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에 의한 오사마 빈라덴의 암살과 그에 따른 2001년 이래로 세계적 악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알 카에다의 무력화는, 마치 극단주의 테러 세력과의 전쟁에서 마침내 승리를 거둔 듯한 약간의 안도를 선사해주었다. 이라크의 치안 회복, 시리아 독재정권의 내전에 대한 제재,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영토문제 중재 등 중동지역에서 해결해야 할 과제는 여전히 차고 넘치지만, 적어도 그것 하나쯤은 거의 풀린 듯 보였다.
하지만 갑자기, 가장 시대착오적으로 보일 법한 극단주의 테러집단이 세계의 주목을 단시간 내에 끌어모으는 것에 성공했다. 그들이 무력으로 점유한 영토는 나날이 넓어지고, 도처에서 테러를 감행하고, 야만적인 인질 살해 비디오를 인터넷에 뿌리며 악명을 높였다. 이슬람 국가(IS)를 자처하는 이 조직은 과연 무엇이고, 어떻게 이런 비극적 성공을 거두고 있으며, 그 현상이 우리에게 던지는 교훈은 무엇인가.
진정한 이슬람의 원리를 위하여
워낙 신흥세력인지라, 이들에 대해서는 아직 명칭조차 치열한 프레이밍 대결이 이뤄지고 있는 상태다. 우선 당사자들은 자신들을 진정한 이슬람 원리로 운영되는 국가라는 의미에서 이슬람 국가(Islamic State; IS)라는 명칭을 강행한다. 이들은 알 카에다 같은 과거 지하드 조직은 일개 조직이었을 뿐이지만, 자신들은 정식 국가이자 이슬람 세계 전체의 정통성을 지닌 구심점이라고 부단히 강조하고 있다.
물론 대다수 중동 국가들과 나머지 세계는 이들을 국가로 승인하지 않을 뿐 아니라 테러단체로 규정하여 규제하고자 하기에, 특정 지역에 출몰한 자들이라는 의미로 ISIS(이라크 및 시리아 지역 이슬람 국가), ISIL(이라크 및 레반트 지역 이슬람 국가) 또는 숫제 알 카에다 분리주의자들이라는 뜻의 QSIS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이들이 이슬람 사회의 이상향으로 칼리프 국가를 내세우며, 대단히 전근대적인 사회관과 대단히 효과적인 세력 확장이라는 모순된 두 가지 요소를 기이할 정도로 성공적으로 관철하고 있다는 점이다.
ISIS: 이라크 및 시리아 지역 이슬람 국가
ISIS의 시초는 1999년 만들어진 이라크 알 카에다(AQI; Al-Qaeda in Iraq)로 알려졌다. 이들은 미국의 2003년 이라크 침공 국면에서 산발적인 반미 무력 활동을 하다가 2006년 수니파 저항집단과 무자헤딘 자문위를 거치며 이라크 이슬람 국가(ISI)를 만들었으나, 지나친 폭력성향으로 지지층을 잃고 표면에서 사라졌던 바 있다. 그런 이들이 2013년에 갑자기 ISIL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재등장했는데, 이번에는 상황이 이들에게 대단히 유리하게 흘러갔다.
AQI (1999) → ISI (2006) → ISIL (2013)
첫째는 지지 기반이다. 장기 주둔하던 미군의 철수 등으로 온갖 권력 공백과 혼란이 커진 와중에 소수파로서 더욱 사회적 차별을 받던 수니파 무슬림들의 불만을 초기 지지층으로 삼을 수 있었다.
그리고 둘째는 영토다. 속칭 ‘아랍의 봄’으로 불리는 아랍 민주화 물결 와중에 시작되었던 비극적인 시리아 내전이 서방세계의 소극적 개입 의지 속에 장기화하고 있는 틈을 타서, 그들은 독재정권에 반기를 든 여러 반군 분파 중 하나인 양 시리아 영토에 자신들의 점령지를 세웠다.
여기에는 사담 후세인 사후 이라크 정규군에서 흘러들어오거나 탈취한 군사장비와 알 카에다의 금전적 지원(하지만 그 알 카에다조차, 2014년 초에 이들의 비타협성에 질려서 연을 끊었다.), 각종 수익성 범죄 사업 등이 도움이 되었다.
즉 핵심 지지층과 확고한 지역 기반을 얻게 되자 이들은 점조직에 가까웠던 알 카에다와 달리 더욱 과감하게 자신들의 이상을 추진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2014년 9월 CIA 추산으로 2~3만 명의 병력을 지니고 있고, 시리아와 이라크 영토 상당 부분에 걸친 웬만한 국가 규모의 점령지를 지니며, 점령지 바깥에도 여러 협력자를 두고 있다.
화끈한 전근대적 교리에 지지자가 모이고…
이들이 이상향으로 추구하는 것은 바로 지중해 연안과 북아프리카, 중동지역 전체를 아우르는 칼리프 국가의 건설이다. 그것을 이루는 방법은 당연히 무력에 의한 정복이고, 민주주의는 버려야 할 서구의 발명품이며, 양성평등이든 전쟁 방식이든 범죄 대응이든 각종 인권 사안에 있어서 딱 꾸란이 쓰이던 시절의 기준으로 돌아갈 것을 천명한다. 현대적 민주공화국에 한참 못 미치는 구시대 체제에 대한 향수를 내세우며 무력 영토 정복을 노리는 이런 지극히 전근대적 망상이 어째서 국가를 선포할 정도로 지지자를 모을 수 있는가.
뻔한 대답이라면 ‘복합적 원인이 작용했다’일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주목해야할 요소 가운데 하나는, 그들이 이슬람 교리를 추구하는 방식이 던져주는 일종의 ‘후련함’이다.
원래 중동 지역에서 이슬람은 도덕 윤리를 넘어 사회 체계까지 일관되게 아우르는 원리로서 오랫동안 적용됐고, 현대사에서 정치체계의 세속화와 서구 제국주의에 의한 침략이 불행히도 많은 부분 겹쳤다. 이란의 80년대 호메이니 집권이 그랬듯, 사회적 자존심을 되찾는 것이 곧 근본주의를 빙자한 극단주의 종교론으로 흐르기 쉬운 것이다.
외세가 개입하여 망친 사회의 모습에서 다시 좋은 세상을 되찾기 위한 가치의 잣대로 일관된 윤리 및 정치 원리였던 이슬람 사상을 재발굴하는 것까지는 좋지만, 그 기세가 지나쳐서 현대적 민주제와 조화를 시키기보다는 좀 더 선명하고 화끈한 전근대적 교리를 내세워버리는 것이다.
선명한 만큼 열정적 지지자들은 더 확실하게 붙을 수 있고, 기본적으로 시대착오적 인권 개념과 반민주적 권력 구조가 널려있다. 하지만 ISIS가 거의 모든 다른 이슬람 국가들에게도 적대 대상이 된 것으로 볼 수 있듯, 이런 것은 이슬람 사상의 보편적 문제라기보다는 선명한 극단주의의 문제다.
냉혹한 현실을 외면하는 선명한 대의
그런 와중에 영토 확장 등으로 승승장구하니, 후련함은 더욱 강해진다. ISIS가 주는 선명한 후련함을 바탕에 놓고 이해하지 않을 때, 서구 선진국에서 자라난 젊은 여성이 지극히 반여성적인 ISIS에 합류하러 들어가는 현상을 설명하는 것은 어려워진다.
결국, 그저 지루한 일상에 신물 나고 감언이설에 현혹되어 충동적으로 저질렀고 세뇌를 당한다는 식의 피상적 훈계로 흐를 따름이다. 하지만 현실은, 문화적 정체성을 충족 받지 못하고 그에 따른 차별도 느끼는 생활을 하던 이들에게, ISIS가 가장 선명하고 호쾌하며 긍정적인 무슬림 자기 정체성을 공급해주는 것이다.
모든 무슬림들이 정의롭고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게 되는, 윤리와 사회체제가 일치하는 진정한 이슬람 국가의 건설을 당신의 손으로 직접 이끌어낼 수 있다는 선명한 대의로 삶의 목표를 그려주면, 나머지 문제는 부수적이고 일시적인 단점에 불과해진다. 실제로 들어가면 그보다는 훨씬 냉혹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지만 말이다.
과감한 군사 전략처럼 선진적인 미디어 전략 구사
그렇기에 ISIS는 과감하고 성공적인 군사 전략만큼이나, 선진적인 미디어 전략을 구사하는 것이 특징이다. 종합적 설계와 수행 방식에 있어서 완전히 새로운 경지에 이르렀기에 주목을 받고 있다.
국가를 표방하는 것에 걸맞게 프로파간다 전용 미디어 조직을 세워놓고, 세부적으로 메시지의 타겟 집단을 나누어 공략한다. 적으로 간주하는 사회를 향해서는 정확하게 연출된 참수 살해 동영상을 유튜브로 뿌리며 자신들의 굳센 결의가 서린 잔인함을 과시하고, 잠재적 지지자들을 대상으로는 트위터 해시태그 가로채기부터 전용 앱 배포까지 온갖 세련된 미디어 활용으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크게 부각한다.
무슬림 정체성 고민을 하는 이들에게 상담과 친밀한 소속감의 느낌을 제공하여 이상적인 이슬람 사회를 그리게 유도하는 것은 물론이고, 합성 이미지로 위트를 과시하기도 한다. 게다가 아무리 ISIS에 넘어갈 정도로 심각하게 취약한 사람들의 비율이 낮다 하더라도, 미디어 공략이 전 지구적 스케일이 된다면 그 낮은 비율만으로도 상당한 머릿수가 된다.
ISIS 급부상으로 얻을 수 있는 교훈
이런 측면을 볼 때, ISIS의 급부상이 우리에게 다시금 상기시켜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우선, 사람들은 살아가는 것이 어렵고 혼란스러울수록 선명하고 호쾌한 사회적 정체성을 갈구한다는 것이다. 그런 정체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느끼는데 무언가가 그것을 채워줄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기면, 어떤 난감한 결점이 있더라도 과감하게 무시할 수 있다. 극단주의에 대한 열광을 어떻게 경계할 것인가.
나아가, 반작용의 순간을 늘 대비해야 한다. 내부 동력을 탄탄하게 키워내서 밑에서부터 바꿔내는 것이 아니라면, 공동체 가치의 혼란과 권력관계의 불안정한 재편 과정에서 반드시 가장 원초적이고 극단적인 형태로 회귀하려는 반작용이 들이닥치는 순간이 온다.
한국 보수층의 박정희 향수와 공안경찰국가 동경을 ISIS식 극단주의를 동급으로 놓을 수는 없지만, 더 선명한 극단주의로 더 많은 반작용이 이어지지 않도록 대처하는 것은 중요하다. 여론 캠페인도, 입법 운동도, 감사 참여도, 소송도 모두 소중하다. 적어도 우리 사회는 아직 총을 들고 싸우지는 않아도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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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필자가 노동당 기관지 [미래에서 온 편지] 2014년 12월호에 올린 글입니다. 슬로우뉴스 편집원칙에 맞게 표제와 본문을 수정, 보충했습니다. (편집자)
우리는 아직 ‘총’을 들고 싸우지 않는다. ‘총’은 비겁하고 야만적이며 저급한 행동이거늘 어찌 위대한 경제성장을 이루어 아시아에서는 가장 잘생기고 명예로운 한국사람이 총을 가지고 싸울수있단말인가? 하지만 요즘…부끄럽고 창피해야할 ‘총’을 든 사람들이 많이 뉴스에 띈다. 그들의 얼굴은 과연 야만인 답게 고상하지 않더라. 험학하고, 치졸하고, 처절하고…뉴스 아래 댓글들을 보니 역시나 고상한 한국인들이다. 비논리적이든 논리적이든 나와 뜻이 같든 틀리든 어쨋든 키보드로 싸우고 있지않은가? 이게 바로 IT강국 한국이지!.. 근데 말야…사실 나도 가끔 꼴통들 머리위에 폭죽원료같은거 던지거나 한 영웅이 나타나 한국에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해주고..뭐 그런 상상해. 병든사회에서는 건강한 사람이 오히려 병든자라던가..!!!! 하! 그렇다면 나도 ‘총’을 들고 다 쏴죽…아냐 진정하자. 어차피 그럴 깡도 없으면서…무력한게 가장 현명하다, 나서지않는게 가장 현명하다. 알만큼 알잖아? 어차피 가만히만있으면 그 사람들이 겨누는 총은 나를 향하지않아. 나 역시 굶어죽기싫어서 일하는거면 그냥 노가다뛰었지..내 맘대로 살고싶으니까. 자유를 원하니까. 권력을 원하니까…이렇게 사는거잖아…그렇구나! 한국사람들이 ‘총’을 들고 싸우지 않는이유. 그건 우린 모두 위선자이기 때문이야. 불평등한 사회에 불구로 태어날 나를 상상하며 복지체계를 수립하기보다 불평등한 사회를 더 불평등하게 만들어서 왕족으로 태어날 상상을 하는거지. 하지만 위선자는 엄마가 부끄러운거라고 했는데…끄응. 역시..영웅이나 기다릴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