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공유하기

[정호재의 아시안 퍼스펙티브] 가깝도고 먼 ‘동남아시아’를 통해 한국을 바라보고 아시아 시대를 꿈꿉니다.

한겨레


지금은 한국의 언론사에 규모의 차이만 남았지만, 1990년대 대학을 다닌 사람들에게 ‘한겨레’는 더 특별했고, 한겨레에 관한 애정과 심적 부채감이 상당했다. 그러니까 창간 직후 ‘한겨레 신문’이라는 건, 일종의 민주주의 운동 혹은 언론 운동의 개념이었고, 그것을 인지한 대학생들은 없는 쌈짓돈을 털어서, 적어도 학회실에서라도 한겨레를 구독해 주려고 노력했다.

정치와 별 인연이 없던 문재인 전 수석이 2013년 대통령 후보가 된 배경도 한겨레와 연관이 있다. 1988년, 고작 30대 중반의 부산 변호사가, 자신의 2천만 원 청약통장을 깨서 한겨레 발기인이자 부산 대표가 됐다는 점이 상당히 깊은 인상을 전파한 것이다. 1988년 은마아파트 31평이 7500만 원. 문재인의 배포가 엄청났다고 볼 수 있고,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그렇게 적극적으로 표출했다는 점에서, 신뢰감이 크게 상승했던 것이다.

그리고 딴 게 아니라, 이번 주말 정문태 기자의 [국경일기] (2021)라는 책을 읽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며 2000년 가장 빛났던 지면을 선보였던 전선기자 정문태 선생을, 간만에 다시 떠올린 것이다. 그는 [한겨레 21]이 함께한 [아시아 네트워크]라는 프로젝트의 간판 필진이었고, 내 기억에는 2000년대 초 가장 인상적인 한겨레의 야심찬 기획이자, 한국 언론사의 위대한 성취 중 하나로 남아 있다.

한겨레 연재를 책으로 묶어냈다.

치앙마이


‘종군기자’라는 말을 거부하고 ‘전선기자’ 혹은 ‘국경전문기자’로 자신을 표현하는 정문태 선생은, 치앙마이를 중심으로 미얀마(버마), 태국, 라오스, 중국 등 인도차이나 지역을 주로 취재하는 전문기자다. 그는 1990년대초 태국의 방콕과 치앙마이를 베이스 삼아, 이른바 국제 기사의 현장 보도론을 역설한 한국인 기자로, 특히 2000년대 초중반 [한겨레 21] 지면을 통해 한국인의 지리적 국제정치적 인식을 아시아 전역으로 크게 넓히는데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내 소셜미디어 친구들 가운데 이번 주 치앙마이에서 따뜻한 겨울을 보내는 분들이 많아, 나 역시도 간만에 치앙마이를 몇 번인가 떠올렸다. 아, 나도 가도 싶다! 지금이야 치앙마이는 태국의 가장 빛나는 관광지이며 은퇴 이민자들이 몰리는 편안한 휴양지지만, 1990년대까지만해도 여전히 전쟁의 상흔이 공존하는 복잡한 국경 마을이었다. 1980년대 악명 높은 ‘골든 트라이앵글’에서 머지 않았고, 미얀마에서 밀려온 샨족, 카렌족 반군들 세력도 다수 있었다. 게다가 캄보디아와 라오스에서의 전쟁이 끝난 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치앙마이는 방콕에서 10시간 정도 떨어진 머나먼 내륙 지역이다. 치앙마이를 중심으로, 라오스 저 깊숙한 메콩강 상류 지역은 한국과의 직접적인 역사 관계가 전혀 없는 동네다. 이곳에서 벌어진 제2차 세계대전, 베트남 전쟁, 그리고 소수 민족의 전쟁은 너무나도 복잡해서 한국인의 의식 세계 속에 자리하기 쉽지 않다. 누가 적이고 동료인지 구분이 힘들기 때문이다. 그런 복잡미묘하고 마이너한 동네에서, ‘현장이 곧 역사다’라는 거대한 주제 의식으로 30년 넘게 뛰어다닌 저널리스트가 바로 ‘정문태 선생’인 것이다.

외로운 선각자


2021년에 출간된 [국경일기]는 2017년 말부터 2020년 초까지 저자가 가장 최근에 치앙마이 일대 국경을 다시 순례하며 현장에서 느끼고 만난 인물과 지리와 소수민족 정치에 대해서 일기처럼 써내려간 글 모음집이다. 2년 전 첫 출간 때부터 읽고 싶었는데, 당시에도 쉽게 도전하지 못했다.

동남아 관련 저술이 독해가 어려운 이유는 ‘지명’과 ‘인명’의 낯섦이 절대적이다. 예를 들어 ‘뉴욕의 맨해튼’에 대해서 누가 서술하면 누구라도 기존에 쌓인 스키마가 적지 않기 때문에, 또 서울이라는 대도시의 삶에 비추어 대략은 이해할 수 있다. 중국의 오지에 관해 설명할 때도, 누군가 ‘여긴 과거 촉나라의 땅이다’라고만 언급해도 간단하게 삼국지 스토리가 펼쳐지며 이해를 가속화 시킨다. 그런데 치앙마이 같은 땅은 갑자기 ‘매솟’, ‘매홍손’, ‘반나부아’ ‘와삿 싯티켓’, ‘똥땀 낫쭘농’, ‘TNLA’, ‘KIA’, ‘MNDAA’ 등 낯선 고유명사부터가 읽는 사람을 두렵게 만드는 것이다.

미얀마 민족민주동맹군(MNDAA, Myanmar National Democratic Alliance Army) 2023.11.

지명과 인명도 낯선데, 거기서 펼쳐진 이념 전쟁과, 민족 분쟁, 국경 분쟁, 그리고 외세들의 개입은 더 난해하고 도대체 어느 대목에서 분노하고 감동해야 할지 까다롭다. 나는 치앙마이를 세 번 정도 다녀오고 미얀마 역사를 꽤 진지하게 공부했음에도 그렇다. 참으로 진지한 여러 독자와 이를 평가할 만한 후배를 갖지 못하는 비운의 포지션에 정문태 선생이 서 계시다는 얘기다.

프리랜서 & 인스티튜션


정문태 기자가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책 중에 중요한 책이 꽤 많다. 그는 30년이 넘게 현장에서 수많은 인도차이나 정치인과 소수민족 지도자, 그리고 서구의 저널리스트들을 직접 만나고 이를 기록으로 남겨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같은 ‘정문태 선생’이 쌓은 자료와 노력이 일부 책으로 기록이 되기는 하였지만, 사실 내가 바라볼 때도 한국에서 제대로 된 가치를 인정받는다고 하기 어렵다.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그가 바로 프리랜서 기자’에 가깝기 때문이다. 제도권 미디어에 속하지 않고, 즉, 직접적인 선배나 후배 기자가 없기 때문에 그의 업적이 제대로 평가되지 못하고, 또한 지식이 대물림 되지 못한 것이다.

독자나 관전자 입장에선 ‘한겨레’라는 미디어에서 그를 조금 더 중하게 대우해 줬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2000년대 [한겨레 21]의 가치를 키운 건, 당연히 소속 정규직 기자들의 공도 있겠지만, 내가 보기엔 [아시아 네트워크]에 기여한 수많은 외부 필진의 공도 엄청나게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끔 칼럼을 쓰는 정도로 그친 것을 보니, 역시 제도권 ‘인스티튜션’의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이는 지나치게 크다는 것을 절감한다

도서출판 원더박스.

국경일기


물론 혹자는 이렇게 반박할 수도 있다. ‘아니, 인도차이나 촌구석, 국경 마을에서 벌어진 갈등과 분쟁이 도대체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중동 전쟁은 대한민국 석유 수급과 관련이라도 있는 데 말이다’ 일견 틀린 말은 아니다. 일국적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말이다.

하지만 세상은 넓지만 의외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사실은 거의 같은 이유와 배경으로 작동 방식이 닮아 있다. 우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어 보이는 동남아 촌구석의 민족과 국경 갈등이라는 게,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의 운명이 한민족과 다르지 않고, 그들이 처한 현실이 미국-중국-인도 등 강대국들의 전략과 오판에 의해 큰 영향을 받아온 상황이며, 거시적으로 보면 한반도의 역사와 동남아시아의 현대사가 긴밀하게 연결돼 작동한다는 것이, 바로 정문태 기자의 현장 취재의 결론에 해당된다.

그래서 조금은 복잡해 보이고, 낯설지만, 애정을 갖고 보면 ‘아시아의 역사’라는 게 독립과 자치, 그리고 인간 해방을 위한 치열한 투쟁의 삶이었고, 그 과정을 이해해야만 우리는 삶의 의미와 연대의 진정한 뜻, 그리고 아시아의 미래에 대해서 논할 수 있다는 게, 전선기자의 고찰 결과인 것이다.

전관예우


나는 정문태 기자를 직접 만나 본 적이 없다. 그의 취재 내용은 주로 책의 서문이나 잡지 기사 정도에만 있을 뿐이고, 요즘 유행하는 유튜브에도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이메일을 ‘기사’에 공개하는 일도 거의 하지 않는다. 몇 번인가 이메일을 보내보려다가 포기한 적이 있다.

간만에 선생의 책을 다시 읽다가 ‘전관예우’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도 이제는 예순 살 중반을 훌쩍 넘겼을 것이다. 우리나라에 ‘전관예우’가 필요하다면, 이처럼 현장에서 치열하게 부닥치며 한국인의 인식의 차원을 넓힌 인물에게 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런데 그런 전관예우라는 건, 꼭 불필요한 사람들이 독식하고 만다. 대법관이나 법원장 검사장을 하신 분들은, 그렇지 않아도 국가가 주는 엄청난 연금이 나오는데, 이분들을 모셔다가 ‘로비스트’로 쓰는 로펌들은 매달 수천만 원, 수억 원씩 추가로 예우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가 배려하지 못하면, 업계 동료나 민간에서 해야 하는데, 그 누구도 ‘전선기자 정문태’의 가치를 몰라주기에, 조금은 아쉽고 서운한 생각이 든다. 정문태 선생의 현장 지식은 한국 사회에 어떻게 장기 보존이 될 수 있을까?

정문태 전선기자. 사진은 오마이뉴스.

관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