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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살 젊은 농부가 생면부지의 외국인에게 납치당했다.

납치된 농부, 자기 자신과 갇힌 자들을 해방하다 

납치된 젊은 농부는 그와 마찬가지로 납치된 다른 사람들과 쇠사슬에 묶여 배에 태워졌다. 그는 자신을 실은 배가 어디로 가는지, 배가 도착하면 자신의 운명이 어찌 되는지 알 수 없었다. 항해 중 그는 고된 노력 끝에 쇠사슬을 풀어내고, 함께 갇혀있던 사람들도 쇠사슬로부터 해방했다.

그들은 선장과 선원들을 일부는 죽이고 일부는 구금한 뒤,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배를 돌렸다. 배는 얼마 후 낯선 나라에 도착했다. 그 배에 구금되어 있던 납치범들은 그 나라의 정부에 호소했다. 저들은 원래 우리의 소유이니, 잡아서 우리에게 돌려달라고. 그리고 그 나라의 대통령은 그렇게 하려고 했다.

‘싱케’라는 이름의 농부는 다시 감옥에 갇혔다. 이것은 1839년 ‘아미스타드 반란’이라고 일컬어지는 사건이다. 이 이야기에서 내가 의도적으로 누락시킨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 농부가 아프리카인, 그러니까 흑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 뿐이다.

아미스타드호(La_Amistad) (출처: 위키백과 공용)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c/ca/La_Amistad_%28ship%29.jpg
아미스타드호(La_Amistad) (출처: 위키백과 공용)

아미스타드호의 반란 

1839년, 스페인의 아미스타드 호는 53명의 아프리카인을 노예로 팔기 위해 항해 중이었다. 쇠사슬에 묶인 아프리카인들은 자신들이 어디로 끌려가는지, 왜 끌려가는지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부실한 식사와 좁은 선실, 열악한 처우로 인해 환자들이 하나씩 생겼고, 환자가 된 아프리카인은 ‘처분’되었다. 한 달 항해 중에 54명 중 9명이 죽었다.

노예들은 곧 봉기를 일으켰고, 그들의 ‘소유주’였던 호세 루이즈와 페드로 몬테즈로 하여금 배를 아프리카로 돌리라고 명령했다. 그들의 요구는 명확히 ‘아프리카로 돌아가겠다’는 것뿐이었다. 8월 26일, 아미스타드 호는 미국 해군의 전함 워싱턴 호에 나포되었다. 싱케를 비롯한 아프리카인들은 뉴욕 주에서 체포되었고, 코네티컷 주로 끌려가 해적행위의 죄목으로 투옥되었다.

아미스타드호의 반란 (출처: 퍼블릭 도메인)
아미스타드호의 반란 아니 혁명

노예상인 편에 선 미국 정부 

노예상인인 루이즈와 몬테즈는 아프리카인 노예들에 관한 권리를 주장했고, 아프리카인들은 자신의 기본권을 주장했다. 당연히 이 권리들은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미국 정부는 루이즈와 몬테즈의 편을 들어주었다. 포사이스 국무장관은 ‘선량한’ 스페인 노예상인들의 고통에 큰 동정심을 표현했다.

“루이즈 씨와 몬테즈 씨는 그들의 재산과 자유를 빼앗긴 채 불법적인 폭력의 고통을 겪고 생명에 대한 끊임없는 위험에 직면한 채로 미국 연안에서 발견되었다.”

Martin_Van_Buren정부의 그러한 ‘동정심’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권리 문제는 법정에서 다투게 되었다. 미국 대통령 마틴 밴 뷰런(사진)은 여전히 ‘루이즈 씨와 몬테즈 씨의 권리’에 강한 연대의식을 보였던 ‘남부’ 정서와 두 사람의 재물(노예)을 스페인에 돌려달라는 스페인 정부 입장을 지지하고 있었다. 대통령은 해군을 항구에 대기시켜놓고, 마음에 드는 판결이 나오면 ‘화물들'(아프리카인들)을 곧바로 붙잡아서 이송시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세 번째 권리 – 아프리카인 인권을 보호하지 않을 정부 권리  

이 사건에 대한 미국 정부의 주장은 이랬다.

“스페인 공사의 요청에 따라 미국 정부는 재산을 반환하기 위해 이 사건에 관여할 권리가 있다.”

쟁점은 1) 그 재산에 아프리카인들이 포함되는가 2) 스페인 공사의 요청을 미국 정부가 수용하는 것이 적법한가였다. 여기서 세 번째 권리가 등장했다. 그 권리란 3) 아프리카인의 인권을 보호하지 않을 정부의 권리다.

이 세 가지 권리에 대한 판단은 결국 대법원에 맡겨졌다.

노예를 변호한 전직 대통령 ‘존 퀸시 애덤스’  

존 퀸시 애덤스 대법원에서 아프리카인의 변호인으로 등장한 것은 전 대통령인 존 퀸시 애덤스(사진)였다. 이 필연적인 정치의 순간에서, 그는 선량한 노예상인의 재산권도, 그 재산권을 보호할 대통령의 권리도 인정하지 않았다. 애덤스는 ‘편파적이고 부당한 감정’의 산물은 배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최후변론에서 하나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해, 다른 두 개의 권리를 철저하게 부정했다. 심지어 그는 아프리카인이 탈출하기 위해 선원을 죽인 일에 대해서도 ‘그래도 사람을 죽이면 안 되지’ 따위의 말을 하지 않았다.

“(전략) 무슨 이유로 국무장관으로부터 국민 전체에 이르기까지 동정심은 오직 2명의 쿠바 출신 스페인 사람들에게만 주어지고 그들의 불법적인 폭력에 희생당한 사람들에게는 주어지지 않는 것입니까? 무슨 이유로 스스로 자유를 회복하고 자신들을 탄압한 자들의 폭력까지 감수하도록 한 사람들에게는 자비가 주어지지 않고 그 폭력행위를 저지른 당사자만 동정을 받는다는 말입니까? (중략)

우리가 범죄자로부터 보호해야 할 억울한 희생자는 누구입니까? 루이즈와 몬테즈라고는 절대로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중략)

이 사건에서 행정부는 지극히 편파적이고 부당한 감정의 지배를 받으며 행동했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감정이 이 사건 관계자들에게 영향을 미친 결과, 미국 국민에게 자유의 근본이 되는 법의 원칙이 무시되고 피고인들에게는 인권 유린에 해당하며 사법부 권한과 독립에도 해가 되는 명령을 내린 것입니다.”

대법원, 아프리카 흑인을 ‘인간’으로 선언하다 

애덤스의 변론은 재판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지만, 대법원은 아프리카인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날 미국 정부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던 애덤스는 훗날 미국정부의 한 가지 권리를 강력하게 옹호하는데, 그것은 바로 ‘국민에게서 노예를 해방시킬 권리’였다.

우리는 이 재판이 아프리카인이라는 ‘화물의 소유권’ 분쟁이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재판의 쟁점은 두 가지 중 하나의 선택이었다. 스페인 노예상인들이 자신의 ‘화물’을 그대로 들고 가게 둘 것인가. 아니면 ‘남부’로 표현되는 ‘아프리카인은 인간이 아니라고 믿을 권리’를 침해해서라도 얼굴 검은 비국민을 인간이라고 선언할 것인가.

조셉 싱크 (출처: The Sun on August 31, 1839)
조셉 싱게 (출처: The Sun on August 31, 1839)

이 문제는 어느새 스페인과 미국이, 남부와 북부가, 현직 대통령과 전직 대통령이 얽혀 국민적 대립 전선을 형성했다. 결코,  물러날 수 없는 이 전선에서, 재판장은 법봉을 집어 던지고 도망가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 판결을 분명하게, 편파적으로 내렸다.

“이 아프리카인들은 자유가 보장되는 사람들로서, 노예가 아니라 납치되어 쿠바로 끌려오고 아미스타드호에 감금된 희생자들이다. 이들을 해적이나 해상강도라고 부를 아무런 이유가 없다.”

링컨, “흑인 평등을 찬성하지 않고, 찬성한 적도 없습니다” 

나는 앞서 싱케가 아프리카인이라는 점을 일부러 밝히지 않았었다. 아프리카인에게 인권이 있느냐 없느냐는 이제 논란의 주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누구도 아프리카인에게 인권이 없다는 말 따위는 하지 못하는 세상이 됐다. 그런 세상을 만들었다.

하지만 동성애자라면 어떤가?

지금은 노예해방의 상징인 미국의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은, 1862년 이전까지만 해도, 노예해방에 대해 매우 중도적 접근방식을 취했다. 그는 노예주와 그들이 사는 주의 주지사들을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어떤 노예 소유주도 설득되지 않았다.

링컨은 1862년까지, 노예주들에게 어떤 보상을 해주어야 노예제 폐지에 노예와 노예주 모두가 전원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했다. 그래서 링컨은 두 차례에 걸쳐 노예해방선언을 저지하기까지 했다. 그는 그 시기에 심지어 노예해방을 ‘개인적 바람’이라고 믿었고, 대통령으로서 연방의 통일보다 더 고집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저는 흑인종의 정치적 사회적 평등을 찬성하지 않고 있으며, 찬성한 적도 없습니다.”

– 1858년 9월 18일, 남부지역에서 링컨의 상원 유세 연설

링컨의 고백과 반성, “결과가 나를 지배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해, 남부에서 수천 명의 노예들이 북부로 도망쳐왔다. 북부에는 노예제 폐지론자가 점점 늘어났다. 국회는 대통령의 의중과 관계없이 노예를 강제로 해방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1863년 1월 1일, 링컨은 “정당하고, 필요한 군사 조치로서” 노예해방선언을 선포했다.

그는 노예주들과 합의해야 한다는 생각을 폐기했고, 노예를 해방하는 대신 노예주의 손해에 어떤 보상을 해야 한다는 생각도 폐기했다. 링컨은 반발하는 주들부터 먼저 노예를 강제로 해방시키겠다고 선언했다. 1864년 4월 4일 앨버트 하지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링컨은 자신의 태도가 명확히 틀렸음을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노예 정책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이 세상에서 잘못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지만 나는 대통령이라는 직책이 이러한 판단과 의견에 대해 판결을 내려야 한다는 것을 이전까지 이해하지 못했다. 고백하건대 그동안 내가 결과를 지배한 것이 아니라 결과가 나를 지배했었던 것 같다.”

세 명의 대통령, 누구도 지키지 않은 중립 

아프리카인 노예와 관련한 역사적 상황에 직면한 세 명의 대통령 중 누구도 중립을 지키지 않았다. 밴 뷰런은 아프리카인 노예들을 적대했다. 애덤스는 스페인 노예상인과 밴 뷰런을 적대했다. 링컨은 때로는 아프리카인을, 때로는 노예주들을 적대했다.

사실은, 인류 역사상 그 누구도 중립을 지키지 않았다. 왜냐하면, 인류는 ‘저들은 인간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이들과 ‘우리는 인간이다’라고 주장하는 이들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는 기술은 아직 발명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약 인류가 그것을 발명해낼 수 있다면, 그것은 과학이 아니라 마법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인권 문제에 중립은 없다 

인권 문제에서 중립은 불가능하다.

존 퀸시 애덤스

인권에 대한 논란은 대개 지속적인 폭력이라는 상황에서, 이 야만과 폭력을 중단하게 할 것인가 묵인할 것인가에 관한 선택과 결정이기 때문이다. 합의 역시 불가능하다. 특정 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차별에서는 외계인과 반인반수를 제외한 모든 인격체가 당사자일 수밖에 없다. 차별하는 자와 차별당하는 자가 있을 뿐이다.

이를 깨달았기에 애덤스는 차별하고, 박탈할 노예상인의 권리와 정부의 권리를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주장은 인권과 관련해 어떠한 이론과도 양립할 수 없고 특히 독립선언서에서 자명하다고 선언한 권리와는 공존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자유에는 불가침의 인권이 부여되었다는 독립선언서를 보는 순간 이 사건의 판결이 어떠해야 하는지 분명해질 것입니다. 저는 이 불행한 피고인들을 위해서 독립선언서 외에 어떠한 것도 주장하지 않겠습니다.”

노예를 소유할 권리 vs. 노예로 소유되지 않을 권리 

노예를 소유할 권리와 노예로 소유되지 않을 권리의 차이는 분명하다.

인권은 ‘인권을 누구에게까지 줄 것인가’를 논쟁 주제로 삼는 걸 허용하지 않는다. 논쟁이 허락되는 것은 오직 모두에게 ‘어느 정도의 권리’를 허용해야 하는가일 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노예를 사고팔 권리를 부정하지만, 노예상인의 인권은 긍정할 수 있고, 살인은 부정하지만, 살인자의 인권은 긍정할 수 있다.

인권이라는 이 기막힌 말은, 모든 권리를 허용하지 않고, 오직 모든 사람을 허용한다.

Giovana Milanezi, CC BY https://flic.kr/p/bPL3S8
인권은 오직 모든 사람을 허용한다. 출처: Giovana Milanezi, CC BY

인권을 파괴하는 방법, ‘단 한 사람의 인권만 부정하라’ 

그러나 인권이라는 이 뛰어난 말이 자동으로 모든 사람을 자유롭게 해주지는 않았다. 인권이라는 것 자체의 존재가 탐탁지 않았던 자들은 끊임없이 인권 자체를 파괴하려고 시도해왔다. 그들은 모든 사람이 편들어주지 않는 ‘한 사람’의 권리를 부정함으로써, 모든 사람이 자신의 권리가 파괴당하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게 만들려 했다.

아미스타드 재판은 끝없이 반복되었다. “모든 인간에게는 천부적인 권리가 있다”는 판결에 대해 세계는, 정확히 말해 다수는 끝없이 질문을 만들어냈다.

그럼 흑인은?
그럼 여성은?
그럼 장애인은?
그럼 동성애자는?

끝없는 질문들이 모두 기각된 끝에 다시, 이 ‘인권’이라는 짜증 나는 괴물을 향해 성난 목소리를 던졌다.

그럼 도대체 우린 누굴 괴롭히란 말이야?

Son of Groucho, CC BY https://flic.kr/p/d2yu1o
인권을 파괴하는 방법? 단 한 명의 인권만 부정하면 된다. Son of Groucho, CC BY

모든 인간은 차별받지 않을 기본적인 권리가 있다. 그리고 어떠한 인간에게도 이 권리를 침해할 권리는 없다. 인권은 그것을 침해할 권리 앞에서 강제적이며, 폭력적이다.

서울시, 헌장을 선포하지 않음으로써 차별을 선포하다 

11월 28일, 서울시가 시민위원회가 표결한 서울시민 인권헌장을 ‘전원합의’가 아니라는 이유로 선포 거부했다. 수없이 언급했듯이, 중립이 불가능한 의제에서 선포 거부는 또 다른 선포에 불과하다.

서울시는 마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던 마냥 수동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지만, 합의할 수 없는 사안에 ‘전원합의’를 요구하는 것은 매우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정치 행동이다.

‘전원합의’에 이르지 못했던, 가장 논란이 된 문항은 아래와 같다.

제4조: 서울시민은 성별, 종교, 장애, 나이, (중략) 성적지향 및 성별정체성, 학력, 병력 등 헌법과 법률이 금지하는 차별을 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

Guillaume Paumier, CC BY https://flic.kr/p/9UKJ38
Guillaume Paumier, CC BY

핵심은 “성적지향 및 성별정체성”이 어떠하더라도 “헌법과 법률이 금지하는 차별”을 받지 않을 권리를 인정할 것이냐였다. 그리고 서울시는 이 명제에 대한 선포를 거부했다. 다시 말해, “성적지향 및 성별정체성”이 소수에 속할 경우 설사 법률이 금지하더라도 차별할 권리가 서울시민에게 있다고 선포한 것이다.

전원합의? 

서울시와 박원순 시장은, 모든 역사적 국면에서 인권의 적들이 그래 왔듯이, 노예상인인 루이즈와 몬테즈의 권리를 빼앗지 않기로 결정했다. 심지어 그들은 그 이유를 ‘전원합의’가 되지 않아서라고 밝혔다.

인권헌장은 그것이 그저 장식이 아니라면, 모든 시민에게 규범으로서 제시하고 이를 지킬 것을 요구하기 위해 만드는 것일 테다. 그러니 나는 물을 수밖에 없다. 전원합의를 통해서만 헌장을 만들고, 만들 수 있다면, 도대체 왜 만드는가? 이미 ‘전원합의’로 지키기로 합의한 내용인데 말이다.

더불어 ‘차별하는 자’가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의 헌장이라는 것을 도대체 만들 수나 있을까? 그리고 그런 헌장이라면 만들 가치나 있을까? 사회적 차별은 외계인에 의해서 일어나지 않는다. 언제나 공동체 내부에서 일어난다.

사회 갈등이 커지지 않게 하는 유일한 방법 

박원순 시장은 인권헌장 논란이 불거지자 기독교 목사들과 만난 자리에서 (서울시장으로서) “ 동성애를 지지할 수 없다”고 말했다. 심지어 인권헌장에 대해서는, “사회 갈등이 커지면 안 하는 것만 못하다”고 말했다.

인권 문제에 있어 사회갈등이 커지지 않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그 착취와 차별과 폭력을 그대로 인정하는 길뿐이다.

노예는 노예로
빼앗기는 자는 빼앗기는 자로

missy, CC BY https://flic.kr/p/6i3iF5
missy, CC BY

자신의 삶을 달게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명민한 철학자의 시적인 문장으로 해방한 자들은 아무도 없다. 싱케가 자신의 쇠사슬을 끊고 그 칼로 선장의 목을 겨누지 않았다면, 아미스타드의 노예들은 아무 갈등 없이 사회적 합의 속에서 무사히 매매되었을 것이다.

박원순 시장은 “사회 갈등이 커지면 안 하는 것만 못하다”고 말했다. 정말 안 하는 것만 못한 일을 한 건 박원순 본인이다.

차별받는 자들을 극장으로 불러낸 것도 박원순이고, 그 차별당한 사람들이 온갖 수모를 겪게 한 뒤, 결국, 아직은 ‘인간이 아님’을 확인해 준 것도 박원순 시장의 서울시다. 그 행위에 또 다른 해석이 가능한가?

서울시의 노예상인들 

박원순의 희망은 파산했다.

박원순의 행동이 똑똑했는지 서툴렀는지 정치인다웠는지 어떤지 유능한지 무능한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인간 박원순’의 진정성이 어떠한지 따위도 연구할 가치는 없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동성애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아니라, 당신이 차별을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서울시장실 http://mayor.seoul.go.kr/manifesto_6_2
서울시장실

당신을 설명하는 것은 당신의 머릿속에 갇힌 증명할 수 없는 지성이 아니라, 당신의 가슴 속에서 비밀리에 끓고 있는 인류애가 아니라, 당신의 손에 들고 있는 비열한 몽둥이다. 그 몽둥이가 자신의 정당성에 대한 모든 해명을 회피한 채 마지막으로 던질 질문을 우리는 알고 있다.

최악과 차악 중 누구의 뒤에 서겠는가?

나는 답한다.

두 악에 조롱당하는 차별받는 소수자 옆에 서겠다고.

박원순 서울시장 (출처: 서울시장실 ) http://mayor.seoul.go.kr/?swptouch_view=normal
박원순 서울시장 (출처: 서울시장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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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및 이미지 출처 

아미스타드 재판에서 애덤스의 변론 내용은 모두 아래 책을 참고:

  • [세상을 바꾼 법정] – 마이클 리프, 미첼 콜드웰 저/금태섭 역

링컨의 노예해방선언 번복명령 조치와 하지스에게 보낸 편지, 찰스턴 연설은 다음을 참고함

본문에 사용한 이미지 중에 출처 표시를 생략한 이미지는 퍼블릭 도메인 저작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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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댓글

  1. 다 힘의 논리. 흑인이 스스로 주채적으로 독립를 한것이 아니기에
    21세기에도 인종차별 받는 현상이 미국에서 나타나는 것.
    오래 전 백인이 아시아의 노예였기에. 그들은 지금까지도 오리엔트.
    즉 동양에 대한 환상이 남아 있는 것.
    힘 만이 스스로를 지킬수 있는 법.

  2. 오히려 미국 인종차별 극복의 역사는 끊임없는 합의의 연속이라고 봐야 할 것 같은데요. 실제로도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권리가 한번에 주어진 것이 아니니까요. 처음부터 특정 원칙에 입각해 모든 차별을 철폐하자, 가 된 것이 아니라, 어떤 차별들은 남겨두고 어떤 차별들은 극복하는 식으로 나갔죠. 노예제를 폐지하고 나서야 참정권이 주어지고, 그 이후로도 각종 차별을 철폐하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이것들을 한번에 처리하려고 하지 않았고, 늘 어느 정도의 타협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차별한다와 차별하지 않는다의 방향성이야 있겠습니다만, 그런 일련의 과정은 합의불가의 영역이 아니라 양측의 입장을 끊임없이 조율하는 정치공학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거죠. 이상의 공간에서라면 몰라도 현실에서는 모든 것을 한번에 얻을 수 없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 아닌지요. 처음부터 목적하는 모든 것을 얻지 못하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 것과 같다는 이야기는 아니겠지요.

    무조건적인 만장일치를 주문한 박원순이야 당연히 이 문제와 관련된 일련의 책임이 있겠습니다만, 박원순은 중립적 입장을 고수해서 문제가 된 것이 아니라 이 문제에서 아예 손을 떼려고 했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고 봅니다만… 아무튼 본문의 논조가 약간 이해가 되지 않아 댓글을 남깁니다.

  3. 물론, 헌장이라는 것은 조금 다른 성격이긴 합니다만, 이것은 본문에서 제시한 예시들이 적당한지에 대한 의문입니다.

  4. 이번 서울시인권헌장과 관련해서 어떤 합의와 조율이 있었나요? 선언을 연기한 것도, 룰을 다시 짜보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냥 원천 무효 선언인데.

    본문에서처럼 박원순은 갈등을 조정하기 보다는 그냥 덮어버린 거죠.

    이번 선언 무효건과 관련해서 인권 측은 무엇을 얻은 것일까요. 뭘 더 줘야 테이블이 생길까요. 앞으로 테이블을 다시 만들려면 뭘 더 준비해야 할까요. 준비할 것도 줄 것도 없는데.

    충청남도는 이미 인권선언을 했습니다. 서울시가 못하는 이유가 뭡니까.

  5. 박원순의 마지막 결정이 합의와 조율을 거부했다는 것은 고령화가족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제 댓글을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또한 저 또한 박원순이 이 문제에서 아예 손을 떼려고 했을 거라는 얘기를 했었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본문에 대한 이야기는 좀 다릅니다. 본문은 인권 문제에서는 중립적 위치가 불가능하며 합의불가능성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에 그 점에 대한 지적을 한 것입니다(어떤 진영에 대한 편을 드는 것이 아닙니다. 글의 정합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합의와 조율은 박원순에게는 없었지만, 제정위원회의 의결 과정에서 이미 등장했었죠.

  6. 더불어, 지금까지 많은 인권의 현장들이 합의와 조율을 통해 조금씩 나아졌다는 점을 되새겨보면, 본문의 근거에는 문제가 있다고 사료되기 때문입니다(흑인 해방의 순간에도, 그것이 동등한 인권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었죠. 단지 노예라는 것을 긍정할 것인가 아닌가에 한정되었습니다). 인권이라는 사상을 원론적으로 보게 되면, 당연히 이런 합의는 허용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치적 공간에서는, 이런 합의를 통해 결과를 얻어내 왔습니다.
    제가 오독한 것일지는 모르나, 이것이 어떤 사상적 원칙을 설명하는 글인지 정치적 공간에서의 방법론을 이야기하는 글인지에 대해 잘 감이 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장이라는 것은 어떠해야 한다, 라는 본문의 이상적 관점에 나름의 가치가 있음을 부정하는 바는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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