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셜코리아 칼럼] 폭염과 정전이 던진 질문…어떤 도시에 살고 싶은가. 도봉의 ‘도넛도시’ 실험…성장보다 중요한 건 균형. (김난미 / 리을미음 대표) (⌚7분)
“아아, 안내드립니다. 현재 모든 세대가 전력을 풀가동하고 있어 아파트 변압기가 폭발할 것 같습니다. 각 세대에서는 인덕션 사용을 중지해주시고 에어컨 온도를 조금만 더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아침부터 땀을 뚝뚝 흘리며 카페에 들어선 지인이 이제껏 살면서 이런 무서운 아파트 안내방송은 처음이었다며 이야기를 꺼냈다. ‘폭발’이라는 단어가 주는 위협감이 생각보다 컸다는 이야기는, 어젯밤 방송된 “자려는데 갑자기 ‘펑’…열대야에 변압기 비상”(MBC뉴스, 2026년 8월 7일)이라는 뉴스로 이어졌다.

노후 주택이 많은 우리 동네(도봉구) 이야기였다는 사실에 모두가 놀랐다. 변압기 폭발로 몇 시간 동안 정전이 이어지면 어떤 상황일까 서로 물음을 던졌다. 누군가에게는 잠깐 견디면 되는 더위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의료장비와 연결된 생명줄이 끊기는 일이고, 혼자 힘으로 이동하기 어려운 이에게는 대피하기 어려운 재난이 된다. 같은 재난이라도 사람마다 전혀 다른 무게로 닥친다는 사실에 공감하며 모두 한숨을 지었다.
만약 폭염으로 변압기가 터진다면…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사는 동안 가장 시원한 여름은 올해’라는 말이 곧잘 들린다. 예전에는 이 말이 실감 나지 않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다르다. 아스팔트 위, 건설현장, 물류센터, 논과 밭, 주차장처럼 누군가의 노동현장에서는 폭염으로 목숨을 잃거나 온열질환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대기과학자 조천호 전 국립기상과학원장은 한 방송(유튜브 ‘SBS 지식의 발견’)에서, 아열대처럼 고온다습해진 우리나라의 여름 기후가 몸속에 쌓인 열을 밖으로 빼내지 못하게 만들어 자칫 장기 손상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정말 두려운 세상이다.
이런 급격한 기후변화는 우리 일상을 시험대에 올린다. 더위를 견딜 수 없어 24시간 에어컨을 가동하고, 뜨거워진 몸을 식히려 차가운 물과 음료 소비가 증가하며, 널뛰는 기후에 밥상물가가 뛰면서 값싼 수입 농산물이 국내산을 밀어내고, 밖에 나가기 싫어 배달음식이 늘어나고, 자가용은 어느새 필수품이 됐다. 당장을 버텨내느라 계속 탄소를 뿜어내는 것이 우리의 일상이다. 폭염 같은 기후재난을 마주하고도 벗어날 길을 찾지 못하는 일상은, 출구 없는 쳇바퀴를 도는 다람쥐와 다르지 않다.
도시를 주제로 현대문명 비평에 힘쓴 루이스 멈퍼드(Lewis Mumford)는 저서 ‘역사 속의 도시’(원제: The City in History)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뉴욕의 교통체증을 풀겠다는 치료책은 대부분 기존의 도로를 넓히고 주차장을 넓히는 식이었는데, 이는 차가 많으면 수용할 공간을 늘리면 된다는 단순한 발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애초에 자동차가 도심으로 들어올 이유 자체를 줄이면 문제는 생기지 않는다. 멈퍼드는 이를 비만한 사람에게 허리띠를 늘려주고 바지 솔기를 넉넉하게 고쳐주는 양복장이의 해법에 비유했다. 근본 원인을 손보지 않고 당장의 위기만 넘기면 된다는 발상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는 우리 속담을 떠올리게 한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현재의 우리 사회도 꼭 닮아 있다.
성장 신화를 넘어, 도넛도시라는 대안
시민의 일상이 쳇바퀴를 돌며 기후재난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동안, 정부는 인공지능·반도체를 앞세운 ‘3대 메가 프로젝트’가 모든 문제를 풀어줄 열쇠인 양 내달리는 모양새다. 모두가 인공지능·반도체 산업의 성과에 환호하는 듯 보이지만, 성장 중심의 자본주의 경제가 늘 그래왔듯 과실은 소수에게 집중되고, 대다수 시민은 화려한 ‘깡통’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삶을 마주하고 있다.
최근 몇 년 사이 가뭄으로 바싹 마른 산은 작은 불씨에도 거대한 산불이 번지고, 산불이 휩쓸고 간 벌거숭이산은 폭우가 오면 산사태로 이어져 취약한 존재들의 목숨을 앗아간다. 얼마나 더 많은 목숨을 잃어야 이 흐름을 멈출 수 있을까. 자원이 무한하다는 가정 위에 설계된 도시 성장은 이제 멈춰야 한다. 더는 도시를 개발할 게 아니라, 도시 안에서 우리가 어떻게 함께 살아갈지 그 방법을 ‘계발’해야 할 때다.
기후위기, 기후불평등, 돌봄과 순환, 좋은 삶 등 지금 이 시대를 설명하는 키워드들은 서로 분리된 개념이 아니다. 이 도시에 우리가 존재하고 있고, 우리가 존재하기에 이 도시가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생태와 삶, 안녕(well-being)도 원래 하나로 연결돼 있다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기후위기 대응을 최우선에 두면서도 동시에 시민의 삶을 지켜낼, 도시 전환에 대한 전면적이고 새로운 발상이 필요하다.
나는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영국의 경제학자 케이트 레이워스(Kate Raworth)가 제안한 ‘도넛경제학’을 도시 단위에 적용한 ‘도넛도시’ 모델에서 구체적 방법론의 가능성을 보았다. 도넛도시는 생태적 한계선(지구가 감당할 수 있는 환경 한도)과 사회적 기초선(모든 사람이 최소한 누려야 할 삶의 조건) 사이, 즉 도넛 모양의 안전한 공간 안에서 모두의 번영을 지향하는 모델이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균형 잡힌 시각으로 지역의 현재를 점검할 수 있게 해주는 도구다. 지역 통계·지표를 통해 작성되는 ‘데이터 초상화’를 바탕으로, 주민이 실제로 느끼고 경험하는 커뮤니티의 목소리까지 더해지기 때문에, 주민의 삶과 맞닿은 입체적 진단이 가능하다.
도넛도시 모델을 세계 최초로 도입한 곳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이다. 이 도시의 지속가능성·도시계획 담당 부시장 마리커 반 도르닝크(Marieke van Doorninck)는 2021년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TIME)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도넛경제학을 읽고 유레카! 대안이 있구나 하고 느꼈어요. 경제학은 자연과학이 아니라 사회과학입니다. 경제는 사람이 만든 것이고, 사람이 바꿀 수 있는 있는 것이라는 점을 확인했어요.”
마리커 반 도르닝크
도봉에서 그리는 도넛
서울 도봉구에는 시민단체와 복지기관, 지역 활동가, 정치인 등 다양한 시민 주체가 함께 조직한 ‘기후불평등 대응 네트워크’가 있다. 그 출발점은 2023년, 기후변화로 치솟는 밥상물가와 음식물쓰레기를 주제로 한 공론장(‘기후불평등 이야기주간 2023’)이었다. 당시 채택된 연대선언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 하나, 시민으로 존재하는 우리 모두의 목소리가 커져야 한다.
- 하나, 기후불평등으로 고통받고 소외된 모든 이들도 함께 사는 정의로운 전환이 필요하다.
- 하나, 우리가 길이고 우리가 대안이다.

당시 공론장을 통해 도출된 의제가 ‘먹거리 순환 시스템 마련’이었다. 밥상물가로 어려움을 겪는 이웃의 식탁을 돌보고, 가정에서 버려지는 음식물쓰레기를 줄이자는 취지였다. 네트워크는 이 의제를 실현하기 위해 ‘우리동네 모두의 냉장고’라는 사업을 기획해, 현재 도봉구 내 4호점까지 운영하고 있다. 지역에서 버려지는 먹거리를 줄이고(생태적 한계선 지키기), 먹거리 돌봄이 필요한 주민에게 연결하는(사회적 안전망 확보) 이 사업은 주민의 공론과 지역의 연대로 시작되어 도넛도시가 구현된 구체적 단면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의 위기는 한 가지 단면, 한 가지 과업만으로는 풀리지 않는다. 다면적인 연결과 근본적 전환이 필요하다는 절실함에서 2026년 ‘도넛도시 도봉’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도넛도시 도봉의 첫걸음은 지역의 밑그림을 그리는 작업이었다. 데이터를 기반으로 워크숍을 열어 지역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 결과 서울시 내 노후주택 비율 1위, 열대야 및 폭염·폭우로 인한 산불과 산사태 등 기후재난 고위험, 그늘이 되어줄 녹지 접근성의 부족 등 우리 동네가 딛고 선 생태적 한계선과 사회적 안전망 지표가 매우 취약한 상황임이 드러났다. 이는 앞서 언급한 변압기 폭발과 정전 같은 일상적 재난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은 결과였다.

우리는 도넛도시 도봉을 그리며 네 가지를 생각했다.
- 첫째, 도넛도시는 우리 삶을 둘러싼 모든 범주들로 공감의 반경을 넓혀가는 과정이다.
- 둘째, 기후위기와 삶의 불평등에 맞서 대응·회복·적응을 이야기하고, 모두의 좋은 삶을 위해 질문을 던지고 답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 셋째, 데이터가 완전하지 않더라도 함께 논의하는 과정 자체가 지역을 이해하고 거버넌스(다양한 주체들의 협치)를 통해 같은 눈높이를 맞춰가는 길이다.
- 넷째, 모든 이가 반드시 누려야 할 최소한의 안녕과 생태적 한계를 분리하지 않는 통합적 시각, 그리고 지역의 가능성을 함께 찾아가는 연대의 힘을 다질 수 있었다.
현재는 여러 영역의 시민 주체가 함께하고 있지만, 기후위기 시대의 지속가능성은 기술이 아니라 관계에서 나온다는 믿음으로 시민-행정-정치-연구가 함께하는 협력적 거버넌스로 끊임없이 확대해나갈 예정이다.
도넛모델을 도시에 구체적으로 적용하려면 복지와 생태를 동시에 고려하는 관점이 필요하다. 유럽 등에서는 복지 정책을 설계할 때 생태적 이슈를 함께 고려하려는 시도가 정책 설계와 커뮤니티 공론장에서 일부 존재한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아직 복지와 기후·생태를 별개의 문제로 나눠서 다뤄왔다. 이는 주민의 실질적인 좋은 삶, 기후재난으로부터 안전한 삶을 지키는 데 큰 난관으로 작용한다. 이제는 지역의 모든 이슈를 복지·생태적 관점으로 함께 들여다보고, 정책 설계자와 지역 커뮤니티, 주민 모두가 이를 자신의 권리이자 역할로 인식하며 지역의 힘을 길러야 한다.

우리는 어떤 도시에 살고 싶은가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오는 기후위기 앞에서 우리 지역사회에는 어떤 생명력이 필요할까. 가장 먼저, 가장 깊고 아프게 삶을 마주하는 이들부터 서로 돌보기 위해, 지역의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주체가 되어 도시의 모습을 새롭게 그려가는 것, 그것이 도넛도시 도봉의 방향이자 출발점이다. 누구도 배제되지 않고 모두가 사람다운 삶을 지켜내며 살아가는 도시를 상상하는 것, 지금부터 시작해보자.
숨이 턱턱 막히는 폭염의 위기를 함께 넘어서는 힘은, 공감의 반경을 넓혀 서로를 돌보는 마음에서 시작될 것이다. 기후위기 시대, 우리는 어떤 도시에 살고 싶은가? 우리는 어떤 지역사회에 존재하고 싶은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