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는 여전히 한국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대륙’이다. 그 이미지도 여전히 세렝게티 초원이나 기근, 내전 같은 피상적 이미지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아프리카는 수억 명의 사람이 수십개의 국가 위에서 살아가는 ‘현실의 대륙’이며, 독립 이후에도 구체적인 수많은 지명과 인명, 사건이 얽히며 만들어나가는 이야기로 가득하다.
앞으로 아프리카 현대사를 형성해나간 ‘영걸’들을 위주로 이 지역을 더 가깝게 느껴지게 할 만한 이야기를 소개해보고자 한다.
[divide style=”2″]
아프리카 영걸전
- 서아프리카 삼국지: 프랑스령 삼국의 엇갈린 운명
- 동아프리카 쌍벽: 케냐타와 니에레레
- 콩고의 순교자 루뭄바: 독립에서 암살까지
- 현대 에티오피아의 아버지, ‘군신’ 메넬리크 2세
- 셀라시에, 타락한 계몽군주의 처참한 최후
[divide style=”2″]
콩고민주공화국은 아프리카 지도를 들여다볼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나라 중 하나다. 말 그대로 아프리카의 중심에 놓여 있는 이 거대한 나라는 국토 면적으로는 세계 11위, 아프리카에서는 2위다. 하지만 1위인 알제리의 국토가 대부분 사막인 것에 비하면, 콩고는 막대한 광물 자원과 수자원, 농경지를 보유했으니 그 잠재력은 훨씬 크다고 하겠다. 그래서 얼핏 보면 콩고가 이 지역의 질서를 주도하는 지역 강국이리라 지레짐작 하기 쉽다.
현실은 전혀 다르다. 콩고는 최근 10년 사이에 지속적 성장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1인당 GDP가 겨우 500달러에 불과한 극빈국이다. 즉, 그 이전에는 더욱 처참한 수준이었다. 구리와 코발트를 비롯한 유수의 자원 수출국이지만, 여타 아프리카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그 돈은 어디론가 빠져나가 엘리트층의 지갑만 두둑히 해준다. 동부에서는 참혹한 내전의 상흔이 아직도 남아 있으며 여전히 불안한 상태다.
그밖에도 민족집단과 지역갈등, 불안한 민주주의와 정치적 억압, 에이즈와 말라리아를 비롯한 보건 문제, 열대우림 파괴와 생태학적 위기 등 가능한 모든 안 좋은 조건을 모아놓은 곳이 콩고다. 사실, 콩고의 장점일 것 같은 거대한 국토조차도 걸림돌이다. 바다가 부족하고, 강이 내륙수운에 부적합한 데다가, 육로교통망에 투자가 미진해 콩고의 발전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광대한 국토만큼이나 깊은 질곡의 역사를 갖고 있는 이 나라는 그러면 어떤 길을 걸어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을까? 그 이야기를 당장 다 할 수는 없으니, 여느 국가를 볼 때처럼 독립과 건국 직후의 상황, 그리고 그 상황을 이끈 영걸을 보는 것이 좋은 출발점이 되어줄 것이다. 이번에 알아볼 영걸은 콩고의 독립운동가이자 초대 총리, 그리고 무엇보다 정치적 순교자인 파트리스 루뭄바다.
암흑의 심연
19세기 후반, 유럽 열강의 식민지 쟁탈이 점점 격렬해지고 있는 가운데 한 탐험가가 배를 타고 콩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스탠리, 콩고 ‘통치권을 구입’하다
그의 이름은 헨리 모턴 스탠리로, 과거 나일강을 탐사하겠다고 나선 선배 탐험가 데이비드 리빙스턴이 실종되었을 때 그를 찾아 동아프리카 내륙으로 떠났던 것으로 유명했다. 스탠리는 이 일화로 유럽 전역에서 유명세를 얻고, 아프리카에 거대한 식민지를 만들고자 했던 야심을 지닌 벨기에 국왕 레오폴 2세에 의해 발탁되어 콩고로 떠나게 된다.
그가 콩고에서 맡았던 임무는 간단했다. 대외적으로는 노예 무역을 근절시키고 중앙 아프리카 내륙을 문명 개화시키기 위해서였지만, 실제 임무는 푼돈과 헐값의 유럽 물품 몇 가지를 넘겨준 뒤 콩고 일대 추장들에게 통치권을 받아오는 것이었다. 어이없게도 추장들은 벨기에가 실질적으로 관할하는 국제콩고협회에 통치권을 이양하게 되고, 레오폴 2세는 이를 근거로 유럽 열강에게 콩고에 대한 벨기에의 배타적 독점권을 주장하였다. 거대한 콩고를 한 순간에 빼앗기게 된 영국과 프랑스 등은 처음에는 반발했지만, 유럽 외교가의 천재 비스마르크의 중재 덕에 반발은 무마되었고, 벨기에는 자국 영토의 70배가 넘는 땅을 거머쥐게 되었다.
콩고를 사유화한 벨기에 왕 레오폴 2세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벨기에가 거머쥔 것도 아니었다. 콩고 땅에는 ‘콩고자유국’이라는 국가가 들어섰고, 명목상으로는 벨기에와는 별개의 정부로 움직였다. 즉, 콩고자유국은 국왕 레오폴 2세의 사실상 사유지나 다름 없던 곳이었다. 말도 안 되는 크기의 사유지를 확보한 레오폴 2세는 그 이전까지 내세웠던 인도주의적 명분은 한 순간에 집어치우고, 국명의 ‘자유’라는 말이 무색하게 콩고를 잔학하게 수탈하기 시작했다. 콩고를 수탈하기 위해 레오폴 2세가 선택한 자원은 고무였다. 자전거와 자동차가 확산되며 고무 수요가 늘어났고, 그에 따라 브라질, 말레이시아를 비롯한 열대 지역에서 고무 생산량이 늘어났다. 레오폴 2세도 이런 흐름에 부응해 콩고를 세계적 고무산지로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이는 남북전쟁 이후에 보편화된 식민지 농장 경영 방식, 즉 현지 농민을 소작농으로 만들고 제국의 금융 시스템에 얽어메어 생산을 확보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대신 과거 미국 남부의 농장보다 더욱 잔학한 방식의 노예노동 시스템이 자리잡게 되었다. 식민 당국은 고무 생산지 근처의 원주민들을 야생고무 채취 노동에 강제동원했고, 할당량을 채우지 못했을 때 무지막지한 폭력을 가해서 공포로 주민들을 통제했다.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현지 노동자들의 손을 하나씩 잘라 본보기로 삼았다는 일화들이었다. 그러나 레오폴 2세는 오히려 이런 인정사정 없는 잔혹한 통치 덕분에 자신의 금고를 가득 채울 수 있었다.
벨기에(왕이 아닌 ‘국가’)로 경영권이 넘어간 콩고
상황이 바뀐것은 20세기가 되어서였다. 벨기에의 콩고 통치는 제국주의가 ‘상식’이던 당대의 기준으로도 용납되기 힘든 수준으로 잔학했다. 그리하여 아프리카 문제에 관심 맞는 외국 인사들이 콩고 통치의 현실에 대해 알고자 계속해서 접근했다. 레오폴 2세는 이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무마하면서 자신의 통치를 이어가고자 했으나, 진실을 계속해서 은폐할 수는 없었다. 영국 주도로 콩고의 현황을 알아보기 위한 조사단들이 파견되었고, 그들이 제출한 보고서는 유럽의 여론을 들끓게 하기에 충분했다. 결국 레오폴 2세는 1908년 마지못해 콩고자유국의 통치권을 내려놓았다. 물론 당연히 독립을 시켜준 것은 아니었다. 콩고는 이제 국왕의 사유지가 아니라 벨기에 정부의 통치를 받는 정식 식민지가 된 것이었다.
벨기에 국가가 식민지를 경영하면서 상황은 꽤 호전되었다. 여전히 광산회사는 이익의 대부분을 가져갔고, 근대적 콩고 엘리트층의 출현은 요원했지만, 그래도 레오폴 2세처럼 막무가내와 같이 수탈하지는 않았다. 1908년부터 1958년까지 대략 50년의 기간 동안, 선교사가 이끄는 초등교육이 마을로 확산되었고, 철도가 오가게 되었으며, 농업도 이전보다 더 발전했다. 벨기에는 이런 발전상으로 말미암아 콩고인들이 식민통치에 만족하고 있으며, 그런 이유로 벨기에의 제국도 더 유지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독립의 파도
물론 벨기에인의 희망은 금세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아프리카 각지에 불고 있던 변화의 바람이 콩고를 비껴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벨기에인의 제도적 차별로 콩고인 엘리트가 출현하지는 않았지만, 식민통치 하 경제적 발전은 도시화를 촉발시켰고, 초보적인 민족의식을 일깨웠고, 조직적인 저항 운동을 가능하게 했다.
인접 아프리카 식민지 모두에서 일어나고 있던 이 변화는 1957년 가나가 영국에게서 독립하면서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떠올랐다. 가나에서 일어난 일은 모든 아프리카 지도자들을 자극하여 연쇄적 독립운동에 나서게 했다. 콩고에서 그 변화의 바람을 몰고 온 주인공은 콩고 우편국 직원에 불과했던 30대 초반의 청년 파트리스 루뭄바였다.
우편노동조합에서 기관지 담당 업무를 맡아 정치에 눈을 뜨게 된 루뭄바는 1958년 콩고민족운동이라는 단체를 창립하여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시작하였다. 가나의 아크라까지 방문한 그와 동료들은 ‘독립국 가나’를 보며 ‘독립국 콩고’의 뜻을 더욱 키우게 되었다. 1959년에는 이미 사회적으로 벨기에 식민통치에 대한 반발이 크게 무르익어 실제 행동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수도 레오폴드빌(현재 수도 킨샤사)에서 폭동이 발생한 이후 이 흐름은 파도와 같이 변해 콩고 각지에서 수십 개의 정치단체가 세워졌다. 루뭄바는 이 시기 전국을 돌며 독립을 촉구하는 연설을 하며 콩고인들의 정치 의식을 일깨우려고 노력했다.
루뭄바뿐 아니라 일련의 독립운동을 지도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먼저 레오폴드빌에 근거를 둔 온건파 지도자인 조제프 카사부부(Joseph Kasa-Vubu, 1910~1969, 콩고민주공화국의 초대 대통령)가 있었다. 그는 식민지 경계를 넘어서는 대 콩고를 만드는 목표를 갖고 있었으나 비교적 조용했다.
동남부에는 콩고 제일의 구리 산지인 부유한 지역 카탕가가 있었다. 카탕가의 주요 민족인 룬다족의 지도자 모이스 촘베(Moise Kapenda Tshombe, 1919~1969)는 조금 다른 셈법을 갖고 있었다. 어차피 그는 콩고 전체의 이익보다는 카탕가의 이익이 중요했고, 사실 카탕가의 자치권과 광물 수출 수익이 보장되기만 한다면 통치권 자체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루뭄바는 북동부 스탠리빌(현 키상가니)를 지지기반으로 삼아 전국 정치인으로 발돋움하고자 했다.
점차 폭동이 일상화되고 벨기에의 행정 역량이 마비되기 시작하면서, 1960년 벨기에는 콩고를 독립시켜줄 수밖에 없다고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벨기에는 프랑스가 식민지를 꽉 붙잡겠다고 결정했다가 베트남과 알제리에서 어떤 고초를 겪고 있는지 이미 지켜본 바가 있었다.
물론 벨기에는 콩고처럼 수지 좋은 식민지를 그냥 현지인들에게 넘겨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들은 4년 간의 신탁통치를 골자로 하는 단계적 독립을 제안했다. 그 과정을 통해 벨기에에 우호적인 엘리트층을 많이 잔존시킬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이미 서로 동상이몽을 꾸고 있던 민족지도자들은 단 하나의 의제에서만큼은 기가 막히게 일치했다. 독립 일자는 1960년 6월 30일을 넘겨서는 안 되었다. 그들은 당장의 독립 혹은 권력을 원했다.
벨기에 당국은 그들의 제안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식민지 전쟁을 불사할 각오가 없었기 때문이다. 5월에 선거가 치러졌고, 그들은 그래도 친벨기에 온건파가 선거에서 승리하리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가장 위험한 인물로 판단된 루뭄바가 과반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결국 온건파 카사부부는 대통령을 받게 되었고, 루뭄바가 총리에 오르게 되면서 벨기에 당국 입장에서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벌어지게 되었다.
아프리카를 뒤흔든 연설
카리스마적 인물 루뭄바는 임기 첫날 독립 축하식부터 화려한 이벤트를 보여주면서 대중에게 자신의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축하식에서 벨기에 보두앵 왕의 연설이 시작되었다. 그는 벨기에가 콩고에 남겨준 체제를 섣불리 바꾸지 말 것을 주문하고, 콩고를 벨기에의 땅으로 만들어준 레오폴 2세의 천재적 위업을 칭송했다. 여기에 원래 호의적 답사가 예정되어 있었지만, 루뭄바는 모두가 기대했던 연설 내용과는 정반대되는 연설을 벨기에인에게 들려주게 된다.
“아침이건 밤이건 우리는 우리가 ‘검둥이’라는 이유로 조롱, 모욕, 구타에 시달려왔다. 흑인들은 친근한 친구여서 ‘너’라고 불린 것이 아니라 ‘당신’이라는 공손한 표현이 오직 백인들을 위한 것이었기에 그렇게 불리었다. 그 누가 이를 잊을 것인가? 우리는 표면상으로는 정당하지만, 실제로는 강자의 권리만을 인정한 법률이 우리 땅을 빼앗아간 것을 보았다. 우리는 그 법률이 백인과 흑인을 결코 같이 대우하지 않는다는 것을 잊을 수 없다.
한쪽에는 온화하고 다른 쪽에는 잔인하고 비인간적이다. 우리는 정치적 신념과 종교적 신앙을 이유로 박해당하고, 우리 땅에서 추방당한 그 비참한 고통을 겪어왔다. 우리 중 다수는 죽음보다 더한 비참함에 놓여 있었다. 우리는 도시의 저택이 백인을 위한 것이고, 다 쓰러져 가는 헛간이 흑인을 위한 것임을, 흑인들은 ‘유럽인’들을 위한 영화관, 레스토랑, 상점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것을, 화려한 선실에 있는 백인들 발 아래 선창에서 흑인들이 여행해온 것을 잊지 않는다.
우리 수많은 형제들을 학살했던 사격, 식민 지배자들이 자신들 지배의 도구로 썼던 부정의와 억압과 착취의 체제에 더이상 종속되지 않기를 원했던 그들을 무자비하게 던져버린 감옥들을 누가 감히 잊을 것인가!’
이 연설은 당시 국왕을 비롯한 벨기에 대표단에게는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반식민주의자에게는 고전으로 통하게 되었다. 이처럼 카리스마적인 루뭄바의 연설 능력은 그가 콩고의 총리가 되게 해주는 데 큰 도움이 되었고, 그를 국제적 명사로 만들기까지 했다.
시작부터 무너지다
그러나 늘 문제는 독립 이후에 터지는 법이다. 통치는 연설만으로는 될 수 없었고, 벨기에가 남겨주고 간 콩고의 상황은 신생 독립국과 30대 중반의 지도자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가혹했다. 독립의 열기가 식자마자 문제가 터져나왔다.
먼저 콩고에는 여전히 근대 국가를 운영할 만한 훈련된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이는 벨기에가 그런 인력을 양성하는 데 의도적으로 소홀했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였다. 따라서 독립 이후에도 군을 비롯한 각종 조직에 벨기에 전문가들이 꽤나 포진하고 있었다. 여전히 식민지 주인으로서의 의식을 버리지 못한 벨기에인들은 곧 아래 직급의 콩고인들과 충돌하기 시작했고, 독립 직후 고조된 민족주의 열기가 이를 더욱 자극했다. 벨기에는 독립 이후에도 이런 이유로 돌아가는 상황을 주의 깊게 바라보아야 했다.
두 번째로 더 큰 문제는 콩고가 하나의 국가 단위로 기능하기엔 너무 컸다는 데 있었다. 국토가 큰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닐지 몰라도, 적어도 콩고는 그 국토를 감당할 준비가 안 되어 있던 나라인 것은 확실했다. 콩고 전체를 포괄하는 독립적 정치조직은 이제야 처음 나온 것이었다. 그 아래에는 지난 수백년 간 갈등해온 온갖 부족과 지역 간 알력의 역사가 잠들어 있었다. 이 역사가 독립을 계기로 터져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루뭄바와 레오폴드빌 정부를 위기에 빠트린 것은 동남부 카탕가의 모이스 촘베였다. 앞서 말했듯 그는 자신 지역의 이권을 지키는 것이 중요했기에, 오히려 벨기에와의 협력이 더욱 절실했다. 광산을 운영할 인력과 투자금, 장기적 거래관계 등이 모두 벨기에를 매개로 형성되어 있었다. 7월이 되자 촘베는 카탕가의 독립을 선언하면서 루뭄바에게 정식으로 도전했다. 그때가 되었을 땐 이미 벨기에 전문가들이 달아나 국가 자체가 마비되어 있었다. 독립 콩고의 여정은 시작부터 가시밭길이었다.
루뭄바 자체도 문제였다. 열정만 앞섰지 미숙하고 변덕스러웠던 그는 결정을 내릴 때마다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벨기에는 말할 것도 없고, 신생 독립국의 후원자로 자리매김하려 했던 미국조차도 그를 감당하기 어려워했다. 국내의 지지자들도 점차 그를 떠나고 있었다. 행정 붕괴와 내전의 위기에 맞서 그는 결국 벨기에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며 국제연합의 지원을 요구하게 된다. 하지만 국제연합에도 그는 불가능한 요구를 하기 일쑤였고, 요구를 들어줄 수 없다면 애원하고 격노하는 등 극히 불안정한 모습을 보여줬다. 점점 서방 세계는 루뭄바를 장기적으로 함께 할 수 없는 파트너로 여기고 있었다.
상황은 루뭄바를 계속 기다려주지 않았다. 8월이 되자 다른 지역인 카사이에서 또다시 반란이 일어났다. 국제연합은 내정 문제를 두고 광범위한 군사개입을 할 수 없다는 이유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루뭄바는 마침내 최후의 도박을 시작했다. 미소냉전이 한창이던 1960년, 그는 소련에 손을 내밀었다. 소련이 대규모 군사지원을 해줄 경우 자신의 지도력을 계속해서 확보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이는 광산회사를 중심으로 투자를 벌려놓은 벨기에, 무엇보다 아프리카에서 점차 확산되어 가는 사회주의를 주시하던 미국을 경악시켰다. 만약 중앙아프리카의 이 광대한 국가가 공산화가 될 경우, 인접국 어디든지 소련의 영향권 아래 떨어질 수 있었다. 미국 입장에서 이는 악몽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악몽을 멈추기로 결정했다. 우선 그들은 명목상 권력만 지니고 있던 대통령 카사부부를 움직여 루뭄바를 총리직에서 해임하도록 했다. 9월 5일의 일이었다.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은 카사부부의 결정을 승인할 수 없다며 루뭄바 정권의 정통성을 주장했다. 냉전이 아프리카에서 점차 드리우고 있었다. 이 상황을 돌변시킨 것은 쿠데타를 일으켜 모든 정치 활동을 금지시키고 공산권 인력을 모조리 추방한 신임 참모총장이었다. 그는 훗날의 수십년 간 콩고의 재산을 약탈해 자신의 금고를 채운 악명 높은 지도자 모부투 세세 세코(Mobutu Sese Seko, 1930~1997)로 알려지게 된다.
11월, 쿠데타군이 자신을 옥죄여오는 것을 느낀 루뭄바는 레오폴드빌에서 탈출하여 자신의 지지기반인 북동부 스탠리빌로 가고자 결심했다. 이 시점에서 벨기에와 미국은 루뭄바를 암살하고 문제를 아예 해결해버리고자 공작을 펼치고 있었다. 따라서 탈출 자체는 현명한 판단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신속히 탈출하는 데 실패해 중도에 잡히고 결국 억류되었다. 이 시점에서 그의 운명은 완벽히 결정되었는데, 사실 그 이전부터도 루뭄바는 “콩고에는 순교자가 필요하다”는 말을 자주 읊었다.
붙잡은 루뭄바의 거취를 두고 토론이 벌어졌다. 카사부부, 모부투, 벨기에, 미국 등에서는 루뭄바를 카탕가의 촘베에게 보내는 것이 가장 괜찮은 수가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1월 17일, 루뭄바는 구금되었던 곳에서 풀려나와 비행기에 탑승했다. 비행기 안에서 그는 끔찍한 구타를 당했고, 착륙한 뒤에는 벨기에 장교가 포함된 카탕가군에게 넘겨져 고문을 당했다. 촘베가 포함된 각료들이 그 뒤를 이어 찾아왔고, 수치와 모욕이 이어진 뒤 루뭄바는 그렇게 처형됐다.
몇달 지나 콩고 사태를 조정하기 위해 아프리카로 날아간 유엔 사무총장 다그 함마르셸드마저 비행기 사고로 죽는 석연치 않은 일이 있었다. 벨기에는 그의 처형을 40년이 지난 뒤에야 ‘일부 책임이 있다’는 식으로 얼버무렸다.
루뭄바 이후: 모부투와 카빌라의 등장
하지만 루뭄바 사후에도 콩고는 안정을 찾지 못했다. 루뭄바가 미숙한 정치인이었고, 그가 처형되지 않았더라도 훌륭한 정치인이 되기는 불가능에 가까웠겠지만, 무엇보다 콩고 자체가 너무나 다스리기 어려웠다. 독립 직후 시점에서 이 나라는 광대한 국토, 비참한 식민 역사와 근시안적인 정책, 과도한 외국 영향력에 시달리고 있던 혼란한 국가였다. 자연스럽게 정부가 기능했다면 오히려 그것이 신기한 일일 것임이 틀림 없다.
그렇기에 당연하게도, 루뭄바의 죽음은 그저 시작의 끝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부터 루뭄바의 정치적 기반이었던 스탠리빌에서는 폭동과 반란이 일어났고, 일시적으로 정부까지 들어섰다. 카탕가는 여전히 자신의 이익을 지키고자 분투했다. 콩고인 전문 인력은 아직도 공급되지 않고 있었다.
미국 입장에서는 이를 좌시할 수는 없었다. 거대한 콩고가 갖는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이었다. 어떻게든 이 국가를 반공의 최전선으로서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했다. 나약한 카사부부나 지역적 이익에 휘둘리는 촘베는 그런 의미에서 적격이 아니었고, 그 둘은 이미 반복하기 시작한 터였다.
그런 와중 1965년 조제프 모부투가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미국은 그가 이 중앙아프리카의 대국을 맡을 최적의 지도자라고 판단하여 그를 전폭적으로 지지하기 시작했다. 험난한 독립 콩고 역사의 제2장이 쓰여지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그렇다고 루뭄바가 아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루뭄바는 서방의 지식인과 학생, 공산권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언급되는 신화적 인물로 자리잡았다. 콩고 위기 당시 20대 초반이던 청년인 로랑 데지레 카빌라(Laurent-Desire Kabila, 1939~2001, 사진)도 그런 루뭄바 추종자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동북부 국경지대에서 모부투에 반대하는 게릴라 조직을 결성했고, 중국과 쿠바에서 일어난 혁명을 콩고에서도 재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쿠바의 유명한 혁명가 체 게바라가 콩고에 간 것도 카빌라의 혁명을 지원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곧 카빌라가 루뭄바와 혁명의 간판만 걸었지 실은 밀수와 여색에 더 관심이 많다는 것을 깨닫고 실망하여 돌아가게 된다.
그러나 밀림 구석에 틀어박혀 누구도 신경쓰지 않게 된 이 인물은 30년이 지난 뒤 모부투는 물론이고 전체 콩고와 아프리카 대륙에 다시 거대한 폭풍을 몰고 오게 된다. 마치 루뭄바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