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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훤주의 지역에서 본 세상] 베테랑 기자 김훤주가 잘 드러나지 않은 세상 이야기를 따뜻하고 담백한 시선으로 전합니다.

국립진주박물관에서 하는 화력조선 두 번째 이야기 조선무기특별전을 보았다. 국립진주박물관은 임진왜란 전문으로 이미 명성이 높은데 이런 재미있고 알토란 같은 기획 전시를 곧잘 보여주곤 한다. 이번 기획 전시도 대체로 그럴듯했다. 무기에 관심 있는 이른바 ‘밀덕'(군대 마니아)들은 다들 한 번씩은 가서 보았을 것이다. 무기에 특별한 흥미가 없는 보통 사람들도 충분히 한 번 둘러볼 만한 것이었다.

1. 누구의 대항해인가?


그렇지만 몇몇 걸리적거리는 게 있었다. 들머리 ‘대항해시대’ 운운과 ‘은의 바다’ 운운이었다. 먼저 대항해시대. 유럽에 한정해서 사용해야 하는 개념임에도 마치 아시아·아프리카·아메리카 등 세계 전체를 아우르는 것처럼 썼다.

그때 대항해는 포르투갈·영국·스페인·에스파니아·프랑스·영국·네덜란드 등 유럽 나라들만 했다. 다른 지역에서는 그런 움직임이 없었으며 어쩌다 중국 명나라 정화의 대원정을 꼽기도 하지만 그것은 예외적인 것이었다.

유럽이 아닌 지역에서 보면 대항해시대는 대침탈시대라 할 수 있다. 비유럽 사람들은 배를 타고 온 유럽 사람들에게 목숨과 재산과 토지를 빼앗겼다. 침략과 수탈이다. 이렇게 남의 관점을 아무 생각 없이 가져오는 잘못을 국립박물관에서 하면 안 되지 않나 싶다.

화력조선Ⅱ, 국립진주박물관 기획전시실, 2023-12-05 ~ 2024-03-10.

2. 바다는 언제나 은빛?


다음으로 ‘은의 바다’는 마치 이 시대에만 은이 화폐 구실을 했던 것처럼 보이도록 했다. 하지만 은은 시대와 지역을 넘어서는 보편적인 교환수단이었다. 물물교환도 많았지만 국경을 넘거나 바다를 건너는 거래는 더욱 그러했다.

은의 이런 기능은 멀리 갈 것 없이 우리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보아도 알 수 있고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를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이렇게 표현하면 유독 이 시대만 그랬던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은과 관련한 전시와 설명은 장황하기까지 했다. 첫머리에 붙여놓은 ‘포토시 은화’는 뜬금없다. ‘연은분리법’과 ‘수은-아말감법’은 저렇게 자세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통째 덜어내도 전시에는 전혀 지장이 없을 것이다.

나는 전시 주체들이 뭔가 그럴듯하게 보이려고 하다 보니 부지불식간에 이렇게 하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렇게 할 필요 없다. 일부러 발품 팔아 박물관까지 찾아온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아도 잘들 알아서 찾아본다.

위와 같음.

3. 너무 많은 글자… 그림이나 동영상 활용 필요성


전반적으로 글자가 너무 많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만큼 하고 싶은 얘기가 많은가보다 싶었지만 그만큼 답답한 것도 사실이었다. 뒷부분으로 가면서 그런 느낌이 더욱 커졌는데, 실물을 구하지 못했다면 그림이나 동영상을 좀더 개발할 필요가 있었지 않나 여겨졌다.

특히 이전까지 활활 타오르던 조선의 화력이 세도정치 시기에 어떻게 사그라들었는지를 보여주는 자료는 별로 언급 또는 제시되어 있지 않았다. 어쩌면 특별한 변곡점으로 꼽힐 지점인 것 같기도 한데 공백으로 남겨진 것 같은 공허함이 남았다.

위와 같음.

4. 아쉬운 마무리: 언제나 원인은 내부에


마무리도 조금 아쉬웠다. 조선의 화력이 왜 사그라들었을까? “조선과 대한제국도 일원화된 제식병기를 갖추고 최신무기로 무장한 강군을 건설하려고 했으나 일본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과연 일본의 방해가 없었으면 강군을 건설할 수 있었을까?

내가 보기에 그런 측면도 있겠지만, 지배 집단의 내재적 한계가 더 클 것 같았다. 이런 팩트로 마무리하면 어떨지 생각해 봤다. 1884년 음력 10월 19일 갑신정변 마지막 날 전투가 코앞에 닥친 김옥균 쿠데타군의 모습이다. 당시 실상이 적나라하게 충격적으로 그려져 있다.

총구가 녹슬어서 탄환이 들어가지 않았다. 미국식 총도 창고에 처박아두어 마찬가지였다. 총을 전부 거두어 방아쇠를 풀고 소제를 시작했다. 결전을 앞두고 창덕궁 여기저기서 총을 소제하느라 소란을 피웠다.” (121쪽)

“주체들의 비상회의에서는 빨리 총기의 소제를 끝마치되 일본군이 방위의 전면에 나서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곧바로 한 무리의 청군이 무차별로 총을 난사하며 선인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123쪽)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18-민중의 함성 동학농민전쟁.
위와 같음

나머지는 다 좋다


몰랐던 사실도 많이 알게 되었고 새로운 역사 흐름의 맥락도 제대로 짚어서 보여주었다. 이토록 알찬 기획 전시는 앞으로도 드물지 싶다. 나는 거기서 두 시간을 보냈는데 어떤 사람은 더 오래 머물러도 좋을 것 같다. 3월 10일까지 한다. 얼마 남지 않았다.

위와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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