우간다 전쟁 

사진만 보면 상남자의 기운이 느껴지는 케냐타와 달리 니에레레는 좀 샌님 같은 이미지가 있는데, 실제 업적은 좀 다르다. ‘아프리카의 히틀러’라 불렸던 우간다의 학살자 이디 아민축출한 사람이 바로 니에레레다. 우간다의 상황이 갈수록 심각해지는 가운데, 우간다군이 탄자니아 국경에서 군사 도발을 시작했고, 이에 니에레레가 반격을 명령하면서 탄자니아-우간다 전쟁(1978~1979)이 시작된 것이다. 막강한 탄자니아군이 우간다군을 몰아내고 이디 아민이 마침내 축출되면서 전쟁은 끝나게 됐다.

아프리카의 히틀러 이디 아민(1923년 혹은 1925년~2003년)과 그를 소재로 한 영화 '라스트 킹' (2006). 이디 아민을 축출한 사람이 바로 에레레레
아프리카의 히틀러 이디 아민(1923년 혹은 1925년~2003년)과 그를 소재로 한 영화 ‘라스트 킹’ (2006). 이디 아민을 축출한 사람이 바로 니에레레다.

탄자니아-우간다 전쟁은 이후 콩고와 르완다에서 벌어진 일과 맞물리면서 커다란 나비효과를 만들어낸다. 한때 니에레레, 케냐타와 함께 동아프리카 삼인걸으로 평가 받다가 이디 아민에게 축출되었던 우간다의 밀턴 오보테가 니에레레의 비호 아래 다시 집권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역시 니에레레의 비호로 전쟁에 참여했던 요웨리 무세베니와 갈등을 겪기 시작했고, 무세베니는 정부에서 뛰쳐나와 민족저항군(NRA)를 결성해 우간다 내전을 시작했다.

한편 이 무렵, 무세베니가 이끄는 민족저항군에 새로운 인물들이 합류했다. 그들은 르완다에서 후투족의 탄압을 피해 망명해온 투치족 인사들이었다. 그들은 무세베니를 도와 밀턴 오보테 정권을 전복시킨 뒤 우간다의 지원을 받아 르완다에서 자신들의 권익을 회복하고자 했었다. 이들이 곧 르완다애국전전(RPF)를 형성했으며, 우간다 내전에서 가장 활약하는 부대 중 하나로 성장하게 된다. 이 르완다애국전선의 지도자이자 후에 무세베니의 오른팔로 활약하게 되는 인물이 바로 지금 르완다의 대통령, 폴 카가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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