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네바 인터뷰 53.] 나이키 운동복 입은 베네수엘라 독재자가 미국 델타포스 헬기에 ‘가축처럼 실려’ 오고, 그 모습을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자랑스럽게 올린 트럼프의 충격적인 사진으로 시작한 2026년. 올해도 만만찮다. 이상헌(ILO 고용정책국장)이 말하는 인간과 노동. (⌚6분)

여는 말: 납치당한 독재자
이상헌(ILO 고용정책국장)에게 2026년을 전망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경제 발전 모델의 변화, 지정학적 문제 그리고 이 두 변수에 따른 인권과 민주주의의 문제로 나눠 이야기했다. 그리고 인터뷰 정리가 마무리되던 참에 미국이 베네수엘라를 공습해 독재자 마두로를 납치했다. 이에 관해서도 논평을 청했다. 베네수엘라 사태에 관해선 따로 좀 더 길게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2025년 12월 28일 나눈 인터뷰를 이상헌의 독백으로 정리한다.

이상헌의 ‘제네바 인터뷰’ [ep. 53]
당분간 태양의 날은 없다:
2026 전망 ‘국제’
질문∙정리: 민노
답변: 이상헌
1. 신자유주의의 종말과 떠오르는 개입주의: 발전 모델의 문제
이제 전 세계적으로 시장 중심이나 시장 주도의 경제 발전 모델을 추구하는 나라는 거의 없다. 미국도, 중국도, 한국도 ‘개입주의’를 노골화한다. 이제 세계는 시장주의에서 개입주의로 그 무게 중심이 이동했다. 중국은 산업 정책에서 매우 공격적인 국가 주도적 성격을 띠고, 미국은 무역 정책이라는 영역 자국을 ‘보호’하려는 의도를 띠고 그런 개입주의를 강화한다.
이런 움직임은 예전과 같은 시장 중심 모델로는 해석할 수 없는 새로운 상황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고전적인 ‘신자유주의'(라는 말을 개인적으로 싫어하지만)는 이제 끝난 게 아닌가 싶다. 이제 신자유주의는 교과서에서만 존재하는 모델로 사라지고 있다.
그런데 ‘안전성’의 관점에서 보면, 미국 모델과 중국 모델이 서로 ‘충돌’할 때 어떤 파열음이 일어날지 그 예견 가능성이 너무 작다. 미국은 상대국과의 갈등을 일으키는 모델이고, 중국은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모델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서로 충돌한다.
예전엔 미국의 자유주의적 경향 vs. 중국의 통제 모델 간 충돌이었다. 하지만 이젠 둘 다 국가 통제적 모델 간의 충돌 혹은 개입주의 간의 충돌이다. 하지만 아직 세계는 그런 ‘선례’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미국과 중국의 충돌이 어떤 모습으로 펼쳐질지 그 파편과 파열음이 어떨지를 예측하는 건 쉽지 않다. 그리고 이 충돌이 너무 파괴적일 때 이를 어떻게 조율할 수 있을지도 불확실하다.

한국은? 문제는 ‘서비스’가 아니라 ‘제조’다
한국은 AI 중심으로 간다. 그 산업 정책이 얼마나 내실 있게 진행할지를 지켜봐야겠는데, 관점 포인트는 ‘서비스’보다는 ‘제조’ 차원에서 얼마나 완성도 있는 ‘프로덕트’를 만들 수 있는지다. AI가 ‘서비스’ 산업의 영역으로 진화하고 발전하면 쿠팡 같은 기술 플랫폼 기업이 더 득세한다.
AI가 ‘제품’ 영역으로 ‘생산’ 가능한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산업적 베이스에 적용할 수 있는 중간 시장(하이엔드 시장은 좀 어렵고)이 확장할 가능성이 생긴다. 제조업적 성격이 강한, 하지만 전적으로 제조업이라고 할 수는 없고 서비스업과의 중간적 성격이랄까. 이 역시 발전 모델(성장 모델)의 문제다.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고, 산업 정책의 방향성과 산업 영역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판단의 준거점이다.
그리고 환경도 아주 중요한데, 한국은 제조업이 아주 강하니까, 가령 태양력 같은 분야에서 좀 도전할 가능성이나 능력이 있어 보인다. 특히 이런 분야에 내가 주목하는 이유는 ‘일자리’다. 이런 산업 분야는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낼 수 있다. 이재명 정부도 환경에 관심이 없어 보이진 않지만, 아무래도 AI가 너무 두드러져 보인다. 그래서 환경 산업 영역이 좀 소외돼 보이긴 한다. 특히 일자리가 청년층에게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전개될 수 있다면 좋겠다.
2. G20 vs. 브릭스: 지정학적 관점
2026년의 세계는 더 분열하고 갈등할 것으로 보인다. 그 과정에서 이합집산도 필연적이다. 중국과 미국의 대결 상황이 더 구체화할 것으로 보이는데, 2026년 G20 의장국이 미국이다. 미국은 G20을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운영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중국과 인도 그리고 러시아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좀 더 힘을 모아서 대립각을 세울 가능성이 크다. 이들 나라도 G20 회원국이지만, 브릭스(Brics)로서의 정체성이 더 도드라진다. 결국 미국 중심의 G20 vs. 중국 인도 러시아의 브릭스 대립 구도가 좀 더 분명해지는 한 해가 될 가능성이 크다.

📌 G20 / Brics
G20: 한국, 일본, 중국, 인도네시아, 인도, 튀르키예, 사우디아라비아, 유럽연합,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영국, 러시아, 캐나다, 멕시코, 미국, 아르헨티나, 브라질, 아프리카 연합, 남아프리카공화국, 오스트레일리아.
Brics: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프리카공화국, 에티오피아, 이란, 아랍에미리트, 이집트, 인도네시아.
두 그룹에 끼지 않는 다른 많은 다른 나라들도 많은데, 이들 나라가 어떻게 포지셔닝할지도 중요한 2026년이 될 거다. 가령 지난 인터뷰에 이야기했던 싱가포르는 미국도 중국도 아닌 제3의 길을 선언했고, 칠레 정권은 좌파에서 우파로 넘어갔다.
이런 분열과 갈등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고,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도 없다. 하지만 원심력(갈등과 분열)이 너무 커지면, 그에 따른 변수(이합집산과 이에 따른 비용)가 커진다. 원심력을 조정할 구심력이 필요한데, 그 역할을 어떤 나라 혹은 그룹에서 할 수 있을지 아니면 미국과 중국의 거시적인 상호 필요성에 의해 그런 구심력이 자율적으로 작동하게 될지는 알 수 없다.
한국은? 한국의 독특한 위상
한국은 이런 대립적인 국면에서 조심스럽게 ‘줄타기’해야 할 운명인데, 지금까지는 괜찮아 보인다. 그런데 아무리 줄타기를 잘해도 줄이 너무 흔들리면 결국은 떨어질 수 있다. 물론 한국도 이제 휘둘리기만 하는 건 아니고, 어느 정도 스스로 자율성도 가지고, 전체적으로 조율에 참여할 수 있는 역량도 축적해 왔다.
윤석열 내란도 수습이 마무리되는 국면인데, 이와 관련해선 한국을 바라보는 국제 사회의 시선은 아주 흥미롭다, 즉, 한국은 이런 측면에서는 아주 독특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이에 관해서는 뒤에서 이야기하자.
3. 미∙중 패권 경쟁과 인권∙민주주의 후퇴
중국의 개입주의는 이해된다. 국가 전략에 따른 자원 조달을 효율적으로 진행하기 위해서는 권위적이고 전제적인 방식을 동원하기 쉽다. 민주적인 방식(혹은 사회친화적 방식)은 이상적이지만 효율성이 떨어지니까. 이 과정은 인권과 민주주의 가치를 훼손하고 후퇴하는 방식으로 진행할 수밖에 없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 다툼도 그렇고, G20과 브릭스의 대립 방식을 봐도 인권과 민주주의가 그 거대한 대립과 갈등에 의해 ‘희생’될 가능성이 크다. ‘희생’이라는 표현이 좀 과하다면, 그런 가치를 침식하고 훼손하는 방식으로 진행할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한국은? 이재명의 노력을 ‘쇼맨십’으로 폄훼해선 안 된다
이런 관점에서도 한국은 도드라지는 측면이 있다. 한국은 매우 개입주의적인 방식으로 AI ‘올인’하는 정부 주도의 산업 정책을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재명 정부는 ‘공개 국무회의’를 생중계함으로써 민주주의적 가치, 국민 참여를 동시에 유지하려는 노력과 실험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항상 자신의 입장과 관점, 정치적 당파와 지형에 따라 같은 현상도 다른 ‘자신의 문법’으로 표현하곤 한다. 그러니까 완전히 똑같은 현상을 서로 정반대로, 한쪽은 권위적이라고 ‘평가’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민주적이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둘 다 그저 표현과 평가(해석)에 불과할 수도 있다. 이런 점을 우선 염두에 둘 필요는 있다.
그렇더라도 이재명 정부의 이런 노력을 ‘쇼맨십’으로 폄훼해선 안 된다. 이 ‘실험’이 성공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국제 사회에서도 한국 정부의 이런 국가 개입주의와 동시에 민주적이고, 사회 참여적인 방식으로 민주주의적 가치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아주 흥미롭게 바라본다. 개입주의와 민주적 가치의 조화가 성공할까? 성장과 민주주의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을까? 2026년에 그 윤곽이 드러날 것이다.
한국은 힘들지만, 어떤 면에서는 상당히 희망적이다.


4. 미국의 베네수엘라 침공 및 마두로 납치 사태
베네수엘라 대통령의 ‘납치’ 소식을 들은 때, 나는 달빛으로 환해진 새벽길을 걷고 있었다. 당분간 밝은 태양의 날은 없을 것이다. 너나없이, 저마다의 희미한 달빛에 기대어 걸어야 하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신제국주의의 문은 활짝 열렸다. 늘 불안정했던 아프리카에 이어 유럽이 흔들리고, 이제 남미가 흔들린다. 남은 것은 아시아다. 북한과 대만을 두고 ‘가벼운’ 말들을 주고받을 때가 아니다.
이식된 민주주의와 ‘해방’은 대체로 불안정하고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한다. 국민이 나서서 회복하고 재건해야 한다고. 맞는 말이다. 그렇다면 미국은 누가 바꾸는가. 결국 미국인이다. 이번 납치 사건은 우리가 미국의 저항 세력을 과대평가해 왔음을 드러낸다.
저항은 존재했지만, 그것 역시 체제의 내부에서 작동해 왔다. 저항의 언어 또한 오늘의 일부가 되었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트럼프가 우리의 길을 비춰주지 않듯, 미국의 ‘진보’나 ‘저항’ 역시 우리의 잣대가 될 수는 없다. 그들의 말은 우리에게 결정적 의미를 갖지 못한다.
유엔은 이미 오래전부터 빈사 상태였다. 트럼프는 영어식 표현을 빌리자면 관에 못을 박았다(“nail in the coffin”). 하지만, 아직 죽지는 않았고, 그렇다고 차마 산소호흡기를 뗄 수도 없는 상태다. ‘평화의 추억’을 가진 나라들이 한 번씩 찾아오는 중환자실 같은 곳. 대안은 없고, 당분간은 찾지 못할 것이다.



한국은? ‘한국이 베네수엘라가 되어 간다’는 말
트럼프 행정부의 의도와 계획을 분석하고 비판하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이제는 냉정하게 물어야 한다. ‘우리는?’ 낡은 드라마의 대사처럼. 결국 다시 ‘우리는?’이라는 질문으로 돌아온다. 그동안 ‘한국이 베네수엘라가 되어 간다’는 말은 너무 자주, 너무 쉽게 쓰였다. 그러나 이 문장은 형태를 바꿔가며 계속 살아남을 것이다. 의미는 모호하지만 이미지는 적나라하게 분명한 문장, 궁지에 몰린 이들이 끝내 붙드는 외침으로.
개인적 판단으로는, 한국 상황은 나쁘지 않다. ‘우리는?’이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답을 모색하려는 조건과 역량은 있다. 옛적 열강들의 살벌한 싸움판 시절에 비교해 봐서 한국의 처지가 열악하진 않다. 물론 상대적 비교 평가지만, 잊지 않았으면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