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눈을 의심하는 기사를 접했습니다. [한국판 미슐랭 가이드 나온다]는 기사죠. 왜 이 기사를 보고 눈을 의심했느냐면 이것과 완전히 똑같은 기사가 1년 전에도 나왔었기 때문입니다. [한국판 ‘미슐랭 가이드’ 나온다]는 기사입니다. 따옴표만 빼고 완전히 똑같죠?
한국형 미슐랭 가이드를 향한 의지
2013년 5월에 나온 뉴스는 ‘음식관광 활성화 방안’이라는 취지에서 나온 이야기이고, 2014년 3월에 나온 뉴스는 ‘신식품정책 추진계획’의 일부였습니다. 정부 차원에서 1년에 걸쳐서 2번이 언급된 것을 보면 ‘한국판 미슐랭 가이드’를 만들고자 하는 의지는 실재하는 것 같습니다.
2013년 5월에 나온 음식관광 활성화 방안은 이렇습니다.
- 고택ㆍ종택과 연결한 종가음식 개발 및 상품화(대통령이 직접 언급한 방안)
- 전통음식 명인 연계 체험상품 개발
- 전국 각 지방 전통ㆍ유명 음식을 표기한 ‘맛 자원’ 지도 제작
- 음식관광 코스 개발
- 메뉴판 표기 등 식당문화 개선
- 한국판 미슐랭 레드 가이드 발간 추진
그리고 2014년 3월에 발표한 신식품정책 추진계획의 주요 과제는 이렇습니다.
- 국민 식생활·영양 개선
- 농식품 품질·안전관리
- 국산 농산물 수요 확대
- 식품산업의 글로벌 경쟁력 제고
- 외식산업 선진화와 한식 진흥
- 정책 추진기반 조성
그런데 여기에 더해서 기사에 “농식품부는 먼저 국내 외식산업 서비스 수준을 향상하기 위해 프랑스 미슐랭 가이드와 같은 민간 기반의 음식점평가시스템 도입방안을 연내 마련할 계획”이라는 언급이 있습니다. 이것은 ‘외식산업 선진화와 한식 진흥’과 ‘식품산업의 글로벌 경쟁력 제고’라는 측면에서 이루어지는 산업인 것 같습니다. 물론 함께 언급된 ’10-10 프로젝트’가 훨씬 황당한 이야기이지만, 여기서는 거기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정착한 한국의 음식평가제도
한국판 미슐랭 가이드가 이렇게 2번이나 언급된 것을 보면 정부에서는 이에 대해서 상당한 의지를 가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한국에는 이미 지자체별로 음식평가제도가 도입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친숙한 ‘모범음식점’이 대표적인데, 이미 오래전부터 유지되어온 제도입니다. 이 모범음식점 제도는 식품위생법에 근거해서 일정 수준의 시설요건과 위생조건을 갖추면 부여받을 수 있기 때문에 제도적인 문제점이 많이 지적되고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서울시 광진구의 경우에는 모범음식점 등급제를 시행해서 점검 시 C등급을 3번 받으면 모범음식점 지정이 취소되게 하는 방식으로 개선책을 내놓기도 했죠. 그러니까, 음식점평가시스템은 모범음식점이라는 이미 운용되고 있는 제도를 보완해서 제대로 기능하게만 해도 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굳이 민간 기반의 음식점평가시스템을 도입하려고 하는 것일까요? 그 답은 간단하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정부가 관여된 사업을 민간 업체에서 하게 되면 상당한 규모의 자금 지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겠죠. 이른바 ‘눈먼 돈’을 노리고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이 눈먼 돈으로 만들어지는 사업이 과연 사업성이 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좀 해보고자 합니다.
미슐랭 가이드의 기원과 발전사
미슐랭 가이드는 1900년 파리만국박람회를 계기로 타이어 제조사였던 미슐랭이 자동차 운전자들을 위한 여행 가이드북으로 발행했던 것이 시초입니다. 당시에는 자동차가 이제 막 보급되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미슐랭은 브랜드의 가치를 높이는 의미에서 미슐랭 가이드를 계속해서 발행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타이어 구매자나 자동차 정비소에 무료로 나누어주던 책이었으나, 무료로 받았던 책을 아무렇지도 않게 취급하고 쉽게 버리는 것이 문제가 되면서 1920년부터는 무료 배포를 중지하고 유료로 판매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레스토랑에 별을 붙이는 방식의 평가제도는 1930년에 시작된 것으로 처음에는 단순히 별을 붙이는 것에 불과했지만, 조금 더 가치를 지닌 레스토랑에는 별 2개를 붙이다가 1933년부터는 별을 최대 3개까지 붙이는 방식이 도입되었습니다. 1940년부터 1945년까지 전쟁의 여파로 출판이 중단되었다가 전쟁이 끝난 뒤 다시 출판이 시작되었지만, 별점은 사라졌습니다. 그러던 것이 1950년도 판부터 별점 방식이 다시 부활하여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잘 알려졌듯이 미슐랭 레스토랑 가이드는 미슐랭(미쉐린)의 직원들이 익명으로 식당을 직접 조사한 뒤에 다양한 기준으로 체크를 해서 가이드에 게재할 것인지 아닌지 여부와 게재후에 별점을 줄 것인지 아닌지를 정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집니다. 미슐랭 가이드는 이러한 작업을 100년 넘게 하고 있기 때문에 상당한 권위를 갖고 있고, 이 때문에 미슐랭 가이드에 소개되는 것만으로도 레스토랑의 매출이 30%까지 향상되기도 한다고 합니다.
잘 팔리지 않는 권위
그런데 이러한 권위와는 달리 정작 미슐랭 가이드는 그다지 잘 팔리지 않는 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미슐랭 가이드 제작 사업은 매년 약 1500만 유로 (약 219억 원)의 적자를 내는 사업입니다. 2010년 액센츄어(Accenture)에 컨설팅을 받았을 당시에 미슐랭 가이드 사업은 2015년에 1900만 유로(약 278억 원)의 적자를 낼 것이며 2011년부터 5년 동안 누적 8000만 유로(약 1169억 원)의 적자를 낼 것이기 때문에 폐간도 고려해야 한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받게 됩니다. 이것을 계기로 여러 국가나 도시의 가이드가 사실상 폐간되고, 여러 분야로 나누어진 가이드들을 하나로 통합하며 직원들도 정리하는 방식으로 구조조정을 단행했지만 여전히 미슐랭 가이드는 미슐랭사의 자존심 때문에 유지하는 대표적인 돈 버리는 사업으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미슐랭 가이드의 판매 부수는 2008년에 전 세계 약 120만 부, 2009년에는 약 100만 부로 알려져있습니다. 미슐랭 가이드가 얼마나 안 팔리는 책인지는 일본판 사례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미슐랭 가이드 도쿄판은 2008년에 처음으로 발행되었는데요. 2008년 당시 일본판 발행에 대한 기대감과 대대적인 마케팅으로 약 20만 부가 팔린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도쿄의 한 대형서점에서만 2만 부가 들어와서 전권이 판매되었다고 할 정도로 인기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판매 실적은 미슐랭 가이드 해외판으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실적이었고, 이 때문에 2009년 판은 보다 더 대대적인 마케팅을 하며 내놓았지만 판매 부수는 2008년과 비슷한 20만 부가 조금 안 되는 수준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2010년 3월에 미슐랭 가이드에서 별 3개짜리 레스토랑으로 지정된 일식집에서 노로바이러스에 의한 식중독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때 미슐랭 가이드측이 이 레스토랑에 대한 별 3개 평가를 취소하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크게 사회문제화되었고, 미슐랭 가이드 측이 결과적으로 별 3개 평점을 취소하지 않으면서 상당한 비난을 받게 됩니다. 이런 여파인지 미슐랭 가이드 도쿄 2010년 판은 추정 판매 부수가 8만 부 선까지 떨어집니다.
그리고 이러한 판매 부수 감소는 계속 진행되어 2011년 이후의 실질적인 판매 부수는 3만 부 전후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물론 일본에서는 도쿄 이외에도 교토・오사카판도 나오고 있으니까 양쪽 모두 합치면 5만 부 전후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일본에서 구루메가이드의 일반적인 판매 부수가 3만 부 수준인 것을 고려하면 미슐랭 가이드 일본판도 그냥 하나의 고급레스토랑 가이드북에 지나지 않는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
미식의 대국인 일본조차도 5만 부를 팔기가 힘든 미슐랭 가이드가 한국에서 몇 부나 팔 수 있을까요? 물론 미슐랭 가이드 일본판은 영문판이 함께 나오고 있기 때문에 일본 현지의 판매와 더불어서 일본은 찾는 관광객을 위한 가이드북으로서도 판매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미슐랭 가이드의 실판매 부수를 생각하면 그다지 많은 부수가 팔릴 것 같지는 않습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그러니까 미슐랭 가이드와 같은 방식으로 객관적인 기준을 세워서 매년 음식점을 체크해서 관리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규모의 예산이 필요합니다. 100년 동안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놓은 미슐랭 가이드의 적자 규모도 매년 200억 원이 넘는 걸 생각해보시면,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아무리 한국의 주요 도시라는 적은 섹터만을 대상으로 한다고 해도 천문학적인 적자가 예상됩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죠.
그래도 미슐랭이 이런 수백억의 적자를 내는 사업을 유지하는 것은 앞서 이야기한 100년이 넘는 전통에 대한 프라이드, 그리고 미슐랭 가이드가 발행된 지역에서 미슐랭의 매출이 3% 오르는 효과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나마도 지금은 일본의 브릿지스톤에 밀려서 별 효과가 없다고 하지만요. 그래도 여전히 ‘미슐랭 타이어의 매출을 향상하는 효과’라는 명분은 유지되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방송국에서 제작하는 맛집 교양프로 만드는 수준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미슐랭 가이드 뿐만이 아니라, 비슷한 형태의 고급레스토랑 가이드 사업들은 현재 어느 곳이나 적자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서 전문 평가위원에 의한 고급레스토랑 평가는 불특정다수에 의한 식당 평점 시스템을 이길 수 없게 되었습니다. 또한, 점차 일반인이 부담 없이 가기에는 너무나 가격이 비싼 고급 레스토랑 소개는 대중들에게 별로 유용한 정보가 아니기 때문에 외면을 받게 되었고요.
한국형 미슐랭 가이드 과연 필요할까?
또한, 요즘 미식 마니아들은 미슐랭 가이드 같은 가이드북의 평가를 무조건 신뢰하지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참고자료로서 삼는 것입니다. 실제로 일본에서 미슐랭 가이드가 처음 발매되었던 2008년에도 가이드에 실린 가게들은 이미 그전부터 미식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가게들이었습니다. ‘미슐랭도 이 가게들을 평가했다’ 이상의 가치 부여는 어려웠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미 우리나라에는 다양한 맛집 평가 사이트가 있습니다. 메뉴판닷컴 가보세요. 전국에 맛집이란 맛집은 이미 다 등록되어 있습니다. 심지어는 서울시에서 만든 맛집 데이터베이스도 있습니다. 물론 영어, 일본어, 중국어로 잘 구성해놨습니다. 한국판 미슐랭 가이드를 만드느니, 차라리 이런 지방자치단체에서 만든 데이터베이스를 홍보하는 게 훨씬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정부에게 주문하고 싶은 것은 이겁니다.
“제발 아무것도 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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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필자가 운영하는 웹진 [데카르챠]에도 실렸습니다. 원문의 표제와 본문은 슬로우뉴스 편집원칙에 따라 수정, 보충했습니다. (편집자)
첨에 미쉘린 레스토랑 가이드 서울이 출범한다는줄 뉴스인줄 알고 흥분했었는데 역시나 하하. 저도 정부 주도로 하는건 반대입니다. 제발 하지마 플리즈.
옳소!! 동감입니다… 제발 하지 마…
미슐랭가이드 독일판 독일어로 잘 나오는데 제시하신 자료에 누락되어있네요
http://www.amazon.de/Michelin-Guide-Deutschland-Germany-2001/dp/2060003016/ref=sr_1_3?s=books&ie=UTF8&qid=1398858114&sr=1-3&keywords=michelin+red
참조하시면 2001년판이 이미 독어로 출판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최신판은 2014년 판입니다.
아니 뭐 오늘 산책하러 간김에 서점에서 봐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