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x type=”note”]어제(3월 8일)는 세계 여성의 날었습니다. 여성들은 유사 이래로 지구 인구의 절반을 구성해 왔지만, 안타깝게도 과거로부터 공고히 전해져 내려오던 성 차별의 장막에 가려 대부분이 조명받지 못했으며, 끊임없이 타자화되고 대상화되어 왔습니다. 이러한 차별을 이겨내고 인류에 공헌한 위대한 여성들의 삶이 최근 많이 주목받고 있죠. 2016년 개봉했던 영화 [히든 피겨스]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그리 대단하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조금은 특별한 한 여성의 이야기를 다루고자 합니다. 무려 20년 동안이나 노력한 끝에 세계 최초로 우주에서의 과학 수업이라는 꿈을 이룬 여성, 바바라 모건(Barbara Morgan, 1951~)의 이야기입니다. (필자)[/box]
1984년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정권은 자국의 우주 개발에 한 획을 그을 ‘티처 인 스페이스 프로젝트(Teacher in Space Project; ‘TISP’)’를 계획한다.
이 프로젝트는 미국 전역의 교사들 중 한 명을 선발하여 우주로 내보낸 뒤, 그 곳에서 원격으로 수업을 진행하고 이를 미국 전역에 생중계한다는 아주 야심찬 프로젝트였다. 이 프로젝트의 목적은 미국의 국력을 과시함과 동시에, 미국의 청소년들에게 과학과 우주 탐사에 대한 꿈을 심어 주는 것이었다. 물론 당시 기술의 한계로 인해 수업은 고작 30분 남짓에 불과할 전망이었지만, 세계 최초의 ‘우주 수업’ 이라는 의미만으로도 충분했다.
당시 이를 위해 NASA는 지원자들 중 한 명을 ‘Payload Specialist (비NASA 우주인)’ 로 선발하기로 결정했고, 곧 미국 전역에서 이 기회를 잡기 위한 교사들의 지원서가 쇄도했다. 당시 NASA의 기록에 따르면 문의가 무려 4만 건에 이르렀으며, 실제로 완성된 지원서만 1만 1천 부가량이 도착했다. 치열한 선발 과정을 뚫고 세계 최초의 우주 교사로 선발된 사람은 바로 뉴햄프셔 주 콩코드 고등학교의 사회 교사 크리스타 매콜리프(Sharon Christa McAuliffe)였다. 크리스타는 곧 자신과 함께 우주로 나갈 6명의 우주인들과 함께 맹훈련에 돌입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매콜리프의 우주 수업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다들 알고 계시듯이 ‘챌린저 호 참사’로 알려진 사고로 인해 그녀와 함께 우주로 떠났던 6명의 우주 비행사들은 모두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챌린저 호는 발사 후 73초만에 공중에서 폭발하여 산산히 분해되었는데, 후일 리처드 파인만이 이끄는 진상조사팀이 밝혀낸 결과, 챌린저 호 폭발의 원인은 로켓 부스터의 이음매를 연결하는 ‘O-Ring’이 추위로 인해 경화되면서 제대로 된 차폐 역할을 하지 못했던 것으로 공표되었다.
이후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챌린저 호의 발사 실패에 대해 참담한 심정을 금치 못하면서도 ‘티처 인 스페이스 프로젝트’는 계속될 것이라 밝혔으나, NASA는 결국 1990년 해당 프로젝트를 중단했으며, 또한 우주 왕복선 프로그램도 상당히 오랜 기간 중단되어야만 했다. 한편 챌린저 호의 발사 당시 발사부터 폭발까지 모든 과정을 지상에서 지켜보고 있었던 사람이 한 명 있었으니, 그가 바로 ‘티처 인 스페이스 프로젝트’에서 2위를 차지했으며 매콜리프의 백업 역할을 맡았던 바바라 모건이었다.
바바라 모건은 크리스타 매콜리프와 마찬가지로 TISP에 지원했던 여성이었다. 그녀는 미국 아이다호 주 맥콜(McCall, 우리가 생각하는 그 맥콜과 다르다)에 있는 맥콜-도널리 초등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는 아쉽게도 최종 심사에서 2위로 낙방했지만, 매콜리프와 함께 동일한 훈련을 받을 기회는 얻을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예전에 고산 선배님과 이소연 박사님이 동시에 러시아에서 같은 훈련을 받았던 것과 같은 이치다. 긴급 상황이 발생할 때에는 예비로 투입될 인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당시 NASA가 우주에서 시연할 과학 수업의 컨텐츠는 우주 공간에서의 크로마토그래피(혼합물을 분리하는 실험 기법의 일종), 우주 공간에서의 작물 수경 재배 시연 및 우주 공간에서의 자성, 간단한 뉴턴 법칙의 실험 등이었다. 그리고 운명의 1986년 1월 28일, 챌린저 호는 매콜리프를 싣고 하늘로 솟아올랐으나, 결국 폭발 참사로 인해 그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고 말았다. 게다가 얄궂게도 매콜리프가 떠나는 모습을 지상에서 지켜보고 있던 모건은 챌린저 호가 폭발하는 장면까지 모두 지켜보아야만 했다.
참사 이후 모건은 자신이 일하던 학교로 되돌아 갔지만, 꾸준히 NASA와의 협업을 진행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TISP는 다시 진행되지 않았다. 당장 90년대 초 소련이 해체되면서 미국은 더 이상 체제 경쟁을 할 필요가 없어졌고, 때문에 체제 경쟁의 첨병이었던 NASA 역시 예산이 감소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클린턴 정권이 들어서고 미국의 경제가 사상 최고의 호황기에 접어들자 다시 기회가 찾아왔다. 1998년 NASA가 TISP를 부활시킨 것이다.
게다가 단순한 승객(Passenger) 역할이었던 1986년의 비NASA 우주인과는 달리, NASA 는 모건을 ‘미션 스페셜리스트(Mission Specialist)’, 즉 NASA의 정식 우주비행사로 다시 선발했다. 모건은 1998년 NASA에 정식으로 참여하여 2002년까지 약 4년 간 우주 비행을 위한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그녀의 첫 우주 비행은 2004년이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모건이 탑승할 우주 왕복선이었던 컬럼비아 호가 2003년 지구로 귀환 도중 공중 분해되면서 또 다시 승무원 7명의 목숨과 함께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 버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1986년부터 2004년까지, 그녀는 무려 18년이라는 기간 동안 ‘우주에서의 수업’ 이라는 꿈을 이루지 못했다. 또한 과거 함께 훈련을 받으며 사이좋은 동료가 되었던 매콜리프의 이루지 못한 꿈 역시 이루지 못했다. NASA에서는 2003년 컬럼비아 호 사고 이후에도 계속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했고, TISP의 후신 ‘교육 우주인 프로젝트'(Educator Astronaut Project; EAP) 를 기획하여 새로운 사람을 선발해 우주로 보냈다. 1986년 챌린저 호의 실패 후 민간인을 우주선에 태워 보내는 것에 정치적인 부담감을 느꼈던 NASA는 이후 전문가 그룹의 선발에 더욱 치중했다.
그러나 결국 2007년, 모건은 첫 우주 비행의 꿈을 품고 발걸음을 내딛은 지 21년 만에 우주왕복선 ‘엔데버’ 호를 타고 STS-118 임무에 참가할 수 있게 되었다. 1986년 매콜리프와 영원히 이별한 지도 강산이 두 번이 바뀔 시간이 지나고 난 후였다. 엔데버 호는 국제 우주정거장 ISS 와 도킹하는 것을 목표로 2007년 8월 8일 우주 공간을 향해 성공적으로 날아올랐다. 1951년생이었던 바바라 모건의 나이는 벌써 환갑에 다가갈 시점이었다. 그리고 모건은 마침내 21년 만에 ‘세계 최초의 우주 수업’ 을 진행하는 데 성공했으며 미국 각지의 학생들과 약 25분 간 간단한 질의 응답을 갖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지구로 돌아오기 이틀 전 (즉 임무 12일차), 모건은 우주 비행사들이 하루씩 돌아가며 신청곡을 재생하는 관례에 따라 38 Special 의 “Teacher, Teacher”를 재생했다.
‘세계 최초로 우주에 나간 선생님’이 21년 만에 그 임무를 마무리하는 순간이었다. 귀환 이후 바바라 모건은 EAP에 선발된 후배들에게 STS-118 이후의 임무를 넘겨주고 NASA에서 은퇴했다. 그리고 2008년 4월에는 모건이 오랫동안 학생들을 가르쳤던 아이다호 주 맥콜에 ‘바바라 R. 모건 초등학교’ 가 개교했다.
세계사에 명멸했던, 성 차별을 뚫고 역사에 이름을 남긴 수많은 위대한 여성들의 삶에 비한다면 아이다호 주 작은 시골 마을의 수학 교사였던 바바라 모건의 삶은 어쩌면 그리 특이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모두의 삶은 보통 극적인 성공도 처참한 실패도 그렇게 자주 반복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영화의 주인공 같은 삶을 살았던 여성들보다, 그리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함 속에서 다양한 종류의 위기와 세상의 변화에 굴하지 않고 목표한 바를 이뤄낸 여성의 삶을 조명하고 싶었다. 결국, 세상을 바꾸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