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가 원래 DVD 대여 서비스로 출발했다는 건 다들 알고 있을 텐데 아직까지도 DVD 대여를 계속해 왔다는 건 모르는 사람이 많았을 것 같다. 최근까지도 100만 명 이상이 DVD 대여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
마지막 랜덤 우편 발송.
- 넷플릭스가 DVD 서비스를 접는다고 밝힌 건 지난 4월20일이었다.
- 8월18일 구독자들에게 발송한 메일에서는 DVD 서비스 구독자들에게 깜짝 선물을 준비했다고 밝혔다. 구독자들에게 최대 10개의 DVD를 랜덤으로 보내주는데 우편이 도착할 때까지 어떤 DVD를 받게 될지 알 수 없다. 럭키 박스 같은 방식이다.
- 9월29일에 우편으로 발송하면 2023년 10월27일까지 반송해야 하는 조건이다. 물론 미국 한정이라 한국과는 상관 없는 이야기다.
이게 왜 중요한가.
- 어쨌거나 한 시대가 끝났다는 신호다. 넷플릭스의 빨간 바탕에 타이포는 사실 초창기 우편봉투의 디자인을 거의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처음에는 핑크색 봉투였다.)
- 요즘 누가 DVD로 영화를 보느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넷플릭스가 스트리밍하는 영화가 전체 영화 가운데 아주 일부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 넷플릭스가 보유하고 있는 DVD는 10만 종에 이른다. 그런데 넷플릭스가 스트리밍하는 영화와 드라마는? 미국 기준 6200종 밖에 안 된다. (미국 아닌 다른 나라들과 비교하면 한국은 3000종 수준일 가능성이 크다.)
- 언젠가부터 넷플릭스에서 뭔가 볼 게 없다고 생각했다면 실제로 그렇게 됐기 때문일 수도 있다. 넷플릭스가 정확한 수치를 공개하지 않고 있지만 오히려 타이틀이 줄어들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2014년 넷플릭스는 6494편의 영화를 서비스했는데 2019년에는 4000편 미만으로 줄었다. 스트리밍 시장에 경쟁이 치열해 지면서 디즈니와 워너브러더스 등이 잇따라 영화 콘텐츠 공급을 중단한 것도 컸다.
- 넷플릭스 스트리밍 서비스에는 ‘시민 케인’도 없고 ‘멋진 인생(It’s a Wonderful Life)’도 없다. 아카데미 상을 받아도 넷플릭스에 뜨지 않는 경우도 많다. 와이어드는 “일주일에 두 번씩 넷플릭스 앞에 앉아서 영화를 보는 영화 팬이라면 1년 안에 플랫폼의 1990년대 영화 컬렉션을 모두 소진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그만큼 콘텐츠 풀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다. 최신 영화와 드라마는 계속 업데이트되지만 지나간 영화는 있다가도 사라지는 경우가 많다.
TMI.
- 넷플릭스가 25년 동안 우편으로 발송한 DVD와 블루레이디스크가 50억 개에 이른다.
- 넷플릭스의 DVD 대여 서비스는 매출이 계속 줄었다. 2013년 9.11억 달러에서 2022년 1.46억 달러까지 줄었다.
- 2011년 전성기 시절에는 가입자가 2000만 명에 육박했고 1주일에 1200만 개의 DVD를 배송했다. 지난해 DVD 매출은 1억4570만 달러. 적은 금액은 아니지만 전체 넷플릭스 매출의 0.5%에 그쳤다.
- 25년 전(1997년)에는 4달러에 DVD 1장을 빌리고 1주일 뒤에 반송 봉투에 담아 보내는 방식이었는데 1999년에 정기 구독 모델을 도입하면서 월별 과금으로 바뀌었다. 한 번에 한 장을 받아볼 수 있는 스탠다드 DVD 요금제는 월 7.99달러, 두 장씩 받아볼 수 있는 프리미어 요금제는 월 11.99달러였다. 블루레이를 추가하면 9.99달러를 추가하면 됐다.
- 사실 2007년 넷플릭스가 처음 스트리밍 서비스를 시작할 때는 DVD 구독자들에게 무료로 제공되는 번들 성격이었는데 2009년에는 이미 스트리밍이 DVD 대여 건수를 넘어섰다. 2011년에 스트리밍 서비스와 DVD 대여 서비스를 분리했다.
다르게 읽기.
- CNN에 따르면 미국은 여전히 인터넷 상황이 좋지 않은 곳이 많다. DVD 대여 서비스를 중단하면 아예 영화를 볼 수 없는 지역도 많다는 이야기다. 집에 인터넷을 설치하지 않은 노인들에게도 DVD 대여 서비스 중단은 당혹스러운 일이다.
- 멜론이나 벅스에는 거의 모든 노래가 있다. 교보문고나 예스24, 알라딘 등에도 거의 모든 책이 있다. 그런데 영화나 TV 프로그램을 한 군데서 볼 수 있는 곳은 없다.
- 넷플릭스에서 영화가 전체 시청 시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3분의 1 정도다. 넷플릭스가 앞으로도 영화에 큰 투자를 하지 않을 거라는 의미다. 실제로 넷플릭스에는 2000년 이전의 영화가 거의 없다. 1990년 이전에 제작된 영화는 79편 밖에 안 된다.
- 화질도 논란이었다. 기즈모도는 16:9로 촬영한 영상을 넷플릭스가 2.39:1로 자르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한 바 있다. 카메라 워킹의 상당 부분이 훼손된다는 지적이었다.
알짜배기 사업을 왜 접을까.
- DVD 대여 서비스는 수익성도 좋았다. 영업이익률이 한때 50%가 넘었다.
- 스트리밍 서비스는 가입자 1명이 만드는 이익이 2.4달러인데 DVD 대여 서비스는 17.3달러에 이른다. (2021년 4분기 기준.) 영업이익률이 각각 10.9%와 52.4%다.
- 넷플릭스는 2020년부터 구체적인 숫자를 공개하지 않고 있는데 2019년 말 기준으로 215만 명이었고 최근까지도 100만 명 이상 남아있었던 것으로 추산된다. 급격히 줄어들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 넷플릭스 창업자 리드 헤이스팅스는 “기업은 너무 빨리 움직여서 죽는 경우가 거의 없고 너무 느리게 움직여서 죽는 경우가 많다(Companies rarely die from moving too fast, and they frequently die from moving too slowly)”고 말한 바 있다. 어차피 접어야 될 사업이라면 빨리 접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고 볼 수 있다.
생각해 볼 부분.
- 프랑수와 트뤼포가 제안한 사고 실험이 있다. 세상에 책이 한 권 밖에 없고 그 책이 도서관에 보관돼 있는데 외부 대출이 안 된다고 상상해 보자. 비디오(VHS) 테이프가 등장하기 이전의 영화가 그런 느낌이었다. DVD와 블루레이의 시대가 시작되면서 누구나 영화를 소장할 수 있게 됐지만 스트리밍의 시대로 넘어오면서 물리적인 디스크를 버리고 나니 오히려 선택의 폭이 줄어들었다.
- 독점 기업의 문제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애초에 월 정액 서비스의 구조적인 한계라고 봐야 한다. DVD는 한 번 구매하면 추가 라이센스 비용을 물지 않아도 되지만 스트리밍 서비스는 서비스 목록에 들어 있으면 계속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잘 나가는 것만 남겨두고 잘라내야 하는 구조다.
- 아마존은 세상 모든 책을 갖다 놓고 롱테일 시장을 만들 수 있지만 개별 과금이니까 가능한 모델이고 정액 과금 방식의 넷플릭스는 애초에 롱테일이 불가능하다. (정액제 이북 서비스인 밀리의서재나 리디북스도 비슷한 딜레마에 빠져있을 가능성이 크다. 꼭 보고 싶은 책은 없고 있는 책 가운데서 골라 봐야 하는 상황. 물론 책과 영화는 또 다르다.)
-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영화 매니아들은 다시 영화를 소장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게 될 수도 있다. 구독 피로감이 늘어날 것이고 광고를 넣은 무료 스트리밍 서비스 시장이 새로운 기회를 맞게 될 가능성이 크다. 포브스가 “구독 취소의 시대(The Great Unsubscribe)”라고 규정한 것처럼 우리는 선택을 좋아하지만 주도적인 선택이 아니라면 좌절감을 느끼게 된다.
- 플랫폼의 횡포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플랫폼 의존도가 높아질수록 선택의 폭이 줄어든다는 사실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는 있다. 넷플릭스와 웨이브와 디즈니플러스를 동시에 구독해야 하는 사람들의 인내심이 한계에 이르고 있다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