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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x type=”note”]이 글은 경향신문 박은하 기자가 쓴 ‘박원순과 재능사회의 비참함’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필자의 동의 하에 원문을 일부 편집했습니다. (편집자)[/box]

“요즘 기자들은 기자정신이 없어. 기자가 아니라 직장인이야.”

기자가 되고 몇 년 굴러보니 ‘저 말’에 동의할 수 없다.

https://flic.kr/p/33ttJ9 NapInterrupted, CC BY ND
NapInterrupted, CC BY ND

모욕 

저 말은 모욕이다. 모욕인 것은 분명한데, 기자가 아니라 직장인에게 모욕이다. 저 말을 종종 듣는다. 기자의 소명의식을 강조하는 취지일 테다. 그 소명의식에 나 역시 기꺼이 동의하지만, 저 말에 담긴 기자라는 직업이 우월하다는 전제는 잘못됐다.

나는 그 관습적인 특권의식에는 동의할 수 없다.

직장인 vs. 기자 

직장인의 모습을 아는가?

잔업에, 야근에, 회식에 시달리는 것은 물론 상사와 거래처의 부당한 지시도 참아야 하고, 빠르게 변동하는 현대사회에도 잘 적응해야 한다. 영어도 기자보다 더 잘해야 하고, 대다수 기자들이 잘 다루지 못하는 엑셀 활용도 기본이다. 정작 출입처에 처박혀 있는 기자만큼 기술변동에 무감각한 존재가 또 어디 있으며, 갑질이 배인 기자만큼 자신의 생산물에 대해 무책임한 존재가 어디 있단 말인가.

검찰 조사받으러 나가는 사주에게 노골적으로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고, 대통령에게 “너무 안고 싶었어요” 따위의 말을 하는 것은 ‘영혼 없는’ 직장인이라서가 아니라, 영혼을 담아 이익을 계산할 줄 알고 자신이 권력의 끄트머리에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한 유사권력자이기 때문이다.

미디어오늘, “너무안고 싶었어요”... 김기자, 대통령과 포옹하니 그리 좋습니까 중 발췌
미디어오늘, “너무안고 싶었어요”… 김기자, 대통령과 포옹하니 그리 좋습니까 중 발췌

그래서 모욕 

그러니 직장인에게 모욕이다.

‘직장인’이라는 비유는 공익이 아닌 사익에 매몰됐다는 비유적 수사라지만, 권력에 대한 의지 없이 회사에 매여 있는 직장인은 정작 그런 짓 안 한다. 내 아는 직장인은 “XX그룹 X부장 수사 안 하냐?”라고 찔러주더라.

‘사명감’ ‘비판정신’은 기자의 전유물? 

저 언사가 최악인 점은 무엇보다도 ‘사명감’, ‘비판정신’ 등의 고매한 정신적 가치를 노동자 일반의 것이 아닌 기자들만의 것으로 소유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학자도 아니면서 학인지향 사회의 유물은 쓸데없이 계승한다.

직장인과 구별되는 존재로서 지식인을 끊임없이 분리하려는 시도는 “대학생 때는 진보적인 사람도 직장생활하면서 보수화한다”는 486(혹은 그 이전)세대의 경험과 결합해 아랫세대를 비판하는 ‘무기’가 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지금의 2030세대가 사회에 관심을 가질 무렵 사회는 이미 민주화한 틀 위에서 보수-진보가 경쟁하는 체제였고, 거기에 절반이 보수를 택했을 뿐인데, “20대가 보수화됐으니 미래는 없다”고 호들갑 떠는 식이다. 그들의 사고 체계에서 대학생 때 보수화한 이들이 직장인이 되어 더 보수화할 것이니 화들짝 놀라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들이 애써 소중히 여기는 ‘노동자’라면 바로 직장인과 구분되는 조직화하고 투쟁 현장에도 나오는 이들만 노동자일 것이다.

2030도 각성하고 분노한다 다만 조직화하지 못할 뿐 

내 경험에서는 정반대 현상이 일어났다. 대학생 때 보수적이던 동기와 선후배들도 취업하고 혹은 취업을 준비하는 여러 과정에서 조직문화를 경험하면 도리어 더 진보적으로 변한다. “우리 회사는 대체 왜 노조가 없냐?”고 분개하고, “남자상사들 성희롱 저거 어떻게 안 되느냐?”고 한다. 아이를 낳아 키워도 마찬가지다.

다만 분노를 인터넷에 쏟아내는 것 말고 조직하고 저항하는 방법을 잘 모를 뿐. 분노를 토할 뿐 그 분노를 조직화하고, 저항으로 이끌어내는 방법을 모르는 이유는 대학생활 때 그 조직과 저항의 방법론을 경험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업은 여기에 더해 저항을 조직하는 일을 경험할 수 없도록 끊임없이 노동자와 노동자를 분리시키고, 자기 삶의 조건을 성찰할 수 있는 ‘여유’라는 틈을 주지 않는다. 이 상황에서 ‘직장인’을 비하하며 ‘기자정신’ 운운하는 이들은 진정 그 기자정신으로 파고들 대상마저 잘못 보고 있는 셈이다. 그런 기자들은 오히려 좀 더 좋은 직장인이 될 필요가 있다.

Garry Knight, CC BY SA
Garry Knight, CC BY SA

486 보수화의 뿌리는 무엇인가 

486세대 운동권이 민주화에 기여한 공은 인정받아야 하지만, 저런 언사를 접하면 대학 진학률이 30%도 안 되던 시절 대학생이었다는 ‘비범함’이 그들 저항정신과 정서의 뿌리였고, 바로 이 지점이 보수화의 진짜 원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니 보수화된 적이 없었다. 애초에 ‘평범함’을 탈출하는 것을 가치있게 여기는 태도는 그대로 유지해왔을 뿐인데, 사회가 움직이다보니 보수화된 것처럼 보였을 터. 비범함으로 군부독재를 부쉈던 그들은 모두가 비범함을 향해 달려 나가는 세상에 문제의식을 가지기보다는 쌍수를 들어 환영했을 것이고, 노동 없는 민주주의는 이렇게 동의를 얻었다.

민주화운동
“끝까지 투쟁하자””전두환과 타협없다” “타도하자 친미 독재”라는 기치를 걸었던 민주화운동 ‘선배’들

놀라운 재능도 기어코 평범하게 … 재능사회의 비참함 

물론 시대의 맨 앞줄에서는 전체 조류가 보이지 않으니 재능사회의 비참함을 특정 세대, 특정 직군의 탓으로 돌릴 생각은 없다.

다만 그들은 의식/무의식에 알게 모르게 드러나는 평범함에 대한 경멸을 좀 더 털어내야 한다. 진보니 민주니 자처하면서도 ‘깨어있는 시민’과 같은 표현으로 선거에서 평범함이 아닌 비범함에 호소하다 번번이 지는 경험을 하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엄청난 재능도 기어이 평범함으로 만들어 버리고, 죽기 살기로 살 생각 하지 않으면 살 생각 자체를 하지 말라는 우리사회의 폭압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Matteo Parrini, CC BY NC SA  https://flic.kr/p/FsFGH
Matteo Parrini, CC BY NC SA

미친 세상에 대한 증언자  

평범한 각자가 이 미친 세상의 증언자다.

  • 라디오에 글만 보내면 당첨이지만 “이런 것이 무슨 소용 있나”라며 본능적으로 시니컬함을 익힌 동생
  • 누가 봐도 반듯하고 성실하지만 계약직 문턱을 넘기 힘든 친구
  • 재능을 살려 미대를 나왔는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업무량에 치여 볼 시간도 없이 사는 친구
  • 서울대 경제학부를 졸업했지만 중학교 시절 외고입시에 실패해 “나는 왜 근성과 끈기가 없을까”라며 자책했다는 대학 후배

평범한 내 주변 이들을 보면, 나는 우리 사회가 미쳤다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Hartwig HKD, CC BY ND  https://flic.kr/p/5CyHGY
Hartwig HKD, CC BY ND

우리 사회의 광기를 눈치챈 친구들 

나 역시 매일 재능 없음을 외치며 찌질거리는 이 시대 젊은이에 불과하다만, 그래도 우리 사회는 미쳤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나뿐만 아니다.

우리 사회의 광기를 적잖은 청년들이 눈치채기 시작했다.

‘숙련은 어쩌다 스펙이 됐나’고 예비연구자가 궁금해 하고, 지난 대선 즈음 “안철수 웃기지 마라 그래. 보통사람에게 창조니 융합이니 뭐가 중요해. 그냥 월급 따박따박 제때 나오는 게 최고야”라고 내 학창시절 최고의 전 총학생회장은 당당하게 선언한 바 있다.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됐는가]라고 동년배 필진들은 재능사회가 숨긴 열정착취사회의 맨 얼굴을 비판한다.

한윤형 , 최태섭 , 김정근 지음  | 출판사웅진지식하우스. | 2011.04.15
한윤형 , 최태섭 , 김정근 지음 | 출판사웅진지식하우스. | 2011.04.15

진보의 싹은 비범이 아닌 평범에서 

나는 어떤 기자가 기자정신이란 것을 발휘한다면 그것은 개인의 타고난 탁월한 사명감에서 출발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아무리 봐도 진보의 싹은 비범이 아닌 평범에서 틀 거 같다. 깨어있다는 비범함이 아닌 억압받는다는 평범함에서 말이다. 그 평범함을 소중한 가치로 여기고 평범한 개인이 모여 만든 집합적 힘을 주목할 때 비참함을 넘어설 수 있으리라 본다.

앞선 글에서 내가 박원순 시장에게 재능사회의 책임을 과도하게 넘긴 측면은 있다. 그러나 박 시장 세대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것이라 보는데 그것은 박원순의 한계라기보다는 그 세대의 한계다. 나의 세대가 한국전쟁과 보릿고개식 비참함을 결코 머리 이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이 비참함을 직접 체험해 본 세대가 아니면 안 된다.

대학을 다녔다면 90년대 학번부터다. 그런 의미에서 언론사에서 젊은 정치인이나 필진들을 2030세대 따위로 뭉뚱그려 소비할 것이 아니라 빨리 링 위에서 대등한 경쟁자로 싸움을 붙여야 한다.

‘평범한 직장인’과 ‘평범한 직장인이 되고 싶은’ 이들의 욕망과 현실에서 출발해서.

Takashi Hososhima, CC BY SA  https://flic.kr/p/cuerp3
Takashi Hososhima, CC BY 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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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댓글

  1. “그러나 박 시장 세대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것이라 보는데 그것은 박원순의 한계라기보다는 그 세대의 한계다. 나의 세대가 한국전쟁과 보릿고개식 비참함을 결코 머리 이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이 비참함을 직접 체험해 본 세대가 아니면 안 된다.”

    대부분 분석은 동의합니다만, 이 회의감과 이런 식의 세대론이 ‘이 문제를 해결’ 하는 데에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도리어 회의가 드네요. 개인적으로는 ‘평범한 직장인’이 되고 싶은 사람들의 욕망을 해결할 수 있는 ‘비범한’ 누군가가 있지 않으면 도리어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에서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드는데요. 그런데 쓰다 보니, 수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재능과 노력, 지향성을 고작 ‘비범’과 ‘평범’으로 나누는 이분법 자체가 글에서 느끼는 불편함의 근원인 것 같네요.

  2. 조한비 님의 말씀 잘 들었습니다. :)

    저는 이 글 편집자인데요. 박은하 기자가 쓴 글은 말씀하신 “수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재능과 노력, 지향성을 고작 ‘비범’과 ‘평범’으로 나누는 이분법”을 오히려 비판하는 취지의 글이라고 저는 생각(해석)합니다.

    즉, 이 글은 평범의 다양한 층위들, 그 풍경과 빛깔의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비범’이라는 억압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는 글이지 인간과 삶의 다양성을 비범과 평범으로 이분화해야 한다는 글이 전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글(텍스트)는 필자의 의도나 저명한 평론가의 해석에 의해 ‘정답’으로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다시 해석되는 것이라서 제 의견(해석)이 정답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진지한 의견 고맙습니다.

  3. 몇번을 읽어 보았지만 이 글이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모르겠다. 거의 원인은 내가 난독증이고 이해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겠지만… 여전히 일부 멋진 기자님들도 있지만 요즘 또 ‘일부’ 기자들을 지금은 더이상 ‘직장인’에 빗대는 것도 맞지 않지 않나? 거기에 딱 들어 맞는 ‘기레기’란 멋진? 말도 나왔는데… 기레기든 기자님이든 스스로 느끼든 애써 물타는 변명을 하듯 모르든 여전히 꽤 괜찮은 무기를 ‘가진자’인 것은 분명하지 않나? 그것을 인식하고 올바른 좋은 방향으로 향하여 쓰지 못할 시절이라도(뭐 이해 할 수도 있지) 옆으로나 뒤로 돌려 총질하는 흉기로는 쓰지는 말아야지? 아무리 “월급에서 자존심”이 나오더라도 그냥 ‘직장인’의 그늘 속으로 슬그머니 숨으려고는 말아야지…

  4. 친애하는 이대팔 님. ^ ^

    이 글에서 “요즘 기자들은 기자정신이 없어. 기자가 아니라 직장인이야.”라는 말의 맥락은 본문에서도 설명되어 있기는 하지만(이 부분이 좀 더 상세하게 설명되지 않은 측면이 있긴 합니다만), 기레기 기자를 비판하는 취지로서가 아니라 기자 특유(?)의 권위의식, 특권의식의 발로로서 뱉어진 발언이라는 맥락이라고 생각합니다. ^ ^

    즉, 글쓴이는 기레기 기자를 비판하는 것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논의 평면에서 기자 특유의 관습적인 권위의식과 특권의식이 저널리즘에 장애 요인이 되고 있다는 점을 세대적 역사체험의 차이로 설명하고 있다고 저는 읽었습니다.

  5. 기자는 ‘당연히’ 직장인이죠. 하지만 사람들은 기자가 타락하면 직장인이 된다고들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기자가 직장인이 되면 기레기라고 하죠. 먹고 살기 위해 글을 쓰면 기레기라고 하잖아요.

    그만큼 사람들은 신념을 다해 일하는 직장인을 상상하지 않죠. 그냥 한 부분을 맡아 일을 하는 직장인을 상상하지. 그게 기자면 기레기, 직장인이면 그냥 직장인.

    하지만 모든 직장인에게는 신념을 지키고 세상의 부조리를 괴이하다 느낄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전세계 노동자들이 그럴 힘이 있는 거죠. 그게 우리가 가진 힘이고.

    이 글은 그런 걸 의미하는 글 아닐까요?

  6. 운항 님께

    저도 그렇게 읽었습니다. : )

    늘 슬로우뉴스 기사와 칼럼에 훌륭한 의견과 논평을 더해주셔서 고맙습니다.

  7. 그렇죠. 아무래도 역시나 저의 찢어진 이해력으로 글쓴이의 말하는 바를 정확히 알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런 하찮은 저의 댓글에 또 친절한 댓글을 달아 주시다니… 민노님 항상 수고가 많으십니다.

  8. 하찮은 댓글이라뇨!
    그야말로 (대부분) 편집자이자 (간혹) 필자로서 이대팔 님의 댓글은 언젠가 아거 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루의 피곤을 날려버리는 ‘바카스’ 같은 존재입니다. (물론 저는 바카스보다는 그냥 시원한 물이나 포도주스를 좋아합니다? ㅎㅎ)

  9. 기자든 직장인이든 이 사회가 길들이려는 대상일 뿐입니다. 사회는 길들여짐을 택한 우리의 자아성찰을 막고 이렇게 생성된 거대한 타성으로 사회를 유지하고 이데올로기를 공고히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은하 기자님은 우리는 하나(기자와 직장인 등 수 많은 노동자)다. 분절화와 파편화된 우리를 스스로 정비하자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왜 힘든 일인지 어떤식으로 노동자가 성찰을 방해당하는지 다음에 들려주셨으면 합니다.

  10. 조금 긴 글이지만, 기사 읽고 생각이 많아져 댓글 달아봅니다.
    http://rusia1020.blog.me/220175195647

    필자가 지적한 바와 같이 우리 사회는 ‘평범함’을 멸시하는 사회이다. 우리 안의 재능과 창의성은 반드시 남과 비교했을 때 ‘눈에 띄는’ 정도의 것이어야 인정받을 수 있고, 경쟁 세계로 뛰어들었을 때 소수의 사람에게만 허락되는 승리의 깃발을 가져올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이어야 ‘재능’있는 인재로 인정받을 수 있다. 교실 내에서 언제나 ‘무명’으로 남는 아이들은 우등생과 문제아를 뺀 나머지의 ‘딱중간’인 학생들이다. 그들은 내가 중고등학교때에 그랬던 것처럼 교실에서 큰 존재감없이 중고등학교 6년을 보내고 사회에 나와서도 크게 호명되는 일 없이 살아간다.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의 수가 오천만이라면 한 명의 개인은 그 사회 내에서 오천만분의 일의 지분을 가지고 있다고 배우지만 사실 대한민국의 ‘국민’을 구성하는 사람은 오천만명이 아니라 잘난 부모를 만나 재산을 물려받을 수 있거나, 혹은 비범한 재능을 가진 극소수의 사람들인것만 같다.

    이런 평범함에 대한 멸시와 동시에 비범함에 대한 무분별한 동경이 ‘노동’없는 민주주의를 만들었다는 필자의 지적은 옳다. 우리는 혼자서는 한순간도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누군가의 노동을 필요로 한다. 내가 지금 노트북을 두드릴 수 있는건 지금 이순간에서 일하고 있을 한전 노동자의 도움과, 이 노트북을 공장에서 조립한 노동자의 노동, 그리고 이 기계를 내게 판매한 노동자의 노동 덕이리라. 내 24시간을 모두 투여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자급자족을 통해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삶을 누릴 수는 없다. 그것은 비효율적일뿐더러 몹시 피곤한 일이기도 하다. 재능있는 누군가가 글을 쓰는 것으로 밥을 벌어먹는다면, 누군가는 버스를 운전해야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벼를 추수하고 과일을 박스에 담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요리를 하며 밥을 벌어먹고 산다. 사실 우리의 삶은 소수의 ‘재능’있는 이들의 노동보다는 절대다수의 눈에 띄지않는 ‘평범한’노동에 기대어 이루어진다. 그럼에도 그 ‘평범한’ 노동은 무가치하고 절대 내 자식에게는 시키고 싶지 않은 무엇으로 여겨진다.

    창의성, 재능 혹은 끼를 필두로 비범함을 강조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과 평범함을 멸시하는 모습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특별한 재능없이도, 거창한 꿈이나 야망없이도 자기 삶의 기준과 윤리에 부합하는 개개인의 삶을 존중하지 못하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기에 우리는 소수의 비범한 사람들을 동경하고, 그것이 나에게 맞는 옷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채 꾸역 꾸역 그 옷을 입기 위해 자기 삶을 도려낸다. 자신의 평범함을 존중받아보지 못한 이에게(혹은 자신의 무가치함을 견딜 방법을 배우지 못한 이에게) ‘창의성’ ‘재능’이 중요시되는 사회 분위기는 분명 또 하나의 억압이고 족쇄일 것이다.

    그러나 ‘박원순과 재능사회의 비참함’ 그리고 ‘미친 세상에 대한 증언’에서 필자가 주장한 논지에 대해 충분히 수긍하면서도 나는 두 가지 이야기를 덧붙이고 싶다.

    한가지는 ‘평범함’의 가치를 존중할 필요는 있지만 그것이 반드시 재능과 창의성 혹은 예술성의 가치를 평가절하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분명 재능사회가 평범한 개인들에게 억압적인 면이 없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개개인들이 창의성과 재능을 키우고 존중하는 교육 혹은 그러한 삶의 지향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가 지식인이나 예술가가 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비범함’에 대한 동경과 무관하게 어떤 창의성과 재능 혹은 열정과 끼라고 불리우는 그것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 나는 모든 개인이 각자의 재능과 끼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문제는 어떤 창의성과 재능을 인정되고 어떤 것은 버려지느냐의 문제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재능이 직업(밥벌이)으로 연결되기 위해서는 그 재능이 ‘상품성’을 가질 때이다. 하물며 열정조차도 어떤 부가가치를 생산할 가능성이 보일 때에만 유효한 열정으로 인정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상품성이 결여된 재능과 창의성을 우리의 삶 안으로 품는 일이며, 그것들이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장을 만드는 일이다.

    같은 맥락에서 덧붙이고 싶은 이야기는 “기자는 직장인”이라는 ‘모욕’에 대한 이야기이다. 필자는 이 모욕을 ‘직장인에 대한 모욕’이라고 이야기 했지만, 그리고 기자라는 직업군, 즉 지식인의 소명의식이나 허영에 대한 비판에 대해 100프로 동의하는 바이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런 질문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그렇다면 기자는 좋은 직장인이면 되는 것인가?’

    질문을 내 삶과 연결하여 바꿔본다. ‘교사는 요즘 직장인이야’ 물론 기자와 교사가 갖는 사회적인 의미나 책무는 똑같지 않다. ‘기자는 지식인인가’라는 질문과는 다르게 ‘교사는 지식인인가’라는 질문에 고개를 갸우뚱 하는 사람이 훨씬 많을 것 같다. 또한 독자는 기사를 선택할 수 있지만, 학생은 교사를 선택할 수 없다는 점에서 각자가 져야하는 윤리적 책임도 분명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자와 기자를 비교해보았을 때 기자 또한 순수한 창작물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사회 내에 존재하는 정보를 자신의 시선(혹은 소속 신문사의 세계관)에 따라 전달한다는 측면을 보면 교사가 교과 정보를 자신의 교육관과 교육과정에 맞춰 학생들에게 전달하고, 교실 내의 수업에 적용한다는 점은 일면 닮아있다고 할 수도 있다. (물론 교육이라는 것이 ‘수업’만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다시 그 질문으로 돌아가, ‘교사는 요즘 직장인이야’라는 질문은 분명 모욕이다. 필자의 의견과 같이 직장인과 교사 사이의 직업의 서열을 나눈다는 점에서 직장인에게 모욕이기도 하지만, 분명 교사에게도 모욕이다. 내가 교사로서의 사명감이나 소명의식이 있어서 모욕인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일하고 있는 교육노동자로서의 ‘직업윤리’에 대한 모욕이기 때문이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직장인들의 삶은 분명 내 상상 이상으로 치열할 것이다. 만화로, 드라마로 ‘미생’의 인기가 멈추지 않는 이유는 그런 직장인들의 치열한 삶을 잘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좋은 직장인’은 ‘나태한 교사’ 혹은 ‘게으른 기자’보다 훌륭하다. 그러나 나는 다시 묻는다. 교사는 그저 좋은 직장인이면 되는 것일까. 기자는 그저 좋은 직장인이면 되는 것일까.

    필자의 지적대로, 기자에게 관습적으로 요구되는 직업에 대한 ‘사명감’과 사회에 대한 ‘비판정신’은 기자만의 소유물이 아니다. 교사에게 요구되는 인간에 대한 ‘애정’과 ‘공공성’에 대한 고민 또한 절대 교사만의 소유물이 아니다.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관심을 갖고 비판적 사고를 해야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어느면에서 기자와 다를 것이 없으며, 내가 살고 있는 공동체 내의 청소년들, 아니 나보다 더 어린 사람들에게 알게 모르게 내 삶을 통해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선생과 다를 바가 없다. 가장 훌륭한 사회는 모두가 기자이고, 모두가 교사인, 아니 더 나아가 모두가 자신의 삶의 범위 안에서 자신의 고유한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무언가를 창조한다는 점에서 지식인이자 예술가인 사회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하고 있는 노동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고, 그 노동을 통해 돈을 받아 먹고 산다는 점에서 교사가 직업이 아닌 이들에 비해 높은 윤리적 책무를 져야한다고 생각한다. 직장인들도 자신의 업무 결과에 따라 책임을 진다. 하지만 교사의 업무 결과는 단순히 서류로, 혹은 손익분기 계산으로 처리할 수 있는 내용의 것이 아니다. 교사가 되는 순간부터 학교라는 작은 사회의 굴레 안에서 교사는 학생들의 삶의 일부분이 되고, 그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교육은 투입과 산출로 계산될 수 없는 영역에 속하며, 정해진 근무시간 내의 노동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교사 앞에 놓인다. ‘학생’이라는 살아있는 형태의 무엇을 대상으로 하는 노동은 가시적인 노동뿐만 아니라 비가시적인 노동을 포함할 수 밖에 없다. 교사가 학생의 삶을 모두 책임져야하고, 교사는 학생을 위해 자신의 개인적인 삶도 포기해야한다는, 그런 교사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교사가 어찌해줄 수 없는 학생의 비참한 삶을 지켜보고 아파해주는 것, 학생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들에 대한 호기심을 유지하는 것과 같은 비가시적인 감정노동 또한 교사가 절대 놓치않아야하는 교육노동의 부분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좋은 직장인도 되지 못하는 태만한 교사가 많다는 것을 안다. 매뉴얼상에 있는 교사 지침조차 소화하지 못한 채 자신의 업무를 기간제에게 미루고, 최소한의 학급 운영조차 귀찮아하며, 무엇이 교육적인지에 대한 고민 없이 관리자가 하라는 대로, 아니면 관습적으로 해왔던 대로 학생지도를 하는 교사가 많다는 것 또한 나도 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자신의 근무시간을 넘겨가면서 학생들과 상담하고 주말에도 수업과 학생들을 고민하는 소수의 교사들이 있다는 것 또한 안다.

    그렇다면 기자의 문제로 돌아와 다시 물어본다. ‘기자는 좋은 직장인이면 되는가?’ 기자가 만들어내는 창작물인 기사는 직장인이 만들어내는 프로젝트와 상품 혹은 사업과는 다르게 ‘공공성’을 띄며 강한 사회적 파급력을 가진다. 선정성에 기대어 쓴 기사 하나는 개인의 삶을 산산조각낼 수도 있으며, 사회 비리를 폭로하는 좋은 기사 하나는 우리 사회의 공정성의 정도에 영향을 미친다. 좋은 기사는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보게 하고, 밥벌이에 바쁜 사람들이 파악하기 어려운 사회의 흐름을 읽게 도와준다. 기사가 불특정 다수의 여론에 미치는 강한 영향력이야 말로 기자들이 ‘갑질’을 해댈 수 있는 이유이자 근거일 것이다. 직장인들은 자신의 업무 결과에 대해 승진고과 혹은 자신의 봉급을 담보로 책임을 질 수 있다. 개인의 비리나 행실문제로 회사에서 짤리는 것은 논외로 하더라도 한 직원의 실수나 무능력으로 인한 책임은 그 조직이 함께 지는 범위에서 마무리 할 수 있다. 하지만 기자가 생산해낸 기사에 대한 책임을 기자는 어떻게 져야하는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을 어떻게 수습하고, 어떻게 되돌릴 수 있는가. 나는 기자가 단 한번의 실수도 하지 않는 완벽한 인간이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지식을 생산하고 유포하는 사람으로서, 다수의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지식인’으로서 더 높은 수준의 윤리적 기준과 공공성에 대한 고민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가 기자로서 얻는 모든 이익(사회적 지위뿐만 아니라 정보에 대한 접근성의 용이함, 사회적 발언권 등)은 기자라는 한 개인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이익은 기사를 읽는 사람들에게서 나온 것이고, 그들의 영향력 또한 기사를 읽는 이들이 기자에게 부여한 것이므로 기자들의 ‘갑질’은 사실 공공의 이익을 사적으로 유용하는 일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기자 혹은 교사(교사는…지식인으로 넣자니 여전히 고개가 갸우뚱해지지만, 다른 직업군과 다른 직업윤리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이 범주 안에 넣는다.)가 다른 직장인 혹은 노동자들에 비해 우월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각자의 소질과 살아온 환경에 맞춰 누군가는 교사를 하고 누군가는 환경미화원을 한다. 모든 노동은 이 사회 내에서 반드시 필요하며, 가치롭다. 그와 동시에 모든 노동은 각 노동에 따르는 고유한 어려움과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것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떤 것을 선택하는 것이 내 삶에 더 어울리는가가 직업 선택의 기준이어야 한다. 지식인이 지식 생산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지식인이 아닌 다른 평범한 사람들의 노동이 있기 때문이며, 그들이 지식인의 생산물을 소비해주기 때문이라는 점에서 지식인은 평범한 직장인들보다 자신의 생산물에 대한 높은 윤리적 기준을 가져야한다. 기자를 비롯한 지식인들의 문제는 ‘평범함’에 대한 이해와 존중의 결핍(필자의 말을 빌리자면 ‘관습적인 소명의식’)뿐만이 아니라 직업윤리의 부재이다.

    윤리가 부재한 사회에서, 직업윤리를 운운하는 것은 무모한 요구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지식인에 대한, 혹은 ‘비범한’ 이들에게 더 높은 잣대를 들이밀 것을 요구한다. 그것이 그들의 가진 ‘비범함’에 대해 책임지는 방법이며 동시에 ‘비범함’에 대한 올바른 존중이라고 생각한다. 필자가 ‘학자 존경 사회’라 이름 붙인 우리 사회에 지식인에 대한 동경은 있을지언정, 지식인에 대한 존중은 없다. 이는 지식인들의 무책임함과 그들에 대한 무분별한 동경이 같이 만들어온 풍경일 것이다. 평범함에 대한 존중없이는 비범함에 대한 존중 또한 불가능한 일이다. 필자가 던진 ‘우리 사회에서 평범한 사람들은 존중받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사실 뒤집어보면 ‘우리 사회의 비범한 사람들은 (비판적 사고와 근거없는 동경이 아닌) 존중받고 있는가, 혹은 우리와 동등한 개인으로서 적절한 직업 윤리를 요구받고 그에 따른 비판을 받고 있는가’라는 질문과 맞닿아있다. ‘평범함’의 가치를 세우는 일은 ‘비범함’의 가치를 끌어내리는 데서 오지 않는다. 오히려 ‘평범함’이 ‘비범함’이 되고, ‘비범함’이 ‘평범함’속에서 만들어질 때, ‘평범함’과 ‘비범함’이라는 이분법의 경계가 모호해질때 진정한 의미의 ‘평범한’ 사람들의 사회는 올 수 있다.

    ‘깨어있다는 비범함이 아니라, 억압받는다는 평범함’에서 시작해야한다는 필자의 글을 읽으면서, 자신이 억압받고 있다는 ‘평범함’을 깨닫는 것조차 이제는 ‘비범함’이 되어버렸을 정도로 우리 사회의 ‘평범함’의 기준은 하향평준화 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울한 생각이 든다. 우리 사회에 좋은 교사가, 좋은 기자가, 좋은 글쟁이들이 혹은 건강한 ‘비범함’이 사라지고 있는 것은 사실 그 ‘평범함’을 깨닫는 이들이 적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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