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2일, 만추의 어둠이 짙게 깔린 서울대공원. 수천 명의 젊은이가 비명을 지르며 뛰어다니고 있다. 한 편에서는 피와 해골 분장으로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좀비들이 뛰는 젊은이들의 생명줄을 뺏기 위해 텀블링을 해가며 쫓고 있다. 좀비와 그들을 피해 달리는 러너(runner)들의 비명과 헐떡이는 숨소리가 섬광처럼 어둠의 적막을 깨어 놓았다. 드디어 결승점. 좀비들을 피해 생명줄을 지켜내며 이곳에 도착한 러너들은 더할 수 없는 환희로 다시 한 번 비명을 질렀다. 좀비를 피해 넘어져 무릎에는 상처가 나도 아랑곳없이 기뻐하는 그들의 표정은, ‘활력’이라는 밍밍한 말로는 모자란, 일종의 ‘광기’까지 품어냈다.
좀비와 러너를 선택해서, 좀비런!
지난해 열린 ‘좀비런’이라는 아주 독특한 행사를 묘사해 보면 위와 같을 것이다. ‘좀비런’은 출발점에서 도착점까지 3Km 구간을 달리는 ‘스포츠’이자, 참가자들이 ‘좀비’(zombie)와 ‘러너’(runner)라는 캐릭터를 선택해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게 즐기는 ‘게임’이자 참가자들이 하나가 되어 즐기는 ‘페스티벌’이다.
참가자들은 좀비와 러너 가운데 원하는 캐릭터로 참여할 수 있다. 러너는 3개의 생명줄을 허리에 묶고 출발점에서 도착점까지 정해진 코스를 뛰면 된다. 중간에 좀비들이 튀어나와 러너의 생명줄을 뺏으려 하니 이를 피해 무사히 도착점에 도달하는 것이 목표. 반면 좀비들은 저마다 기괴한 분장을 하고 최대한 러너의 생명줄을 빼앗는 것이 임무이다.
행사의 신선함 때문인지 공식행사로 처음 소개된 ‘좀비런’에 무려 7천 명의 참가자가 몰렸다. 티켓몬스터를 통해 4차에 걸쳐 입장권을 팔았는데 1차는 20시간 만에 매진됐고 마지막 4차는 무려 8분 만에 완전히 매진됐다.
미국을 비롯한 외국에는 ‘좀비’라는 캐릭터가 갖는 힘도 있고 문학작품은 물론 영화, 게임을 통해 지속적인 스토리로 재탄생하지만, 국내에서 좀비는 아직 대중화된 캐릭터는 아니다. 해외에서 ‘좀비 마라톤’이 인기를 끄는 것은 좀비가 갖는 고정 팬의 힘이라 할 수 있으나 국내에도 ‘좀비런’ 행사가 대박을 쳤다는 것은 의외의 일이라 생각됐다.
이 행사를 기획, 운영한 커무브의 원준호 대표를 만났다. 20대 후반의 젊은 창업자, 그는 역시(?!) ‘좀비 매니아’였다.
좀비는 역설적으로 생존 본능을 항변하는 캐릭터
언제부터인지 마음이 힘들 때 좀비 영화를 보는 게 취미가 됐습니다. 보기에도 흉측하고 죽어있는 좀비는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사람들을, 때론 사랑하는 사람들을 공격하며 삶을 이어 가기도 합니다.
원 대표는 어느 날 극심한 슬럼프에 빠져 좀비 영화를 보면서 ‘이거 난데?’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울한 사람들은 아무런 의욕이 없이 움직인다. 시체로 살아가는 좀비와 같다. 게다가 좀비와 접촉이 있는 사람들이 다시 좀비가 되는 것처럼 우울증도 전염성이 있다.
좀비는 역설적으로 생존 본능을 가장 항변해주는 캐릭터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죽었지만, 생명을 모질게 연장하고 있는 것이죠. 의욕을 잃고 좀비처럼 하루하루를 보내는 사람들에게 활력을 주고 싶었습니다. 바로 몸을 움직이는 것이죠!
그는 유독 일찍부터 힘없고 의욕마저 잃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절망을 목격했던 경험이 많았다. 대학 초기 봉사 활동을 단순히 ‘스펙쌓기’로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노인들 목욕시켜 드리는 일을 자원했다. 좁은 임대 아파트에서 혼자 사시는 어른들과 만나면서 어두운 실내에 한껏 웅크리고 있는 모습에 마음 아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늙고 병들었다’는 생각 자체가 노인들에게는 모든 활력으로부터 스스로 소외시키는 이유라고 생각됐다. 그 어른들이 밖으로 나가 활기 넘치는 사람들을 보기만 해도 소외감을 씻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의무소방관으로 소방서에서 국방의 의무를 다할 때였다. 동료 중 한사람이 소방차에 목을 매어 자살했다. 다리를 다쳐 일하지 못하게 된 그 소방관을 독방에서 지내게 했는데 바쁜 사람 중에서 혼자 떨어져 지내게 되자 스스로 무능하게 소외됐다는 고독감에 푹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힘든 일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런데 절망하는 사람들은 우울함이 극도로 심해져 스스로 가두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혼자 방에 틀어박혀 꼼작하지 않고 지내다 보면 다시 우울증이 눈덩이처럼 커지는 거예요.
원 대표는 그때부터 주변에서 어떤 이유로든 실의에 빠진 사람들을 보면 막무가내로 밖으로 데리고 나와 몸을 움직이게 했다. 사법고시에 낙방해 두문불출하는 선배를 매일 집으로 찾아가 한 달 동안 등산을 함께하기도 했다. 이런 경험을 통해 몸을 움직이고 땀을 빼고 나면 마음의 활력을 찾는데도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됐다.
그 자신도 첫 번째 공동 창업했던 회사를 그만두고 상실감에 빠져 있었던 적이 있었다. 우울함에서 헤어 나오기 위한 노력으로 ‘함께 움직이는’ 경험을 만드는 회사, 커무브(Co-move)를 만들었다.
‘사람들을 뛰게 하자’는 런 페스티벌의 포맷에 자신이 좋아하는 좀비 캐릭터와 젊은 층에 익숙한 게임 요소를 섞었다. 그렇게 탄생한 게 커무브의 대표상품 ‘좀비런’이다.
지난해 연세대 축제에서 ‘좀비런’을 시험 가동했다. ‘좀비가 된 나로부터 살아남아라!’가 행사의 구호였는데 1천 명 정도가 참여해 대성황을 이뤘다.
‘좀비런’ 참가자들의 얼굴을 보면 상황 몰입이 최고였어요. 러너들은 생존본능에 충실하게 뛰다 보면 활기를 찾고 스트레스를 날려 버릴 수 있는 것이죠. 좀비들은 흉측한 분장을 할 때부터 일탈로 인한 쾌감을 느끼는 것이고요.
두 번째 좀비런 축제를 준비하며
실제로 참가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새로운 형식에 대한 참신함과 게임처럼 즐기면서 직접 뛰는 것의 힘도 대단했다.
연세대에서의 베타 테스트가 좋은 평가를 받은 것에 힘입어 지난해 11월 초에 서울랜드에서 7천 명이 참가하는 대형행사로 발전시킬 수 있었다. 이 행사 참가자 중 20대가 70%, 여성이 70%였다.
오늘날 20대는 젊은 에너지를 발산할 곳이 없습니다. 대게는 스펙쌓기와 취업 전선에서 허덕이고 있죠.일상에서의 스트레스를 젊은이의 방식으로 풀 수 있는 것이 ‘좀비런’이었던 것입니다.
마라톤과는 달리 느슨하기는 하지만 ‘젊은이들의 공동체적 유대감’을 줄 수 있었던 것도 ‘좀비런’의 성공비결이었다고 원 대표는 진단했다.
지난해 서울랜드 행사의 옥에 티는 운영 미숙이었다. 처음으로 7천 명 규모의 행사를 진행하다 보니 보급품 전달 등 여러 부분에서 실수가 있었던 것. 빗발치는 항의에 당황했지만, 행사 후 불만을 제기한 참가자들을 일일이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운영의 미숙함은 있었으니 다들 행사 자체는 즐거웠다는 평가를 해주었다.
그는 올해 다시 힘겨운 도전을 앞두고 있다. 4월 25일과 26일, 다시 서울랜드에서 두 번에 걸쳐 ‘좀비런’ 축제를 연다. 서울 페스티벌을 시작으로 부산, 대구, 대전, 광주 등 5대 도시를 순회하며 전국에 ‘좀비런’ 열풍을 전파할 계획이다.
‘좀비런’을 시작으로 좀 더 공동체적 놀이 문화를 발전시킬 기회들을 많이 만드는 것이 그의 꿈이다. 좀비가 역설적으로 전하는 생명 에너지가 널리 널리 퍼지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