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공유하기

아프리카는 여전히 한국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대륙’이다. 그 이미지도 여전히 세렝게티 초원이나 기근, 내전 같은 피상적 이미지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아프리카는 수억 명의 사람이 수십개의 국가 위에서 살아가는 ‘현실의 대륙’이며, 독립 이후에도 구체적인 수많은 지명과 인명, 사건이 얽히며 만들어나가는 이야기로 가득하다.

앞으로 아프리카 현대사를 형성해나간 ‘영걸’들을 위주로 이 지역을 더 가깝게 느껴지게 할 만한 이야기를 소개해보고자 한다. 먼저 다루어볼 곳은 서아프리카 해안에 위치한 프랑스령 식민지 3개국, 코트디부아르, 세네갈, 기니다.

 

[divide style=”2″]

아프리카 영걸전 

  1. 서아프리카 삼국지: 프랑스령 삼국의 엇갈린 운명
  2. 동아프리카 쌍벽: 케냐타와 니에레레
  3. 콩고의 순교자 루뭄바: 독립에서 암살까지
  4. 현대 에티오피아의 아버지, ‘군신’ 메넬리크 2세
  5. 셀라시에, 타락한 계몽군주의 처참한 최후

[divide style=”2″]

 

18세기 북대서양 유럽의 국가들은 지중해 국가들의 패권을 깨고 세계 각지로 뻗어나가면서 본격적으로 식민지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중 가장 치열한 경쟁을 한 국가는 영국과 프랑스였다. 하지만 프랑스 국가 역량은 영국에 비하면 한계가 많았기에, 인도, 북아메리카, 중동 등 핵심 지역에서 번번히 깨지고는 하였다.

프랑스는 중동 등 '핵심 지역'에서 영국에 매번 밀렸다.
18세기 식민지 건설 경쟁, 프랑스는 인도, 중동, 북아메리카 등 ‘핵심 지역’에서 영국에 매번 밀렸다.

그래서 프랑스는 차선책으로 서아프리카 쪽을 집중적으로 확보하고자 분투했다. 마르세유와 마주보는 알제리와 서아프리카 해안 지역 무역항에서 시작한 프랑스 식민 개발은 곧이어 드넓은 사헬(사하라 사막의 경계)과 사하라로 뻗어나가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내륙은 그다지 실속 있는 곳은 아니었고, 결국 이 지역의 핵심은 지중해와 대서양, 상아탄으로 이어지는 해안지대일 수밖에 없었다.

그중에서도 대서양에서 상아탄으로 뻗어나가는 사하라 이남 지역에서 세 국가가 비교해볼만 한 재미가 있다. 북쪽에서부터 세네갈, 기니, 코트디부아르다. 이 세 국가 모두 내륙은 중세부터 사하라 교역망과 연결되어 있어 이슬람교를 믿고, 해안 지역은 오래된 유럽 식민 권력의 역사로 인해 가톨릭을 믿는다. 그러다보니 해안지대는 자연스레 유럽풍 시가지가 있는 상대적으로 부유한 땅이 되었고, 내륙은 전통 생활이 계속 해서 유지되는 경제적 분기도 이어졌다.

세네갈, 기니, 코트디부아르 (출처: 구글지도, 합성)
세네갈, 기니, 코트디부아르 (출처: 구글지도, 합성)

그런데 비슷한 조건이었던 세네갈, 기니, 코트디부아르의 운명은 제각각 달랐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각국 지도자의 차이를 들여다보면 흥미롭다. 그 지도자의 면면은 다음과 같다.

  • 세네갈 – 레오폴 상고르 (1906~2001)
  • 코트디부아르 – 펠릭스 우푸에부아니 (1905~1993)
  • 기니 – 아흐메드 세쿠 투레 (1922~1984)

먼저 살펴봐야 할 것은 비교적 유사한 배경을 공유하는 레오폴 상고르와 펠릭스 우푸에부아니다.

상고르(세네갈) vs. 우푸에부아니(코트디부아르) 

[dropcap font=”arial” fontsize=”22″]상고르[/dropcap]는 중산층 사업가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선교 학교에 들어갔고, 프랑스로 유학을 가 학문과 문학에 매진한 지식인이었다. 일찌감치 프랑스 생활을 그는 제2차세계대전에도 참전하여 독일군에 포로로 잡힌 적도 있었다. 한편 유럽에서의 생활은 그로 하여금 식민지, 제국, 인종 등의 문제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그는 아프리카의 전통을 재발견하자는 ‘네그리튀드’ 운동을 주창한다.

세네갈의 제1대 대통령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Léopold Sédar Senghor, 1906년 10월 9일 ~ 2001년 12월 20일,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세네갈의 제1대 대통령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Léopold Sédar Senghor, 1906년 10월 9일 ~ 2001년 12월 20일,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dropcap font=”arial” fontsize=”22″]우푸에부아니[/dropcap]는 남부 내륙의 부족장 아들로 태어났다. 역시 선교 학교를 다니며 가톨릭으로 개종한 그는 ‘서아프리카의 파리’라고 불리는 아비장에서 의사로 개업했으며, 농업 문제에 있어서 프랑스 지주와 식민당국에 맞서는 지도자로 명성을 쌓았다.

코트디부아르의 초대 총리·대통령을 역임한 펠릭스 우푸에부아니(Félix Houphouët-Boigny, 1905년 10월 18일 ~ 1993년 12월 7일, 퍼블릭 도메인)
코트디부아르의 초대 총리·대통령을 역임한 펠릭스 우푸에부아니(Félix Houphouët-Boigny, 1905년 10월 18일 ~ 1993년 12월 7일, 퍼블릭 도메인)

프랑스 선교학교라는 배경을 공유하나 정치 역정은 꽤 달랐던 상고르와 우푸에부아니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모두 파리 중앙 정가에 들어서게 된다. 이 무렵 서아프리카 식민지를 프랑스 본국의 일환으로 재편하고자 했던 프랑스는 이 지역에서도 파리 국회의원 선거 투표권을 주었고, 세네갈과 코트디부아르에서 뽑힌 의원이 각각 상고르와 우푸에부아니였던 것이다.

이후 펄쳐질 탈식민화와 독립의 시대에 두 사람의 비전은 꽤 달랐고 그래서 의견 충돌이 벌어졌다. 상고르는 아프리카 국가들이 유럽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 중에서도 프랑스령 아프리카가 하나로 뭉쳐 연합해야 한다는 이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우푸에부아니는 정치적 대표권을 얻은 이상 굳이 프랑스의 품에서 벗어날 필요는 없다고 독립에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프랑스가 식민지 유지 비용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며 차츰 식민지들을 독립시킬 준비를 하자 우푸에부아니는 노선을 180도 틀었다. 그는 독립할 거면 프랑스령 서아프리카라는 모호한 지역으로 독립할 게 아니라 자신의 지역 기반이 확실히 살아있는 코트디부아르로 독립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이미 코트디부아르뿐 아니라 수많은 지역에서 그 같은 흐름이 진행되고 있었다. 여전히 연합의 꿈을 놓지 않았던 상고르는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독립 후 두 국가가 걸은 길도 달랐다. 상고르는 가톨릭이었고, 정부 주요 인사도 일찍부터 근대 교육에 노출된 가톨릭 교도들이 많았지만, 결국 인구 다수를 점하는 내륙의 이슬람 세력과 화합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자치를 보장해주는 조건 하에서 내륙 수피즘 교단들과 협조하여 국가를 통치했고, 수피 교단 지도자들이 상고르가 추진했던 근대 교육과 보건 정책을 지지하여 세네갈은 안정적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상고르가 장기집권하는 동안 펼친 사회주의적 경제 정책은 많은 아프리카 국가에서 그랬던 것처럼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세네갈 경제는 오랜 기간 제자리걸음을 걸었다.

우푸에부아니는 정반대 선택을 했다. 독립 이전부터 농업 문제를 대표했던 그는 코트디부아르 농업 자원의 잠재력을 알아보았다. 독립 후 아비장을 중심으로 활발한 투자가 이루어졌으며, 카카오가 대규모로 재배되어 세계 각지로 수출되면서 경제는 활황을 이루었다. 우푸에부아니는 이를 재투자하고 또 일부는 착복하면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그는 아프리카 최초의 독립국이자, 과감한 사회주의 정책을 추진했던 인접국 가나의 콰메 은크루마를 비웃었다. 코트디부아르와 가나 사이에는 냉전기 체제 경쟁 비슷한 것이 펼쳐졌는데, 결과는 코트디부아르의 압승이었다.

건국 이후 세네갈(왼쪽)과 코트디부아르의 경쟁은 코트디부아르의 압승으로 끝났다.
건국 이후 세네갈(왼쪽)과의 체제 경쟁에서 코트디부아르(오른쪽)는 압승했다.

코트디부아르, 성공이 낳은 불안과 갈등의 폭발 

하지만 이 성공은 이후 코트디부아르에 불안 요소를 싹트게 했다. 농업 경제가 너무나 성공적이었기에 이제 코트디부아르는 인력이 모자랄 지경이 되었다. 우푸에부아니는 부르키나파소나 말리를 비롯한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지역에서 이주 노동자들을 받아들어 인력난을 해소했다.

문제는 이들이 주로 가난한 북부 지방에서 왔기에, 코트디부아르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가톨릭과는 문화적 배경이 다른 무슬림이었다는 것이다. 경제가 잘 나갈 때는 물론 문제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우푸에부아니 집권 후반기에 에너지 가격이 올라가고, 농산물 가격이 폭락하면서 코트디부아르는 위기를 맞았다. 우푸에부아니 치하 코트디부아르는 카카오라는 한 바구니에 계란을 너무 많이 담아놨던 것이다.

무역수지가 악화되고 재정이 위기에 처하면서 기독교와 이슬람 간의 사회적 갈등이 점화되었다. 강력한 지도자였던 우푸에부아니가 살아있을 때는 문제가 수면 위로 드러나지는 않았으나 1993년 그가 죽자마자 결국 갈등이 점화되었다. 남부의 앙리 코난 베디에와 북부의 알라산 와타라를 중심으로 내분이 일어났고, 경제난에 쿠데타까지 겹쳐 코트디부아르는 그야말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거기에 자국 이주민을 이용해 코트디부아르 정치를 조종하고자 했던 부르키나파소 지도자 블레즈 콩파오레로 인해 결국 코트디부아르는 내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축구 선수 드록바가 제발 전쟁을 그만두자고 한 호소에는 이런 역사가 있었다.

2005년 10월, 드로그바의 조국 코트디부아르에서는 2002년부터 장기적인 내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2006년 FIFA 월드컵 본선 진출 티켓을 거머쥔 뒤 드로그바는 TV 생중계 카메라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랑하는 조국 여러분, 적어도 1주일 동안 만이라도 전쟁을 멈춥시다." 라고 호소하였다. 실제로 이후 1주일 동안 코트디부아르에서는 내전이 벌어지지 않았으며, 2년 후인 2007년에는 5년간 계속되어 왔던 내전이 완전히 종결되었다.
코트디부아르는 2002년부터 내전 중이었다. 2006년 월드컵 본선 진출 티켓을 획득한 드로그바는 TV 생중계 카메라 앞에서 무릎 꿇고 “1주일 동안 만이라도 전쟁을 멈추자”고 호소했고, 이후 1주일 동안 내전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로부터 2년 후인 2007년에는 5년간의 내전은 완전히 끝났다.

세네갈은 해안과 내륙 사이의 사회적 화합을 추구했고, 그 성과는 좋은 대신 사회주의적 경제 운용에는 실패했다. 반면 경제 발전에 매진하던 코트디부아르는 그 사회적 긴장을 감당하지 못하고 내파되었다. 물론 이슬람이 인구에서 압도적 다수를 점하는 세네갈과 두 종교가 엇비슷한 세력을 이루는 코트디부아르의 차이는 중요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상고르와 우푸에부아니의 정책 노선은 독립 이후 두 국가의 운명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이와 유사한 이야기는 동아프리카의 인접한 영국 식민지인 탄자니아와 케냐에서도 반복된다(이만큼 극적이진 않지만).

기니, 독립 영웅의 타락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삼국의 마지막 인물인 아메드 세쿠 투레는 이름에서 드러나듯 무슬림이다. 이 점에서 가톨릭 선교학교를 통해 ‘프랑스화’를 적극 받아들인 상고르, 우푸에부아니와는 다른 배경을 지녔다는 게 확연히 드러날 것이다. 앞의 두 인물이 비교적 좋은 배경을 갖고 성장해 근대적 교육을 수월히 받은 반면 투레는 코란 학교를 먼저 다녔었다.

그는 이후 총독부가 있는 코나크리의 학교에 들어가기도 하지만 쫓겨났다. 채신부에 들어간 그는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정치적으로 급진화되었으며, 마르크스와 레닌의 저작을 읽으며 투쟁심을 키웠다. 기니의 노동조합 지도자로 성장한 투레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프랑스 식민권력에 맞서 끈질긴 독립투쟁과 노동운동을 개시하였다.

기니의 제1·2·3·4대 대통령 아메드 세쿠 투레(Ahmed Sékou Touré, 1922년 1월 9일 ~ 1984년 3월 26일, 퍼블릭 도메인)
기니의 제1·2·3·4대 대통령 아메드 세쿠 투레(Ahmed Sékou Touré, 1922년 1월 9일 ~ 1984년 3월 26일, 퍼블릭 도메인)

결국, 기니는 인접한 세네갈과 코트디부아르와는 상당히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두 국가에서 프랑스 식민 권력은 점진적으로 물러났고, 자연스럽게 독립 이후에도 다카르와 아비장에서 프랑스인은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기니는 달랐다. 투레는 유예 없는 즉각 독립을 주장하며 드골이 추진하고자 했던 점진적 독립안을 일축했다. 결국, 1958년 기니에서 프랑스 연합 탈퇴 투표가 시작되었고, 투레가 승리했다. 따라서 점진적으로 철수할 여유가 있던 다른 지역과 달리, 기니에서 프랑스 식민통치기구는 이미 적대적 태도를 접하고 있었기에 화급히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기니의 신속한 독립은 시원함은 줬을지 몰라도 기니에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지는 못했다. 국가 운영에 필수적인 지식을 갖춘 관료와 전문 인력이 기니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프랑스 식민 권력이 자체적 식민지 엘리트를 육성하는 데 큰 투자를 안 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전문인력이 대거 빠저나가자 기니는 혼란에 직면했다.

거기에 더해, ‘독립 영웅’이자 아프리카 제민족의 자랑스런 투사였던 투레는 슬슬 국가를 사유화하기 시작하면서 본색을 드러냈다. 실패로 끝난 사회주의 정책들이 입안되는 가운데 투레에 반대하는 인사들이 투옥, 실종, 살해되었다. 그렇게 1980년대까지 이어진 투레 정권 하에서 기니는 빈곤, 독재, 억압에 신음하게 되고, 지금도 사정은 딱히 좋아지지 않았다.

레오폴 상고르, 펠릭스 우푸에부아니, 아메드 세코 투레.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삼인방은 각각 다른 배경에서 성장한 지도자의 개성이 독립 직후 국가를 어떻게 끌고 나가 수십년 동안 이어질 유산을 만들어내는 대표적 사례라고 하겠다.

서아프리카 삼국지

사족: 

그러고보니 예전에 천안에서 피씨방 야간 알바할 때 어떤 아프리카인이 손님으로 온 적이 있었다. 그 이질적 포스에 놀라서 “웨어 아 유 프롬?”하니 “세네갈!”이라고 하셨다. 세네갈 인구의 95%가 무슬림인 걸 알았기에 “알 유 무슬림?” 했는데 “노노 암 크리스찬~”이라고 답하셨다. 아니 하필 세네갈인이 왔는데 그 세네갈인이 5% 밖에 안 되는 기독교인일 줄이야.

관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