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캡:콜드케이스] 미국 대학을 굴복시키려는 트럼프의 광기? 그렇지 않다. 미국 우익의 오래된 ‘기획’이다. (⏰13분)
“신념이 아니라 패션”
버락 오바마, 2025.10.14
트럼프의 압박에 미국 대학들이 굴복하고 있다는 오바마의 비판. 그 표현이 예사롭지 않다. 늘 그랬듯 트럼프의 돌발적 ‘광기’가 미국 대학을 덮친 것일까? 캡콜드(김낙호 드렉셀 대학 교수)는 그렇지 않다고 평가한다. 수십 년 동안 이어져 온 미국 우익의 ‘기획’, 그 연장선에서 바라봐야 한다. 그리고 그 기획의 전모를 정확히 이해하려면, 미국 대학이 지금까지 걸어온 그 경로를 알아야 한다고 캡콜드는 말한다.
미국 대학의 두 가지 전통과 네 가지 모습을 제대로 알아야 미국 우익이 ‘대학 길들이기’ 프로젝트을 왜 기획했는지, 그리고 그 기획이 어떻게 진화했는지 알 수 있다. 하나씩 살펴보자.

김낙호의 ‘캡:콜드케이스’ [ep. 27]
트럼프의 대학 ‘길들이기’:
미국 우파의 ‘오래된 기획’
질문 정리: 민노
답변: 캡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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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25년 11.3 월(밤)과 그다음 날 새벽까지 진행한 인터뷰를 정리한 것입니다. 가독성을 위해 질문은 소제목과 본문에 함축했고, 본문은 문답 형식이 아닌 답변자(인터뷰이) 1인칭으로 정리했습니다. 최종 정리 과정에서 질문자와 답변자가 함께 내용을 확인하고 협의하여 퇴고했습니다.
🔖 여는 말(질문자): 민노
🔖 본문(답변자): 김낙호(캡콜드)
‘대학’ 열심히 협박 중인 트럼프
재집권한 트럼프가 직권으로 대학 연구 지원금을 끊어버리겠다고 압박하고 있다(백악관 행정명령 14151호). 이미 확정된 지원마저 철회하겠다는 강도 높은 압박이다. 연구비가 모두 자기가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라고 마음대로 선포한 후 모든 지원을 전면 중단하겠다는 사실상 협박인데 대학에 요구하는 조건은 다음과 같다.
- DEI(다양성; Diversity, 형평성; Equity, 포용성;Inclusion) 정책 폐기
- 팔레스타인 학살 반대는 반유대주의이므로 대학 당국이 학생과 교직원의 정권 비판을 적극 관리하고 차단할 것
- 기독교적 세계관(예: 창조 “과학” 등)을 커리큘럼에 수용
받아들이기 힘든 요구 조건을 걸어놓고 대학의 일방적인 ‘항복’을 강요하는 상황이다. 마치 사채업자 불법 장기 매매 계약을 연상시킨다. 트럼프 행정부의 제안을 받은 대학은 9개인데, 지난 10월 20일까지가 1차 시한이었고, 대다수 대학은 그 협박을 거부했다(텍사스-오스틴대학만 빠르게 굴복했고). 행정부가 연구비 지원 예산을 통해 대학을 통제하고 협박하는 상황 자체가 실로 ‘엄청난 일’이고, 이런 상황에서 전직 대통령 오바마가 트럼프의 압박에 굴복하려는 대학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 트럼프 행정부 제안받은 9개 대학
◾ 트럼프 ‘협박’의 정식 명칭: 학문적 우수성 협약(Compact for Academic Excellence)
⑴ 밴더빌트대학교(Vanderbilt)
⑵ 다트머스대(Dartmouth) ⇨ 공개적으로 거부
⑶ 펜실베이니아대(UPenn) ⇨ 공개적으로 거부
⑷ 남캘리포니아대(USC) ⇨ 공개적으로 거부
⑸ MIT ⇨ 공개적으로 거부
⑹ 텍사스대 오스틴캠퍼스(UT Austin) ⇨ 수락
⑺ 애리조나대(University of Arizona)
⑻ 브라운대(Brown) ⇨ 공개적으로 거부
⑼ 버지니아대(University of Virginia) ⇨ 공개적으로 거부 (2025.10.20. 기준)
미국 내 분위기는? 썰렁…
대학이 미국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한국과는 좀 다르다. 한국에서 대학은 오늘날에는 뒤처지지 않기 위한 필수 코스에 가깝지만, 미국에서는 여전히 더 나은 기회를 위한 업그레이드 코스에 가깝다. 사립 대학들은 학비도 아주 비싸고. 더불어 기본적으로 미국 우익이 대학을 바라보는 시선은 ‘내 멀쩡한 자식 좌빨 만드는 곳’으로 강력하게 틀짓기 됐다. 이런 맥락에서 그 반작용으로 ‘찰리 커크’가 등장했고, 지난 10년 동안 대대적인 대학 내 우익 활성화가 있었다. 그래서 현재 트럼프의 대학 협박 이슈에 관한 미국 내 일반 대중의 관심은 그렇게 뜨겁지 않다.

한국 우익 정권이 연구비 지원 예산을 볼모로 서울대와 연고대를 때린다고 하면 사회가 요동치겠지만, 미국에서는 트럼프가 연구비를 지렛대 삼아 하버드를 때려도 일반 대중에게는 그렇게 관심이 가는 이슈는 아니다. 뉴욕타임스 같이 엘리트층 관심사를 강력하게 반영하는 매체들만 열심히 다루는 편이다. 그래서 우익 정권이 더 파고드는 셈이다. 그런데 이 이슈를 좀 더 정확하게 그리고 풍부하게 이해하려면, 미국에서 대학이 어떤 의미인지 좀 더 찬찬히 그 맥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국 대학의 두 가지 전통: 고귀함과 실용
원래 미국 대학 체계의 원류인 유럽에서 대학은 견습 사제의 훈련소로 출발했다. 신학 연구를 위한 폐쇄적인 연구 공동체가 유럽 대학의 기원이다. 물론 이 맥락에서의 신학은 문학, 철학, 자연과학 등이 두루 포함된 개념이지만, 어쨌든 밥 먹는 기술을 연마하는 실용적인 지식 탐구가 아니다. 철학적이며 신성한 순수 지식을 탐구하고, 그런 지식과 체계를 생산하는 일이다. 교회는 그런 지식 탐구와 생산을 대가로 최소한의 생계를 책임졌다.
하지만 연구자들은 그 대가로 세속적인 성공은 포기해야 했다. 그야말로 폐쇄적인 지식 생산 공동체였고, 그 지식이 교회 전체는 물론이고, 국가 단위에서 유용한 이데올로기로 작동했기 때문에 교회가 운영하는 대학의 자율성과 폐쇄성을 용인했다. 학문의 자유 같은 이상향이나 학계 지식생산 방식의 묘한 자기 완결성은 그런 기반이 이어진 것이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 대학은 그런 식의 폐쇄적인 지식 공동체이기만 할 수는 없다. 실용적인 지식으로 경제적인 가치를 창출하고 그 중 몇몇은 엄청난 부를 획득하기까지 했다. 그런 과정에서 명문 엘리트 대학이 만들어지고, 또한 공공의 지원으로 지역의 이익에 기여할 인재를 육성한다는 공립대학들도 생겨났다. 미국에서 그런 공립대학의 대표격은 주립대다. 아이비리그로 대표되는 사립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학비로 대학에 다닐 수 있고, 이 비용은 주에서 지원한다. 이런 흐름은 19세기 말엽부터 생겨났다.

지식 생산에 특화한 폐쇄 공동체로서의 근간은 가져가되 사회와 엮이는 실용성도 겸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학은 지식 생산에 최적화한 논리로 작동하되, 시스템 운용을 위한 자원은 외부에서 끌어와야 한다. 상대적 자율성과 자율성을 유지하기 위해 외부 지원에 의존해야 한다는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고급 지식 생산이 그 자체로 고귀한 일이라는 전통적인 전략과 더불어 대학에서 생산한 지식을 통해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성공 신화’를 전파했다.
이런 ‘전략’은 지식 자체의 논리(교양 학문)와 입신양명/부귀공명(MBA 등등)이라는 이질적 요소가 결합한 형태로 한동안 대충 잘 유지됐다. 특히 미국 대학이 크게 성공했는데, 양동작전이 잘 굴러간 것에 더하여 역사적 비극이 오히려 행운으로 작용하기까지 했다. 바로 제2차 세계대전 즈음을 계기로 유럽의 대가들이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 대학으로 피신한 것이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 아인슈타인 등 석학들이 잔뜩 합류하며 미국 대학의 종합적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그렇게 미국 대학들은 세계의 지식 인재를 끌어들이는 진공청소기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미국 대학의 네 가지 모습
미국 대학의 두 가지 전통(고귀한 학문 연구와 실용적인 세속적인 성공)은 다음 네 가지 모습으로 현대화했다.
- 자유교양학부 대학 (Liberal Arts College)
- 주립대학
- 사립대학
- 지역 커뮤니티 대학
자유교양학부 대학은 고전적 유럽식 지식 추구 모델로 특화한 타잎이다. 윌리엄스 대학, 웰리슬리 대학 등이 대표적이다. 한편, 주 정부의 예산을 투입하여 우리 고장 인재 키우기에 특화한 주립대학이 있다. 심지어 보통 주립대들은 해당 주에 신분을 두고 있는 주민들에게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등록금을, 외부자에게는 비싼 등록금을 부과한다. 가령 내가 박사 과정을 공부한 미국 위스콘신에는 ‘위스콘신 아이디어’라는 전통이 있다.

위스콘신 주립대학에서 만들어내는 지식은 주 전체를 이롭게 만들어야 한다는 이념이다. 그리고 세 번째 부류는 비싼 학비로 악명이 높고, 전 세계적 명성을 갖춘 명문대들이 많이 소속된 사립대들이 있다. 흔히 아이비리그로 불리는 미 동부 대학들이 이쪽 부류다. 그리고 하나 더 언급하면, 지역의 커뮤니티 칼리지가 있다. 주립대보다는 훨씬 더 실용적인 영역, 가령 자동차 정비와 같은 전문 기술까지도 포함하여 가르치는 부류로, 한국으로 치면 전문대와 직능교육을 담당하는 정도의 위치다.
이렇게 미국 대학의 모습은 크게 네 가지다. 그래서 대학의 역할이 어떤 것인가 하는 질문은 어떤 대학 부류를 생각하는가에 따라서 의견이 갈릴 수 있다. 예를 들어 오바마는 대학 교육의 계층 상승 기능에 집중했기에 주립대학과 커뮤니티 칼리지를 강조하는 이야기들을 자주 했던 경우다. 하지만 일반 대중이 생각하는 소위 먹물 든 좌파의 ‘워크(WOKE)’(마치 ‘깨시민’ 처럼 미국에서 멸칭으로 사용되는 개념) 재수 없음을 공격한다고 할 때는 사립대학을 염두에 뒀을 가능성이 크다.
이에 반해 자유교양학부의 전통은 항상 붕 떠 있는 느낌이랄까? 학비는 치솟고, 예산은 쪼들리고… 교양학부의 전통은 미국 안에서도 가장 취약하고 쇠락하고 있다. 우리나라로 치면 대학에서 인문학의 쇠락 같은 느낌이랄까. 기존에는 자유교양학부 대학을 졸업하면 꽤 고상한 인재로 인정받았는데, 실용적 결과물을 바라는 투자금의 유입 없이는 전반적으로 운영 실속이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물론 전통적인 지명도로만 보면 여전히 고고하지만.
주립대와 우익 정치의 문제: 오래된 기획
미국 안에서 사회적인 계층 이동성을 만들 수 있는 공간은 아무래도 주립대학들이다. 지식과 실용 양쪽 모두 인정받는 브랜드 명성, 지역의 인적 네트워크, 그리고 무엇보다 주의 주민이면 감당할 수 있는 학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주립대들이 우익 정치가 십수 년 전에 가장 먼저 표적으로 삼은 대상이 되었을까. 이를 위해서는 미국 우익의 정치 역사를 약간 되짚을 필요가 있다.
원래 미국의 정치적 보수주의는 오랫동안 대학에서 생산한 지식, 과학과 크게 충돌하지 않았다. 보수적 정치색을 가진 학자도 학문적으로 얼마든지 뛰어날 수 있었다. 보수라는 정치적 성향이 데이터를 통해 과학적∙학문적 접근을 유지하는 교차점이 있었고, 말이 되는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9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클린턴 정부 시절 미국은 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했다. 그런 민주당 정부에 대항하기 위해 보수 공화당은 문화적 정체성을 더 강하게 오른쪽으로 이동시켰다. 깅리치 등의 자극적인 언설이 당시의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그런 우익화 드라이브에는 지지층을 더 공고하게 하는 과정에서 복음주의 종교적 색채마저 노골적으로 부각되었다. 즉, 90년대 후반 ‘잘 나가는’ 민주당에 대한 대항마로서 문화 정치, 종교 정치 전략을 세운 셈이다.
그리고 다시 집권한 공화당의 부시 정부는 9/11 테러를 겪고는 엉뚱한 이라크 전쟁을 터뜨렸다. 세계정세의 다극화를 고려하면 오히려 좀 더 다양하고 포용적이며 섬세한 사회적인 접근과 인식이 필요했지만, 미국의 보수 정치는 닥치고 애국이라는 정반대의 방향에서 지지세를 얻은 것이었다. 점점 복잡 섬세한 현실을 다루는 지식에 기반한 방향성에서 유리되던 보수 세력에게 결정타가 터지는데, 바로 2008년 서브프라임 금융 위기다.

리먼 브라더스 붕괴로 상징되는 큰 경제 위기가 터졌는데, 한국으로 치면 97년 IMF 정도의 충격이랄까. 탈규제와 적하효과로 대표되던 미국 보수의 경제∙사회학적 인식이 현실에서 결정적으로 파괴됐다. 현실에 맞추어 방향을 수정하기보다 그냥 공허한 동어반복에만 빠져버렸다. 그렇게 미국 보수 우익은 학문적 엄밀성, 과학성과는 점점 더 멀어진다.
그러다 보니 이제 미국의 보수 정치는, 간판만 유지되면 알맹이가 바뀌어도 상관없을 정도로 텅 빈 껍데기가 되었다. 원래 보수 공화당 이념이었던 신보수주의(‘네오콘’)을 생각해 보자. 네오콘은 미국이 국제 정세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탈규제를 통해서 미국적인 기업 가치를 보전하고 전 세계에 보급하는 것을 목표로 적극적인 확장 전략을 편다. 그런 적극적인 활동에는 CIA가 제3세계의 쿠테타를 조정하는 것까지 포함됐다.
그런데 지금 트럼프는 네오콘의 정반대에 더 가깝다. 네오콘의 확장주의와는 정반대로 보호무역에 바탕한 고립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식당으로 치면 간판(공화당)은 그대로지만 메뉴가 중화요리집에서 영국 레스토랑으로 완전히 바뀐 셈이다. 공화당 간판을 걸고 있어서 내용은 별생각 없어도 스스로를 보수라 자처하는 지지층이 상당수 계속 유지되지만, 네오콘의 정통은 단절됐다고 봐야 한다. 내부에서 계파 갈등 상황을 겪는 것도 아니다. 2기 트럼프는 그냥 공화당 전체가 일사불란하게 트럼프의 모든 정책에 충성하느라 탈법적 행위도 옹호하며 사실상의 독재정치에 찬동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우익이 보는 미국 대학들, 참 마음에 안 드네…
그렇기에, 오늘날의 미국 우익이 보기에는 미국 대학의 네 가지 유형이 모두 성에 차지 않는다.
모든 고등교육의 본질은 관찰의 엄밀성이다. 주장의 근거를 맥락적으로 분석하고 고차원적이고 입체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중시한다. 그리고 그런 철학과 방법론은 오늘 미국 우익의 방법론과는 정반대에 가깝다. 유명 코미디언 스티븐 콜베어가 “(뉴스 미디어가 리버럴 편향이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 세계가 리버럴 방향으로 편향되어 있다.”고 개그를 친 적 있다. 보수주의가 이야기하는 정치적 이상은 점점 더 현실과 어긋날 수밖에 없고, 그런 우익적 사고방식을 고수하면 할수록 현실과는 점점 더 멀어지게 된다는 맥락이 담겨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고등 교육을 끌어내려서 자신들의 아집을 고수할 것인가. 자유교양 대학들은 뜬구름 놀이로 희화화하고, 명문 사립대학들은 엘리트 귀족들로 포장하면 된다. 그럼 주립대학에 관해선? 멀쩡한 자녀들을 ‘좌빨’ 만드는 곳으로 프레이밍 하는 것을 선택했다. 00년대 후반부터 기세를 올려서 2010년대 초만 되더라도, 어떤 주에서 공화당 주지사가 당선되면 가장 먼저 하는 게 주립대 예산을 깍는 거였다. 그리고 주립대 이사회에 활발한 우익활동을 하는 인사들을 쑤셔넣고. 그런 식으로 점점 더 우익의 정치적 입김을 주립대에 주입하려고 했다. 이런 역사적 ‘밑밥’이 있었기에 오늘날 트럼프가 대학을 마음 놓고 공격할 수 있게 된 거다.
한마디로, 미국 우익 측은 대학 나온 고급 인력이 보수적인 정치색과는 멀어진 ‘리버럴’ 쪽으로 배출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다. 당연히 ‘우익 대학’ 만들기 프로젝트까지 나아갔는데, 우리나라에도 잠깐 화제가 된 모스 탄(Morse H Tan·한국명 단현명·51)이 재직 중인 리버티대 역시 미국 우익 재단 돈으로 세운 대학이다. 오스틴 대학처럼 정식 인증도 안 나온 교육업체, 예전 트럼프 대학처럼 아예 학교조차 아니었던 경우, 그냥 선전기관인데 대학 이름 내걸었다가 슬그머니 이름을 바꾼 프래거(Prager U. 처음에는 Prager University) 사례처럼, 대학이라는 이름이 주는 권위를 참 많이 동경한다.

미국 대학의 약점: 돈 먹는 하마
앞서 슬쩍 보았듯 미국 대학은 특히 2차 대전을 거치면서 명망이 높아졌다. 하지만 고급 인력 수급과 연구의 성장세를 지속하려면 점점 더 많은 자금이 필요했다. 초창기에는 대학이 지닌 연구 프리미엄이 공고했기에 기업이 적극 투자해서 연구를 지원하는 경우가 많았다. 벨 같은 통신기업이 ‘벨랩’을 만들어 대학과 기업 사이의 교량 역할을 한다든지. 정부 연구 발주도 큰 수입원이었고, 결과물도 대단했다. 오늘날 인터넷의 조상 가운데 하나인 미국의 아르파넷(ARPAnet)도 60년대 국방부에서 대학에 연구를 발주해서 만든 프로젝트다. 아무튼 점점 규모는 커지고 ‘돈’이 중요해졌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기업은 대학에 의존할 필요가 적어졌다. 스스로 직접 연구소를 만들면 되니까. 그렇기에 대학 연구소 입장에서는 기업 지원 비중은 줄고, 정부 지원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 높아질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결국 정부의 ‘돈’이 가장 중요한 재원 중 하나가 됐다.
여기에 2000년에 들어서면서 또다른 수익원이 된 것은 ‘해외 유학생’으로, 명문 사립대나 주립대에서 유학생의 등록금은 무시할 수 없는 수입원이 되었다. 주립대만 해도 유학생은 주 거주민에게 주어지는 등록금 할인 헤택이 없고, 2~3배 많은 등록금을 내야 한다. 명문 사립대나 자유교양 대학들 또한, 많은 장학금 보조 혜택이 내국인들에게 우선순위 내지 지원 자격이 돌아갔다. 이런 흐름 속에서 이런 대학들이 특히 인도계와 중국계 학부생들을 대규모로 받아들이는 구조가 생겼다. 유학생들이 눌러살면서 만들어지는 지역 경제, 그들이 숙련 인재가 되어 기여하는 부분 등은 말할 나위도 없다.

트럼프의 공세
첫 번째 충격은 트럼프 1기다. 연방 단위에서 이민 규제. 극우적 캠페인이 전개됐다. 미국 최고, 미국인 최고를 내세우면서 중국과 중동에 적대적인 정책이 전개되고, 이들을 악마화했다. 이민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가령, 이민국 예산을 줄이고, 전체적인 분위기를 적대적으로 하는 방식이었다. 유학생 규모가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다.
그런데 트럼프 1기 후반에는 ‘코로나’ 사태까지 터졌다. 유학생은 물론이고 재학생마저 등록률이 낮아졌다. 그래서 공공 예산의 중요성이 더 커졌다. 이 과정에서 대학도 몸집을 줄이기 위해 ⑴ 임직원을 줄이고, ⑵ 정원 트랙을 줄이는 노력을 기울였지만, 대학 재정의 불안정성은 가속했다. 이때부터 주욱, 많은 대학교들이 유학생이 줄고, 예산도 줄고, 기나긴 하향 곡선을 그었다.
그러다가 바이든 때 잠깐 한숨을 돌리며 이런 트렌드가 바뀔 뻔했지만, 바이든 집권 후기에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터지고, 대학생들이 진보적인 목소리가 가열했다. 그런데 대학생 시위라는 게 아무래도 과격화, 단순화되기 쉽고, 이스라엘군의 인종학살에 대한 반대에서 시작했지만 이스라엘의 존재 자체를 악마화하거나 유대인을 까는 방식의 구호도 좀 표출됐다.
당장 그 유명한 ‘그 강에서 그 바다까지'(팔레스타인의 나라를 만든다)라는 구호도, 반대로 해석하면 유대인을 모두 몰아내야 한다는 의미가 되니까. 그렇게 미국 대학 시위 = 반유대주의라는 맥락으로부터 유리된 트집을 우익들에게 잡혔다. 이런 약점을 미국 우익이 쏠쏠하게 악용하고, 먹잇감으로 삼았던 거다.

📌 그 강에서 그 바다까지
◾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자와 반(反)시오니스트가 사용하는 구호. “요르단강에서 지중해까지”(From the Jordan River to the Mediterranean Sea)라고도 한다. ‘팔레스타인 해방’ 같은 구호와 함께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 “예컨대 가자지구의 무장단체 하마스는 2017년 조직 규약에 “그 강에서 그 바다까지 팔레스타인의 완벽하고 완전한 해방 이외의 어떤 대안도 거부한다”며 이 구호를 끌어들이고 있다.”(한겨레, 유레카 “그 강에서 그 바다까지”)
◾ 반면, 시오니스트나 팔레스타인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반유대주의적 증오 발언이라고 주장한다.
◾ 영어: “From the River to the Sea”
아니나 다를까, 트럼프 2기가 출범하자마자 우익 정치가 대학들을 굴복시키려 한 첫 단추가 바로 반유대주의 척결이라는 명분이었다. 하버드, 컬럼비아 총장들을 압박해서 사퇴시키고, 지원 예산을 삭감하고, 신규 연구 프로젝트에서도 제안서에 다양성, 평등, 사회정의 등에 연관된 키워드가 포함되면 탈락시켜 버렸다. 협박 무기는 연방 정부의 연구비 지원, 지렛대는 반유대주의 같은 대충 적당한 명분. 그게 현재 미국 대학의 상황이다.

미국 대학의 오늘
정부의 연구비 지원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상황에서, 그 연구비를 정치적 무기로 쓰겠다고 결심했고 고등교육을 적으로 생각하는 정치세력이 집권했다. 그렇기에 큰 대학일수록 취약하다. 트럼프의 9개 대학 표적 공문 이전에도 개별적인 협박… 아니 협상이 있었고, 대응은 갈렸다. 예를 들어 컬럼비아 대학은 정권의 압박에 무릎을 꿇었고, 하버드는 (아직은) 버텼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대학으로 가려는 유학생 수요는 당연히 줄 수밖에 없다. 미국 대학의 경쟁력은 적어도 유학생을 기준으로 봤을 때는 쇠락하고 있다. H1B비자 수수료를 2천 달러에서 10만 달러로 올린 트럼프의 막장 행정 덕분에 미국에서 공부하고 계속 취업해서 살겠다는 의지도 박살나고 있는 중이다. 미국에서 고등교육 받은 전문직 노동자로 미국에서 살 수 있는 가능성이 낮아지면, 미국 대학으로 유학 가서 얻는 메리트가 줄어드니 말이다. 그냥 연구 역량 자체만 놓고 보면 과학, 공학 분야에서 중국 대학들이 오히려 빠른 성장을 보이고 있다. 돈을 투자하니까.
그래서 미국 대학 총장들에게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다. 당장 자금줄이 끊기는 것을 감수하고도 학문의 자유라는 대학의 전통적 가치를 지킬 것인가. 개개인 큰 손 후원자들마저도 떠날 수 있는데도 학생들의 정치적 권리를 보장해 줘야 할 것인가. 안타깝게도 그간 미국 대학들 대다수는 명문 취급 받을수록 덩치 큰 공룡이 되었고, 협박 테이블을 엎어버리기 어려운 상태다. 트럼프 정권이 콕 집어서 우선 협박 대상으로 삼은 9개 대학은, 굴종할 만한 가능성을 보고 뽑은 것이다.

역설적으로, 평소에 등록금이 비싸서 정부 의존이 적은 학교가 이런 협박으로부터 좀 더 자유롭다. 그래도 어쨌든 재정 위기를 모든 직원들이 그야말로 허리띠 졸라매고 버텨야 하는 건 마찬가지지만.
전망
미국 대학은 지금 자발적으로 ‘학문의 자유’을 내다 버리고 있다. 이런 미국 대학의 위기 상황은 일개 트럼프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 우익이 수십 년 프로젝트의 연장선에서 바라봐야 한다. 단 한 명이라도 공화당 정치인을 주 단위 선거든 시 단위 선거든 교육에 입김을 넣을 수 있는 공직에서 공화당 인사를 떨어뜨리는 게 현실적인 유일한 대응책이다.
미국은 개방성을 바탕으로 세계 전체를 대상으로 인력과 기술을 포용하는 ‘용광로’로 발전한 모델이다. 유학생은 그 주요한 자원이었다. 유학생이 그저 학비만 내는 수입원은 아닌 것이다. 세계 지식 인재의 허브가 되는 방향으로 개방적인 방향으로 진화해야 하는데, 트럼프 ‘치하’에서는 그 정반대 방향으로 달리고 있다.
임기가 끝날 때까지는 잘 버티어야 하는데… 개별 대학들이 정신을 차릴 수밖에 없다. 재단 예비비를 풀어서, 그러니까 일반 기업으로 치면 자본 잠식을 하더라도 대학을 지켜야 하는 상황이다. 철학이 밥 먹여 주냐고 할 수 있지만, 그런데 대학은 철학으로 밥 먹여주는 곳이어야 한다.
대학이 한 사회에서 가질 수 있는 이상적인 위치는 가장 현실에 기반한 지식을 깊이 있게 파고드는 거다. 그래서 사회에 바람직하게 적용하는 것이다. 직능 교육과도 다르고, 단순한 신분 상승 프로젝트와도 다르다. 상대적 자율성을 가지고 지식 그 자체에 매진하는 것, 그게 대학의 핵심적인 사회 기능이다.

여담: 타산지석
사실 이런 사태를 한국의 대학 상황에 그대로 적용해 타산지석 삼기는 쉽지 않다. 지난 정권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연구 예산을 깎았던 것조차, 고등 지식체계에 대한 이념적 길들이기가 아니라 그냥 엉터리 경제정책이었을 뿐이었다. 대학교가 좌빨 양성소니까 자식을 대학에 보내지 않겠다는 특정 정치 정체성의 사람들이 흔한 것도 아니다. 그보다 오늘 미국 대학이 겪는 위기는 한국 대학의 위기와 비슷하다기보다는, 사회적 기능과 경제적 자립 사이의 균형을 맞추기 어려워서 휘청이는 모든 다른 영역에서 참조해야 할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