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윤희 스토리] 회사 관두고 장애인 이동권 위한 사단법인 ‘무의’ 이사장으로, 지민이 엄마로, 활동가로, 자유기고가로. 힘겹고 지치지만 가끔씩 찬란한 홍윤희 이야기.
홍윤희? 근데 누구세요?
장애가 ‘무의미’해지는 세상을 꿈꾸는, 아니 계획하고 실행하며 그걸 알리는 ‘무의’라는 단체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진짜’ 직업 따로인 자원봉사 1인 활동가 단체였지만, 협동조합의 테두리를 갖추고, 이제 막 사단법인으로 법인격을 바뀌면서 그 골격이 좀 더 단단해졌습니다. 물론 일도 많아지고요.
하지만 뭔가 의리 번쩍할 것 같은 그 재단법인 안에서 돌아가는 모든 일은 열정과 소명이라는 진부하기 짝이 없는 오래된 ‘비경제성’의 단어와 함께하지 않으면 그대로 멈추는 일들입니다. 홍윤희라는 한 명의 인간이 그 열정과 소명을 잃어버리면 그대로 멈추는 일입니다. 아마도 그럴 것으로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에는 합리성과 경제성이라는 보편적 경로가 아닌 열정이나 소망이나 어쩔 수 없음 등으로 이끌리는 예외적인 경로를 쫓는 ‘비경제적 인간들’이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그들에게 빚지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힘들고 초췌하게 지쳐 있어도 이 사회에 진짜 광채를 비춥니다. 물론 그런 ‘희생'(?)을 권하는 건 아닙니다. 모두 가급적 적게 일하고, 많이 벌고, 인간답게 서로 나누고, 즐거움을 누리면 좋죠. 그런 세상을 저도 꿈꿉니다.
홍윤희는 2006년 딸을 낳았고, 딸이 소아암에 걸렸고, 그 결과로 장애가 생겼습니다. 그 딸은 어느새 세븐틴에 진심인 고등학교 2학년생입니다. 기업에서 홍보이사가 되기까지 열심히 일했던 그는 이제 장애인 이동권 증진 콘텐츠를 만드는 사단법인 ‘무의’ 이사장입니다. 딸을 위해, 장애인 이동권을 위해 휠체어로 이동할 수 있는 서울지하철 교통약자 환승지도를 만들었습니다.
드라마 같습니까? 역경을 하나씩 극복하는 엄마와 딸의 벅찬 감동이 있을 것 같나요? 홍윤희의 이야기는 매력적인 ‘스토리’입니까? 자주 떠올리는 문장, 누군가의 목소리가 반드시 당신을 위한 ‘콘텐츠’일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누군가의 진실한 이야기는 때론 우리에게 콘텐츠 이상으로 삶의 나침반이 되어주기도 합니다.
홍윤희의 이야기, 그게 매력적이든 매력적이지 않든, 그게 감동적이든 감동적이지 않든 저에게는 그게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그냥 그 아프고 슬프고 기쁘고 벅찼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다채로운 광채 뒤에서 묵묵하게 지겹고, 힘들고, 그늘진 시간에 관해 들어보고 싶습니다. 지긋지긋하게 짜증 나고 다 포기하고 싶었던 그런 순간의 이야기가 그냥 궁금합니다. 인생은 소풍이 아니니까, 소풍만 이야기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저 ‘홍윤희 이야기’를 몇 번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들어보기로 했습니다. 이미 발표된 칼럼이나 강연에서 들은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최대한 있는 그대로의 이야기, 홍윤희가 스스로 자신을 돌아본, 그리고 나아가려는 그 길에 관해 묻고 정리하겠습니다. ‘기억할 만한 지나침'(기형도)의 순간을 기록하겠습니다.
질문.
- 우선 지민이 엄마로 사는 일과 그냥 홍윤희로 사는 일이 어떻게 다르고 겹치고 충돌하는지 물었습니다.
- 아이와 갈등에 관해서도 물었고요.
- 이야기하다 보니 너무 바쁘고 지친다는 이야기로 흘러서
- 휴식은 어떻게 취하냐고 물었습니다. :D
- 인터뷰는 2024년 5월 29일 수요일에 했어요.
1. 엄마의 말
지민이는 태어나자마자 소아암 진단을 받았어요. 지민이를 돌보기 위해 6개월 정도 회사를 휴직했는데, 그 시간이 다해가던 즈음 회사를 관둘지 말지 고민했어요.
당시가 2006년이었으니까 남성 육아휴직이 지금 같지 않던 시절인데 남편이 6개월 육아휴직을 썼어요. 당시 증권사에서는 남성 육아휴직이라고 하면 육아휴직 핑계로 유학 준비 같은 걸 하는 게 예사였는데, 남편은 온전히 지민이를 돌보는 데 썼죠. 친정 부모님도 큰 도움이 됐어요. 마침, 친정이 지민이가 있던 세브란스 병원 근처였거든요.
괴로웠던 시기였어요. 그래도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자원’이 있었으니까요. 소아암 병동에는 대부분 부모 중 하나가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를 돌봐요. 맞벌이하는 건 저밖에 없었어요. 남편이 있었고, 간병인도 쓸 환경이 되었고, 친정엄마가 있었으니까요. 이런 가족의 자원이 없었다면 버티기 힘들었을 거예요.
회사를 관둬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던 참에 엄마가 직장 그만두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아이 생사가 기로에 있는데··· 휴가 기간 거의 다 쓰고 복귀를 1주일쯤 남긴 때였어요. 엄마가 그러더라고요.
“이제 회사 가서 좀 쉬어.”
당시 아이가 항암치료 후유증으로 장이 멈췄어요. 장폐색이 진행될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의사들도 지민이를 중환자실로 올려보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고민하고, 아이는 너무 힘들어서 낑낑대고… 결국 중환자실에 보내지 않았어요. 의사는 아이가 이겨낼 수밖에 없다고만 말했죠.
그런 상황에서 회사에 약속한 날이 온 거에요. ‘이제 회사에 가서 쉬라’고 엄마가 말한 거죠. 회사에 다시 출근했고, 바로 그날부터 지민이가 호전되기 시작했어요. 점심에 남편에게 전화가 왔어요.
“지민이가 방귀 뀌었어.”
그 말을 듣는 순간 안도했어요. 얼마나 반가운 말이겠어요. 가스가 빠져나가야 안전하거든요. 6개월 된 아이지만 생명력이 있었던 거죠. 회사도 큰 도움을 줬어요. 당시 저는 옥션(이후 G마켓과 통합)에 다니고 있었는데, 비교적 초창기라서 그렇게 규모가 크지 않았어요. 2006년에는 한 250명 정도 규모 회사였죠. 사장님이 문병 오셔서 치료비에 보태라며 지원금도 주셨고, 직원들도 모금을 해줬어요. 저는 6개월 동안 회사가 배려해 준 덕에 여러 휴가를 당겨쓸 수 있었고요. 과장에서 차장으로 승진까지 했죠.
그래서 지민이가 생사의 기로에 서 있는데도 회사에 돌아가야 한다는 부채 의식이 있었던 거예요. 그 부채 의식 덕분에, 아이가 암 진단을 받고도 직장에 다닐 수 있었던 셈이죠.
2. 지민이의 말
무의 활동을 하면서 지민이의 단독 활동도 커지는 것 같아요. 언론 인터뷰에서 지민에게 단골로 나오는 질문이 ‘엄마 활동에 관해 어떻게 생각해요? 얼마나 고마워요?’ 이런 거예요. 그런 질문을 정말 많이 해요(웃음). 제가 처음 ‘활동’이라는 걸 시작한 게 지민이 초등학교 3학년 때었으니까. 지민도 저 때문에 좀 더 일찍 조숙해진 것 같기도 하고요. 지민이를 안고 계단을 오르내리는 모습이 언론이 바라보는 제 모습이었고, 교통약자 환승지도를 만들면서는 희생하는 엄마 프레임 같은 게 있기도 했고요.
“이거 엄마 좋아서 하는 거잖아? 이게 무슨 희생이야?”
지민이 초등학교 6학년인가 중학교 1학년인가 그때 시크하게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웃음). 그런데 저도 딸에게 칭찬받고 싶은데, 때로는 그냥 시큰둥하기도 하고···어떤 때는 일이 힘들어서 지민이에게 와서 넋두리를 하고 있으면 이런 말을 하기도 했어요.
“왜 엄마는 나에게 인정받고 싶어 해?”
지민이와 컨퍼런스에 함께 연사로 나갔을 때도 비슷한 질문에 “엄마는 엄마 일을 하는 거예요” 이렇게 말하기도 하고… 그럴 때는 약간 서운하기도 했어요.
그런 생각을 바꾸게 한 일이 있어요. 무의의 대표 프로젝트는 서울지하철 교통약자 환승지도에요. 지민이는 케이팝 덕질을 한지 10년 정도 됐는데, 멤버 생일 축하 지하철 광고를 소셜미디어에 사진 인증하는 게 있어요. 지민이가 어느 날 ‘지하철역 어디 어디 가야 하니까 나갔다 올게.’ 그러는 거예요.
저는 그게 너무 걱정이 되는 거죠. 지하철 승강장과 플랫폼 사이가 멀면 휠체어 바퀴가 끼는 경우도 있고, 그러면 위험할 수 있잖아요. 그런 정류장이 꽤 많아요. 당시 지민이 나이가 초등학교 6학년이나 중1학생밖에 되지 않았을 때라서 불안하고 걱정이 됐죠. 그래서 어떤 지하철역은 제가 미리 찾아서 알려주기도 하고 그랬어요. 그런데 지민이가 걱정하지 말라면서 이렇게 말하는 거죠.
“걱정하지 마, 엄마가 만든 지하철 환승지도 있잖아.”
그럴 때면 또 감동받고요. 엄마가 이런 걸(교통약자 환승지도) 만들었다는 것만으로도 지민이가 세상에 관한 신뢰를 품는 것 같아서요. 물론 저 혼자 만든 건 아니고, 200명이 넘는 자원봉사자, 디자이너 등이 큰 도움을 줬죠. 그게 저에겐 커요, 지민이가 사회에 신뢰를 품을 수 있게 했다는 거.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지민이와 그렇게 큰 갈등은 아직 없고요(웃음). 오히려 일하고 힘들었던 걸 이야기하고, 그걸 들어주면서 약간 시크하게 조언 해주기도 하고, 어느 날은 그만 투정 부리라는 식으로 말하기도 하고, 이제는 어느새 친구 같죠.
지민이가 이제 스스로 활동에 목소리를 내면 그걸 도와주기도 하고요. 공연장에서 휠체어석이 없어서 장애인 팬들은 공연 보러 다니는 게 아주 힘들어요. 거기에 지민이가 목소리를 냈어요. 트위터에 이렇게 썼죠.
“휠체어석이 분명히 있는데 왜 휠체어석 예매를 오픈하지 않는 건지?”
다른 팬들이 공분해서 팬카페에 문제를 제기했어요. 이듬해 그 아이돌 콘서트에서는 휠체어석 예매를 받게 되었죠. 이런 영향을 받아 무의가 2천석 이상 공연장의 휠체어석 현황을 조사하기도 했고요. 저나 지민이가 이 주제로 신문 칼럼을 쓰거나 언론 문의에 대응도 많이 했고요.
2022년에는 장애인권대학생네트워크와 함께 케이팝장애팬 설문조사를 통해 제안서를 만들어서 대형기획사 네 곳에 전달했어요. 두어 군데에서는 연락이 와서 실제 미팅도 했고요. 한군데와는 구체적으로 프로젝트를 구상 중입니다.
3. 너무 일을 많이 해요
지금은 리소스가 부족해요(웃음). 잘 아시겠지만, 할 일은 많은데 사람이 없어요. 누가 칼 들고 이 일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협박하는 거 아니잖아요(웃음). 그런데도 하다보니 일이 너무 많아요. 계속 업무가 추가돼요.
사단법인으로 전환하면서 그동안 안 해본 행정업무 부담이 커요. 협동조합일 때는 회사도 다니면서 병행하느라 1년에 한두 가지 프로젝트만 하면 됐어요. 지금은 협동조합도 연말까지 계약 관계 때문에 유지해야 하는 데다가 사단법인 설립과 조직 셋업을 같이 하고 있어요. 거기에 2024년 5월 기준으로 무의(사단법인, 협동조합)가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무려 8개에요. 우리 팀원은 저 포함해서 5명이고요.
8개 중에서 두 개만 작년부터 지속해 왔던 안정적인 프로젝트고, 나머지 6개는 처음 하는 거예요! 일도 일이지만, 조직이 커지니 이젠 정말 운영비가 장난이 아니에요. 2024년 6월 현재 저는 무의에서 보수를 받고 있지 않아요. 그 대신 2021년부터 카카오임팩트펠로우(현재 브라이언펠로우)로 받는 지원비가 큰 힘이 되고 있어요. (브라이언펠로우: 김범수 카카오 창업자가 출연한 재단인 브라이언임팩트에서 운영하는 사회혁신가 펠로우십 제도) 올해 지원이 끝나지만요.
“그 지원비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용기가 났어요.”
지민이 엄마, G마켓 홍보이사, 파트타임으로 사회공헌활동, 자유기고가. 제가 거쳐 간 혹은 하는 일은 그런 네 가지 페르소나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심사나 자문하는 일이 종종 들어오기도 하고요. 오늘 아침에도 ‘열린관광지’ (문화체육관광부가 지자체에 지정하는 장애친화관광지) 운영가이드 제작 자문하고 왔어요. 이런 일들은 경험과 인맥을 쌓기 위해 해요.
2024년 무의 주력 사업 중 하나가 ‘모두의 1층’이라고 서울시와의 프로젝트인데 여기서 경사로 설치, 휠체어 탄 고객을 위한 서비스 가이드를 만들었어요. 그런 가이드를 만들고 확대하는 데 다양한 가이드 제작 자문이 도움이 되고요. 덤으로 접근성에 진심인 사람들과 네트워킹을 할 수도 있고요. 무의라는 조직의 무형자산이 되는 거죠.
문제는 지금은 너무 다양하고, 생소한 일 여러 가지를 동시에 진행하니까 일할 때 ‘모드전환’이 잘 안 되요(허탈 웃음. 허허). 사람이 더 필요한 것 같지만, 사람을 새로 뽑는 일도 힘들고, 비용도 필요하고… 제가 PR 일을 했잖아요. 그래서 내가 한 일을 PR이든 소셜미디어든 컨텐츠를 만들어 공유해야 일을 마무리하는 것이라는 강박이 있어요.
“그렇게 활동을 소개하고 확인받아야 일을 끝낸 느낌이 있어요.”
공유하고 드러내는 게 비장애인들이 몰랐던 걸 알게 해준다는 명분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오래 하다 보니 너무 지친 게 사실이긴 해요. 가령, 페이스북 활동은 예전만큼 즐겁지는 않아요. 미국에서는 미 대선이나 아동청소년 정신건강 이슈와 맞물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에 대한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점이 대두되기도 했잖아요? 브런치에도 ‘사랑하는 페북, 왜 이 모양이 된 거야’ (2021.10.19) 같은 글도 썼죠.
기본적으로 소셜미디어는 자극적인 컨텐츠가 흥하는 데다 너무 많은 시간을 써야 하는 게 피곤해요. 하지만 긍정적인 요소도 많아요. 일례로 지하철 환승지도를 처음 만들게 됐던 것도 페이스북에 제가 올린 한 장의 사진 덕이었죠.
“2011년 고속버스터미널역 휠체어 리프트 고장 안내.”
당시 3개의 노선이 교차하는 환승역인데 리프트 고장 신고를 했더니 “어머니 어디 계세요?”라며 관할 구역을 따지더라고요. 환승 구간은 양쪽이 모두 관장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공사 측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던 걸 페북에 썼고, 그걸 서울신문이 보도한 후 다음 날 교통부에서 ‘우리 장애인편의시설 이렇게 잘 설치하고 있어요’라며 해명 자료를 냈어요.
이런 과정을 지켜본 대학 후배(EBS PD)가 당시 다음(카카오) 뉴스펀딩을 제안했고, 슬로우뉴스에도 그 글을 연재한 거고요. 소셜 미디어가 특히 소수자들의 사회적 연결 고리 역할을 수행하는 건 많은 연구에서 밝혀진 사실이기도 한데 저 같은 경우는 매우 드라마틱하게 그게 풀린 거죠. 물론 요즘은 소셜미디어 포스팅이 일상 휴식이 아니라 일의 측면이 강해져서 탈이지만요
4. 나쁜 휴식, 좋은 휴식… 위로가 필요해
정말 너무 지치면 몇 가지 휴식 방법이 있어요.
나쁜 방법부터 말씀드릴게요. 회사 그만두고 자기 일 하는 모든 사람이 그렇듯이 저도 주말에 안 쉬고 일하는데요. 가끔 주말에 하루 종일 유튜브로 몰아보기(빈지 워칭; binge watching)를 하는 거예요. 제 유일한 낙이 제가 좋아하는 배우인 조승우가 나오는 드라마를 보는 거죠. 최근에는 [마의]라고 50부작 드라마를 온종일 봤어요.
여담이지만 지민이를 임신했을 때 조승우 배우가 자폐인 마라토너로 나온 ‘말아톤’을 서너 번 극장에서 봤어요. 이제 제가 장애 자녀를 키우며 말아톤에 나온 엄마처럼 아이를 보호할지 손을 놓을지 고민하고 있으니 그 배우와는 나름 각별한 인연이기도 하죠.
지칠 때 아주 가끔은 페이스북에 저녁나절 노을 사진과 함께 중2병스러운 글을 올리기도 해요.
“인생 리셋하고 싶다.”
그냥 사람들의 따뜻한 위로가 필요한 때가 있어요. 소셜 미디어의 가장 큰 미덕은 얼굴 안 보고 적당한 수준에서 위로를 건넬 수 있다는 데 있는 것 같아요. 아주 좋은 방법은 아니지만, 가끔은 그런 걸 하죠. (웃음)
“같이 고통스럽게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수준으로 적당히 위로할 수 있으니까.”
좋은 방법은 운동이에요. PT를 받고 있죠. 스스로 운동하면 좋은데 그걸 못해서. 지민이를 자주 안아야 하니 근골격계 문제가 많아요. 코로나 이후부터 근력 운동을 중점적으로 하고 있어요. 얼마 전엔 데드리프트 40kg 스무 개인가를 성공하고 스스로 놀랐다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