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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바에서 온 편지: 버트런드 러셀, 천재의 깃털처럼 무거운 삶

세상에는 정말 타고난 이야기꾼이 있습니다. 같은 얘기라도 들려주는 이에 따라 그 울림은 달라지죠. 널리 알려진 사람과 사건, 그 유명세에 가려 우리가 놓쳤던 그림자,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제네바에서 온 편지’에 담아 봅니다. (편집자)

버트런드 러셀(1872-1970)
출처: 위키커먼스

[서양철학사](1945)로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러셀은 그냥 천재다. 수학, 그리고 인문사회과학 쪽으로는 거의 모든 분야에 팔 걷어 거들었고, 손대는 분야마다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언어분석철학의 태두 비트켄슈타인은 러셀이 그야말로 ‘어둠에서 끄집어낸’ 수제자였다. 그의 출판 목록을 보고 있으면 현기증이 난다. 질투를 넘어선, 경이의 현기증이다.

중국에서 보낸 한철

최근에서야 러셀이 중국에 가서 1년 가까이 머물렀다는 걸 알게 되었다. 1920~21년이라 하니, 1차대전 직후다. 전쟁 동안 열심히 반전운동하는 바람에 감옥살이까지 했으니, 영국에 정나미가 떨어졌던 때다. 그래서 러시아를 갔다는 것까진 알았는데 중국이라니. 게다가 모택동도 러셀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했다. 세기적인 사건이 아닌가. 부랴부랴 찾아봤다. 레이 몽크(Ray Monk)의 러셀 전기를 다시 뒤졌다. 무려 1,500페이지를 넘어가는 두 권짜리다. 색인 중심으로 읽게 되는, 참으로 백과사전 같은 전기다.

정작 내 눈에 들어온 것은 그의 중국 방문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그의 ‘번잡한 삶’이었다. 러셀은 정부 초청으로 중국에 일 년 정도 있었는데, 처음 몇 개월은 여행, 본격적 강의 몇 개월, 그리고 생사를 넘나드는 병치레가 몇 개월이었다. 활동 기간이 짧았을 뿐 아니라, 그 시기 그의 관심사는 격변하는 세계가 아니라 소용돌이 속의 개인사였다. 그의 삶은 그때 깃털처럼 가벼웠고, 그 가벼움을 넘고자 발버둥 치다 보니 삶이 한없이 무거워졌다.

‘혁명적 페미니스트’ 도라를 만나다 

여자 문제였다. 러셀은 24살이 되던 해인 1894년 알리스(Alys)와 결혼했다. 하지만 10년이 채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자전거를 타면서 문득 그녀를 더는 사랑하지 않음을 깨닫는다. 20세기가 막 시작된 때였다. 이 깨달음은 곧 행동으로 이어졌다. 수많은 여성과 이런저런 관계를 가진다. 그러다가, 1920년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 혁명주의적 페미니스트인 도라(Dora)에게서 또 다른 ‘운명적인 사랑’을 발견하고, 그녀와 결혼을 결심한다. 마침 이때 러셀은 중국 초청받은 상태였으니, 두 사람은 자연스레 같이 떠날 계획을 세웠다.

도라 러셀(1894–1986) (출처 미상)

그런데 당시 러셀은 그의 첫 부인 알리스와 법적으로는 여전히 부부였다. 20년 동안 사랑도 만남도 없는, 허울 좋은 부부인 셈이었다. 제도가 문제였다. 당시 영국에는 합의이혼이 없었다. 상대가 중대한 과오를 저질렀다는 것을 충분히 입증해야 이혼 절차에 들어갈 수 있었다. 도라 때문에 마음이 다급해진 러셀은 작전을 꾸민다.

그에게는 러시아 가기 이전까지 같이 했던 콜레트(Colette)이라는 연인이 있었다. 그녀에게 연락해서 런던의 한 호텔에서 불륜을 ‘연출’하자고 제의했다. 물론 그녀는 도라의 존재를 알지 못했기에, 러셀이 드디어 자신과 결혼하려는 것으로 생각하고 흔쾌히 응했다. 알리스의 변호사는 이 모든 것을 보고 기록해 두었다. 혹시 미진하지 않을까 걱정하여 러셀은 다른 호텔에서 불륜을 다시 한번 연출했다. 그녀의 기대는 모멸을 견딜 만큼 컸다.

러셀은 도라와 중국에서 행복했다. 당시 세계를 흔들었던 소비에트 혁명에 대해서 두 사람의 생각은 확연히 달랐으나, 사랑이 곧 ‘아말감'(amalgam)이었다.

그러기를 몇 개월, 러셀은 갑자기 심각한 폐렴 때문에 고생하더니 기어코 죽음의 문밖에 서성이게 된다. 의사들도 포기하는 듯했다. 섣부른 일본 언론은 러셀의 사망 소식을 타전했다. 수 개 월의 사투 끝에 러셀은 살아난다.

‘불륜 연극’ 불사한 두 번째 결혼 그리고 준비된 파국 

죽음과의 전투에서 이긴 그에게는 큰 선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도라의 임신 소식. 러셀이 수십 년 동안 기다려 온 순간이었다. 그는 드디어 수학과 논리와 철학의 형이상학 세계에서 벗어나 세속으로 들어온다. 뛸 듯이 기뻐했다. 아이에게 안정적인 보호막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러셀은 결혼을 더 서둘렀다. 귀국도 서둘렀다.

이혼에 이용당한 콜레트 오닐(출처: 위키커먼스)

이혼에 이용당한 콜레트 오닐 (출처: 위키커먼스)

한편, 러셀의 옛 애인 콜레트는 이 모든 것을 알지 못한 채 러셀의 귀국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알리스와의 이혼 절차가 끝나는 대로 그녀는 러셀과 결혼할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러셀의 귀국과 함께 그녀도 미몽에서 깨어난다. 마지막까지 당신을 사랑했으나 이제는 더 이상 연락하지 않겠노라는 짧은 편지만 남기고 떠났다.

하지만 이제 러셀의 두 번째 부인이 될 도라는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다. 결혼이라는 인습적인 제도에 벗어나서도 여성은 행복하고 당당하게 살 수 있다고 역설해 온 그녀다. 이제 와서 결혼하고 애를 낳아서 여느 여성처럼 산다면 그녀의 말은 어찌 되는 것이고, 그녀를 따르던 젊은 여성들은 또 얼마나 실망할 것인가. 도라는 결국 러셀과 결혼하지만, 바로 그 순간, 파국은 예비되어 있었다. 늘 그랬듯이, 결혼이 러셀의 자유로운 사랑을 막지는 못했다.

첫 번째 결혼과 두 번째 결혼 사이, 그리고 그 직후에 러셀과 염문을 뿌린 여성들
오톨린 로렐 / 비비안 헤이우드(T. S. 엘리엇의 아내) / 콜레트 오닐
 출처: 위키커먼스(왼쪽, 가운데), © National Portrait Gallery, London(오론쪽)

모택동 “이론은 그럴듯한데 현실성이 없어”

짧은 중국 기행이었지만, 러셀은 중국에 관한 수많은 글을 써냈다. 중국에 대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그가 본 중국은 “힘보다는 대화로 분쟁을 해결하려는, 평화로운 은자(隱者)”였다. 그는 1970년까지 장수하며 살았으니 힘과 폭력이 난무하는 중국을 보았을 터다. 그러면서 그의 생각도 바뀌어 갔을 것이다.

1920년에 그가 본 것은 중국일까, 아니면 그의 엉킨 삶 속에 투영된 중국이었을까? 그는 새로운 사랑을 위해 도피하고 은둔했고, 거기서 사랑의 평화를 찾으려 했다. 중국의 평화가 짧았듯이, 그의 사랑도 짧았다. 그 이후로도 두 번의 결혼을 더 했고, 마지막 결혼을 했을 때 그의 나이가 70살이었다.

1961년, 그의 나이 89살에 반핵시위로 체포되어 벌금형을 받았는데도 단호히 거부하여 기어코 감옥생활을 일주일 한다. 그 이후는 자서전을 쓰며 인생을 정리했다. 마지막 결혼은 행복했다고 한다. 더 이상의 새로운 사랑은 없었다. 그의 얘기다.

모택동은 1920년에 러셀의 정치철학 강의를 듣고, 이에 대한 평을 남겼다.

“이론적으로는 그럴듯한데, 전혀 현실성이 없네.”

하기야, 러셀의 오류를 온몸으로 입증한 이가 모택동 아닌가. 나는 그의 삶에 대해 평을 남긴다. “그의 깃털처럼 무거운 삶은 이론적으로 가능할진대, 전혀 현실성이 없네, 내게는…” 그리고, 나도 온몸으로 한번 입증해 볼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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