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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opcap font=”arial” fontsize=”22″]1979년 11월 20일[/dropcap] 일군의 무장 세력이 메카의 그랜드 모스크(Grand Mosque)를 무력으로 점거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었다. 어찌보면 황당하기까지 한 극단주의자들의 테러 행각에 불과했지만, 이 사건은 전후의 여러 사건들과 맞물려 이후 40년 간 중동, 나아가 세계에 엄청난 유산을 남겼다.

메카의 그랜드 모스크 점거 (1979, 퍼블릭 도메인)
메카의 그랜드 모스크 무력 점거 사건 (1979. 11. 20., 퍼블릭 도메인)

이란 혁명의 영향 

당시 중동은 그 해 초 이란에서 있던 혁명으로 사회 각지가 부글부글끓던 상황이었다. 석유 파동 이후 쏟아져 들어온 오일 머니는 중동의 많은 국가를 변모시켰다. 하지만 발전의 혜택은 불균등하게 분배되었으며, 서구 지향적인 엘리트에게서 배제된 대중은 모스크를 중심으로 뭉치면서 정치적 종교 운동이 사회 밑바닥에서 성장하고 있었다. 이란은 이로 인해 사회가 뒤집힌 최초의 사례였다.

이란 혁명은 단순히 한 나라의 정권 교체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당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로 나뉘어 있던 냉전 시대의 한 복판에서 ‘이슬람주의’라는 제3의 노선을 천명한 것부터 심상치 않았다. 중요한 것은 경제와 계급보다는 문화와 정체성이었다. 이 혁명은 이집트와 터키에서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까지, 나아가 더 멀리 있는 이슬람 세계 전역에 지각변동을 일으킨 일대 사건이 되었다.

이란 혁명(1979), 호메이니의 사진을 든 시위대.
이란 혁명(1979), 호메이니의 사진을 든 시위대.

그해 11월에는 사우디에서도 유사한 시도가 있었다. 주하이만 알 오타비가 이끄는 500명의 무장세력이 5만 명의 순례객이 있던 메카의 그랜드 모스크를 점거하고 인질극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오일머니가 유입된 이후 변모하기 시작한 사우디 사회를 타락했다고 비난했으며, 이런 타락을 방조한 걸 넘어 스스로 탐닉한 사우디 왕정을 격렬하게 비난했다.

그들 입장에서 메카 점거는 돌이킬 수 없이 서구 문명의 유혹에 빠진 타락한 사회를 정화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었다. 점거 세력은 사우디 정부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극단주의적 정책을 제안했다. 예컨대 왕정은 미국으로 석유 수출을 중단하고 모든 외국인을 추방하고 텔레비전을 사우디에서 추방해야 했다. 만약 이 조건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점거를 해제하지 않을 것임을 천명했다.

이 점거는 두 성지의 수호자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바탕으로 이슬람 세계의 종주국을 자임하던 사우디 입장에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행위였다. 하지만 사우디군은 테러리스트들을 제대로 다룰 능력이 전혀 없었다. 결국 사우디군이 주도하던 작전이 실패로 끝나고 말았고, 사우디는 굴욕적이게도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결국 프랑스 특공대를 불러 진압작전을 재개했다. 12월 4일, 최루 가스가 뿌려지고 총격전이 다시 벌어졌다. 결국 수백명이 전투에 휘말려 죽고난 뒤에야 그랜드 모스크는 다시 사우디 정부의 손에 들어올 수 있었다.

와하비즘과 아프카니스탄 침공 

하지만 1979년의 메카 공성전이 남긴 여파는 그 뒤에도 이슬람 세계 전역에서 울려퍼졌고 21세기 초엽, 어쩌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먼저, 이번 사건으로 정통성에 큰 타격을 입은 사우디 정부는 서구화와 불균등 발전을 우려하는 자국 내 불만 세력을 끊임없이 의식하게 되었다. 게다가 이제는 이슬람 세계의 종주국을 자임하는 라이벌마저 더 생긴 상황이었다. 이란의 혁명 정권은 공격적으로 영향력을 확장하고자 시도하는 새로운 라이벌로 부상하고 있었다. 대내적 불만과 대외적 위신저하가 사우디 지도부를 압박했다.

이에 대응한 사우디의 선택은 극단적 보수주의인 와하비즘[footnote]와하비즘(Wahhabism): 코란(율법)을 강조하고, 이슬람의 타락과 형식주의를 비판하며 쿠란의 가르침으로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슬람 수니파의 사상, 이슬람 근본주의 사상을 말한다.[/footnote]을 더 강하게 밀어붙이는 것이었다. 만약 사우디가 문화적 서구화를 억제할 수만 있다면, 왕가가 오일머니를 독점하고 불평등이 다소의 불만을 만들어낸다 하더라도, 반대 세력이 정부를 공격할 큰 명분을 상실할 것임은 분명했다. 여기에 경제적 보조금만 더해준다면 많은 국민이 사우디 체제에 큰 불만을 가지지 않으리라. 거기에 더하여 사우디 정부는 진정 신실한 이슬람의 수호자라는 인식을 외국에 퍼트리면서 이란의 부상을 차단하고 ‘두 성지(메카, 메디나)의 수호자’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계속 지킬 수 있을 것이었다.

사우디 정부를 도와주기라도 하듯, 1979년 12월 24일에 세계를 흔들 사건이 또 하나 벌어졌다. 소련의 붉은 군대가 우즈베키스탄에서 대거 남하하여 아프가니스탄으로 쏟아져 들어간 것이다. 모스크바의 결정도 테헤란의 혁명에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것이었다. 모스크바 입장에서는 이란 혁명이 자국의 중앙아시아 무슬림 지역을 동요시켜 소련 통치 기반을 흔들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에 더하여 대표적 친미 국가였던 이란에서 발생한 지정학적 공백을 소련이 빠르게 메꾸어 이익을 취하고자 하는 동기도 있었다. 물론 이 전쟁은 취약해질 대로 취약해진 소련 체제의 치부를 노출시킨 최악의 선택이 되었으며, 오히려 소련 해체에 크게 기여했다.

소련의 아프카니스탄 침공은 사우디아라비아에는 큰 기회를 제공했다. 사진은 카불에서 BMD-1 탱크에 탑승한 소련군의 모습(퍼블릭 도메인).
소련의 아프카니스탄 침공은 사우디아라비아에는 자국의 위기를 해결한 큰 기회를 제공했다. 사진은 카불에서 BMD-1 탱크에 탑승한 소련군의 모습(퍼블릭 도메인).

사우디아라비아는 이 전쟁을 자국의 위기를 해결할 최고의 기회로 판단했다. 사우디 성직자들은 타락한 서구보다 더 흉악한, 러시아의 무신론자들을 맞선 성전이 벌어지고 있다고 선동했다.

파키스탄의 종교적 보수화 

사우디 정보부가 아프가니스탄에 인접한 파키스탄으로 파견되었다. 당시 파키스탄은 1978년 군부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지아울하크 대통령이 통치하고 있었다. 1979년 소련이 침공을 시작했을 당시 파키스탄의 입장은 사우디가 요구하는 많은 것을 만족시켜주고 있었다.

1977년 7월 쿠데타를 일으켜 1978년 집권한 무함마드 지아울하크(1924~1988) 파키스탄 대통령. 1988년 의문의 사고로 사망했다. (출처: Quora.com https://www.quora.com/How-did-Pakistan-President-Gen-Zia-ul-Haq-die)
1977년 7월 쿠데타를 일으켜 1978년 집권한 무함마드 지아울하크(1924~1988) 파키스탄 대통령. 1988년 의문의 사고로 사망했다. (출처: Quora.com)

파키스탄은 이미 주적인 인도가 친소국가인 상황에서, 서쪽의 아프가니스탄마저 소련의 영향권 안에 들어가면 나라가 완전히 포위될 것이라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이를 막기 위해서라도 파키스탄은 적극적으로 아프가니스탄의 저항 세력을 지원해야만 했다. 이런 지정학적 위치 덕택에, 사우디아라비아와 미국, 그리고 소련과 갈등을 빚던 중국마저 파키스탄에 적극적 지원을 시작하며 유대관계를 쌓고자 했다. 이 중 중국과의 협력은 이후 중국에서 전개되던 개혁개방과 맞물려 전혀 예상하지 못한 파급효과를 낳았으나, 이것은 또 다른 이야기가 된다.

한편 지아울하크 파키스탄 대통령도 사우디 왕가와 마찬가지로 이란 혁명의 여파를 우려했다. 정통성이 떨어지는 군부 정권이 국민의 요구를 해결해주지 못한다면, 이란 혁명에 자극 받은 대중이 정부를 전복시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지아울하크는 따라서 사우디 왕가와 정확히 같은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슬람교를 지원하고 성직자들과 보수적 신자들의 문화적 감수성을 보호해주는 것이었다.

무함마드 알리 진나(Muhammad Ali Jinnah, 1876~1948, 인도의 독립운동가)가 기초한 세속국가이자 수많은 자유주의적 무슬림 지식인을 만들어낸 파키스탄은 이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종교적으로 보수적인 국가로 변모했다. 아니, 제 자리를 찾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파키스탄의 이런 전환은 사우디아라비아 입장에서는 쌍수를 들만큼 환영할 일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 정보부가 파키스탄으로 들어가 협력 네트워크를 만들었고, 사우디의 오일머니가 파키스탄을 통해 아프간의 무자헤딘(아프간 반군, 이슬람 전사)[footnote]무자헤딘은 ‘성전에서 싸우는 전자’를 뜻하는 무자히드의 북수형으로, 좁게는 아프간 반군을 의미하지만, 20세기 후반 이후 이슬람 이념에 따라 투쟁하는 의용군 일반을 의미하는 말로 굳어졌다.[/footnote]에게 유입되었다. 사우디는 이를 통해 이슬람 세계를 수호하는 지도국으로서 자신의 입지를 탄탄하게 쌓을 수 있었다. 라이벌이라는 이란은 이라크와 가망 없는 소모전에 돌입하면서 제 코가 석자가 되어버린 상황이었다.

세속주의 정부 vs. 이슬람주의 저항자 

이런 대외적 위신 재고에 더해 사우디는 국내의 수많은 불만분자를 은연 중에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으로 내몰 수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넘치는 투쟁 욕구, 세상에 대한 불만, 성전을 향한 열망을 사우디 왕가가 아니라 진정한 적인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에게 풀 수 있을 것이었다. 불만 분자들이 아라비아 반도를 벗어나 힌두쿠시 산맥으로 옮겨가면서, 사우디 왕가는 마침내 발을 뻗고 잘 수 있었다. 굴욕과 위기감을 안겨준 메카 공성전의 악몽이 재현될 일은 없었다. 테헤란의 악몽이 리야드에서 재현될 일도 없었다.

하지만 이것은 문제가 눈에 보이지 않도록 바닥 밑에 치워둔 것에 불과했다. 먼저, 사우디와 파키스탄이 어떻게 안정성을 회복했다고 해도 다른 나라마저 그런 것은 아니었다. 터키에서는 좌우갈등으로 정정 불안과 혼란이 심화되고 있었는데, 이 같은 혼란을 해소하기 위해 1980년에 군부 쿠데타가 벌어졌고, 군부 지도자인 케난 에브렌은 사우디아라비아, 파키스탄과 유사한 정책을 채택하게 된다. 바로 이 시기 정부가 이슬람을 끌어안으면서, 미래의 대통령과 그의 라이벌이 될 레젭 타입 에르도안과 페툴라 귈렌이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1989년 수단에서는 오마르 알 바시르가 쿠데타를 일으켜 더 심한 종교적 억압 체제를 도입했다.

쿠데타를 이끈 케난 에브렌은 터키에 광범위한 억압을 초래했고, 결국 7대 대통령에 취임한다.
쿠데타를 이끈 케난 에브렌은 터키에 광범위한 억압을 초래했고, 결국 7대 대통령에 취임한다.

이처럼 이슬람주의의 압력이 심화되자 세속주의적 권위주의 정부는 이에 맞서 더욱 강하게 이슬람주의를 억눌렀다. 이집트에서는 대통령 안와르 사다트가 이스라엘과 협정을 맺은 것에 굴욕을 느낀 일군의 무장집단이 이란 혁명에 자극 받아 새로운 행동을 계획하고 있었다. 2년 뒤 사다트는 암살된다. 이후 들어선 무바라크 대통령은 아랍 봉기로 물러나기 전까지 이집트의 이슬람주의를 철저하게 억눌렀다. 저항이 더 격렬했던 시리아에서는 더욱 잔인한 해결책이 도입되었는데, 하페즈 알 아사드는 1982년 봉기가 일어난 하마 시를 포격하고 탱크를 투입하여 도시를 무참히 진압했다. 이런 국가들에서 벌어진 세속적 권위주의 세력과 이슬람주의 저항자들의 투쟁은 수십년 뒤 다시 한 번 불길처럼 번져나가게 된다.

물론 세계 권력의 중심에 있던 사람들은 중동의 물밑에서 벌어지던 이런 사건들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확실히 이 지역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탄화수소 공급지였고, 많은 이들이 이 지역에 관심을 기울이기는 했지만, 그래서 모든 논의가 석유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면이 분명 있었다. 대부분 국가에서 세속적 권위주의 세력이나, 혹은 종교적으로 다소 타협한 권위주의 세력은 너무나 강력해보였다.

이란이 흔들렸으나, 이슬람 세계를 집어삼킬 것 같은 그들의 위세는 이라크에 발이 묶여 소진되고 있었다. 워싱턴 입장에서, 터키의 빈민가나 시리아의 마을에서 커지기 시작한 아우성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여전히 세계 전역에서 미국을 위협하는 것처럼 보인 소련의 존재 그 자체였다. 당시 미국은 미래의 자신들을 위협할 중국 또한 소련에 맞설 방파제로서 키워주었다.

독일의 평원과 엄동설한의 북극해, 베트남과 앙골라의 정글에서 미국의 모든 관심은 소련의 진출을 차단하는 것에 쏠려 있었다. 마침내 아프간 산자락에서 무자헤딘들이 붉은 군대에 막대한 출혈을 강요하고 엄청난 전비를 쏟아붓도록 만들었다는 게 판명나자 미국은 쾌재를 불렀다. 그렇게 끝내 소련이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자 그들은 세계를 위협하는 본질적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환호했다. 하지만 그것은 전혀 다른 문제를 파생시켰을 뿐이라는 자명한 사실을 미국인들은 곧 깨닫게 된다.

1979년 11월, 22세의 청년 

시계를 되돌려 다시 1979년 11월. 한 청년이 메카의 그랜드 모스크가 무장 세력에게 점거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당시 22세의 젊은 나이로 토목 공학을 공부했던 그 청년은 메카의 그랜드 모스크를 아주 잘 알 수밖에 없었는데, 그의 아버지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가장 큰 건설기업 중 하나의 회장으로서, 정부가 추진한 그랜드 모스크 개장 사업을 수주 받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사우디군은 진압작전 때 그의 아버지가 소유한 기업에 도면을 요청해서 받아보기까지 했다.

하지만 사우디군이 수행한 진압작전은 세상 일에 다소 무관심하던 이 청년의 세계관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 그는 이슬람의 가장 성스러운 장소에 탱크가 들어가고 포격과 총격전, 학살이 벌어지는 장면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는 이 사건이 갖는 의미로 혼란스러워했고, 결국 억압적이고 타락한 사우디 정부가 무언가 잘못하고 있다는 확신을 굳히게 되었다. 그러던 와중, 그 청년은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는 뉴스를 접하게 된다. 이에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낀 그는 몇명의 사우디 동료들과 함께 파키스탄으로 날아갔다. 파키스탄 정보부 ISI 밑에서 훈련 받은 그는 아프가니스탄의 계곡으로 들어가 소련군과 맞서 싸웠고, 그곳에서 이슬람 세계 각지에서 날아들어온 인생을 함께 할 동지들을 만났다.

아프리카 소년 분노 남자 좌절 화 앵그리 이슬람

1989년 마침내 전쟁이 끝났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있는 동안 소련은 지도자가 세 번이나 바뀌었고, 고르바초프는 소련군을 전격적으로 철군시키면서 마침내 그레이트 게임[footnote]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 또는 그림자의 토너먼트는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대영제국과 러시아제국 간의 전략적 경쟁과 냉전을 총칭하는 의미이다. 보통 그레이트 게임은 1813년의 러시아-페르시아 조약부터 시작하여 1907년의 러시아-영국 우호 조약으로 끝을 맺는다. 일부에서는 1917년의 러시아 10월 혁명을 종점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출처: 위키백과 – 그레이트 게임)[/footnote] 이래로 이어져온 이 나라의 지정학적 우여곡절의 한 장이 끝났다.

열렬한 무자헤딘으로 싸웠던 이 청년은 이제 30대가 되었고, 자신의 활동에 자부심을 느꼈지만 아프간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진 부족 간 갈등에 이골이 나 있던 상황이었다. 그는 사우디아라비아로 다시 돌아가 아버지의 건설사에서 다시 일을 시작한다. 그러던 중, 그는 인생을 또 뒤흔들 소식을 접하게 된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공하면서,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연합군이 후세인을 몰아내고자 사우디아라비아에 군대를 주둔하게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아직도 피가 끓는 30대 중반이던 이 청년이 어떤 감상을 느꼈을지는 뻔하다. 그는 십여년 전 성스러운 메카의 대 사원에 타락한 왕정의 탱크가 들어가는 것을 보고 분노했다. 그런데 이제는 한 술 더 떠 자신의 전통과 종교를 모욕하는, 문화를 타락시키는 사악한 제국이 그 성스러운 땅에 들어오게 되었다는 말이었다. 그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미국이 초강대국이라는 사실은 그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소련을 쓰러뜨린 건 미국이 아니라 바로 자신과 그의 동지들이었다. 그는 다시 끓어오르는 분노를 새로운 목표들을 향해 돌리기 시작한다.

이미 많은 독자들이 눈치챘겠지만, 우리 모두 이 청년의 이름을 알고 있다.

라딘의 아들인 아와드의 아들인 모함메드의 아들 오사마.

걸프전 이후 다시 10년이 지났을 때 세계를 충격의 도가니로 몰아넣을 오사마 빈라덴이다.

오사마 빈라덴 (1957~2011). 사진은 1988년 인터뷰 당시의 모습 (출처: Hamid Mir, CC BY SA 3.0) http://www.canadafreepress.com/
오사마 빈라덴 (1957~2011). 사진은 1988년 인터뷰 당시의 모습 (출처: Hamid Mir, CC BY SA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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