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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 만화 삼국지’

이런 식상하다 못해 구린내까지 나는 제목을 한 번 써보고 싶었다.

역시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일본의 침체와 한국의 부상과 저 멀리서 물량으로 마구잡이 성장을 시작한 중국이다.

1. 일본

1990년대까지 일본 만화는 작품 세계를 확장하고 성장일로를 걸으며 세계 속에서 일본을 상징하는 아이콘 중 하나로 우뚝 설 수 있었다. 하지만 버블 붕괴 헤이세이 시대 일본이 겪은 아노미는 만화라고 피해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경제가 사실상 제자리 걸음을 수십년 째 이어가는 상황에서 새로운 시도는 줄었고 만화 생산에서 배급까지 이어지는 시스템은 점점 경직되어 작가를 옥죄기 시작했다. ‘초식화’된 소비자들도 점차 강렬한 서사구조를 갖춘 대작에서 밋밋하지만 멍하니 보기엔 좋은 다수의 평범한 작품으로 옮겨갔다.

이러한 시대 흐름을 상징하는 작가는 역시 신카이 마코토이다. 신카이 마코토의 여러 작품은 사실상 그의 일생을 반영한 한 가지 테마의 변주에 지나지 않는다. 예컨대 도쿄는 언제나 일생을 바꾸는 전환점이자 피안으로서 제시되고, 작가 본인을 반영한 것 같은 어리숙한 남자 주인공이 신비로운 여성과의 만남 혹은 이별을 겪으며 이야기가 진행된다. 가장 유명한 세 작품인 [초속 5cm], [언어의 정원], [너의 이름은]은 이 패턴을 반복한다. 그래서 신카이 마코토 작품들의 서사는 다분히 개인적 차원에서 머문다.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거장으로 떠오른 신카이 마코토 감독과 그의 작품들.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거장으로 떠오른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작품들.

동일본 대지진을 소재로 했다는 [너의 이름은]이 그나마 예외긴 하지만, 이 조차도 어떤 메시지가 없는 안타까운 정서의 표출에 더 가깝다. 빈약하고 자기복제가 많은 서사의 문제점들은 신카이 마코토 특유의 아름다운 그림과 ‘따뜻한 감성’으로 어물쩍 넘어가게 되는데, 사실 그마저도 도쿄의 실제 풍경을 바탕으로 그렸다는 점에서 능동성보다는 수동성이 더 강하다. 신카이 마코토와 그의 작품이 그 자체로 문제될 것은 없지만, 그가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로서 자리매김한 것은 일본 사회가 그만큼 더 과거의 활력을 상실하고 수동적인 사회로 변해가고 있다는 증거인 것이다.

하지만 과거 수많은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일본 아니메의 대작들이 사라져가는 것은 일본 사회의 변화만을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더 넓은 맥락에서 보았을 때, 서사의 약화와 캐릭터 및 이미지의 강화는 세계적 미디어 환경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메커니즘을 알기 위해서는, 컴퓨터, 인터넷, 무엇보다 모바일이 미디어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국 웹툰을 보면 이 변화상을 잘 알 수 있다.

2. 한국

대여점 문화와 불법다운로드, 스캔본 좋아하는 습성 때문에 국내 만화 업계가 죄다 고사했다는 이야기가 무색하게 요 10년 간 정말 놀랍도록 비상했다. 오히려 기존 만화시장이 너무나 처참하게 박살나버려서 온라인 환경이라는 새로운 플랫폼 환경에서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었던 듯 싶다.

플랫폼 변화와 맞물려 한국 웹툰이 이야기로서도 그림으로서도 질이 일본에 비해 떨어진다는 것도 아주 큰 장점이다. 아니 이게 왜 장점이냐고 분명 반문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산업의 우열을 작품성 높은 걸 많이 생산하냐가 아니라 소비자를 많이 끌어들이냐로 보자면, 명백히 한국의 ‘그림 대충 그리고 스토리 하나 없는’ 웹툰이 훨씬 더 트렌드에 맞다.

현 시대의 가장 큰 흐름은 사람들이 컨텐츠에 인지적 자원을 쏟는 걸 버거워한다는 것이다. 컨텐츠는 무한히 범람하고 있으나 한 컨텐츠에 집중해서 시간을 쏟는 시간은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 당장 나만 해도 오늘 넷플릭스의 [맨헌트 유나바머] 보는데 너무 느리고 답답해서 1.5배속으로 재생하고 싶어서 환장했었다. 유튜브 영상은 15초 광고만 떠도 분노조절장애가 생기고, 누가 나에게 10분 넘어가는 영상을 보라고 링크 걸어주면 “아니 지금 이걸 다 보고 있으란 말인가?”라는 의문이 생길 정도다.

[맨헌터 유나바머]를 보면서 1.5배속으로 돌려보고 싶은 욕망이 (....)
[맨헌터 유나바머], 너무 느리고 답답해서 1.5배속으로 돌려보고 싶었다(….)
인터넷 시대를 넘어 모바일 시대가 펼쳐지면서 인간의 컨텐츠 소모는 점점 더 많은 종류의, 그러나 찰나적인 방식으로 급격히 변하고 있다.

이 점에서 작품성 없는 게 장점이 되는 것이다. 예시를 하나 들어보자. 얼마전 지인과 네이버 웹툰 [스위트홈]과 일본 만화 [아이엠어히어로]를 얘기한 적이 있다. 나는 스위트홈을 꽤 재밌게 보고 있었다. 그런데 지인이 이렇게 말했다.

“근데 그거 아이엠어히어로 ‘짭’이에요. 그것도 한 번 보시죠. 스위트홈이 재미 없다는 건 아닌데 보시면 알 겁니다.”

어젯밤에 한 권을 딱 봤는데 보자마자 그분의 말이 맞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표현, 작화, 내용 모든 면에 있어서 공유하는 면이 많은데 역시 모든 면에서 [아이엠어히어로]가 압승이다.

하지만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모바일로 보기에 압도적으로 좋은 것은 [스위트홈]이다. 오토모 가츠히로의 [아키라] 이후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배경까지 리얼하게, 마치 사진처럼 묘사하는 그림을 핸드폰으로 보는 건 시각적으로 상당히 피로한 일이다. 이야기에 밀도가 너무 높아도 마찬가지다. 쉽게 지쳐버리고 피로해진다.

반면 [스위트홈]은 [아이엠어히어로]에 비해서 낮은 퀄리티를 시종일관 유지하지만, 매주 나에게 쿠키 2개를 결제하게 만들 정도의 몰입감과 긴장감과 내용 전달력은 유지된다. 동시에 대충 버튼 틱틱 눌러서 스크롤 슥슥 내리고 ‘아 재밌었다~’하면서 끝내기 딱 좋은 퀄리티다.

[아이엠어히어로]는 [스위트홈]보다 완성도가 뛰어나지만, 모바일에서 보기엔 [스위트홈]이 더 적당(?!)하다.
[아이엠어히어로]는 [스위트홈]보다 완성도가 뛰어나지만, 모바일에서 보기엔 [스위트홈]이 더 적당(?!)하다.
쉽게 말해서 이런 것이다. 과거에 사람들은 모두 정해진 시간에 앉아서 7첩 반상을 먹었다. 이게 삼각김밥보다는 당연히 맛, 정성, 영양 모든 면에서 뛰어날 것이다. 하지만 7첩 반상은 걸어가면서 먹을 수 없지만, 삼각김밥은 걸어가면서 먹을 수 있다.

웹툰을 보고 ‘이야기 같지도 않은 이야기, 발로 그린 그림’ 등등으로 폄하할 수는 있지만, 바로 그런 가벼움 덕에 모바일 환경에 최적화되어 엄청난 속도로 성장할 수 있었다. 향후 만화 매니아들이 아니고서야 그림과 글이 빽빽히 들어있는 책을 찾게 되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 것이다.

작가도 그런 종류에 적합한 작가들이 늘 것이다. 나는 디지털 혁명의 한복판에서 성장한 ‘디지털 네이티브’(Digital Native) 세대다(나는 1994년생이고, 7살 때 처음 온라인 게임을 접했으며, 그 게임은 [바람의 나라]다)[footnote]디지털 네이티브는 미국의 교육학자인 마크 프렌스키(Marc Prensky)가 2001년 그의 논문 ‘Digital NativeDigital Immigrants’를 통해 처음 사용한 용어로 1980년대 개인용 컴퓨터의 대중화, 1990년대 휴대전화와 인터넷 확산에 따른 디지털 혁명기 한복판에서 성장기를 보낸 30세 미만의 세대를 지칭한다. (위키백과 ‘디지털 네이티브’ 중에서)[/footnote]. 이젠 디지털 네이티브를 넘어 식당에서 부모들 수다 떠는 사이에 유튜브를 보고 자란 ‘모바일 네이티브’가 고등학생으로 성장했다. 장인정신 ‘쩌는’ 그림과 내용을 올리는 사람은 이 세대에도 ‘확률적 에러’로 계속 나오겠지만, 그들의 정성과는 다르게 애석하게도 시장에서는 큰 호응을 못 받을 확률이 높다

몇 가지 예시를 또 들어보면, 예컨대 네이버 수요웹툰 [푸른사막 아아루] 같은 건 나름 정통 순정만화풍 그림에 요즘 트렌드에 맞는 주체적 여성상(!) 이런 걸 강조하면서 되게 정성을 다한 만화인데 별로 인기가 없다. 고일권 작가의 [칼부림]도 비슷하다. 아마 [고수]나 [호랑이형님] 정도가 예외랄까? 이 점에서 해외 시장의 모바일, 인터넷 원주민들을 향한 확장성 자체는 한국 웹툰이 제일 탁월하지 않나 싶다. 특히 한국 문화 자체가 적어도 아시아에서는 트렌드 선도의 중심에 있기도 하고.

아아루 칼부림 호랑이

문제는 이렇게 체계가 별로 없이 개인이 알아서 제작해서 투고하고 배포 비용도 거의 들지 않는다는 점이 양날의 칼이라는 점이다. 즉, 진입장벽이 없다. 수많은 웹망생이 오늘도 등단을 꿈꾸며 손이 터지도록 그리지만(퀄리티는 낮지만, 투입 인력도 1인~2인을 넘지 않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극도로 노동집약적이다), 진입자들이 훨씬 더 많기 때문에 상황은 더 힘들어진다.

또 현대 문화컨텐츠는 역시 베블런 효과[footnote]경제학자 베블런은 그의 책 ‘유한계급론'(1899)에서 “상류층의 소비는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기 위해 자각 없이 행해진다”고 지적했고, 이것이 과시적인 소비자의 소비가 다른 소비자에게 영향을 준다는 이른바 ‘베블런 효과’에 관한 언급이다. 이런 사치적인 소비 행태는 우리나라의 ‘명품’ 소비와 유사하다. 즉 과시적인 소비자의 소비(‘명품’ 소비)를 모방하고, 급기야 ‘짝퉁’이라도 사겠다는 유사 소비행태가 바로 베블런 효과의 일례라고 할 수 있다.[/footnote] 처럼 ‘적당한 허위의식’을 어느 정도 팔아먹을 필요가 있어서, 아무리 이렇게 말했어도 최소한의 퀄리티 관리는 필요한 법이다(‘죽음에 관하여’ 같은 오그라드는 허세 만화가 시대의 명작 취급 받는 게 딱 이걸 제대로 노린 것).

그런데 이런 종잡을 수 없는 혼돈의 시장이 가지는 문제는 퀄리티 관리가 힘들어진다는 것이다. 나름 야심차게 런칭한 고급 작품은 순위권이 바닥이고 반대로 그림, 내용은 없으나 말초적 센스가 탁월한 병맛 작품이 최상위라면 다음엔 어떤 작품을 뽑아야할까? 이런 식으로만 생각하게 되면 또 ‘네이버는 이제 고퀄 작품은 넣지도 않냐?’하면서 소비자 불만이 생기게 되고 또 완전 발퀄로 그린 [공감툰] 같은 걸 집어넣는 참사도 일어나는 법이다.

그 밖에 낮은 진입장벽과 슈퍼스타경제학의 논리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작가 혹사, 장르 획일화도 문제다. 작가 혹사는 긴 호흡을 두고 하는 퀄리티 관리를 고사시킬 수밖에 없고, 장르 획일화는 시장에 매너리즘을 확산시켜 일본처럼 침체로 가는 길을 연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현 웹툰은 낮은 진입장벽 + 머리 비우고 보는 특징 때문에 ‘아주 기초적이고 말초적인 이야기의 베이스라인’을 지키면 팔리게 되었고, 그 덕에

  1. 1020 여성타겟 만화
  2. 1020 남자 오타쿠 타겟 만화
  3. 30대 이상 남성 대상 성인만화

위 세 가지 유형의 작품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는 모양새다(물론 포털 플랫폼의 최상위에 있는 작품들은 특정 장르적 색체가 덜한 인싸들의 작품이지만 근래에는 여기서도 장르적 색체가 더 강해지고 있다). 이런 점이 물론 머리 비우고 찰나적 자극만 즐긴 뒤 다음날 다른 웹툰을 기다리는 현 플랫폼 상황에 잘 어울리긴 하지만, 더 다양한 독자층을 끌어들이지 못하면 게토화될 여지가 많다. 사견으로는 네이버 웹툰도 어느 정도 게토화가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3. 중국

이런 상황에서 요즘 자체 시장이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는 곳이 중국이다. 중국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일본 만화계를 제약하는 기존 업계의 유산이 없다는 점에서 한국과 같고,
  2. 일찌감치 자리잡은 거대 플랫폼이 존재하고 노동력이 싸다는 점에서 한국 웹툰에서는 하기 힘든 스튜디오 체제를 굴릴 수 있다.

1번은 한국과 크게 다를 것 없으니 더 설명할 것 없고, 2번은 한 마디로 인건비와 수익 등등으로 소형 공방이 최선인 한국 웹툰과 달리 중국에서는 저가노동력을 활용한 규모의 경제와 대량생산화가 가능하다는 의미다.

오오토모 가츠히로의 [아키라] (1988)에 열광하였던, [이끼]와 [미생]의 윤태호 작가가 언젠가 이런 인터뷰를 했다. “보는 재미와 읽는 재미를 놓치지 않으려면 그림이 경제적이어야 한다”고(아래 박스 참조). 독자가 원하는대로 스토리를 전개하고, 쭉쭉 치고나가려면 그림 퀄리티 면에서는 타협할 수밖에 없다.

재패니메이션의 전설이자 '사이버펑크'의 고전 [아키라] (1988)
재패니메이션의 전설이자 ‘사이버펑크’의 고전 [아키라]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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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 작가는 ‘아키라에 관하여’를 쓰면서 시각 예술로서 만화를 강조했다. 세밀한 시각적 묘사, 가령 옷 속에 숨겨진 인체의 감각까지 이야기했는데, [미생]을 보면 서사와 캐릭터에 집중한 것 같다. 그리고 그건 다분히 의도적으로 보인다. 어떤가?

윤태호: 한국에서 중견 만화가로 4인 가족을 부양하며 살아가는 건 쉽지 않다. 문하생이 4명이니 사실상 8인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 그런 상황에서 일본 작가의 몇 배나 되는 작업을 해야 먹고 사는 방편이 생긴다. 그러면서도 작품의 재미를 놓치지 않고, 즉 보는 재미와 읽는 재미를 놓치지 않으려면 그림이 굉장히 경제적이어야 한다. 허영만 선생님이 그런 경제적이면서도 훌륭한 그림을 그리는 분이다. 모든 컷에 에너지를 쏟기보다는 적절하게 분배를 잘해서 작품 전체를 봤을 때 충족감을 준다. 여백이 많아도 그저 빈 공간이 아니라 다 의미가 있다.

사실 이런 생각도 한다. 만약 나에게 누군가가 말한다고 치자. ‘지금 벌고 있는 그 돈을 한 작품 40페이지만 해도 줄 테니 잘 그려봐라.’ 그렇게 된다면 과연 내가 만족하는 퀄리티에 지금과는 다른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사실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는 작가 자신의 개념이 발현하는 것이다. 이전과는 그림에 대한 개념 자체가 달라졌기 때문에 예전과 같은 그림이 안 나온다는 거다. 더 잘 그릴 수는 있을지 모르나 그것이 [미생]의 그림과 다를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고 본다. 예를 들어 오토모 카츠히로가 [사요나라 니뽄] 같은 단편집을 냈을 때의 그림과 [아키라]의 그림을 비교해 보면, 그건 인식 체계 자체가 달라져야 나올 수 있는 그림이다. [동몽]을 통해서 ‘난 이렇게 변하겠어’라는 틀을 만들어내고, 그것에 맞는 그림이 나오는 것이지, 그리다 보니 우연히 [아키라]까지 도달했네, 이런 건 없다는 거다.

– 슬로우뉴스, 교활하게 개판인 세계에서 만화작가로 살기: 윤태호 인터뷰 (2013. 12. 20.)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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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가 없는 것이 아무리 포탈 웹툰 탑급에 위치해서 고수익을 거머쥔다고 하더라도, 그림 그리는 것 자체가 엄청난 노동집약적인 일이다보니까 과거처럼 화실에 어시스턴트 여럿 고용해가면서 그림에 혼을 싣는 게 불가능해졌다. 이런 악조건이 앞서 말한 플랫폼 조건과 잘 맞아떨어져 한국 웹툰의 발전에 기여하긴 했지만, 여전히 작가들에겐 힘든 점이고, 전개속도와 연재주기 사이에서 끝없이 갈등하게 만드는 원흉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액션만화에서 전투 같은 걸 작가가 상세히 묘사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내용 자체는 없고 그림에 신경 써야하다보니, 엄청나게 노동력이 많이 들어가는데 스크롤 생각없이 넘기는 독자는 ‘어, 뭐야? 일주일 기다렸는데 퍽퍽 투탁 으아악이 전부냐?’라고 투덜거리는 것이다. 이게 완결된 작품 10주치 몰아보면 10주치 누적된 격투씬이 주는 카타르시스라는 게 있는 건데 주간 연재 환경에선 그런 걸 할 수가 없다.

반면 중국은 저가노동력을 활용해 이 점에서 운용에 훨씬 여유를 확보한 것이다. 듣자하니 중국은 스튜디오가 스토리 작가와 그림 작가를 연결시켜주고 여러 명의 어시스턴트를 활용해서 같은 주간연재더라도 한국 만화보다 더 고퀄리티의 그림을 많은 컷수로 그려낼 수 있다고 한다. 이 점에 있어서는 마감과 주간연재 독자들의 아우성에 고통받는 한국 작가들보다 훨씬 호조건에 있는 셈이다.

중국 메이드 인 차이나

물론 이와 같은 호조건에도 불구하고 모든 중국 컨텐츠가 갖고 있는 치명적 단점이 있다.

재미가 없다. ‘구리다’. 20년 전 한국 만화 보는 유치함이 그대로 느껴진다(…) 요즘 몇 작품이 카카오페이지 등지에서 인기라길래 좀 봤는데 1화 보고는 도저히 더 볼 수가 없었다(…)

이건 공산당 검열정책으로 문화가 발전하기 힘들고 여전히 현대적 도시 대중문화가 한국 수준으로 완숙했다고 보기 어려워서 어쩔 수가 없다. 후자야 시간 지나면 해결된다지만, 전자는 해결의 기미도 안 보여서 아마 당분간 한국 웹툰판에 몰려오는 ‘차이니즈 인베이전’을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만 어느 사회나 그렇듯 그 사회의 조건 상 나올 수가 없는데 뜬금없이 튀어나오는 ‘확률적 오류’가 있기 마련이고, 이런 확률적 에러가 그동안 누적되어온 중국 웹툰의 창작 역량을 만개시키는 계기를 제공해줄 수도 있다(따지고보면 아키라도 그런 작품 아니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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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문화 컨텐츠에 대한 필자의 개성과 이에 바탕한 자유로운 해석이 담긴 비평입니다. 말할 필요도 없지만, 슬로우뉴스는 이 글과 이 글의 소재에 관한 다양한 해석과 비판을 환영합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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