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공유하기

2003년 여름이었던 것 같다. 여름 방학 때 할만한 알바를 찾으려 아르바이트 구인 구직 사이트를 뒤지다 꽤 좋은 조건의 공고를 발견했다.

‘여름 영어 캠프 강사 모집’

내용을 살펴보니, 5주 동안 한 대학 캠퍼스 내에서 숙식을 하며 100만 원을 받는 조건이었다. 최저 시급이 2,275원밖에 안 되던 시절이었으니 정말 좋은 조건이었다. 게다가 내가 하는 일은 직접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원어민 강사와 짝을 이뤄 해당 강사와 10명 남짓 학생들 사이에서 담임선생님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 학생은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이때만 해도 고등학생과 나이 차이가 몇 살 나지 않았으니 여고생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를 했던 것이 그리 잘못된 것 같진 않다.

면접을 수월하게 통과하고 대학 캠퍼스로 모였다. 미국, 영국, 호주 출신 원어민 선생님들과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는 나와 비슷한 나이 또래의 보조 선생님들이 캠프가 시작되기 3일 전에 각자 방을 배정받고, 반을 배정받고, 서로 인사를 나눴다.

다시 정리해보면, 20명가량의 원어민 선생님과 여기에 짝을 이루는 20명 정도의 대학생 보조 선생님, 그리고 캠프를 기획하고 운영하는 회사의 직원 4명이 있었다.

그런데 원어민 선생님들로부터 조금은 이해하기 힘든 말이 들려왔다.

“아무런 교육 커리큘럼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는데요?”

이때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어야 했지만, 20대의 젊은 청춘남녀가 폐쇄된 공간에 모여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린 설렜고, 아무도 크게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던 것 같다. 단지 원어민 선생님 그룹엔 40대의 미국 교사 출신이 있어 어렵지 않게 모든 커리큘럼을 이틀 만에 만들었던 기억이 남아 있다.

캠프가 시작되고…

800px-Georgia_Tech_campus
이런 느낌의 교정이였다.
CC: Georgia Institute of Technology

한국의 입시지옥으로부터 해방된 20대 초반 대학생이 모이다 보니 매일 밤 일을 마치고 끓어오르는 청춘을 안주 삼아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새벽 시간이 되곤 했다. 한여름밤 슬리퍼를 끌며 캠퍼스를 산책 삼아 돌아다니다 보면 모기들이 물어뜯은 발을 봤던 기억도 나고. 이때 가장 기억이 나는 건 내가 맡았던 반의 한 학생.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가, 2학년이었던가. 가장 어린 학생들이 모인 반을 맡았다. 어린 친구들이고 부모에게서 떨어져 생활하는 것이 거의 처음이었을 테니 힘든 일이 있어도 잘 이야기 하지 못했던 것 같다. 항상 활발하게 말을 하고 다니던 한 남자아이가 어느 날 아무런 말 없이 조용히 있었다. 한마디도 하지 않고 어딘가 아픈 듯 계속 침묵을 이어갔다.

그래서 낌새가 이상해 원어민 선생님이 수업하는 도중 그 친구만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예상했던 대로 냄새가 났다. 아침 일찍 수업하는 도중 말도 못하고, 참다 참다 바지에 실례를 했던 것이었다. 그것도 아주 큰 실례를. 누구에게도 창피해서 말을 못하고 있었던 걸 내가 운 좋게 알아차렸다.

수업 중이어서 한산했던 건물을 벗어나, 다른 더 한가한 건물로 데려간 후 손수 씻겼다. 우리 인간의 대변에는 독성 물질이 그렇게나 많이 있는 줄 그때 처음 알았다. 이미 이 친구의 허벅지와 엉덩이는 벌겋게 부어있었다. 부모에게 전화하고, 함께 병원에 다녀와서 큰 문제 없다고 금방 붓기는 가라앉는다는 진단을 받고 학생은 다시 수업을 받을 수 있었다. 친구들은 아마 지금까지 그때 일어난 일을 모르겠지.

하얗게 불태웠다...
하얗게 불태웠다…

5주의 여정이 끝나고

이제 이야기의 시작이다. 여기까지 읽느라 수고가 많을 것 같다만, 남녀노소가 좋아하는 ‘똥 이야기’가 나왔으니 그리 지루하진 않았겠지.

캠프가 무사히 끝나고 1주일 안에 100만 원을 받기로 처음 계약을 했었다. 그 1주일이 지나기 하루 전쯤이었나 캠프 주최 측에서 이메일이 왔다. 내용은 대충 이런 식이었다.

‘미안한데, 회사 사정이 생겨서 1주일 후에 꼭 입금해줄게.’

당시엔 참 순진하게도 1주일이 지나면 돈을 줄 것으로 믿었다. 5주 동안 친해진 것도 있었고, 그때는 사람을 잘 믿었으니까. 20년 조금 넘게 살면서 누가 나를 크게 속인 적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같이 일하던 형, 누나들에게 연락이 왔다. 같이 가서 따지자고. 1주일이나 미루는 게 정상은 아니라고 말이다.

난 이 ‘1차 원정대’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순진한 바보였으니깐. 그런데 1주일이 지나자 원정대원들은 돈을 받았으나 참여하지 않은 나는 한 푼도 받지 못했다. 그래서 나와 비슷한 마음을 먹었던 사람들이 모여 구성한 2차 원정대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show me the money

라운드 1

2차 원정대에 참여했으나, 순진하기 짝이 없던 난 한마디도 못한 채, “회사 사정이 힘든데, 그래도 일단 30만 원 정도 입금해주고 다음 주에 잔금 꼭 다 처리해줄게.”라는 사장의 말을 그대로 믿었다. 하지만 같이 갔던 원정대원 중 나이가 좀 있는 한 형님은 캠프 생활을 할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다.

형님: “아니 그래서 도대체 언제 돈을 주겠다는 겁니까?”

사장: “정말 미안하네. 그런데 조금만 기다려주면 안 될까요? 정말 사정이 안 좋아서 그래요.”

형님: “그럼 애초에 학생들한테 받은 돈이 있을 거 아닙니까. 우리 줄 돈은 다른 데 다 써버렸다는 게 말이 됩니까?”

뭐 이런 대화가 계속 오갔다. 체육교육과에 다니던 그 형은 몸도 우락부락, 얼굴도 까무잡잡해서 솔직히 같은 편인 나도 쫄게 만들었다. 일방적인 고성과 사장의 불쌍한 표정이 이어지다, 별다른 결론 없이 2차 원정대는 해산했다.

기억으론 형님의 몸은 이정도였다
기억으론 형님의 몸은 이 정도였다

라운드 2

며칠이 지나고 그 체육학과 형에게 연락을 해보니 본인은 돈을 100만 원 모두 돌려받았다고 했다. 나는? 겨우 20만 원이었다. 즉 아직 난 못 받은 돈이 50만 원이나 있었다. 그래서 3차 원정대 대장직을 자진했다. 아직 못 받은 사람들에게 연락을 돌리고 다시 찾아갈 날을 정했다.

하지만 3차 원정대까지 가니, 평소에 한 성격하는 사람들은 이미 모두 항의를 통해 돈을 받은 상태였고 나같이 순둥이만 남아있었다. 대장을 자청했기에 사장을 대면하고 뭔가 한마디를 해야 했던 상황이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좀 어처구니없는 주장이긴 했지만 그래도 강하게 말했다.

VLUU L100, M100  / Samsung L100, M100
“scream and shout” by Mindaugas Danys

나: “사장님은 지금 장난치는 겁니까? 찾아와서 소리를 지르고, 항의를 한 사람들은 돈을 주고 가만히 있는 사람들은 안주고. 그래서 찾아왔어요. 소리 좀 치고 그러려고요. 그래야 제 돈을 줄 것 같거든요.”

“돈 없다는 헛소리는 이제 그만 하시죠. 우리 줄 돈 없으면 진작 회사 부도내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정말 오늘 우리한테 줄 돈 없으면 같이 손잡고 부도신청 하러 가시죠?”

“아까 보니깐 사장님 차 좋아 보이던데, 그거 일단 팔고 그걸로 우리 돈 주면 되겠네요.”

이 정도의 말을 하고 나니, 이 상황을 지켜보던 그 회사 직원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30대 중반의 건장한 남자였던 것 같다.

직원1: “아무리 그래도 아버지뻘 되는 사람에게 너무 심하게 말하는 것 아닙니까?”

나: “심하긴 뭘 심해요. 그쪽도 월급 못 받으면 우리랑 똑같이 나올걸요? 아… 그쪽은 아직까진 월급 안 밀리나 보죠? 뭐 그럼 일단 그쪽 월급을 우릴 주면 되겠네요.”

음.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이건 건드리면 안 됐던 걸까? 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 직원은 내 멱살을 잡았다.

영화 스카우트 (2007)
영화 스카우트 (2007)

직원1: “이 새끼가 어디라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난 어린 나이에 어디서 본 건 많아서 이렇게 받아쳤다. 나도 물론 반말로.

나: “오호. 여기서 월급 많이 받아서 돈 많은가 보네? 돈 많으면 쳐. 얼른 쳐. 그래야 내 돈도 받고 거기에 좀 더 받아가게. 왜 무섭냐? 치려니깐 돈이 없어?”

진짜 맞을 뻔했다. 하지만 내가 맞으면 돌이킬 수 없게 큰 문제가 되기에, 사장이 중재에 나섰다. 일단 그 돈 많던 남자 직원을 밖으로 내보내고, 나에게 돈을 당장 입금해주기로. 그렇게 나는 돈을 돌려받았다. 물론 이후에도 내 영웅담은 4차, 5차 원정대에게 큰 힘이 되었다는 후문이 들려오곤 했다.

[divide style=”2″]

우리나라 알바생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

이렇게 제 알바 체험기는 끝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얻은 교훈이 있어 꼭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10대 후반, 20대 초반에 처음 사회에 발을 디디며 아르바이트라는 것을 하게 되는데 정말 많은 불이익을 받곤 합니다. 아마 세상에 아직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S 부대찌개 사건’이 있겠죠.

만약 아르바이트하다 이런 불합리한 상황을 맞닥뜨리게 되면 이렇게 해보세요.

1. 연대하라
같이 일하던 친구들과 힘을 모으세요. 저도 혼자 사장을 상대해야 했다면 아마 저렇게 큰소리를 치진 못했을 겁니다. 제 뒤에서 저를 지지해주고 응원해주던, 같이 일했던 친구들이 있었기에 힘을 얻어 싸울 수 있었던 거니까요.

2. 주변에 도움을 청하라
저는 일단 힘을 함께 모을 친구들이 있었지만, 만약 그럴 사람이 없다면 가장 가까운 지인에게 도움을 요청해보세요. 친한 친구나 아니면 부모님에게요. 만약 그것도 힘들다면 알바노조/알바연대나 노동청 등 이럴 때 도움을 주는 여러 사회기관이 있습니다.

이만 마칠게요. 만약 이 글을 읽고, ‘아 나도 그랬는데!’ 라는 분이 있다면 꼭 기고해주세요. 대 환영입니다.

슬로우뉴스에 기고하기

관련 글

첫 댓글

  1. 저 정도는 아니지만 유사한 경험이 있어요.
    이벤트 알바였고, 약 한 달 가량 진행된 행사였습니다.

    이 한달짜리 행사가 종료되고 나서, 저를 고용했던 인력업체에서 다른 행사를 소개해줬죠.
    그런데 입금 예정일이 지나도 돈은 입금되지 않았습니다.(이땐 이 업체가 소개해준, 지방 숙식을 하는 다른 행사를 진행하던 상태..)

    그래서 알바비 입금이 안되었다고 전화했습니다. 그랬더니 일주일 뒤에 보내준다합니다.
    일주일 뒤, 여전히 미입금.

    고등학생때 전단지 알바를 했다가 사장이 차일피일 미루고, 전화도 받지 않다가 나중엔 번호까지 바뀌어버려서 알바비를 떼먹힌 전례가 있어 같이 행사하는 팀장, 알바에게 그쪽은 알바비 들어왔냐고 일부러 물어보고 그랬죠.
    (ex : 그쪽도 미입금 되었다구요? 아~ 이거 노동부에 신고라도 해야겠네.. 같이 하실래요?)

    알고보니 임금 지급을 지연 하는 일은 다소 상습적인 듯 했어요.
    이 업체와 여러번 일한 경험이 있던 알바생이 말하기를, 자신도 알바비를 전부 받지 못했고,
    보통 한 달 가량 이후에 모두 지급이 된다고…

    그럼 왜 가만히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가끔씩 고기를 사준다’ 며… -_-;;
    그러면서 임금체불을 이해해달라 하니 자신은 그냥 참는다 했습니다.

    인력업체는 행사장 내의 알바가 문제를 일으키면 여러가지로 큰 손해라는 걸 알고있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간접적인 메세지를 보냈고,

    결론부터 말하면 결국 근시일 내에 알바비를 모두 지급받았습니다.

댓글이 닫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