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x type=”note”]프로야구 한화 이글스는 올해 탈꼴찌에는 성공했지만, 포스트시즌에는 진출하지 못했습니다. 김성근 감독에게 늘 따라다니던 혹사 논란은 여전합니다. 핵심 불펜 4인방에게는 ‘살려조(組)’라는 웃지 못할 별명까지 붙었습니다.
2015년 김성근 감독과 관련된 논란에는 한국 사회의 고질적 문제들이 스며들어 있다고 봤습니다. 이에 관련 문제들을 연결해 분석해보려 합니다.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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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중후반, 두산그룹 박용곤 회장이 OB 베어스 김성근 감독에게 가진 신뢰는 대단했다. 그룹 중역들이 모인 자리에서 박 회장은 김 감독을 일컬어 ‘성근이’라고 친근하게 부르며 “내가 가라고 하기 전에는 가서는 안 된다”고 할 정도였다.
그룹 회장과 ‘다이렉트 일처리’
당시 김 감독은 OB 베어스에서 종신 감독으로 재임할 가능성이 있다고 할 정도의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날 야구팬 사이에서 ‘종신 감독’이란 무능한 다른 팀 감독이 그 팀을 영원히 망쳐주길 바란다는 조롱의 의미로 쓰이지만, 당시 김 감독에게 기대하던 ‘종신 감독’ 가능성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였다.
박 회장에게 감동한 김 감독도 “평생 OB를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는 이야기도 있었을 정도였다. 그래서일까? 김 감독은 구단 내 업무 처리를 박 회장과 직접 의논해서 처리했다. 하지만 야구단도 엄연한 재벌그룹 내 계열사였다. 사장도 있고, 단장도 있다. 그들이 반감을 갖지 않을 리가 없었다.

OB 베어스 프런트는 조심스레 반격을 시도했다. 박용민 단장은 1988년 5월 빙그레 이글스에서 은퇴한 김우열을 타격코치로 영입했다. 윤동균 타격코치가 있었지만, 윤 코치에게는 좌타자를 맡기고 김 코치에게는 우타자를 맡긴다는 ‘복수타격 코치’를 구상했다고 한다.
그런데 김 감독은 김 코치의 영입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윤 코치와 김 코치는 모두 OB 베어스에서 선수로 활약했다. 순혈 선수를 코치로 채워 정통성을 갖춤으로써 김 감독의 입지를 흔들려는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이광환 2군 감독과 ‘세탁기’ 사건
이미 프런트는 1987년 12월에는 OB 베어스 타격코치를 했다가 미국에서 지도자 연수를 했던 이광환 2군 감독을 영입했다. 많은 야구팬들이 아는 사실이지만, 이 감독은 김 감독과 전혀 다른 야구관 ‘자율야구’를 지론으로 삼고 있었다.
김 감독은 경기 전 든든하게 음식을 섭취하는 것이 좋다는 지론을 가졌지만, 이 감독은 되도록 가볍게 해야 한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을 정도로 두 감독은 세세한 부분까지 다른 가치관을 갖고 있었다. 이 감독 선임에 이어진 김 코치의 영입에 대해 김 감독은 위기를 느낄 수밖에 없다. 이후 이 둘은 사사건건 갈등했다.
그러다가 이른바 ‘세탁기 사건’이 터진다. 이 감독은 OB 베어스 프런트의 협조 아래 2군 연습장에 세탁기를 도입한다. 1군에도 없는 이런 편의를 김 감독이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그래서 1군에도 세탁기를 요구했지만, 프런트는 거부한다. 이후 “김 감독이 파워게임에서 밀린 것 아니냐”고 인식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결국, 김 감독은 1988년 프로야구 인생 최초의 해고를 당한다.
“5년 동안 FA 한 명도 잡지 않았다”
2011년 8월 17일, SK 와이번스 왕조를 구축했던 김 감독은 돌연 재계약 포기를 선언했다. SK에서 4년 연속 한국시리즈 진출과 3회의 우승을 달성했지만, 당시 김 감독과 SK 와이번스 프런트의 갈등은 어지간한 야구팬이라면 거의 다 알고 있을 정도로 가시화된 문제였다.
이후 김 감독은 한 인터넷매체와 인터뷰를 진행하며, “팀을 맡으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선수 보강이 제대로 되지 않았던 상황에서 팀을 만들어나가려고 생각했고, 그 속에 부상자들도 많았다. 모든 걸 내가 만들어가야 하는 시스템이었다. 비난도 있었을 테고 5년 동안 내가 모든 짐을 짊어져야 했다. 그게 힘들었다. 5년 동안 FA 한 명도 잡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이 정도 성적이면 선수들이 잘해줬다고 생각한다.
김 감독은 OB 베어스에서의 해고 이후 태평양 돌핀스, 삼성 라이온즈, 쌍방울 레이더스, LG 트윈스에서 감독으로 활동했다. 불행히도 그때마다 프런트와 마찰이 있었다. 태평양 돌핀스에서는 특유의 비시즌 지옥훈련을 진행하며 구단에 수당을 지급하라고 요구하다가 임호균 각서 파동을 계기로 성적 부진을 이유로 해고당한다.

가는 곳마다 프런트와 마찰
삼성 라이온즈에서는 변명의 여지 없는 성적 부진으로 해고당했다. 쌍방울 레이더스에서는 고질적 재정난에도 불구하고 선수들을 다잡아 한국시리즈에까지 진출하는 등 기적을 연출해 ‘돌격대’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하지만 쌍방울 레이더스의 해체 몇 달 전인 올스타전 직후에 해고당했다.
이후 LG 트윈스에서도 김응용 감독의 삼성 라이온즈에 맞서 7차전까지 가는 명승부를 연출한 2002년 한국시리즈를 뒤로 한 채 “이건 김성근 야구지, LG 야구가 아니다”라는 이유로 해고당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김 감독의 후임은 1980년대 후반 OB 베어스와 마찬가지로 이광환 감독이었다.
이렇듯 김 감독은 가는 팀마다 프런트와의 마찰이 있었다. 이것은 김 감독에게 독이었지만 한편으로 득이기도 했다. 야구팬들은 야구단 프런트를 기득권자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김 감독의 열성팬들은 이런 경향이 욱 강하다. 김 감독은 이런 일련의 사건들로 강자와의 타협을 거부하며 원칙을 지키는 소신파로 이미지화되었고, 열성팬들은 이를 추종하게 된 것이다.
프런트는 강자, 감독은 약자?
실제로 한국 프로야구에서는 프런트의 횡포로 인한 사건이 빈번하다. 바로 지난해에는 롯데 자이언츠 프런트에서 호텔 CCTV 자료를 입수해 선수 사생활을 사찰한 것이 발각됐다. 어떤 구단에서는 고관절 수술을 한 프랜차이즈 선수에게 각서를 요구하다가 그 선수가 다른 팀으로 이적함으로써, 팬들의 분노를 유발한 일도 있었다. 야구팬들 사이에서 프런트란 감독과 정치 게임을 하며 선수단을 방해하는 존재라는 인식이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프런트의 현실도 돌아봐야 할 필요도 있다. 야구단은 재벌그룹 내 대표적인 적자 발생 집단이며, 애초부터 수익 발생을 기대할 수 없는 집단이다. 야구단 운영비용은 광고나 홍보 등을 매개로 그룹 내 계열사들의 수익 배분을 토대로 만들어진다. 따라서 야구단의 사장과 단장은 그룹의 명을 거역할 수 없다는 딜레마가 있다. 야구단의 운영비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사장이 그룹 사장단 회의에서 아쉬운 소리도 하고 하소연도 해야 만들어진다.
김 감독은 일본인 코치를 대거 영입하기로 유명하다. 올해 한화 이글스에서도 1군과 2군을 통틀어 총 5명의 일본인 코치를 두고 있다. 일본인 코치 영입비용도 돈이다. 전원을 대동하고 훈련을 했으니 더 많은 훈련비용이 발생한다. 태평양 돌핀스에서 프런트와의 갈등 원인은 비시즌 훈련수당이었다.
그래서 “FA 한 명도 잡지 않았다”는 그의 항변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이진영은 FA로 LG 트윈스로 이적했지만, 조웅천·이호준·박경완·김재현·박재홍 등 김 감독이 재임했던 2007년부터 2011년까지의 내부 FA 선수는 비교적 잘 붙잡아뒀다. 특히 이호준에게는 4년 동안 34억 원을 보장하는 큰손 역할을 했다. 그렇다면 김 감독이 말하는 FA는 외부 FA를 말한다. 실제로 SK 와이번스는 김 감독 재임 당시 외부 FA를 영입하지 않았다.

당시의 기준으로 볼 때, FA 선수를 영입하기 위해서는 준척급은 대략 4년간 20억 원 내외, 특급은 30억 원에서 40억 원 사이의 비용이 발생했다. 선수 1명 영입에만 발생하는 비용이다. 여기에 영입 선수의 원소속 구단에 지급해야 하는 보상금과 보상 선수까지 출혈이 생기는 상황이었다.
그 돈은 어디서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구단 경영진이 그룹 상층부나 사장단 회의에서 아쉬운 소리를 해야 만들어진다. 그래서 대개 프로야구팀 감독들은 구단에 내부 FA 단속은 공개적으로 요구하지만, 외부 FA를 영입해달라는 말은 쉽게 꺼내기 힘들어한다.
기업이 구단에 제공하는 그 돈은 기업의 뼈대를 이루는 직원들이 곳곳에서 힘들게 생산하고 영업해서 만들어진 수익을 기반으로 한다.
그런데 김 감독은 자신의 성과를 설명하면서 “구단이 (외부) FA를 잡아주지 않았다”는 불만을 표출한 것이다. 김 감독의 해임 과정에서 오갔던 이런저런 논란은 일단 차치하더라도, 이런 불만 자체가 비현실적이라는 지적이 있을 수 있다. 김 감독의 시즌 운용에는 필연적으로 다른 팀보다 더 큰 비용이 들어간다. 김 감독이 이런 부분은 고려한 것인지 의문이 간다.
어느 ‘짠돌이 구단’의 프런트와 감독
김응용 감독이 왕조를 구축했던 해태 타이거즈는 당시에도 대표적인 ‘짠돌이 구단’이었다. 김응용 감독의 회고에 따르면, 연봉은 짜기 이를 데 없어 매년 봄이면 선수들이 불만을 품었으며 명절 보너스는 종합과자 선물세트였다.
프런트가 하는 일은 혹시 선수들에게 인센티브를 지급하는 구단이 있으면 “왜 그런 걸 지급해서 우리를 곤란하게 하느냐”는 항의전화를 거는 일이었다고 한다. 김 감독 본인부터도 연봉이 적어서 “계약금은 주지 않아도 좋으니 연봉을 더 달라”고 요구하는 일이 빈번했다고 한다.
하지만 김응용 감독은 해태 타이거즈가 선동열·이종범을 일본프로야구 주니치 드래곤즈로 이적시켰을 때와 본인 자신도 삼성 라이온즈 이적이 확정된 1990년대 후반 외에는 구단과 마찰을 빚은 바 없었다. 삼성 라이온즈 이적 자체도 삼성과 해태의 사전 협의가 있었다. 그렇다고 김응용 감독이 구단의 허수아비에 머무른 것도 아니다. 금전적으로 극도로 열악한 상황에서도 김응용 감독은 프런트와 비교적 이상적인 관계를 구축한 것이다. 어떤 차이일까?
이런 스타일 때문일지는 몰라도, 김응용 감독은 2005년부터 2010년까지 삼성 라이온즈의 사장으로 활약했다. 야구와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당시 감독이던 선동열에게 아쉬운 소리를 한 적도 없다고 한다. 김응용 감독 스스로는 사장 역할을 “단장과 감독의 방패막이”라고 규정했다고 한다.
에스밀 로저스 2군행 논란
2014년 12월, 김 감독은 한화 이글스 감독으로 부임한다. 한화 이글스는 김 감독에게 전권을 부여했다. 김 감독은 5명의 일본인 코치를 영입했고, KIA 타이거즈 임준섭·이종환·박성호와 유창식·김광수·오준혁·노수광의 트레이드도 본인이 주도했다. 이후 노재덕 단장이 교체되는 일이 있었는데, 이 트레이드에 반대하다가 경질됐다는 설이 있을 정도로 한화 이글스에서 김 감독의 권한은 강하다.
9월 23일에는 교체 용병으로 투입되어 선발투수로 맹활약하던 에스밀 로저스가 2군으로 내려가는 의아한 일이 있었다. 로저스가 경기 도중 심판의 판정에 항의하며 글러브를 집어 던지는 등 돌발 행동을 한 직후 일이다. 구단에서는 “휴식 차원의 2군행”이라고 발표했다.

그런데 여기서 김 감독이 갑자기 “기강을 잡기 위한 2군행”이라고 구단의 발표와 전혀 다른 내용으로 인터뷰한다. 실상은 로저스가 돌발 행동을 한 이후 김 감독이 그의 기강을 잡겠다며 벌금을 부과했고, 로저스는 감독이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고 벌금까지 부과하자 미국행을 선언했다. 그러자 김 감독이 등판 옵션이 걸린 로저스의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2군으로 내린 것이다.
구단 발표는 5강 진입 싸움이 한창인 상황에서 감독과 외국인 선수의 신경전이 외부에 알려져 봤자 좋은 것이 하나도 없기에 이루어진 고육지책일 것이다. 명분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감독은 언론에 자기 입장을 그대로 발표한 것이다. 게다가 로저스는 시즌 도중 큰 돈을 들여 영입한 선수였다. 구단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은 행동이었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야구단 비용은 그룹에서 사장이 아쉬운 소리를 해서 가져오는 돈이다. 김 감독은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직접 영입했기 때문에 그룹에서도 전폭적 지원을 한 것이다. 김 감독에게는 현장의 권한과 프런트의 권한까지 전부 위임했다. 트레이드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단장이 경질됐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강력한 권한이 부여됐다.
그런데도 남은 것은 외국인 선수와의 분란·살려조 논란·시즌 6위의 성적·자신이 주도했던 트레이드의 부정적 결과다. 한창 훈련해야 할 2군 투수들을 1군의 배팅볼 투수로 활용해 논란을 빚기도 했다. 김 감독이 가졌던 권한과 그 결과를 보면, 이명박 정부의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이 환율 방어와 관련해서 “원 없이 돈을 써봤다”고 발언한 것과 비교해볼 수 있다.
절차와 체계가 필요한 이유
사실 비극의 씨앗은 1980년대 OB 베어스에서 잉태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왜 절차를 만들어 운용할까? 절차를 거쳐 검토하고 많은 사람의 동의와 확인을 얻어야 좋은 결과를 얻을 확률이 높아지고, 설령 결과가 나빠도 책임 소재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 김 감독은 단장과 사장이 있음에도 그룹 회장과 직접 야구단 업무를 처리했다. 야구단이 아무리 특수조직이라고 해도, 계열사의 임원이 사장과 회장을 건너뛰고 그룹 본사로 가서 회장과 직접 대화하며 결재를 받는다면 과연 기업에서 인정받을 수 있을까?
아무리 야구단의 프런트가 그동안 많은 횡포를 부렸다고 하더라도, 고찰할 것은 고찰해야 한다. 김 감독은 야구단의 비용이 어디에서 나오고 있는지에 대한 고려가 부족해 보인다. 김 감독 외에도 수많은 감독이 해고됐다. 하지만 그들이 구단을 직접 비판하는 일은 거의 없다. 야구계 내 정치적 고려도 했겠지만, 근본적으로 자신이 팀을 운용했던 비용에 대한 고려도 있을 것이다. 기업이 지원해준 그 돈은 기업의 수많은 직원이 땀 흘려 생산하고 영업해서 만들어진 비용이다.
김 감독은 한때 김응용 감독 밑에서 해태 타이거즈 2군 감독을 지낸 바 있다. 김 감독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김응용 감독의 우승 비결이 궁금해서 갔다고 한다. 하지만 그때 정작 봐야 할 것은 또 있었다. 김응용 감독은 세상이 다 알던 짠돌이 구단과 어떻게 마찰 없이 많은 우승을 일궈낼 수 있었을까? 김응용 감독은 [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감독님처럼 한 우물을 오래 판 장인들은 자기주장이 무척 강하지 않습니까. 특히나 과거 야구인들은 프런트가 말하는 협조나 조언을 ‘간섭’으로 인식할 때가 잦았는데요?
다른 감독들은 장돌뱅이처럼 여기저기 팀을 돌아다녔잖아. 하지만 나는 늘 한 팀에서만 ‘쭉’ 있었어. 한일은행 감독할 때도 은행장은 5, 6명이 바뀌었지만, 누구도 내 목을 친 적이 없었다고. 해태 때도 그랬고. 그래서 구단이 하는 말이 뭔지, 뭘 필요로 하는지 잘 이해할 수 있었다고. 그 사람들 고충도 알고 말이야. 지금도 삼성가서 물어봐. 나처럼 진짜 협조한 감독이 있었느냐고 말이야(웃음).
-어떻게 하셨기에 구단과 마찰 없이 상생을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내 목소리만 주장하면 안 돼. 난 늘 구단과 상의하면서 타협점을 찾았다고. 트레이드도 늘 그렇게 진행했어. 구단에 양보할 건 양보하고, 협의할 건 협의하고, 고수할 건 고수하다 보면 얼굴 붉힐 일이 없다고. 감독이 구단의 얼굴마담이긴 하지만, 구단이 감독 소유물도 아니고, 감독도 구단의 한 일원이란 점만 명심하면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