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청 ‘시민청’이라는 곳에 처음 가 봤다. 시민청 지하 2층에서 하는 행사에 들르려다 내려가는 계단을 못 찾아 뱅뱅 돌다보니 시민청 전체(전시 중심의 지하 1층과 행사와 모임 중심의 지하 2층)를 살펴보게 됐다. 한마디로 감동했다.

시민청 지하 1층의 전시 공간들
시민청 지하 1층의 전시 공간들: 안내센터, 시민청갤러리, 담벼락미디어, 뜬구름갤러리, 시티갤러리, 소리갤러리, 활짝라운지, 군기시유적전시실 (사진: 시민청)

시민청, 이렇게 근사한 곳이 있었다니!

시민청은 미술관 같으면서 호텔라운지 느낌도 들면서 카페 분위기도 나고 진짜 카페도 있다. 공정무역, 아이디어 상품 판매점도 있고, 정책에 반영할 수 있는 시민들의 아이디어를 적는 공간도 있고 미니 도서관도 있다.

시민청 가게는 구경 가도 “뭐 살 거에요?”라고 묻지 않는다. ‘북유럽 스타일’ 비스무리한 인테리어는 아늑하면서도 생동감 있다. 이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나의 문화 수준이 올라가는 것 같다.

저절로 실체 없이 공허했던 말을 떠올렸다. ‘디자인서울’이 이런 것이었구나! ‘창조경제’가 바로 여기 있었네! 요약한다면 ‘재능 넘치는 시민들의 창조적인 무대’라고 부르는 게 적당할 것 같다.

시민청 지하 2층은 행사장과 공부방, 세미나 실 등을 위주로 구성됐다: 태평홀, 시민플라자, 바스락홀, 동그라미방, 워크숍룸, 이벤트홀 (사진: 시민청)
시민청 지하 2층은 행사장과 공부방, 세미나 실 등을 위주로 구성됐다: 태평홀, 시민플라자, 바스락홀, 동그라미방, 워크숍룸, 이벤트홀 (사진: 시민청)

시민청 = 파격 감싸는 세련 = 박원순의 ‘스타일’ 

시민청은 박원순 시장의 특징을 고스란히 구현한 공간이었다. 그는 일단 세련됐다. ‘참여연대’와 ‘아름다운 재단’으로 대표되는 그의 시민운동 경력은 ‘부르주아적’이라거나 ‘정당을 우회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적어도 ‘성향이 온건하다’는 평에는 전혀 동의할 수 없다.

참여연대가 출범 초기부터 한결같이 내세우는 목표는 정치사법 분야의 개혁과 사회복지의 확대다. 사회복지는 말할 것도 없고, 복지국가청년네트워크 보고서를 보면 젊은 층조차 계층 막론하고 ‘가장 불평등이 심하다고 느끼는 요소’로 사법 불평등을 1순위로 꼽는다.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http://www.peoplepower21.org/Judiciary/515742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소위 민중적 욕구와 일치한다. 정책으로 실현된 활동을 꼽으려면 열 손가락이 모자라고 선거판을 갈아본 적도 있다. 중산층 이슈인 거 같으면서도 체제 바깥의 급진적 의제인 ‘동물권’에 대해서 선구자급으로 고민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건하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어떤 내용이건 간에 새롭고, 근사하고, 품격도 있는 거 같은 만족감을 주는 스타일로 담아내기 때문이다. 졸부도 군부도 심지어 운동권들과도 비교되는 스타일이다.

박원순이 극복해야 할 과제 역시 ‘스타일’ 

흥미로운 점은 박 시장이 극복해야 할 과제도 그 스타일에 있다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박 시장만의 과제가 아니다. 재능, 아이디어, 창의성, 창조를 지향하는 사회가 간과해서 생긴 비참함에 관한 이야기다.

박 시장이 꿈꾸는 세상은 ‘창의성 넘치는 시민들이 자유롭게 아이디어를 내고 참여를 통해 각자의 보람을 찾을 수 있는 사회’인 것 같다. 이런 세상을 만들려면 ‘재능과 끼를 억압하는 획일적 교육’, ‘권위주의적 관료’, ‘출발선에서 뒤쳐진 자의 재능을 묻어버리는 불평등’ 등을 극복해야 한다. 급진적이라고 느껴지지 않지만, 막상 하려고 들면 결코 쉽지 않다.

그리고 이런 것들을 본격적으로 하자고 한 사람은 내 기억에는 김대중 정부 때부터였다.

김대중 이전, 학자 존경 사회와 그림자 

김대중 정부 이전 한국은 학자를 존경하는 사회였다. 뿌리 깊은 유교 전통에 입각해 학생은 예비학자로서, 고시를 통해 배출된 관료는 학자의 연장선상으로 우대했다.

그렇기 때문에 5.16 쿠데타의 주역들도 군인 신분으로 직접 정권을 접수하지 못하고 일단 제대부터 했다. 선비의 나라에서 군인 따위가 어찌 감히 집권한단 말인가. ‘군 출신’ 정부에 학생과 지식인이 반기를 들 때마다 정권은 격렬하게 탄압하면서도 움츠러들었고 시민들은 학인들을 지지했다.

박정희가 표상하는 이미지: 하면 된다, 경제발전 그리고 쿠데타와 독재
“하면 된다”는 박정희였지만, 역시 군복은 일단 벗었다.

4.19의 김주열, 6월항쟁의 박종철, 이한열처럼 역사의 변곡점에서 시민들을 뛰쳐나오게 만든 것은 학생의 죽음이었다. 군부 쿠데타가 발생했던 다른 나라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학생운동과 빠른 민주주의 정착은 바로 이 전통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문치 전통에는 그림자도 있었다.

학자를 우대하는 세상에서 노동 존중과 장인정신은 부족했다. 모두가 학자를 꿈꾸는 세상에서 노동자는 ‘공부 못 해서 되는’ 천한 존재였다. 노동자가 되지 않기 위해 모두가 열심히 공부하는 사회는 민주화 이후 노동계의 요구를 무시하고, ‘노동 없는 민주주의’를 쌓아 올렸다. 언론이 무렵 급작스럽게 권력으로 떠오른 것도, 관료집단의 오만과 부패와 권위주의도 비슷한 맥락에 있었으리라 본다.

IMF와 김대중 당선, ‘신지식인’ 시대

1997년 IMF 외환위기가 터졌다. ’우리가 뭔가 잘못 살아왔다’는 반성 속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됐다.

김대중 정권은 ‘학자의 나라’를 깨 보려고 뭔가 애썼던 것으로 보인다. 그때 학인에 대한 과도한 존경과 획일적 학인지향 사회의 대안으로 떠오른 것은 ‘노동에 대한 존중’이나 ‘장인정신’이 아니라, ‘모험심 넘치는 기업인’이었다. 자장면 배달부와 개그맨을 ‘신지식인’ 1호로 공포한 것(1999년)은 ‘학자의 나라’를 깨려는 첫 시도였다.

 2000년 07월 18일 김대중 대통령은 서울 삼성동 COEX 대서양관에서 열린 신지식 직능인대회에 참석,격려사를 통해 “지식정보화 시대에는 학벌이나 직업보다 맡은 분야에서 창의성을 발휘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직능인들이 혁신의 열의와 창의성을 갖고 신지식인이 되려는 노력을 다할 때 우리나라의 경쟁력도 크게 신장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사진: e-영상역사관)
2000년 07월 18일 김대중 대통령은 서울 삼성동 COEX 대서양관에서 열린 신지식 직능인대회에 참석했다. 김 대통령은 격려사를 통해 “지식정보화 시대에는 학벌이나 직업보다 맡은 분야에서 창의성을 발휘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직능인들이 혁신의 열의와 창의성을 갖고 신지식인이 되려는 노력을 다할 때 우리나라의 경쟁력도 크게 신장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사진: e-영상역사관)

학력이야 어떻든 자신의 영역에서 최선을 다하는 ‘장인’이야말로 신시대의 진정한 지식인(학자의 나라를 깨려고 했으면서도 결국 ‘지식인’이란 말을 붙였어야 했다)이라는 메시지가 어느 정도 있었던 거 같기는 하다. 하지만 대중들에게 와 닿기로 ‘신지식인’이란 대학 안 나와도 각자 하는 일에서 수완을 발휘해 돈을 잘 벌어 성공한 사람이 됐다.

배달 노동자의 기가 막힌 배달 스킬은 노동자의 지위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는 자기계발을 통해 1인 기업인이 되라는 메시지로 전이하고, 심형래 씨로 가면…아아, 디워.

이해찬 세대의 좌절 

‘이해찬식 교육’도 비슷하게 꼬였다. “한 가지만 잘하면 대학 갈 수 있다”가 당시 캐치 프레이즈였다.

이는 ‘대학 굳이 가야하나’는 선택지는 배제하면서, 기존에는 인정받지 못햇던 재능에 ‘학자의 지위’를 부여하는 방식이었다. 그 결과 한 가지 잘해서 대학 간 뒤 그 재능을 살려 벤처재벌로 성장하는 것이 김대중 시대의 성공모델로 부상했다. 그리고 이해찬 세대는 좌절을 몇 년 뒤 첫 좌절을 맛본다.

“한 가지만 잘 하면 대학 잘 간다더니, 수능을 잘 봐야 하잖아! 거짓말이야!”

첫 번째 좌절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한 가지 잘 해서 대학 가 봤자 취직하고자 하니 쓸모가 없었다. 재능을 살리고 네 꿈을 펼쳐라? 초등학교 교실 한 반에서 노래 가장 잘하는 아이가 있다고 치자. 반에서 노래 1등하는 수준으로 이 아이는 노래로 먹고 살 수 없다. 이 반에서 축구 제일 잘 한다고 축구선수 되는 것 아니다.

노래로, 축구선수로, 피겨스케이팅으로, 리듬체조로 뭐든 재능을 살려서 그 분야에서 성공한다는 것은 웬만한 재능과 노력으로 안 되며, 자신이 세계구급 재능이 있을지 불확실한 상태에서 집안까지 말아먹으면서도 베팅해야 하는 도박인 것이었다.

뭐야.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가 틀린 말이 아니었잖아.

"김연아 정도는 아니지만, 안도 미키 정도는 해야...." (리그베타 위키, "이해찬 세대" 중에서)
“김연아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안도 미키 정도는 돼야….” (리그베타 위키, “이해찬 세대” 중에서)

한 가지 재능도 없는 사람은 여전히 절대다수 

가장 근본적 층위의 좌절은 한 가지라도 재능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는 점이다.

어릴 때는 친구들 사이에서 노래 좀 잘 하고, 달리기 잘 하고, 글씨 잘 쓰고, 공부 잘 하고, 이런 것들이 재능인 줄 알았는데 개뿔. ‘재능’이란 남보다 월등히 잘해서 그걸로 충분히 직업인으로서 성공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본다면 이 세상에 재능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적성에 맞다고, 자기가 좋아한다고 그 분야에 재능 있는 것은 아니다. 세상은 넓고, 천재는 널렸다. 세계화가 진행될수록 재능의 조건도 까다로워졌다. 전국구급이 아니라 세계구급 재능이 돼야 산다.

넘버1 황제의 재능은 당연히 인정받고 넘버2도 홍진호쯤 되면 인정받지만, 대부분 연습생으로 떠돌다 승부조작 따위에나 휘말려 불운하게 젊음을 끝내야 하는 것이 재능이라는 영역인 것이다. 그 친구들 다 자기 동네에서는 ‘겜짱’이었고, 자기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일이 게임이었을 텐데.

maryalena, CC BY SA  https://flic.kr/p/axH8Kw
세상은 넓고, 천재는 많다. 평범한 재능은 더는 재능이 아닌 사회. maryalena, CC BY SA

말할 수 없는 ‘평범함’  

이 사실을 냉정하게 말하는 이는 거의 없다. 다들 당신은 잠재력이 있다고, 꿈을 포기하지 말라고 한다. 정말인가?

학교 다닐 때 전교 1~2등 하는 친구도 사범대 갔다가 하도 요새 정교사 안 뽑아서 기간제 교사 전전하는 상황이다. 그 앞에 두고 평범함이 아니라 비범함을 말하며, 비범함은 평범함 속에 있다면서 결국 비범해지라고 말하는 ‘쿵푸팬더’식 메시지만 범람하니 우울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나만 재능 없는, 나만 평범한 그런 사람일거라고. 나는 재능과 꿈을 활짝 펼칠 불확실한 무대보다 1년 뒤, 10년 뒤 내 인생을 설계할 수 있는 안정적 직장과 이웃이면 족하다고. 나는 엄청난 꿈 없다고. 적당히 취직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가족 이뤄 평탄하게 살다가는 것이 솔직히 내 꿈이라고. 획일적 문화까지는 아니더라도 살아가는데 적당한 가이드라인이 있어서 혼란 속에 빠지지 않으면 좋겠다고….

그런 생각은 곧 낡은 것이자 패배의 징표다. 입 밖으로 꺼내서 말할 수 없다.

침묵 표현의 자유
dreamwhile, CC BY NC ND

말할 권리마저 빼앗긴 대다수 패배자 

그런 종류의 우울과 좌절 속에서 대다수를 패배자로 만들어버리면서도 불평조차 할 수 없게 만들어버린 것. 그것이 바로 의도와 달리 전개된 ‘신지식인’과 ‘이해찬식 교육’의 결과였다.

‘한 가지만 잘 해도 대학가는 사회’가 아닌 ‘대학 안 가도 모두가 대우받는 사회’, 한류스타가 아니라 동네 레스토랑에서 피아노 치며 먹고 살아도 그럭저럭 만족감 속에서 삶을 보장받는 사회를 지향하지 못해 비참함이 벌어졌다. 결국, ‘학자의 나라’가 외면했던 ‘노동’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던 대가다.

신지식인 사회는 노동 문제 없이 ‘꿈, 끼, 깡, 끈, 꼴’의 비범함(끈=연줄 혹은 끈기, 꼴=외모)을 강조하며 내달리다 ‘재능 없는 자 먹지도 말라’는 사회가 됐다. 그런 흐름 속에서도 유례없이 성공했지만, (구지식인으로서도 충분히 지식인인) 박원순 시장의 과제도 아마 여기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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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있는 민주주의: 노동은 ‘집합적’이다 

노동 있는 민주주의를 만들려면 노동의 핵심적 성격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노동은 ‘집합적’이다. 개성보다 체계와 협력이 필요하고, 비범함이 아니라 평범함이 빛난다. 그러니까 이 노동문제의 복권은 여태까지 말해왔던 ‘네 꿈을 펼쳐라!’ 대신 ‘음, 저는 엄청난 꿈 따위 없는데요.’라고 말하는 게 인간의 당연한 모습이며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말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 전제에서 사회, 교육, 복지 정책을 다시 짜야 하는 일, 그게 노동 있는 민주주의를 위한 출발점이다.

Artotem, CC BY https://flic.kr/p/6HgsVs
Artotem, CC BY

시민청의 ‘재능 비범 창의’가 슬펐던 이유 

시민청 곳곳에 녹아 있는 시민들의 재능과 아이디어, 창의성, 비범함 속에 왠지 슬퍼졌다.

재능과 창의가 엄청 거창한 것이 아니라 일상 속 아주 작은 차이 같은 것이라고 인정될 수 있다 하더라도, 재능이 삶의 당연조건이 되는 사회에서는 사람들을 옭아맨다. 재능기부란 말이 재능 있는 이들을 착취하는 동시에 기부할 재능이 없는 사람을 소외시키는 것처럼.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이 쓴 책 중에 [저항과 반역 그리고 재즈](원제: Uncommon People: Resistance, Rebellion and Jazz)란 책이 있다. 제목은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이라 해놓고, 그 내용은 당대를 살았던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다뤘다. 이 책의 한 챕터 ‘빅토리아 시대의 가치’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에릭 홉스봄, [Uncommon People: Resistance, Rebellion and Jazz](1998)과 한국어 번역본
에릭 홉스봄, [Uncommon People: Resistance, Rebellion and Jazz](1998)과 한국어 번역본 [저항과 반역 그리고 재즈](2003)

“장인들은 더 이상 자신과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을 재생산하지 않는다. 1930~40년대에 장인적 경험과 가치를 갖고 자란 세대가 여전히 남아 있지만, 그들도 점차 나이가 들어가고 있다.

증기기관차를 운전하고 관리한 마지막 세대가 은퇴하게 될 때 –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 그리고 기관사들이 전차 운전사들과 별 차이가 없어지고 언젠가 완전히 불필요해질 때,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까?

시장 가격과 화폐로 그 가치를 매길 수 없는 힘들지만 유익하고 사회적으로 유용한 육체노동에 대한 존엄성과 자긍심을 지닌 수많은 사람들이 없어진다면 우리 사회는 어떻게 될까?

지금과는 다르지만 더 좋은 사회가 될 수 있을까? 시험을 치르는 데는 신통치 않은 사람들에게 손과 눈, 그리고 두뇌를 쓰는 기술이 제공하는 자긍심에 이르는 길이 없어진다면 그 나라는 어떻게 될 것인가?”

스마트폰과 사물인터넷과 드론과 3D프린터의 시대, 시험을 치르는 데 신통치 않은, 하지만 노동이란 형태로 존엄과 자긍심을 지닌 수많은 사람들의 설자리는 ‘재능’과 ‘창의’와 ‘비범함’으로 대체돼야 하는가.

누구도 이 독한 진실에 대해 말한 적이 없다. 누가 해결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지도자로 나서는 사람들은 대체로 너무 비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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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x type=”note”] 이 글은 미친 세상에 관한 증언: “요즘 기자들은 직장인이야”라는 당신에게로 이어집니다. (편집자) [/b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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