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림.
인간은 사람속(호모) 사람(호모 사피엔스)종에 속하는 유일한 현존 인류입니다. 사람속에 속하는 다른 인간종들 가령, 호모 사피엔스 이달투, 네안데르탈인, 데니소바인 등은 모두 멸종하고 유일하게 호모 사이엔스종만 남았죠. 이 글에서 ‘인간종 다양성’은 ‘(인간의) 문화적 다양성’에 관한 비유라는 점을 알려드립니다. 이 점에 오해가 없으시길 바랍니다. (편집자)
나는 생물종 다양성의 문제보다 인간종 다양성의 문제가 훨씬 심각하며, 후자가 전자의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놀랍게도 인간종 다양성의 문제는 이야기가 나오질 않는다.
잠깐 다른 이야기지만, 주디스 버틀러 식으로 “인간 중심주의를 벗어나자”는 이야기를 나는 아주 싫어한다. 이건 유럽인들이 ‘유럽 중심주의’를 벗어나겠다는 말과 마찬가지로 가능하지도 않으면서 젠체만 이빠이하는 더욱 황당한 최신판 ‘유럽 중심주의’로 귀결될 뿐이다. 루쉰 선생 말마따라 “자기 머리카락을 잡아당겨서 지구를 떠나고자 하는” 짓이랄까. 인간은 인간이 되지 않으면 자연에 대한 책임을 다할 수 없다. 생물종 다양성 걱정하기 전에 인간종 다양성부터 책임지는 게 옳다.

유전자와 대진화(macro-evolution)에만 집착하는 생물학적 편향을 벗어나서 본다면, 인간은 하나의 종이 아니며 지금도 진화하고 있는 중이다. 피그미족과 필라델피아 마약 정키와 이누이트와 상하이의 중산층이 어떻게 같은 생물종인가? ‘문화’만이 아니라 서식지를 꾸리고 자연과 인간과 관계맺는 방식에 있어서 완전히 다르다. 인간은 그래서 80억으로 불어나며 지구 전체를 덮었다.
200년전까지만 해도 인류는 ‘인간종 다양성’에 있어서 놀라운 존재였다. 그런데 산업혁명이 개시된 이후 개체 수도 놀랍게 불어났을 뿐만 아니라 그 다양성이 놀랍게 빠른 속도로 소멸하였다. 몽고의 유목민도 SUV를 몰고 있으며, 남태평양 어민들도 디젤엔진을 사용하며, 이슬람 청소년들도 BTS에 열광하며, 온 세계인들은 틱톡으로 연결되었다. 문화적 유전자(meme)의 차원에서 보자면, 유전자의 다양성은 거의 소멸한 상태이다.
극단적인 효율을 추구했던 캐번디시 바나나의 숙명.
유전자 다양성이 거의 소멸한 바나나와 표범과 바다표범 등은 개체수가 아무리 많다고 해도 환경이 조금만 변하면 금방 떼죽음으로 멸종할 위기에 있다. 인간도 똑같다. 1970년대의 서울이라면 전기가 한 사흘 끊어진다고 해서 도시가 마비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하루만 끊어져도 도시는 봉기가 벌어지고 난장판이 될 것이다. 10일이면 내란이 벌어질 것이며, 100일이면 외국과의 전쟁이 벌어질 것이다.
문화적 유전자는 단순한 ‘정신적 문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의 물질 생활은 그 ‘정신적 문화’에 묻어들어 임베디드(embedded)돼 있다. 80억이 똑같이 ‘안드로이드 양’을 꿈꾸게 되면 니켈과 희토류는 금방 작살이 날 것이며, 태양판 바람개비가 지구를 뒤덮을 것이며, 버려진 컴퓨터와 핸드폰이 방글라데시의 산천을 박살낼 것이다. 쌀과 옥수수와 보리만 경작되면서 다른 작물들 다른 식물들이 박살날 것이며, 공장식 사육과 대규모 경작으로 담수자원이 박살날 것이며 등등등.
당연히 이는 각종 생태 위기 그리고 생물종 다양성의 파괴로 나타난다. 바다표범을 그토록 살리려하는 인간들은 왜 바퀴벌레는 오늘도 멸종시키려 혈안이 되어 있을까? 전자는 예쁘고 후자는 못생겼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벌레를 신으로 모시기도 하고 먹기도 하는 문화는 모두 사라졌다. 버마 오지의 부족들도 이제는 뱀과 개구리를 즐겨먹지 않는다고 한다. 생물종 다양성을 지키겠다는 명분으로 이런저런 생물종을 살리자는 운동도 가만히 보면 순전히 인간들의 욕심 그것도 똑같이 ‘안드로이드 양’을 꿈꾸는 80억 마리의 (나 포함) ‘안드로이드 양’의 욕심에 맞는 생물들만 살리겠다는 노아의 방주 꾸리기에 불과하다. 훨씬 근본적인 문제는 인간종 다양성의 회복이다.

돈과 가치.
그렇다면 인간종 다양성은 왜 파괴되었는가? 여기에는 우파의 기여가 있고 좌파의 기여가 있다. 하나는 ‘돈’이고 다른 하나는 ‘가치’이다.
첫 번째, 짐멜의 ‘돈의 철학’의 핵심 명제, “돈은 이제 모든 가치들을 지배하는 가치”가 되어 있다. 인간종 다양성은 다양한 가치 혹은 ‘실질적 합리성’의 병존이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그런데 인류가 몇 천 년 몇 만 년 유지해왔던 이 다양한 가치는 모조리 ‘돈’으로 그 가치가 측량되어 서열이 매겨지고, 싸구려들은 모조리 땅으로 버려져서 새로운 세대들은 어김없이 내다 버린다.
두 번째는 ‘가치’이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의도치 않은, 후배들에 의한 역작용으로, ‘보편적 가치’라는 것을 휘둘러서 거기에 부닥치는 모든 삶의 방식들을 다 분쇄하고 박멸하였다. 나는 80년대 한국의 ‘마당극 문화’가 소련 미학 어쩌고를 들여온 진중권과 ‘노문연’ 무리들에 의해 어떻게 찐따 취급을 받고 소멸했는지가 똑똑히 기억이 난다.
여기서부터는 지뢰밭이다. 이 ‘돈’과 ‘(진보적) 가치’의 힘으로 인간종 다양성이 19세기 이후로 급격하게 소멸해온 현상을 비판하게 되면 어김없이 근대 일반을 부정하는 반동으로 귀결되며, 때로는 파시즘으로까지 치닫게 된다. 생각의 진전에 있어서 한 걸음 한 걸음이 지뢰밭처럼 조심스럽다. 화폐경제의 효율성과 계몽주의의 보편적 가치의 소중함을 계승하면서 다시 인간종 다양성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그러니 “인간 중심주의를 버리자”라는 건방진, 최악의 ‘인간 중심주의’부터 때려치자. 인간은 가장 인간적이 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 이를 위해서는 ‘돈-자본’과 ‘(진보적) 가치’라는 것에 대해 철저한 분석과 자기비판과 성찰이 이루어져야 한다. 인류의 진화는 여기에서부터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

하나 덧붙이자면, 내가 나를 포함한 똥팔륙 세대의 정서와 문화에 느끼는 창피함이 여기에 있다. 90년대 이후 급격한 경제와 소비 팽창의 와중에서, 이 세대는 자기들이 ‘돈’도 ‘(진보적) 가치’도 모두 가지고 있다는 기고만장으로 살아오면서 한국의 삶에서 내려오는 거의 모든 종 다양성을 다 박살내버렸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읽으면서 전국을 자동차로 누비며 몰려다니는 게 그러고 나서 맛집가서 때려먹는 게 얼마나 쌍스럽고 천민적인 짓인지 누구도 말리지 않는다. 하나하나가 깊고 소중하게 접근하고 교감해야 할 문화유산을 주마간산처럼 떠돌아 다니며 야부리 거리로 만든 이야기를 창피한 줄도 모르고 출판사는 신이 나서 그 책을 무한히 줄줄이 찍어낸다. 보잘 것 없는 절의 초라한 산신간에 올라와 절하는 할머니와 한 30분 같이 이야기하고 배우려는 사람은 이제 또라이 핵아싸 소리를 듣고 멸종하였다. ‘문화 이론가’들이라는 이들은 프랑스와 미국 대학의 ‘최신’ 이론들이 무슨 미래의 빛이나 되는 양 힙스터(라고 쓰고 햄스터라고 읽는다)만 양산하였다.
그 만만한 동네북은 결국 ‘돈’도 없고 ‘배운 것’도 없는, 주로 술 담배에 절고 길거리에 침이나 뱉으면서 야동이나 찾아보는 뻔한 서민 남성들이 되었다. 이들은 이제 공식적 빌런이며 문화와 음악과 영화와 소설에 단골로 등장하는 트롤들이 되었다. 문제는 그 트롤들의 비율이 인구의 절반이 넘는다는 데에 있다. 이 트롤 박멸전은 오늘도 가열차게 진행되고 있다.
인간종 획일성의 극단, 넷플릭스와 뉴욕타임스를 보라.
웰즈의 ‘타임머신’에 나오는 끔찍한 비전. 80만년 후의 인류는 하얗고 팔다리가 가늘고 천사와 같은 인종과 시커멓고 어둠 속에 살면서 식인과 살인을 서슴치 않는 악마 두 종류로 갈라진다. 이것도 인간종 다양성일까?
그만 쓴다. 여기서부터 지뢰밭이고, 지뢰밭에서 자기 길을 찾는 것은 다 개인의 몫이며, 더 이야기해봐야 내가 찌질하게 비틀거리며 똥밟고 휘청거린 흔적만 나올 것이니까.

하지만 인간종 다양성은 급격히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다양성(diversity)’을 코스모폴리타니즘의 최고 가치로 삼는 이 21세기의 제국 시스템에서 벌어지는 포복 절도의 패러독스이다. 내 눈에는 진짜 트롤들은 ‘돈’과 ‘가치’를 창칼처럼 휘두르며 자기를 내세우는 좌파 우파들일 뿐이다. 그 결과 인류는 델몬트 농장의 바나나들마냥 똑같은 유전자의 비실비실한, 획일종으로 전락하였다. 인간종 획일성을 느끼고 싶은 분들은 뉴욕타임즈와 넷플릭스를 권한다.
인간종 다양성 상실이 우려스럽다면, 그 원인과 맥락을 짚고 해결책을 제시하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글은 왜 이렇게 불쾌한 감정만 분출하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제가 이해력이 부족한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글을 두 번 읽어도 좌우파가 합작해낸 인간종 다양성 상실이 어떻게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읽으며 문화유산을 몰려다니며 감상하는게 쌍스러운 일인지, 왜 술 담배에 절어 길에 침이나 뱉는 서민 남성들이 트롤이 되었는지와 연결되는지 모르겠어요. 이런 일기 같은 글을 게시한 편집자의 의도가 궁금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