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위치:   » 사회 » 법률 에세이: 5만 원 작전 – 권리 위에 깨어 있는 자

법률 에세이: 5만 원 작전 – 권리 위에 깨어 있는 자

조우성 법률 에세이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받지 못한다.’

유명한 법언(法諺)이다. 이 말은 아무리 권리자라 하더라도 일정 기간 권리를 행사하지 않으면 국가는 그 권리행사를 인정해 주지 않겠다는 의미다. 즉, 권리행사도 일정한 유효기한이 있다는 뜻. 민법에서 이 법언 정신이 잘 나타나 있는 것이 바로 ‘채권의 소멸시효’다.

부도사업가 우현 씨와 빚보증 선 동생 

이우현 씨(가명)는 소규모 회사를 창업해서 경영하다가, 업계 불황과 거래처 부도가 맞물려 결국 폐업 처리하고 말았다. 회사는 5억 원가량의 빚이 있었다. 남은 재산으로 급한 불부터 껐는데 5억 원 중 3억 원을 갚고 2억 원 정도의 빚이 남았다.

남은 빚 2억 원 중에서 K상호신용금고로부터 빌린 1억 원은 우현 씨에게 특히 뼈아팠다. 우현 씨는 그 돈을 운전자금으로 빌린 것인데 신용금고 요청으로 물적 담보 외에 보증인을 세워야 했다. 회사에 다른 임원이라도 있었으면 그를 보증인으로 세웠을 텐데 소규모 회사다 보니 임원은 우현 씨 혼자뿐이었다.

좌절 고독 사람 남자

하는 수 없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던 동생에게 부탁했다. 동생은 재산이 없었지만, 어차피 물적 담보를 기초로 돈을 빌리는 것이었기에 형식상 보증인만 서면 된다는 것이 상호신용금고의 설명이었다. 정현 씨는 형의 부탁에 따라 보증을 섰다.

회사가 폐업 처리되고 매월 내야 할 이자를 내지 못하자 상호신용금고는 우현 씨에게 대출금 전액을 일시에 갚으라고 독촉했다.1 상호신용금고는 연대보증인인 정현 씨에게도 독촉했다. 하지만 부도 사업가인 우현 씨나 공무원 시험 준비생인 정현 씨 모두 빚을 갚을 형편이 아니긴 마찬가지.

신용금고는 몇 번 더 독촉하다 어느 시점부터는 연락을 끊었다.

‘P캐피털’ 채권추심 통보서  

우현 씨는 자기보다 동생이 더 걱정되었다. 혹시라도 채권자가 동생을 신용불량자로 등재해버리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동생에게 불이익이 돌아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 우현 씨는 상호신용금고로부터 통보서를 받았다. 상호신용금고가 갖고 있던 우현 씨에 대한 채권을 P캐피털로 이전하므로 앞으로 채권추심은 P캐피털이 진행하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우현 씨는 덜컥 겁이 났다. P캐피털이 어떤 회사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상호신용금고가 부실한 채권을 헐값에 딴 곳으로 넘기고, 이를 인수받은 회사들은 집요하게 빚을 받아내려고 채무자들을 힘들게 한다는 것을 신문에서 본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한동안 빚 갚으라는 독촉이 없어 마음을 놓고 있었는데 조만간 본격적인 채권추심이 시작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런데 의외로 통보서가 온 이후에도 오랫동안 아무런 조치가 없었다.

P캐피털 직원 동우가 들려준 허심탄회한 이야기 

그러던 어느 날 우현 씨 집으로 누군가 찾아왔다.

자신을 P캐피털 직원이라고 밝힌 동우 씨. 우현 씨는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동우 씨는 우현 씨를 안심시키려 노력했다.

“제가 와서 놀라셨죠? 다들 저 같은 사람이 방문하면 빚 독촉 시작할까 봐 두려워하시더군요. 그냥 차나 한 잔 얻어먹고 가겠습니다.”

커피 차

동우 씨는 서글서글했다. 본인 이야기도 스스럼없이 털어놓았다. 나이는 우현 씨보다 6살 아래. 동생 정현 씨와 동갑. 원래 휴대폰 판매 일을 하다 선배 소개로 이 업계에 발을 들여놓았다고 했다.

“사장님처럼 사업하시다 부도난 분들을 대상으로 한 채권추심 업무가 많습니다. 은행이나 상호신용금고는 자기들이 회수하기 힘든 채권들만 따로 모아서 저희 회사 쪽에 팔아버리죠. 저희 회사는 그 채권을 가능한 데까지 회수하는 거고요. 저 같은 직원들은 개별 회수 건별로 실적급을 받습니다. 기본급이 조금 있기는 하지만 주로 실적급이죠.

솔직히 사장님 채권은 회사 내부적으로 D급으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회수될 가능성이 아주 낮다고 보는 거죠. 연대보증인인 동생분도 별 재산이 없고. 저희 직원 중에서 팀장에게 잘 보인 친구들은 A, B급 채권들을 배당받습니다. 아무래도 회수 가능성이 높고 그에 따라 인센티브를 받아갈 수 있죠. 하지만 전 팀장에게 찍혀서 매번 C, D급 채권만 배당받는 신세랍니다.”

그의 삶도 팍팍한 건 마찬가지구나. 우현 씨는 미안했다.

“저런, 내가 형편이 돼서 얼마라도 빚을 갚을 수 있으면 참 좋겠는데.”

“아닙니다. 부담 갖진 마시고요. 저도 월급 받는 처지라 이렇게 한 번씩 채무자를 방문하는 흔적은 남겨야 한답니다. ”

채권회수 업무를 하는 사람치고는 사람이 너무 착해보였다. 우현 씨는 동우 씨가 팀장에게 별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가 이것 때문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추심업체 직원과 친해진 부도사업가 

동우 씨는 두 달에 한 번꼴로 우현 씨 집을 찾아왔다. 우현 씨도 처음 한두 번은 부담스런 마음이었지만, 동우 씨가 우현 씨를 편하게 대해주니 우현 씨도 동우 씨를 동생처럼 생각하기 시작했다. 동우 씨는 우현 씨 동생 정현 씨의 안부도 물었다.

공무원 시험에 두 번 떨어졌지만, 커트라인과는 별 차이가 없어서 조금만 더 노력하면 합격할 수도 있겠다는 얘기를 해줬더니 동우 씨는 꼭 합격하면 좋겠다는 덕담도 했다. 어느 날, 동우 씨는 뭔가를 들고 우현 씨 집을 찾았다.

“저희 집에서 매실 농사를 좀 짓습니다. 이번에 매실로 진액을 만든 것을 어머니께서 몇 통 보내주셨는데 제가 사장님 드리려고 한 통 가져왔습니다. 유기농이라 시중에서 파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이것 드시고 힘내시라구요”

매실주

우현 씨는 동우 씨를 한참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렇게 심성이 착할 수 있을까.

“오늘은 몇 군데를 돌아다녀야 하는가?” 

언제부턴가 우현 씨는 동우 씨에게 말을 놓았다.

“네. 여기서 나가면 앞으로 네 군데를 더 돌아봐야 합니다.”

우현 씨는 지갑을 열어 만 원짜리 몇 장을 챙겼다.

“동우 씨, 이거 얼마 안 되지만 차비로 쓰게.”

“네? 아, 아닙니다.”

“당장 빚을 다 갚지는 못하지만, 이 정도는 내가 줄 수 있네. 받게.”

격려 악수 손

동우 씨는 난감한 표정을 짓다가 그 돈을 받았다.

“어려운 형편이실 텐데 이렇게 해주시니 고맙습니다.”

“아닐세, 내가 오히려 더 미안하지.”

우현 씨는 예전에 자신이 잘 나갈 때 동우 씨를 만났더라면 그를 회사 직원으로 채용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동생의 공무원 합격과 ‘소멸시효’ 완성의 기대 

1년 뒤 정현 씨는 드디어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우현 씨는 동생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목표를 이룬 것에 대해 형으로서 미안함과 고마운 마음이 교차했다.

우현 씨와 정현 씨가 P캐피탈로부터 대여금 반환청구 소장을 받은 것은 정현 씨가 공무원 시험 합격한 후로부터 6개월이 지난 시점. 이미 그로부터 1달 전에 정현 씨 급여에 가압류 조치가 취해졌고, 곧이어 이번에 정식 소장이 제기된 것이다.

돈을 빌린 것도 맞고 못 갚은 것도 맞으니 달리 대항할 방법이 없지 않겠냐는 생각이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우현 씨와 정현 씨는 소장을 들고 법률구조공단을 찾았다.
법률구조공단 상담 변호사는 사건을 찬찬히 검토해 보더니 뜻밖의 말을 했다.

“이 사건 이길 수 있겠는데요? 소멸시효가 완성된 것 같아요.”

“네?”

대한법률구조공단

우현 씨와 정현 씨는 깜짝 놀랐다.

“상호신용금고의 대출채권은 상사채권이라 5년의 소멸시효에 걸리거든요. 증거자료를 보니까 김우현 씨 회사가 부도나고, 이자를 못낸 시점이 2010년  2월부터잖아요. 그럼 그때부터 소멸시효 기간이 시작되니 2015년  1월 말이면 소멸시효가 완성되거든요. 그런데 이 소장은 2015년 7월에 접수됐잖아요. 즉, 소멸시효 완성된 후 청구한 셈입니다.”

“아, 그래요? 그럼 저희는 어떻게 하면 됩니까?”

“소멸시효는 판사가 직권으로 판단하는 게 아니라 피고가, 즉 김우현 씨, 김정현 씨가 그 사유를 주장해야 합니다. 답변서에 ‘이 사건 소송은 소멸시효가 완성된 이후에 청구한 것이므로 기각되어야 한다’고 쓰면 됩니다.”

“변호사님, 저희는 잘 모르니 한 장만 써주시면 안 될까요?”

법률구조공단 상담 변호사는 무척 바빴지만, 우현 씨가 간절히 요청하자 즉석에서 답변서를 한 장 써줬다. 우현 씨는 그것을 법원에 제출했다.

추심업체 직원에게 건넨 5만 원 

그로부터 한 달 뒤 법원에서 우현 씨에게 다시 서류가 날아왔다. 원고(P캐피털)의 준비서면이었다. 내용은 ‘소멸시효는 피고 김우현의 채무승인 및 일부변제로 중단되었다’는 것이었다.

우현 씨는 다시 법률구조공단 변호사를 찾아갔다. P캐피털의 준비서면을 읽어본 변호사가 말했다.

“어? 사장님. 2014년 8월에 P캐피털 담당 직원에게 채무를 인정하고 그 중 5만 원을 갚은 적이 있네요? 왜 이건 제게 말씀 안 하셨어요?”

‘그때 동우 씨에게 택시비 하라고 준 5만 원을 말하는 건가?’

“그건 채권추심 하러 온 직원에게 수고한다고 차비 조로 5만 원 준 거였습니다.”

“채권추심 하러 온 직원에게 차비를 줬다고요? 그걸 판사가 믿어주겠습니까? 당시 담당 직원과 사장님 간의 대화 내용도 녹취되어 있는데요? 증거서류를 보세요.”

갑 제3호증 녹취록이란 걸 보니 동우 씨와 우현 씨 간의 대화 내용이 속기록 형태로 기재되어 있었다.

김우현: “당장 빚을 다 갚지는 못하지만, 이 정도는 내가 줄 수 있네. 받게.”

김동우: “어려운 형편이실 텐데 이렇게 해주시니 고맙습니다.”

김우현: “아닐세, 내가 오히려 더 미안하지.”

“보세요. 돈을 다 갚지는 못하지만 그중 일부만이라도 이렇게 갚는다고 말씀하셨네요. 이런… 결국, 소멸시효는 중단된 거고 원고의 청구권은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판결, 소멸시효 중단 – “모두 빚을 갚아야 합니다” 

대여금 반환청구 재판 변론기일. 우현 씨는 법정에서 판사에게 말했다:

“판사님, 그 돈은 제가 직원에게 차비하라고 준 거고요. 돈을 갚은 건 아닙니다.”

판사의 반응은 냉담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빚 받으러 온 사람에게 차비를 준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리고 녹취록에도 나와 있잖아요. ‘당장 빚을 다 갚지는 못하지만…’이라고 한 부분은 채무를 승인한 것으로 볼 수 있어요. 그리고 돈을 건넸으니 이는 일부 변제로 볼 수 있고요.”

판결 법원 재판

우현 씨는 다급한 마음으로 판사에게 말했다.

“판사님. 그럼 저는 책임을 진다고 하더라도 제 동생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주채무자인 김우현 씨가 채무를 승인하고 빚을 일부 갚았기 때문에 소멸시효는 중단되었고, 주채무자에 대한 소멸시효 중단은 보증인에게도 효력이 있어요. 다시 말해서 김우현 씨, 김정현 씨 모두 빚을 갚아야 합니다. 저는 그렇게밖에 판결할 수 없어요.”

“아…”

한 달 뒤 판결 선고. 원고 승소.

피고들(김우현, 김정현)은 연대하여 원금(1억 원)과 이자를 합해 1억 4,000만 원을 원고에게 갚아야 했다.

여기까지가 법률구조공단에 있는 후배 박 변호사가 내게 들려준 이야기다.

“대단하군. 그럼 그 동우라는 사람은 작전을 편 건가?”

“진실은 모르죠. 하지만 녹취를 했고, 녹취 내용 중에 차비로 쓰라고 한 부분을 일부러 삭제한 것을 보면 고의적이었다고 볼 여지가 큽니다.”

“결국, 빚진 사람의 미안한 심정을 교묘히 자극해서 채무승인 또는 일부 변제를 유도하는 방법을 쓴 거군.”

꼭두각시 조종 노예

2015년 12월, 야당에서는 가계부채 대책의 하나로  소멸시효 완성채권(일명: 죽은 채권)의 거래 및 추심을 금지하는 법안을 추진했다.

일부 추심업체들은 소멸시효가 거의 임박한 채권에 대해서 채무자들에게 ‘일부만 갚으면 원금을 탕감해주겠다’고 속여 일부를 갚게 해서 소멸시효를 중단시키거나, 이미 소멸시효가 완성된 채권의 채무자에게 가서 ‘일부라도 갚으라’고 한 다음 이를 들어 소멸시효 이익을 포기한 것으로 취급해서 죽은 채권을 부활시키는 일이 많다고 한다.

법률을 통해 이러한 부당 채권추심을 막겠다는 것이 법안 발의의 취지라고 한다. 권리 위에 잠자는 것처럼 보이지만, 대단한 집중력과 기획력을 가지고 권리 위에 깨어 있는 채권자들이 많은 것 같다.

돈 추심 채권추심


  1. 월 이자를 내지 못하면 대출 만기까지 미루지 못하고 대출금 전액을 일시에 갚아야 하는 것을 ‘기한이익의 상실’이라 한다. 우현 씨는 기한이익의 상실을 당한 것이다.

좋은 기사 공유하고 알리기
슬로우뉴스에 커피 한잔의 여유를 후원해주세요. 필자 원고료와 최소한의 경비로 이용됩니다.

필자 소개

초대필자. 변호사.

기업분쟁연구소 소장, 20년차 변호사로서 분쟁의 사전예방에 관한 컨설팅과 교육을 담당합니다. 변호사 업무 외에 법 에세이, 협상, 인문학 관련 컬럼 작성도 하고 있습니다. → 홈페이지

작성 기사 수 : 26개
필자의 홈페이지

©슬로우뉴스 | 개인정보취급방침 | 청소년보호정책 | 슬로우뉴스 안내 | 제보/기고하기 | 제휴/광고문의
(유)슬로우미디어 | 전화: 070-4320-3690 | 등록번호: 경기, 아51089 | 등록일자 : 2014. 10. 27 | 제호: 슬로우뉴스 | 발행인: 김상인 | 편집인: 강성모
발행소: 경기 부천시 소사로 700번길 47 1동 506호 (원종동, 삼신) | 발행일자: 2012. 3. 26 | 개인정보관리/청소년보호책임자: 강성모

Scroll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