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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며칠 동안 주위에서 ‘분서(갱유)’(진시황이 사상통제책으로 농서 등을 제외한 각종 서적을 불태우고, 수백명의 유생을 생매장한 사건)라는 말을 두 번 들었다.

한 번은 HBO Max에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흑인에 대한 차별적 묘사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라인업에서 (일시적으로) 제외했을 때[footnote][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지난 6월 10일 “인종차별적인 묘사”가 문제되어 스트리밍 라인업에서 제외됐다. 이 작품은 ‘역사적 맥락’ 해설을 인트로에 달고 다시 라인업에 복귀할 예정이다. (편집자)[/footnote]그리고 이번에는 ‘협재해수욕장 인어상’의 묘사로 자신의 인식 수준을 드러낸 작가가 해명이라고 올린 글에서다.

[toggle style=”closed” title=”‘협재해수욕장 인어상 ‘찌찌”와 이에 관한 해명글”]

현재 이 글은 원문을 쓴 황현호 님께서 비공개처리한 상태입니다. 다만 공적 토론의 소재가 되었기에 캡처된 사본을 올립니다. (편집자)
현재 위 글(글쓴이: 황현호)은 비공개 상태입니다. 다만 공적 토론의 소재이므로 독자의 객관적인 판단 자료 확보를 위해 캡처된 사본을 올립니다. (편집자)

【’흥건체’ 다시는 분서갱유 당하지 않으리 】

이틀 전, ‘협재해수욕장 인어상 찌찌’라는 글을 올렸다.
나는 그 포스팅에 찌찌, 유방 등을 표현했다. 하지만 이런 말에 불편해 하며 성적 수치심을 느낄 수 있겠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오늘 아침부터 지진이 났다. 그 글에 불편해 하는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어떤 이는 내 글을 여기저기 퍼날라 그 분노를 연료 삼아 나를 비난하고 세상의 웃음거리로 사용했다. 심지어 나를 인신공격까지 하며 지금 내리고 있는 폭우처럼 융단폭격했다. 그들은 폭우가 쏟아질수록 메시지를 비판하더니 점점 ‘메신저’를 비난했다. 그들의 반응은 비판에서 비난으로 홍수가 됐다. 예전에는 이런 반응에 그냥 무심히 돌파했다. 연식이 들어 기운이 달리나? 이젠 ‘회개’하고 ‘죄사함’ 받아 좋는 게 좋은 거라고 퉁 칠려고 하는 데 아무래도 나의 나약함이 맘에 안 드는 건 여전하다.

기본적으로 글쓴이는 표현의 자유와 낭만성을 중요하게 여긴다. 나로 말하면 가치 판단이 서울에서 제주까지 넓게 널브러져 있는 ‘여혐’이라는 표현과 뿜어져나오는 숫컷 해학 ‘골계미’가 시나브로 어지간하기 때문에 쉽게 내릴 판단은 아니다.
타인의 어떤 글에 ‘여혐’이라고 딱지를 마구 붙이면 이 세상에 살아남을 글과 영화 문학 작품이 얼마나 될까.
고전 <안나 카레니나>와 <차털리 부인의 사랑>이 지금 시대부터 앞으로 얼마나 견딜 수 있을 지 궁금하다. 이런 식으로 검열이 심해지면 페북의 다양한 글들이 생기 없이 말라비틀어질 게 뻔하다. 여기저기 눈치 보며 하나마나 한 상투적인 글과 댓글이 차고 넘칠 거다. 이건 마크 저크버크가 원한 현실과 미래가 아니다. 이래서는 건강한 페이스북이 될 수 없고 약동하는 SNS 생태계를 이룰 수 없다.
내가 누군가. 고집 센 ‘황씨’이기 때문에 오래된 먼 친척 황희 정승 찬스를 오늘에 이어받아 일단 나를 비판한 사람들의 뜻을 이해하려고 한다. 다만 비난하는 내용은 사절한다.

좋은 대화가 그렇듯, 좋은 글엔 세 가지 요소가 있다.
정보, 재미(웃음, 유머), 통찰. 이 세 가지를 모두 겸비한 글은 잘 읽힌다. 그 중, 하나만 잘해도 독자는 만족한다.
나는 어떤가. 정보? 공부와 배움이 부실해 그건 아니고,
통찰? 내 깜냥엔 도저히 안되는 분야여서,언감생심. 그럼 재미? 음, 이건 퍽 관심사고 도전하면 될 것 같은 느낌이다. 소설가 성석제, 이기호, 천명관을 좋아하고 이 작가들의 글을 흉내내려고 애를 쓰는 것만 봐도 내가 꽂히는 분야가 재밌는 글을 제조하는 데 있다. 재밌는 글은 말이 쉽지 쓰긴 쉽지 않다. 아니 어렵다. 그런 글은 많은 정보가 있다고 되는 건 아니다. 몇 개 안 되는 얄팍한 정보라도 상상력을 발휘해 이야기로 풀어낼 수 있어야 독자는 그 스토리에 편승해 재밌어 하고 교감한다. 그게 어디 쉽냐고.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내가 재밌는 글을 쓰려고 노력한다.
글 잘 쓰는 사람 많다. 곳곳에 글쟁이 고수가 널려 있다. 하지만 좋은 글이 그렇듯 재밌는 글은 드물다. 그만큼 유머 있는 글을 뽑아내기 어렵다. 재밌는 글을 쓰는 일은 언제나 재밌는 일이다.

페북하는 것은 교류와 소통도 있지만 내 글을 세상에 출고하여 페친들의 평가를 받는 게 즐겁기 때문이다. 간혹, 좋아요와 댓글이 풍년이면 기쁘기도 하고. 중요한 건 글에 유머 코드를 심으려고 경작 중이다. 가끔 애러가 난다. 유머를 발휘하려고 설치느라 해학과 골계미가 쌍태를 부려 글이 천박하고 불편해질 때가 있더라. 가끔 작업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오류다. 이건 역량이 부족하고 능력이 함량미달이다는 증거다. 이걸 최대한 줄이고 없애는 게 목표다. 이게 어디 쉽게 되냐고. 내가 원체 천학비재하니 그 길은 아득할 뿐이다. 어쩌랴, 글 잘 쓰는 재주는 부족하고 열정으로 쥐어짜는 수밖에. 괴테가 그랬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앞으로 나갈 수 있다고. 그거 하나 믿고 오늘도 페북에 글을 올린다.

나의 글쓰기 스타일은, 일명 질펀한 ‘흥건체’다. 오랫동안 이렇게 썼다. 어설프나마 절차탁마 하다보니 나름 ‘흥건체’가 몸에 붙었다. 이런 문체에 딴지를 거는 사람이 있다. 그런 분에게 말한다. ‘문체가 바로 나’라고.
그건 누가 뭐라고 해도 나의 정체성의 문제이기 때문에 버려서도 안 되고 버릴 수도 없다. 만약 나의 흥건한 ‘질펀체’를 버리고 글을 경건하게 쓰라고 하면 나는 당장 탈이 난다. 탈장은 아니고 갑자기 몸에서 사리가 왕창 생겨 ‘사리병’이 날 지도 모른다. 중들이 그렇게 찾는 그 사리 말이다. 스님은 입적하고 불국토에 간다. 이때 노자돈이 사리다. 절에서 스님 다비식 한 후 사리가 안 나오면 참 난처하다. 중이 얼마나 사리 생기는 걸 염원하냐면 목탁 좆나 두들기며 염불 톤을 높인다.
그 무아지경에 들면 방성이 터져 “사리사리 마사리”를 수백 번 부르짖는다. 원래 오리지날 버전은 누구나 아는 “수리수리 마수리”다. 사리는 스님한테 ‘사리’를 잘
판단할 문제고 중요한 아이템이다.

나한테 착한 글, 반듯한 글, 예쁘고 샤방샤방한 글을 주문하면 그때부터 사리가 막 생긴다. 그게 심해지면 ‘사리병’이 걸린다. 평소에 사리 생길 일이 없기 때문에 사리에 관심이 없다. 내가 그만큼 ‘사리판단’을 잘한다. 사리, 사리병? 차라리 상사병이면 몰라도. 아직, 사리 과다로 ‘사리병’으로 이 세상 척지고 싶지 않다.
앞으로 욕을 더 푸지게 먹을 각오하고 장수만세 할 거다.

나를 정조처럼 ‘문체반정’하려고 잡도리 하면 안 된다.
조선시대 18세기 어느날. 박지원이 정조 앞에 불려갔다. 열하, 중국여행기를 다룬 <열하일기>가 ‘킹정조’의 검열에 딱 걸렸다. 꼰대 정조는 박지원한테 훈계조로 “세상이 어지러운 건 너같은 놈의 잡글이 돌아다니기 때문이다. 거기엔 사직과 예법은 간 데 없고 풍기문란과 혹세무민만 판을 치니 백성이 타락하기 안성마춤이다. 이를 엄히 다스리고자 한다”라고 선빵을 날렸다.
안 그래도 종로 바닥은 이 문제로 시국이 어수선했다. 정조는 얼마 전에 글쟁이 이옥의 문서에 분노의 화염을 뿜은터라 시중에서 베스트셀러로 인기 있는 연암의 <열하일기>에 딴지를 걸었다. 이 기록은 비서(?書), <조선의 딴지일기>에 자세히 그 상황을 묘사했다. 비밀인데, 문제는 정조 본인도 <열하일기>를 붓으로 줄쳐가며 무쟈게 잼나게 읽었지롱. 하지만 꼰대 정조는 자기도 잼나게 연암의 책을 읽었음에도 돌변하여 ‘타락한’ 글을 쓰는 지식인들을 단단히 벼렸다. 그는 우선
샘플로 한놈을 패기로 했다. 그 선두주자는 박지원. 그를 이번에 몹시 조지지 않으면 발흥하는 신흥 글쟁이들의 영향력을 마냥 누르기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박지원이 누군가. 흥! 연암도 힘이 세다.
그는 호락호락하지 않다. 바야흐로 조선 후기 명장면. 이래서 조정에선 조선 천재 두 명이 일합을 겨룬다.
서로 썰과 댓글이 왔다가고 협박과 회유가 권커자커니 넘나들면서 이렇다할 결론이 안 났다. 당연하다. 이 같은 지독한 제로섬게임은 도 아니면 모다. 정조가 박지원을
박정희나 전두환, 박근혜처럼 권력으로 얼마든지 마구잡이로 찍어 누를 수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정조는 연암을 함부로 다루지 않았다. 그를 인정하고 대접했다. 조선의 정조가 연암을 내치는 건 조선의 손실이라는 것 쯤은 안다. 책 읽기 좋아하는 정조는 연암의 지성과 의연함을 함부로 훼손하지 않는 지성인이다. 박지원은 권력자 정조의 말을 예의바르게 몇 번 퉁치며 쪼개면서 비스므리하게 개긴듯 받아들인듯 시간을 마냥 끌었다. 애초 연암의 계획은 그 문제를 어물쩡 만수산? 한라산 칙넝쿨처럼 어슬렁저슬렁 구렁이 담 넘어가듯 넘길려고 했다. 연암은 역쉬 짱이다. 그는 다 계획이 있었던 거다. 그 결과 <열하일기>는 분서갱유 당하지 않고 전승돼 오늘날까지 살아남았다. 이래서 시간이 흘러 세계 최고 여행기 중에 하나인 <열하일기>가 고전이 된 연원이다.
정조의 문체반정 VS 연암 패관문학의 금자탑인 열하일기. 이 둘이 겨룬 입합은 조선 후기 드라마틱한 미쟝셴이다. 조선 르네상스 시대의 권력투쟁이자 문화 풍경이었다. 이는 조선의 더하기이자 힘이고 컨텐츠다.

체코 작가 밀란 쿤데라가 말했다.

” 우리 땅을 지옥으로 만드는 건 악마가 아니다.
우리 땅을 천국으로 만들 수 있다는 광신자들이
만드는 것이다.”

해서 이번 사태로 나의 글, 흥건한 ‘질펀체’ 스타일에 딴지를 거는 것에 선을 긋는다.
그들은 사람 몸에 주렁주렁 달린 어떤 부위를 표현하는 데 눈에 거슬린다고 ‘여혐’이라고 항의하는 것은 인정한다. 그것은 표현의 자유다. 하지만 이 논쟁을 일단 덮는 차원에서 이틀 전 글을 내린다. 그 글은 남조선에서 버티기 어려워 저 우주 속, 안드로메다 성운으로 보냈다.

오늘 비오는 아침부터 비판과 비난이 폭우처럼 쏟아져 정신 없이 페북에서 ‘1.4후퇴’했다. 곧 후회가 밀물이 됐다. 상황에 밀려 성찰 없이 함부로 반성한 게 후회다. 그건 내 자존심의 문제다. 서툴렀다. 논란이 된 글을 내린 것과 그 글의 ‘ 질펀체’ 정체성을 다투는 건 위상이 다른 문제다. 나는 이 둘을 한통속으로 처리한 게 애러였다.

경황 없는 오전. 이래서 나의 글에 웃음과 좋아요, 댓글 단 분의 마음은 또 뭐란 말이냐. 다시 말해 나를 너그럽게 대해준 페친을 챙기지 못했다. 다른 한편에서 나를 비판한 그들한테 최소한의 설득조차 생략하고 백기투항 한 게 미안하다. 너무 나갔다. 그건 내 글의 ‘질펀 DNA’를 아예 뽑아내는 일이기에 차마 그건 할 짓이 아니다.
일단 휴전한다.
이럴 때 원효의 ‘화쟁론’을 왜 공부 안 했나고 후회한다. 황희 정승의 그 빛나는 ‘둘다맞다’ 정신을 오늘날에 계승 못한 게 안타깝다. 어찌해야 하나. 답이 없어 답답하다

글을 내렸다.
남조선 50대 ‘한남’의 성인지 감수성이 부족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다시 한다. 나의 부족함과 한계가 한라산 만큼이다. 나의 미욱함이 애월 바다보다 넓다.

지난 번 글이 ‘여혐’이라고 주장하며 마음이 불편했을 분들이 있음을 인지한다.
어느 페친분들이 내 글의 문제점과 불편함을 호소한 것은 정당하다. 그런 사람들의 넛지를 자양분 삼아 좀 더 젠틀한 사람으로 진화하려고 한다.

지금 제주 애월엔 연신 폭우가 쏟아진다. 이 비가 처음엔 나에 대한 ‘비난의 비’로, 지금은 ‘화해하는 것 같은 비’로 바뀌었다.
지난 번 글에 불편했던 분들이 이 폭우에 그 구정물 같은 감정을 씻어내길 빈다.

ㅡ 옴마 니 반 메훔

(황현호, 6월 14일 오전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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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창작된 명작에 “‘여혐’ 딱지를 마구 붙이면” 혹은 지금 세상의 기준으로 판단하면 세상에 살아남을 영화와 문학작품이 어디있겠느냐는 것이 이 분들의 공통적인 주장이다.

  • 먼저, 당신의 인어상 묘사는 명작이 아니다. 이건 분명히 하자.
  • 둘째, ‘바람과 함께..’는 모든 사람들에게 명작이 아니다.

사람들이 좋다면 좋은 거고, 싫다면 싫은 거다. 당신이 그 영화가 그렇게 좋으면 싶으면 유튜브, 아마존 프라임, 구글 플레이, 아이튠즈에서 $3.99에 언제라도 스트리밍으로 볼 수 있고, 사고 싶으면 $14.99라는 저렴한 가격에 사서 저장할 수도 있다. 분서갱유는 그 작품을 서버에서 지워버리고, 제작자를 죽여버리는 게 분서갱유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1939, 빅터 프레밍)는 시대의 걸작으로 오스카 9개 부문을 수상한 작품이지만, '인종차별적인 묘사'가 문제되어 (일시적으로) HBO MAX의 스트리밍 라인업에서 빠졌다. 다만, 역사학자 재클린 스튜어트이 '시대적 맥락'을 해설한 인트로를 첨부해 다시 스트리밍 라인업에 복귀할 예정이다(2020. 6. 15. 보도 기준, 편집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1939, 빅터 프레밍)는 오스카 9개 부문을 수상한 작품이지만, ‘인종차별적인 묘사’가 있다는 이유로 HBO MAX는 지난 6월 10일 이 작품을 (일시적으로) 스트리밍 라인업에서 제외했다. 다만, 재클린 스튜어트영화의 ‘시대적 맥락’을 해설한 인트로를 첨부해 다시 스트리밍 라인업에 복귀할 예정이다(2020. 6. 15. 보도 기준, 편집자).
나는 이 사람들의 호들갑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럼 도대체 선은 어디에다 긋겠느냐, 세상의 좋은 작품이 다 날아가는 거 아니냐”는 주장은 왜 하는 건가. 사람들이 비판한 건 당신의 페북 포스팅이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작품 하나다. 그걸 뭐라고 했다고 세상이 무너지는 것 처럼 한탄을 하는 건, 결국 자기연민과 자의식의 과장이다.

표현의 자유를 이해하는 못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설명을 하면: 당신이 가진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주는 것과 당신의 작품이 욕을 먹지 않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표현의 자유는 ‘까방권'(까임방지권)이 아니다.

  1. 감독에게 표현의 자유가 있으니까 ‘바람과 함께..’가 나왔다.
  2. 관객에게 표현의 자유가 있으니까 사람들이 작품을 비판했다.
  3. 기업에게 표현의 자유가 있으니까 HBO가 라인업에서 (일시적으로) 뺐다.

이 모두가 표현의 자유의 결과다. 당신이 표현하고 싶을 때는 표현의 자유이고, 관객이나 독자가 비판한다고 분서갱유 운운한다면, 표현의 자유를 위협하는 건 바로 당신이다.

시카고대학교 영화과 대학 교수이자 블랙 시네마 하우스 이사로 활동하는 재클린 스튜어트. (출처: Turner Classic Movies) https://www.youtube.com/watch?v=d2DdMaUVHLo&feature=youtu.be
HBO MAX에서 다시 스트리밍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시대적 맥락’을 해설할 재클린 스튜어트는 시카고 대학교 영화과 교수이자 블랙 시네마 하우스 이사다. (출처: Turner Classic Mov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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