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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희 스토리: ‘모두의 지하철’] 지하철에 ‘안내표지’ 붙이는 간단한 일? 그렇지 않다, 전혀 그렇지 않다. 누군가가 10년 동안 꿈꾼 아주 힘든 일이다. 왜? 도대체 왜 이 일은 ‘꿈’ 같은 ‘미션’일까? 우리 시대의 슬프고 기쁜 자화상. (⏰12분)

여는 말: 영혼 갈아 넣는 사람

‘모두의 지하철을 위한 교통 약자 환승 안내표지 개선 프로젝트’
(이하 ‘모두의 지하철’).

쉽게 말해 지하철에 ‘안내표지’를 붙이는 민관 협력 사업이다. 겨우? 쉬운 일 아닌가? 그렇지 않다. 누군가가 10년 동안 꾼 꿈이었고, 감히 상상만으로 그려본 ‘프로젝트’다. 그 꿈을 지금 실현하고 있다. 누군가에겐 별일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겐 오랜 고통을 견딘 보답처럼 만난 환희의 순간이다. 난 그런 인생이 멋지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이동하는 존재다. 손바닥 안에 세상이 담긴 모바일 시대에도 그 본질은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동권이다. 특권이 아니라 권리다. 권리의 본질은 누구나 마땅히 누려야 한다는 것에 있다. 보편성, 그게 권리의 본질이다. 그런데 장애인단체는 그 당연한 권리를 위해 ‘투쟁’한다. 그리고 많은 비장애인은 내 출근길 막는 장애인 활동가를 향해 여러 감정이 교차하는 표정을 짓는다. 둘 다 사정이 있고, 둘 다 안쓰럽다.

무의는 투쟁이 아닌 대화와 협력, 설득의 방법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투쟁이든 설득이든 힘든 건 마찬가지다. 둘 모두 영혼, 그런 게 있다면, 그걸 바쳐야 할 수 있는 일이다. 이 세상엔 영혼을 바쳐 싸우고, 영혼을 다해 대화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있어 ‘비장애인’도 좀 더 인간다운 세상, 특혜나 특권이 아닌 그저 인간의 권리가 조금 더 땅으로 내려온 세상에서 살 수 있다. 그러니 장애인도 비장애인도 결국 그런 투쟁과 대화의 동지들에게 빚지고 있다.

홍윤희(무의 이사장)에게 ‘모두의 지하철’은 영혼을 갈아 넣은 꿈의 프로젝트다. 그 일에 관해 물었다.

홍윤의(무의 이사장). 엘리베이터 안내 표지가 붙으면 가장 효과적인 위치(빨간색 동그라미)를 가리키고 있다. 무의.

📢 이 글은 2024년 7월 17일 인터뷰를 정리한 것입니다. 독자의 가독성을 고려해 질문은 소제목과 본문으로 맥락화하고, 홍윤희(인터뷰이)의 답변을 중심으로 정리했습니다. 초벌 정리는 민노(인터뷰어), 최종 퇴고 과정에서는 홍윤희(인터뷰이)가 참여했습니다. (편집자)

고속터미널역에서 있었던 일

15년 전 일이다. 휠체어를 타는 지민이와 가끔 가던 서울고속터미널역 3호선과 7호선 환승 구간에서 리프트가 고장 났다. 전화했다.

받는 쪽에서 이렇게 물었다:
“지금 어디에 계세요?”

난 속으로 생각했다.
‘그게 왜 중요하지?’

전화 속 목소리는 내가 리프트 ‘밑에 있으면 3호선’이고, ‘그 위에 있으면 9호선’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내 위치에 따라 리프트 고장 업무 담당자가 달라진다는 취지였다. 너무 화가 났다. 고속터미널역이면 고속터미널역이지 내가 리프트 위에 있는지 아래 있는지에 따라 연락해야 하는 담당자와 전화번호가 달라진다고?

페이스북에 글을 썼다. 한 신문이 두 페이지에 걸쳐 크게 기사를 썼다. 기사가 나간 후 3, 7, 9호선에서 모두 연락이 와서 ‘도대체 그 엄마가 어디에 있었는가’를 물었다. 당시(2011년)에는 3개 노선이 각각 다른 회사였기 때문이다. 지하철 관계자들은 문제 해결보다 ‘누가 이 기사에 책임을 져야 하나’ 더 신경 쓰는 모습이었다. 기자는 다음 날 ‘기자의 눈’ 칼럼까지 썼다. 국토교통부까지 ‘교통약자 전철 안내에 투자하고 있다’는 해명 자료를 내야 했다. 그때 목소리를 낸다는 것의 효능감을 느꼈다. 

15년 전인 2011년 4월 당시 서울신문 기사(온라인 기사 갈무리).

왜 안내표지인가

이동 약자의 ‘수직 이동’을 위해선 엘리베이터가 필요하다. 하지만 50년여 전 서울 시청역을 시작으로 도시철도를 처음 만들었을 때는 엘리베이터를 고려하지 않고 건설했다. 첫 전철은 1974년에 생겼다. 지하철에 엘리베이터를 의무화한 교통약자이동편의증진법은 2006년부터야 비로소 발효됐다. 오래된 역 엘리베이터 위치가 불편한 곳에 있거나 아예 없는 이유다.

그렇게 지어진 지하철에 나중에 억지로 끼워맞춰 증축하다 보니 엘리베이터는 늘 부족하다. ‘안내표지’라도 있었으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안내표지는 쉽게 붙일 수 있는 게 아니다. 필요하다고 함부로 붙이면 불법이다. 뉴욕에서는 그 유명한 ‘휠체어 탄 사람이 달리는 역동적 휠체어 표지’를 불법을 감수하고 사회운동 차원에서 붙이기도 했다.

accessibleicon.org

그때 나는 회사원이었고, 그렇게까지 할 순 없었다. 그래서 이동 약자를 위한 지하철 환승 지도를 만들었다. 하지만 그때도 ‘교통약자 환승지도’가 필요 없는 지하철 ‘안내표지’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게 ‘더 큰 목표’였다. 지하의 특성상 GPS가 안 터지다 보니 환승지도가 있다 해도 사전에 보고 가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지하철 현장에 믿을 만한 안내표지가 체계적으로 구비되어 있는 게 우선이다. 하지만 공공 공간에 부착해야 하는 안내표지는 일반 시민인 내게는 도저히 닿을 수 없는 과업이었다. 

이동 약자는 왜 지하철에서 더 힘들까 

1. 인프라가 부족하다  

지하철에는 아주 오랫동안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1974년 첫 지하철이 생겼는데 지하철 첫 엘리베이터는 1994년 6월 3호선에 생겼으니 20년 동안 엘리베이터가 전혀 없었다. 장애인 활동가들이 말 그대로 지하철 철로에 드러누워 싸우면서 만든 게 지하철 엘리베이터다. 게다가 오래된 역사에 환승역을 만들면 덧대고 덧대는 방식으로 공사하다 보니 엘리베이터 환승은 도보 환승보다 최고 28배까지 더 오래 걸린다.

그래서 ‘안내표지’가 더 절실하게 필요하다. 엘리베이터가 이렇게 드물다 보니 또 휠체어 리프트를 타다가 떨어져 죽는 휠체어 사고가 있었던 과거 때문에 엘리베이터만 타고 지하부터 지상까지 이동 가능한 동선을 만드는 게 서울시 지하철의 큰 목표 중 하나다.

‘1역사 1동선’이라는 말이 거기서 나온다. 한 역에서 이동 약자가 리프트를 타지 않고, 최소한 1동선(엘리베이터, 수직 이동)를 확보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장애인 단체에서는 적어도 ‘1역사 2동선’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엘리베이터 하나만 있으면 고장 났을 때 대책이 없어서다. 정보 또는 안내표지 또한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최소한의 현장 ‘인프라’다. 

무의 지하철 교통약자 환승지도를 주제로 교통약자의 환승 불편에 대해 논문을 쓴 건설사 직원에 관한 서울신문 기사(온라인 기사 갈무리).
2. 여러 사업자가 운영한다

고속터미널 사건에서 보았듯 도시철도는 여러 사업자가 분산해서 운영한다. 엘리베이터나 리프트가 고장 났을 때 ‘어느 번지에 물어야 하나’와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안내표지를 보면 통일되어 있지 않다. 서울교통공사와 코레일의 안내표지는 폰트, 색깔 조합이 다르다. 복잡한 역에 가면 안내표지들이 제각각이다. 서울역 환승 구역 같은 곳에서 쉽게 혼란에 빠지는 이유다.

서울에 있는 도시철도역 중 서울교통공사가 관리하는 역은 그중 절반 정도다. 코레일 외에도 각종 민자 사업자까지 지하철 운영 주체가 6개 이상이다. 서울시가 할 수 있는 일도 많지만, 서울시가 할 수 없는 일도 많다. 예를 들어 서울역과 가까운 남영역엔 엘리베이터가 없다. 국토교통부 코레일이 관리하는 역이다.

결론은 지도를 만들든 안내표지를 붙이든 ‘서울 전체 프로젝트’를 하려면 서로 다른 도시철도 사업자들과 함께 일해야 한다는 거다. 승객 입장에서는 고속터미널역에서 겪었던 것처럼 똑같은 역에서도 공간에 따라 업무 담당자가 다를 수 있다. 당연히 엘리베이터에 의존해야 하는 교통약자가 뭔가 고장 났다고 연락할 때 이런 관리감독 업무 담당자의 분리 때문에 스트레스받을 수밖에 없다. 

지하철 이동 약자 환승지도를 만들 때도, 왜 ‘애 엄마’가 그런 걸 만드냐는 소리를 들었다. 공공이 해야 하는 일 아니냐. 나는 다르게 말한다. 공공이 서로 협조해서 일하기 쉬운 구조가 아니기 때문에 애 엄마가 나선 거다. 애 엄마가 그런 (공적인)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던 거다.

‘모두의 지하철’ 안내표지를 붙이는 모습. 무의.
3. 지하철에서 마주치는 편견과 무심함

딸은 몇 달 전 여의도역에서 자전거를 끌고 와 엘리베이터에 탄 남성에게 봉변을 당했다. 딸은 지하철 엘리베이터에 비스듬히 세운 자전거를 약간만 움직이면 함께 탈 수 있으니 움직여 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이 남성은 자기를 내리라고 했다는 식으로 딸을 모함하며 폭언을 퍼부었다.

“그래도 좋은 분들도 있지 않아?”라고 딸에게 물었다. “어. 좋은 분들도 많지. 그런데 사실 자연스레 새치기하며 ‘아가씨는 다음번에 타’라는 말 하는 사람이 더 많아.” 이렇게 나쁜 경험을 한 번이라도 하면 이동 약자들은 위축된다. 여러 번 하면 ‘한국에서 살기 싫다’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내 딸처럼. 

지하철 장애인 휠체어석에 놓여진 자전거.

딸이 성수 대신 합정에 가는 이유

지하철 타는 걸 좋아하는 딸이 지하철을 맘껏 탈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지하철 교통약자 환승지도’를 만들었다. 갈아타는 길을 찾느라 헤매는 시간을 아껴주고 싶었고, ‘왜 내가 여기서 헤매고 있지’라는 좌절감을 덜어 주고 싶었다. 한때는 아이가 ‘엄마 지도 보면서 지하철 잘 타고 다녀’라고 말해서 뿌듯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사실 아무리 지도를 만들더라도 원래부터 환승 엘리베이터가 너무 먼 곳에 지어진 경우는 도리가 없다. 지하철 동선에 따라 어울릴 기회와 취향을 포기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요즘 가장 인기 있는 ‘핫플’ 성수동보다 아이는 집에서 30분은 더 가야 하는 합정역 근처가 더 좋단다. 성수나 합정이나 휠체어 못 들어가는 곳이 많은 건 매한가지지만 지하철 환승이 어려워서다.

딸이 성수 대신 훨씬 더 먼 합정에 가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무의.

보문역에서 성수로 가려면 신설동역 또는 신당역에서 환승해야 한다. 놀랍게도 두 역 모두 휠체어로 환승하려면 역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야 한다. ‘핫플’ 성수에서는 만나고 싶은 친구를 만날 수 없다. 실제로 서울대 보건대학원 김승섭 교수 연구에 따르면 휠체어 이용 보행 장애인은 접근이 안 되는 곳이 많기 때문에 “가족이나 친구 만나기를 포기”하기도 한다.

시사IN, 장애인이 외출하지 않은 이유, ‘딱 하나’ 아니다. 온라인 갈무리.

‘교통약자 지도’보다 훨씬 더 어려운 ‘안내표지’ 바꾸기

지하철은 공공 공간이라서 아무나 마음대로 안내문을 붙일 수 없다. 애 엄마가 공공 기관을 설득해 디자인을 변경한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설득했다손 치자. 예산 규모도 지도보다 훨씬 더 큰 돈이 필요하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대형 역 한 곳의 안내표지를 모두 교체하는 데엔 최대 1억 원 정도의 예산이 필요하다. ‘디자인 표준’을 맞춰야 하고, 준비 과정에서 실행까지 아주 복잡한 절차와 방식을 거친다는 건 별개다. 참고로 2026년 기준 수도권 지하철(전철)의 역 수는 모두 656개다.

현장에 안내문이나 인적 지원이 잘 되어 있다면 환승 지도와 같은 보조 도구가 근본적으로 무의미해진다. 특히 개별적 인적 지원은 일본에 다녀온 휠체어 이용자가 많이 이야기하는 부분이다. 휠체어 이용자가 내리는 곳에 역무원이 발판을 들고 서 있다는 거다. 

물론 무의가 만든 지도는 탑승 전 계획을 짤 때 여전히 유용하다. 그러나 GPS가 안 터지는 지하 공간에서 지상과 똑같은 지도 구현은 불가능하다. 결국 현장이 바뀌는 게 답이다. 흥미롭게도 무의가 2017년경부터 지도를 만들며 시민과 함께 문제점을 제기하기 시작한 후, 물론 그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각 역마다 역에서 컬러 출력한 것처럼 보이는 ‘줄글 표지’가 붙기 시작했다.

“인천 방면으로 가실 휠체어 유모차 고객은 소요산 방면 승강장(승차지점 3-2)엘리베이터를 이용해 건너편 승강장으로 내려가십시오”라는 식이다. 물론 아무런 안내가 없는 것보다는 낫다. 휠체어 환승을 하다가 개찰구를 지나가야 하는데 아무런 안내표지도 없는 경우도 있었다. 환승지도를 만든 후 ‘휠체어나 유모차 고객은 도움벨을 누르시면 열어드립니다’라는 식의 컬러프린트 출력물들이 여기저기 개찰구에 붙었다.

이런 대학 동아리 일일호프 안내보다 못한 걸 ‘지하철 환승안내’라고 불러야 하는가? 무의.

대학 동아리가 일일 호프를 하더라도 지하철 안내표지보다는 더 신경 써서 눈에 잘 보이게 만든다. 이런 일상의 풍경들을 보면, 이동 약자는 아주 오랫동안 투명 인간이었던 셈이다. 

지하철에 ‘뭔가’ 하는 게 어려운 행정적 이유

지도를 만들면서 지하철에 뭔가를 하는 게 어려운 ‘행정상’ 이유를 더 발견했다. 

첫째, ‘우리 관할이 아니에요’

휠체어 환승 최악의 역 중 하나는 서울역이다.환승 동선이 길고 복잡하다. 휠체어 환승에 최악의 경우 40분이 걸리기도 했다. 환승지도를 만들기 위해 하다못해 역 내에서 사진이라도 촬영해야 한다면 서울역의 다음 4개 도시철도 회사에 공문을 각각 보내야 한다. .

  1. 서울교통공사
  2. 코레일
  3. GTX
  4. 공항철도

이런 상황에서 코레일과 서울교통공사를 비롯해 6-7개의 공기업과 민간철도 기업이 다 함께 협의해 안내표지를 만든다? 불가능에 가깝다. 

지하철에 (교통약자를 위한) 안내표지 붙이는 일,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모든 일의 출발점 ‘교대역’에 드디어 ‘모두의 지하철’ 안내표지를 붙였다! 무의.
둘째, (공무원이 가장 싫어하는 건) ‘최초의’ 사업 

50년 동안 존재하지 않던 교통약자 안내표지를 처음 만든다? 공익적인 의미이니 겉으로는 다 환영할 것 같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공무원이 ‘최초’의 무엇인가를 하려면, 법이나 근거가 필요하다. 개인적으로 민간 기업에서 경험한 바에 따르면 처음 하는 일이라도 ‘맨 윗사람’이 강력하게 밀어붙이면 되는 경우도 있었는데 공공에선 상부 명령이 있어도 근거가 없으면 좀처럼 잘 움직이질 않는다 (지자체장 임기 말에는 이렇게 신규 사업을 회피하는 경향이 더 심해진다).

꿈의 프로젝트

“10년 전 엄마의 꿈을 이뤄 주세요.”

그 꿈을 이제 기업이 지원하고 공공기관 두 곳과 함께 민관 협력 프로젝트로 진행한다. 그야말로 그 꿈을 이룬 게 꿈만 같다.

그 꿈의 출발점은 202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대로템 사회공헌팀에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철도 차량을 만드는 기업이니만큼 교통약자 지하철 첫 안내표지를 만들게 된다면 국내 도시철도에 있어 유례없는 사회공헌 사례가 되는 건 확실했다. 현대로템 지원을 받으려면 현대로템이 기금을 위탁하는 공동모금회의 심사를 통과해야 했다. 사업 심사 중 “서울 지하철에 안내표지를 붙이는데 왜 사업을 세금으로 하지 않고 사기업(현대로템) 사회공헌 기금을 써야 하는지” 이유를 제시했다. 설득을 위해 두 가지 근거를 준비했다.

첫째, 우선 교통공사가 매년 적자를 보고 있다는 점. 당장 엘리베이터가 모든 역에 다 있는 것도 아니기에 불요불급하거나 안전 관련이 아니라면, 이런 신규 디자인 사업은 현장에선 필요를 느끼고 있지만, 공사 차원에서는 예산 투여의 상대적 순위가 밀릴 수밖에 없다. 

둘째, 민관협력으로 ‘새 공공디자인’을 만든 외국 사례를 제시했다. ‘도쿄 토일렛’ 공공디자인 프로젝트는 민간 기금을 조성해 도쿄 시부야구의 14개 공공 화장실을 획기적으로 개선했다. 공중화장실이 더럽고 음산해 이용율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유니클로 회장 아들이 제안하여 NGO 일본재단이 기획한 사업에 시부야구가 함께 참여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유니버설 디자인 화장실’ 도쿄 토일렛.
‘퍼펙트 데이즈’ (2023, 빔 벤더스)

다이와하우스(건설사), 토토(변기 회사)와 같은 민간 기업들도 함께 했고 안도 다다오와 같은 유명 건축가들이 참여해 디자인적으로도 아름다울 뿐 아니라 유아 동반, 휠체어 이용자, 심지어 장루-요루인 세척대까지 갖춘 유니버설 디자인 화장실을 만들었다. 후에 거장 빔 벤더스의 영화 ‘퍼펙트 데이즈’ 배경이 되기도 했다

이 프로젝트의 관건은, 과연 그 어렵다는 ‘첫 공공 사례’를 어떻게 만들지, 즉 서울시와 서울교통공사를 한꺼번에 설득한다는 게 과연 가능한지였다.

믿는 구석: 김계리 + 이연준 + 김소미

내겐 믿는 구석이 하나 있었다. 서울시 약자동행 담당관 김계리 주무관이었다. 약자동행 사업을 위해 시 안팎에서 다양한 협력을 추진해 일을 만들어 내는 팀이다. 김 주무관은 2023년 무의에 약자동행 사업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처음 연락해 오셨다.

이후 ‘휠체어도 가는 화장실’ – 장애인화장실 데이터 구축을 했고, 2024년에는 무의와 함께 ‘모두의 1층X서울’ 사업의 서울시 PM 역할을 하셨다. 민간 기금을 끌어와서 바람직한 경사로 디자인도 만들고 ‘경사로 설치 길라잡이 가이드’ e북 발간, 경사로 도로점용허가와 같은 첫 사례를 만드는 일잘러였다.

왼쪽부터 김계리(서울시 주무관), 황시인(무의 매니저), 이연준(홍익대 교수), 홍윤희(무의 이사장).
‘모두의 지하철’ 디자인 개발을 위해 연구 중인 홍대 연구진 모습. 무의.
김소미(눈디자인 실장). 무의.

이렇게 최초 사업을 따낸 기쁨도 잠시, 무의로서도 처음인, 한국에서 아무도 해 보지 않은 디자인 프로젝트의 시행착오를 줄이기 위해 실력 있고 믿을 만한 팀이 필요했다. 

디자인 연구는 공공디자인을 여러 번 진행한 홍대 시각디자인과 이연준 교수 팀이 맡았다. 만나면서 알게 됐는데 이 교수의 동생도 장애인이라 이민가려는 생각까지 했단다.  2017년 무의 지하철교통약자환승지도를 처음 디자인했던 눈디자인 김소미 실장 팀도 합류했다. 김 실장은 2017년 20개 지하철역을 직접 돌며 역 지도를 그렸다. 환승 경로를 지도에 표기하는 과정에서 ‘지하철 이동 약자 동선’을 이동 약자 본인보다 더 잘 알게 됐다. 진심과 전문성이 만났다. 

항해의 절반, ‘모두의 지하철’ 디자인 탄생

‘모두의 지하철’은 2025년 시작해 2027년 끝나는 3년짜리 프로젝트로 어느덧 절반을 넘겼다. 홍대 연구진과 눈디자인이 디자인을 연구했고 2026년 9월 현재 시범 역 10개에 부착되어 있다.

  • 시청
  • 서울역
  • 건대입구역
  • 고속터미널역
  • 교대역
  • 노원역
  • 삼각지역
  • 연신내역
  • 천호역
  • 청구역 등이다.
  • 이 중에서 특히 건대입구역과 노원역은 역 밖에 나가서 긴 길을 돌아가야 하는 곳이다.
  • 시범 역들의 성과를 측정해 더 확장하는 게 목표다.
  • 현재(2026년 9월)는 25개 역사로 확대하기 위해 준비 중이다.
‘모두의지하철’ 시청역 표지를 지나가는 유아차 동반한 최유정 님. 무의.

‘모두의 지하철’ 시그니처 디자인은 소위 ‘인디케이터’ 눈에 띄는 청록색 띠다. 이 청록색 띠를 따라가면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다는 비주얼 신호를 준다. 지하철에 이미 쓰이는 색이 26개라서 그 색들을 모두 피해야 했다. 지하철 조명이 제각각이다. 서울시청역처럼 붉은 벽돌을 붙인 곳도 있지만 흰 벽, 조명이 어두운 곳 등등 여러 조건에서도 눈에 띄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청록색’이 남았고, 그걸 선택했다. 눈에 잘 띄면서도 지하철에서 이미 쓰고 있는 색과는 겹치지 않아야 했다. 민트색과도 비슷해서 ‘민트길’이라고 할까 했다가 어르신은 민트라는 단어가 직관적으로 알아듣기 힘들다는 의견이 있어서 ‘청록색’으로.이름을 수정했다.그 이외에도 다음과 같은 디자인 요소가 들어갔다: 

  • 엘리베이터: 이동 약자는 엘리베이터를 찾아야 수직 이동이 가능하기 때문에 엘리베이터를 일종의 ‘랜드마크’로 삼아 큰 픽토그램을 넣었다. 휠체어 이용자가 엘리베이터를 못 타면 다른 이동 약자에 비해서도 차선책이 없기 때문에 휠체어를 크게 넣고 싶다고 의견을 제시했지만 자문회의를 통해 교통약자 4개 픽토그램(휠체어 이용자, 노인, 유모차 이용자, 임산부)을 같은 크기로 붙이는 걸로 정리했다. 
무의.
무의.
  • 긴 설명문을 외우지 않더라도 안내 표시(목적지까지의 거리)와 픽토그램을 정보 결정 지점이나 헷갈리는 지점에서 보면서 따라갈 수 있도록 정보 안내 체계와 부착 체계를 정리했다. 
  • 같은 층 장애인 화장실, 수유실, 전동기 충전기 위치 등도 표시했다. 특히 전동 휠체어 충전기 위치는 그동안 전혀 표시된 적이 없었다!
  • 지하철 화장실 표지가 엘리베이터 표지와 언뜻 보면 헷갈린다. 그래서 화장실 표지엔 남녀 픽토그램 옆에 휠체어 픽토그램을 넣었다.

이 표지를 붙인 시청역에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계속)

다음 편 예고.

무의.
무의.
무의.
무의.
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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