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청 ‘시민청’이라는 곳에 처음 가 봤다. 시민청 지하 2층에서 하는 행사에 들르려다 내려가는 계단을 못 찾아 뱅뱅 돌다보니 시민청 전체(전시 중심의 지하 1층과 행사와 모임 중심의 지하 2층)를 살펴보게 됐다. 한마디로 감동했다.
시민청, 이렇게 근사한 곳이 있었다니!
시민청은 미술관 같으면서 호텔라운지 느낌도 들면서 카페 분위기도 나고 진짜 카페도 있다. 공정무역, 아이디어 상품 판매점도 있고, 정책에 반영할 수 있는 시민들의 아이디어를 적는 공간도 있고 미니 도서관도 있다.
시민청 가게는 구경 가도 “뭐 살 거에요?”라고 묻지 않는다. ‘북유럽 스타일’ 비스무리한 인테리어는 아늑하면서도 생동감 있다. 이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나의 문화 수준이 올라가는 것 같다.
저절로 실체 없이 공허했던 말을 떠올렸다. ‘디자인서울’이 이런 것이었구나! ‘창조경제’가 바로 여기 있었네! 요약한다면 ‘재능 넘치는 시민들의 창조적인 무대’라고 부르는 게 적당할 것 같다.
시민청 = 파격 감싸는 세련 = 박원순의 ‘스타일’
시민청은 박원순 시장의 특징을 고스란히 구현한 공간이었다. 그는 일단 세련됐다. ‘참여연대’와 ‘아름다운 재단’으로 대표되는 그의 시민운동 경력은 ‘부르주아적’이라거나 ‘정당을 우회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적어도 ‘성향이 온건하다’는 평에는 전혀 동의할 수 없다.
참여연대가 출범 초기부터 한결같이 내세우는 목표는 정치사법 분야의 개혁과 사회복지의 확대다. 사회복지는 말할 것도 없고, 복지국가청년네트워크 보고서를 보면 젊은 층조차 계층 막론하고 ‘가장 불평등이 심하다고 느끼는 요소’로 사법 불평등을 1순위로 꼽는다.
소위 민중적 욕구와 일치한다. 정책으로 실현된 활동을 꼽으려면 열 손가락이 모자라고 선거판을 갈아본 적도 있다. 중산층 이슈인 거 같으면서도 체제 바깥의 급진적 의제인 ‘동물권’에 대해서 선구자급으로 고민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건하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어떤 내용이건 간에 새롭고, 근사하고, 품격도 있는 거 같은 만족감을 주는 스타일로 담아내기 때문이다. 졸부도 군부도 심지어 운동권들과도 비교되는 스타일이다.
박원순이 극복해야 할 과제 역시 ‘스타일’
흥미로운 점은 박 시장이 극복해야 할 과제도 그 스타일에 있다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박 시장만의 과제가 아니다. 재능, 아이디어, 창의성, 창조를 지향하는 사회가 간과해서 생긴 비참함에 관한 이야기다.
박 시장이 꿈꾸는 세상은 ‘창의성 넘치는 시민들이 자유롭게 아이디어를 내고 참여를 통해 각자의 보람을 찾을 수 있는 사회’인 것 같다. 이런 세상을 만들려면 ‘재능과 끼를 억압하는 획일적 교육’, ‘권위주의적 관료’, ‘출발선에서 뒤쳐진 자의 재능을 묻어버리는 불평등’ 등을 극복해야 한다. 급진적이라고 느껴지지 않지만, 막상 하려고 들면 결코 쉽지 않다.
그리고 이런 것들을 본격적으로 하자고 한 사람은 내 기억에는 김대중 정부 때부터였다.
김대중 이전, 학자 존경 사회와 그림자
김대중 정부 이전 한국은 학자를 존경하는 사회였다. 뿌리 깊은 유교 전통에 입각해 학생은 예비학자로서, 고시를 통해 배출된 관료는 학자의 연장선상으로 우대했다.
그렇기 때문에 5.16 쿠데타의 주역들도 군인 신분으로 직접 정권을 접수하지 못하고 일단 제대부터 했다. 선비의 나라에서 군인 따위가 어찌 감히 집권한단 말인가. ‘군 출신’ 정부에 학생과 지식인이 반기를 들 때마다 정권은 격렬하게 탄압하면서도 움츠러들었고 시민들은 학인들을 지지했다.
4.19의 김주열, 6월항쟁의 박종철, 이한열처럼 역사의 변곡점에서 시민들을 뛰쳐나오게 만든 것은 학생의 죽음이었다. 군부 쿠데타가 발생했던 다른 나라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학생운동과 빠른 민주주의 정착은 바로 이 전통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문치 전통에는 그림자도 있었다.
학자를 우대하는 세상에서 노동 존중과 장인정신은 부족했다. 모두가 학자를 꿈꾸는 세상에서 노동자는 ‘공부 못 해서 되는’ 천한 존재였다. 노동자가 되지 않기 위해 모두가 열심히 공부하는 사회는 민주화 이후 노동계의 요구를 무시하고, ‘노동 없는 민주주의’를 쌓아 올렸다. 언론이 무렵 급작스럽게 권력으로 떠오른 것도, 관료집단의 오만과 부패와 권위주의도 비슷한 맥락에 있었으리라 본다.
IMF와 김대중 당선, ‘신지식인’ 시대
1997년 IMF 외환위기가 터졌다. ’우리가 뭔가 잘못 살아왔다’는 반성 속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됐다.
김대중 정권은 ‘학자의 나라’를 깨 보려고 뭔가 애썼던 것으로 보인다. 그때 학인에 대한 과도한 존경과 획일적 학인지향 사회의 대안으로 떠오른 것은 ‘노동에 대한 존중’이나 ‘장인정신’이 아니라, ‘모험심 넘치는 기업인’이었다. 자장면 배달부와 개그맨을 ‘신지식인’ 1호로 공포한 것(1999년)은 ‘학자의 나라’를 깨려는 첫 시도였다.
학력이야 어떻든 자신의 영역에서 최선을 다하는 ‘장인’이야말로 신시대의 진정한 지식인(학자의 나라를 깨려고 했으면서도 결국 ‘지식인’이란 말을 붙였어야 했다)이라는 메시지가 어느 정도 있었던 거 같기는 하다. 하지만 대중들에게 와 닿기로 ‘신지식인’이란 대학 안 나와도 각자 하는 일에서 수완을 발휘해 돈을 잘 벌어 성공한 사람이 됐다.
배달 노동자의 기가 막힌 배달 스킬은 노동자의 지위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는 자기계발을 통해 1인 기업인이 되라는 메시지로 전이하고, 심형래 씨로 가면…아아, 디워.
이해찬 세대의 좌절
‘이해찬식 교육’도 비슷하게 꼬였다. “한 가지만 잘하면 대학 갈 수 있다”가 당시 캐치 프레이즈였다.
이는 ‘대학 굳이 가야하나’는 선택지는 배제하면서, 기존에는 인정받지 못햇던 재능에 ‘학자의 지위’를 부여하는 방식이었다. 그 결과 한 가지 잘해서 대학 간 뒤 그 재능을 살려 벤처재벌로 성장하는 것이 김대중 시대의 성공모델로 부상했다. 그리고 이해찬 세대는 좌절을 몇 년 뒤 첫 좌절을 맛본다.
“한 가지만 잘 하면 대학 잘 간다더니, 수능을 잘 봐야 하잖아! 거짓말이야!”
첫 번째 좌절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한 가지 잘 해서 대학 가 봤자 취직하고자 하니 쓸모가 없었다. 재능을 살리고 네 꿈을 펼쳐라? 초등학교 교실 한 반에서 노래 가장 잘하는 아이가 있다고 치자. 반에서 노래 1등하는 수준으로 이 아이는 노래로 먹고 살 수 없다. 이 반에서 축구 제일 잘 한다고 축구선수 되는 것 아니다.
노래로, 축구선수로, 피겨스케이팅으로, 리듬체조로 뭐든 재능을 살려서 그 분야에서 성공한다는 것은 웬만한 재능과 노력으로 안 되며, 자신이 세계구급 재능이 있을지 불확실한 상태에서 집안까지 말아먹으면서도 베팅해야 하는 도박인 것이었다.
뭐야.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가 틀린 말이 아니었잖아.
한 가지 재능도 없는 사람은 여전히 절대다수
가장 근본적 층위의 좌절은 한 가지라도 재능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는 점이다.
어릴 때는 친구들 사이에서 노래 좀 잘 하고, 달리기 잘 하고, 글씨 잘 쓰고, 공부 잘 하고, 이런 것들이 재능인 줄 알았는데 개뿔. ‘재능’이란 남보다 월등히 잘해서 그걸로 충분히 직업인으로서 성공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본다면 이 세상에 재능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적성에 맞다고, 자기가 좋아한다고 그 분야에 재능 있는 것은 아니다. 세상은 넓고, 천재는 널렸다. 세계화가 진행될수록 재능의 조건도 까다로워졌다. 전국구급이 아니라 세계구급 재능이 돼야 산다.
넘버1 황제의 재능은 당연히 인정받고 넘버2도 홍진호쯤 되면 인정받지만, 대부분 연습생으로 떠돌다 승부조작 따위에나 휘말려 불운하게 젊음을 끝내야 하는 것이 재능이라는 영역인 것이다. 그 친구들 다 자기 동네에서는 ‘겜짱’이었고, 자기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일이 게임이었을 텐데.
말할 수 없는 ‘평범함’
이 사실을 냉정하게 말하는 이는 거의 없다. 다들 당신은 잠재력이 있다고, 꿈을 포기하지 말라고 한다. 정말인가?
학교 다닐 때 전교 1~2등 하는 친구도 사범대 갔다가 하도 요새 정교사 안 뽑아서 기간제 교사 전전하는 상황이다. 그 앞에 두고 평범함이 아니라 비범함을 말하며, 비범함은 평범함 속에 있다면서 결국 비범해지라고 말하는 ‘쿵푸팬더’식 메시지만 범람하니 우울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나만 재능 없는, 나만 평범한 그런 사람일거라고. 나는 재능과 꿈을 활짝 펼칠 불확실한 무대보다 1년 뒤, 10년 뒤 내 인생을 설계할 수 있는 안정적 직장과 이웃이면 족하다고. 나는 엄청난 꿈 없다고. 적당히 취직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가족 이뤄 평탄하게 살다가는 것이 솔직히 내 꿈이라고. 획일적 문화까지는 아니더라도 살아가는데 적당한 가이드라인이 있어서 혼란 속에 빠지지 않으면 좋겠다고….
그런 생각은 곧 낡은 것이자 패배의 징표다. 입 밖으로 꺼내서 말할 수 없다.
말할 권리마저 빼앗긴 대다수 패배자
그런 종류의 우울과 좌절 속에서 대다수를 패배자로 만들어버리면서도 불평조차 할 수 없게 만들어버린 것. 그것이 바로 의도와 달리 전개된 ‘신지식인’과 ‘이해찬식 교육’의 결과였다.
‘한 가지만 잘 해도 대학가는 사회’가 아닌 ‘대학 안 가도 모두가 대우받는 사회’, 한류스타가 아니라 동네 레스토랑에서 피아노 치며 먹고 살아도 그럭저럭 만족감 속에서 삶을 보장받는 사회를 지향하지 못해 비참함이 벌어졌다. 결국, ‘학자의 나라’가 외면했던 ‘노동’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던 대가다.
신지식인 사회는 노동 문제 없이 ‘꿈, 끼, 깡, 끈, 꼴’의 비범함(끈=연줄 혹은 끈기, 꼴=외모)을 강조하며 내달리다 ‘재능 없는 자 먹지도 말라’는 사회가 됐다. 그런 흐름 속에서도 유례없이 성공했지만, (구지식인으로서도 충분히 지식인인) 박원순 시장의 과제도 아마 여기 있을 것이다.
노동 있는 민주주의: 노동은 ‘집합적’이다
노동 있는 민주주의를 만들려면 노동의 핵심적 성격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노동은 ‘집합적’이다. 개성보다 체계와 협력이 필요하고, 비범함이 아니라 평범함이 빛난다. 그러니까 이 노동문제의 복권은 여태까지 말해왔던 ‘네 꿈을 펼쳐라!’ 대신 ‘음, 저는 엄청난 꿈 따위 없는데요.’라고 말하는 게 인간의 당연한 모습이며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말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 전제에서 사회, 교육, 복지 정책을 다시 짜야 하는 일, 그게 노동 있는 민주주의를 위한 출발점이다.
시민청의 ‘재능 비범 창의’가 슬펐던 이유
시민청 곳곳에 녹아 있는 시민들의 재능과 아이디어, 창의성, 비범함 속에 왠지 슬퍼졌다.
재능과 창의가 엄청 거창한 것이 아니라 일상 속 아주 작은 차이 같은 것이라고 인정될 수 있다 하더라도, 재능이 삶의 당연조건이 되는 사회에서는 사람들을 옭아맨다. 재능기부란 말이 재능 있는 이들을 착취하는 동시에 기부할 재능이 없는 사람을 소외시키는 것처럼.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이 쓴 책 중에 [저항과 반역 그리고 재즈](원제: Uncommon People: Resistance, Rebellion and Jazz)란 책이 있다. 제목은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이라 해놓고, 그 내용은 당대를 살았던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다뤘다. 이 책의 한 챕터 ‘빅토리아 시대의 가치’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장인들은 더 이상 자신과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을 재생산하지 않는다. 1930~40년대에 장인적 경험과 가치를 갖고 자란 세대가 여전히 남아 있지만, 그들도 점차 나이가 들어가고 있다.
증기기관차를 운전하고 관리한 마지막 세대가 은퇴하게 될 때 –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 그리고 기관사들이 전차 운전사들과 별 차이가 없어지고 언젠가 완전히 불필요해질 때,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까?
시장 가격과 화폐로 그 가치를 매길 수 없는 힘들지만 유익하고 사회적으로 유용한 육체노동에 대한 존엄성과 자긍심을 지닌 수많은 사람들이 없어진다면 우리 사회는 어떻게 될까?
지금과는 다르지만 더 좋은 사회가 될 수 있을까? 시험을 치르는 데는 신통치 않은 사람들에게 손과 눈, 그리고 두뇌를 쓰는 기술이 제공하는 자긍심에 이르는 길이 없어진다면 그 나라는 어떻게 될 것인가?”
스마트폰과 사물인터넷과 드론과 3D프린터의 시대, 시험을 치르는 데 신통치 않은, 하지만 노동이란 형태로 존엄과 자긍심을 지닌 수많은 사람들의 설자리는 ‘재능’과 ‘창의’와 ‘비범함’으로 대체돼야 하는가.
누구도 이 독한 진실에 대해 말한 적이 없다. 누가 해결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지도자로 나서는 사람들은 대체로 너무 비범하다.
[divide style=”2″]
[box type=”note”] 이 글은 미친 세상에 관한 증언: “요즘 기자들은 직장인이야”라는 당신에게로 이어집니다. (편집자) [/box]
와 멋있는기사 감사 ㅠㅠ
정말 잘읽었습니다..
그 dj 사진에서 따 <가 다로 수정되야 할 것으모 보입니다
정말 잘 읽었습니다 ㅠ…현재 대학교를 다니고 별다른 재능없이 취업만을 목표로하는 저에겐 너무나 와닿았네요…하지만 저희나라같이 인재자원을 수출의 일환으로 해야하는 나라로는 경쟁을 통해 우수한 재능만을 배출해야 하는건 별수없는거 아닐까요 ㅠㅠ…씁쓸하지만 저희나라가 현재처한 상황으로는 흠…
지금까지 슬로우뉴스에서 읽은 글 중에 최고였던 거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그냥 잉여다. 그러므로 가치있다.”라고 주장하는 기사.
이게 일베의 논리와 무엇이 다른가요?
저에게는 슬로우 뉴스에서 최악의 기사처럼 보입니다.
.. 사람은 언제나 낮은 곳으로 흐른다. ..라는 말이 떠오르네요.
한국의 수출품은 평범한 사람들이 힘을 합쳐 열심히 노력한 결과들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물론 천재의 역할이 어디에나 있었겠지만 물건이란 천재들의 아이디어가 아니라 그걸 실제로 만들어내는 사람들의 역할이 있어야 하는 것일테고, 지금 그 역할을 무시하니 나라 전체가 침체에 빠지는 게 아닐지…당분간 이런 상태라 무척 힘들겠지만 그래도 짓눌리지 마시고 취업 잘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완전..동감이예요. 시민청갔다가 느낀 이건뭐지!! 느낌… 잘 정리해주셨어요. 잘읽었습니다.
이 글 편집자입니다. 뒤늦게 확인했네요. ㅜ.ㅜ; “했따” 오타 정정했습니다.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 ^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하면서도… 이렇게 날카로운 비판을 한 저자(박은하 기자님) 마저도 “힘들겠지만 취업 잘 되세요”란 말 말고는 별달리 해줄 수 있는 얘기가 없는 오늘이 참 버겁네요. 종종 마주치게 되더라구요. 열을 올려서 혹은 잔잔하게 조곤조곤 오늘의 문제들을 꼬집고는 잘되길 바랍니다로 끝나는… ㅜㅠ 박은하 님이 그런 지점들에 대한 문제의식이 부족하다 이런 지적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동맥경화 마냥 꽉 막혀버린 오늘에 대한 안타까움이 크다는 이야기였어요. 글도 리플들도 잘 읽었씁니다.
잘봤습니다~ 엄청 공감하면서 끝까지 훅 읽었어요…
근데 여기서 언급된 ‘끈’은 보통 끈기보다 연줄… 네트워크의 의미로 쓰이지 않나요?? 뭐 딱히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어찌됐든 말이 되면 되는거지만 보통 그랬던 거 같아서요 ;;;;;;
반드시 말해야 하는… 그리고 말하기 쉽지 않은… 오랫만에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사회부 기자셔서 그런지 사회적 문제, 특히 노동에 대한 문제로 나름 일계의 일을 잘 연계해 주셨네요.
다만 아쉬운건, 재능이 무언가 특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먼저 사전적 의미를 보더라도 재주와 능력을 아울러 말하는 것입니다. 기자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사전적 의미에서 재주에 가깝네요.
타고난 것이 재주라고 하니까요.
능력이라 함은 개개인이 어떤 일이든 어떤 행위든 특정하게 할 수 있는 힘이지요.
재능 기부라 함은 천재적이고 비범함 사람만이 가진 것을 무료로 내 놓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조그만 능력이라도 있으면 보탬을 달라는 것이죠.
노동이라는 것은 대가를 받고 일을 하는 것입니다.
기자님으로 따지면 사회부기자로 취재를 해서 돈을 버는 것이 노동이겠지요.
재능기부는 말 그대로 어떠한 대가를 받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할 수 있는 것을 내어놓겠다는것이지요.
물질적인 기부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가진 능력을 조금 내어놓아 행복을 바라는 것인데, 너무 노동과 결부한 건 아닌지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지나친 패배주의에 빠져서 생각하신 건 아닌지 생각이 듭니다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는 공감하지만, 재능기부가 마치 비범한 사람들만의 전유물인 것처럼 표현되어 안타깝네요.
잉여가 여기서 왜 나오나요
평범함=잉여에요?
댓글쓴 분의 생각이야말로 이 기사가 문제삼고 있는 평범함에 대한 평가절하와 외면의 문제를 그대로 보여주네요.
노동의 숭고한 가치를 일깨우고 평범함에 대한 우리사회의 주소를 각성시키는 부분은 공감됩니다만 평범과 비범이 조화를이룰 수 있는 사회적 지향점이 제시되었다면 좋았다는 아쉬움이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저두 이 기사를 읽고 재능이라는 의미가 많이 왜곡되어 정의되어졌다고 느껴졌습니다. 정리 안되는 저의 머릿속 생각을 잘 정리해주셨네요. 공감합니다.
원래는 ‘꾀’가 ㄲ 시리즈에 들어있죠. 그리고 ‘끈’은 말 그대로 ‘끈’, 즉 인맥-혈연/학연/지연으로의 해석이 더 시류에 맞다는…
허현준 님께 ^ ^
이 글 편집자입니다.
“끈”은 저는 “끈기”라고만 생각했는데, 다른 댓글 논평도 그렇고, “연줄”(네트워크, 인맥)으로 해석하는 게 더 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의견을 반영해 수정 보완했습니다. 보충 논평 고맙습니다. :)
투덜이 님께 ^ ^
이 글 편집자입니다.
“끈”은 저는 “끈기”라고만 생각했는데, 다른 댓글 논평도 그렇고, “연줄”(네트워크, 인맥)으로 해석하는 게 더 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해당 본문(괄호 설명)은 의견을 반영해 수정 보완했습니다.
지적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Good!
글을 계속 보려면 어디로 들어와요? 어떻하다 보인 제목클릭해서 읽었어요
제 아이는 공부에서 거의 반에서 꼴찌를 한답니다. 그래서, 그런데도 이 아이가 행복하게 살 게 할 수 있는 방법이 뭘까 고민하지요. 하지만, 모두가 그 일로 존중받는 세상은, 우리가 지금 들어와 살고 있는 세상에서는 가당키나 하겠나 싶습니다. 누구든 더 존중받고 싶어하니까, 그 욕구로 질서를 조직해 내니까 말입니다. 제 아이가 사람답고 행복하게 살게 하는 것, 정말 어려울 것 같아서…
여기는 슬로우뉴스입니다. :)
https://slownews.kr
오랫만에 글다운 글을 읽은 느낌입니다 고맙습니다
하하낄낄호호~~ 글자는 많은데 생각을 더하게 하는 글이 없더라구요 많이 생각해 보겠습니다
노동인권의 문제를 해결되면 다 좋아질텐데. 개인이 발버둥치지 않아도 되게, 시스템을 바꾸려는 노력을 모두가 함께 하면 좋겠어요. 왜 삶을 애쓰면서 살아야 하나요. 왜 불안해하며 살아야 하나요. 왜 쫒기면서 살아야 하나요. 모든 사람이 차등과 차별로 줄세우는 이 시스템에서 동시에 하차하면 어떨까 싶어요. 설국열차에서 버티는 삶도 정말 지긋지긋합니다. 열차 바깥에서 보는 열차 안의 사람들, 너무 안쓰러워요. 바깥에도 분명 삶이 있는데. 모두가 믿지 못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