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응원할 거야?”
“응? 무슨 경기해?”
“유로비전!!!!!”
5월의 어느 날, 친구가 감자칩을 사들고 주말에 같이 유로비전을 보자고 했다.
“근데 유로비전이 뭐야?”
어떻게 모를 수가 있냐는 눈빛이다. 유로비전? 모를 수도 있지. 아시아인인 내가 어찌 유럽의 비전을 알겠니? 하지만 유로비전을 시청한 후 나의 반응은, “세상에나! 왜 이제야 유로비전을 알게 된 걸까!”
유럽 전국 노래자랑
유로비전은 쉽게 말해 유럽 전국 노래자랑이다. 정식 명칭은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Eurovision Song Contest)인데 보통 ‘유로비전’이라고 한다. 나라별 대표가 출전해 노래로 겨룬다. 사전 심사와 전화나 모바일을 활용한 시청자 투표로 결과가 엎치락뒤치락한다. 친구와 함께 중계를 한번 보고 난 이후로 축구팬이 월드컵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유로비전을 기다리게 됐다.
1년에 한 번, 오월의 어느 토요일에 열리는 유로비전은 단순한 노래자랑이 아니다. 경연과 동시에 이뤄지는 투표는 손에 땀을 쥐게 한다. 나라별 트렌드도 볼 수 있다. 몇 년째 시청하고 보니 나라별 특징이 보였다. 영국은 보이밴드 노래 같은 달콤하고 전형적인 멜로디로 승부한다. 동유럽은 짙은 화장에 복장이 매우 화려하다. 스페인은 퍼포먼스에 강하다. 벨기에는 실험적 무대를 선보이기로 유명하다.
지난 5월 12일 막을 내린 2018 유로비전에서는 이스라엘 대표로 나온 스물다섯 살의 네타 바질라이(Netta Barzilai)가 “토이(Toy)”라는 곡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가사는 생각하는 그대로 “난 너의 장난감이 아니야, 이 멍청한 놈아” 하는 빠르고 강한 보컬의 댄스곡이다.
‘박박꿍박웅 박박꿍아이'(들리는대로 씀)라며 상식을 깨는 가사와 이스라엘의 멜로디가 흥겹다. 과거 2015년 유로비전 이스라엘 대표곡이었던 “골든보이(Golden Boy)”의 멜로디도 비슷했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좋아하는 멜로디인가 보다. 나랑도 잘 맞아서 집에서 청소할 때 곧잘 틀어놓곤 했다.
바질라이는 이 곡을 만들 때 이스라엘 사람들의 따뜻한 감성에서 비트를, 고양이 춤을 추는 곡의 비디오는 K-pop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아마 내년 이맘때까지 유럽의 클럽과 라디오에 줄기차게 나올 듯.
참가국의 다채로운 스타일
이번 유로비전은 전반적으로 노래가 다 좋았다. 약간 올드팝 느낌의 곡이 많은데 난 중학생 때부터 델포닉스(Delfonics)를 들었던 구식 취향이라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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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국 전체 하이라이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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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년째 세련된 팝을 선보이는 오스트레일리아(“We got Love”)
- 휘젓는 양팔을 바라보며 계속 듣다가는 최면에 걸릴 것 같은 에스토니아의 소프라노(“La Forza”)
- 공포에 떨게 했던 헝가리의 록메탈(“Viszlat Nyar”)은 제목의 뜻이 “여름 안녕”이랬는데 등골이 오싹하게 무서운 곡이어서 가는 여름도, 오는 가을도 겁에 질릴 것 같았다.
- 귀에 착착 감기는 멜로디와 감미로운 목소리의 아일랜드(“Together)로 진정시켰기에 망정이지.
- 분명 한국 가요 중에 이거랑 정말 비슷한 노래 있는데 싶은 슬로베니아의 출전곡(“Hvala, ne!”)
개인적으로는 노르웨이 알렉산더 뤼박(Alexander Rybak)의 곡(“That’s how you write a song”)이 좋았다. 아마 당분간 나의 청소 노래로 쓰일 듯! 무대 구성은 2015년 우승곡인 스웨덴의 몬스 젤메를뢰브의 HERO를 좀 따라한 감이 있지만 곡도 신나고 가사도 참 착하다. “먼저 널 믿어, 그리고 하루 종일 흥얼대다가 그냥 써보는 거지.”
뤼박은 역대 유로비전 최고득점으로 우승했던 2009년 노르웨이 대표이자, 2016년 축하공연 때 바이올린 연주자로 나왔던 사람이네.구 소련연방 벨라루스에서 어릴적에 이민왔다고.
가사를 보면 물론 사랑이 자주 보이지만, 다른 주제도 그만큼 많다. 감사, 내면의 어두움, 평화,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희망, 타부에 맞서겠다, 인생 등등. 가끔 가요를 듣다 보면 한국 사회는 사랑을 과소비하는 것 가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에는 사랑 많고도 부딪히는 또는 노래하고 싶은 수 만 가지 주제가 있는데 모든 걸 남녀 간의 사랑으로 수렴하는 것 같아서 공감이 안 되는 1인입니다.
유로비전을 빛난 가수들
유로비전 역사상 가장 많은 우승자를 낸 나라는 ‘원스(Once)’의 나라 아일랜드다. 총 7번의 우승을 거머쥐었다. 그다음으로 북유럽이 강세다. 아일랜드를 이어 우승팀을 많이 낸 나라가 스웨덴이다. 2015년 우승을 포함해 총 6번 우승했다. 덴마크와 노르웨이는 세 차례 우승했다. 핀란드는 한 번 우승했다.
역대 유로비전의 최고점 1, 2, 3위는 노르웨이와 스웨덴이 나눠서 보유하고 있다. 유로비전 결승 진출곡을 묶어 내는 앨범은 높은 판매를 올리는 것은 물론, 출연한 가수도 일약 스타가 된다. 유로비전이 끝난 주부터 다음 해 유로비전이 돌아올 때까지 유럽의 클럽은 유로비전 노래 반복 재생이다.
- 알렉산더 리박(노르웨이) – 페어리테일(Fairytale): 2009년 387점
- 로린(스웨덴) – 유포리아(Euphoria): 2012년 372점
- 몬스 젤메를뢰브(스웨덴) – 히어로즈(Heroes): 2015년 365점
유로비전 출신으로 가장 유명한 팀이 바로 스웨덴 그룹 아바(ABBA)다. 1974년 ‘워털루’라는 곡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워털루가 속한 앨범은 전 세계적으로 3.8억 장이 팔렸다. 당시 영국 대표로는 뮤지컬 ‘그리스’로 유명한 올리비아 뉴튼-존이 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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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유로비전 아바의 워털루 실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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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가 국적인 셀린 디옹은 1988년 스위스 대표로 출전했다. 꼭 자국민이 그 나라를 대표한다는 규정이 없어 가능한 일이다. 셀린 디옹은 우승 후 엄청난 스위스 초콜릿을 선물 받았다는 후문이다. 사실 국가별 대회에 한국인이 아닌 사람이 한국 대표로 나간다는 걸 상상하기 어렵다. 유럽은 그런 면에서 우리와는 국가에 대한 소속감이나 애국심의 개념이 좀 다른 듯하다.
개최국에겐 최고의 홍보 기회
유로비전은 매년 다른 도시에서 개최된다. 그 해 우승자의 나라가 다음 해 개최지가 된다. 개최국으로서는 이보다 좋은 국가 홍보 기회가 없다. 올해는 포르투갈에서 대회가 열렸다. 지난해 우승국이 포르투갈이기 때문이다. 올해의 우승국은 이스라엘이니 내년에는 텔아비브에서 대회가 열리려나?
2016년 유로비전은 스톡홀름에서 열렸다. 스웨덴에서 열린다기에 일부러 시간 맞춰 각 잡고 앉아서 보았다. 2015년 우승자인 몬스 젤메를뢰브와 재치 넘치는 중견 여자 코미디언이 진행을 맡았다. 일반적 공식과는 다른 조합이다. 두 사람은 사회를 보면서 웃통 벗은 젊은 남자가 연주하는 드럼도 좋지만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연주자이면 어떠냐며 짧은 스킷을 선보이기도 했다.
본 경연이 시작되기 전 개막 축하 영상이 특히나 볼만하다. 올림픽 개막식에서 그 나라의 특징을 드러내는 다양한 공연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 다양한 기술과 예술이 어우러져 개최국의 면면을 소개한다. 서로를 자연스레 알아가는데 이만한 방법이 또 있을까 싶다.
유로비전은 1956년 첫 방송을 탔다. 주최자는 유럽 방송 연합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나라 간 화해를 도모하는 가볍고 즐거운 프로그램을 만들어보자는 것이 그 출발이었다. 명칭은 유로비전이지만, 꼭 유럽 국가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 모로코, 터키, 아제르바이잔, 러시아 등도 참가국에 이름을 올렸다. 2015년에는 호주 대표도 출전했다.
첫 경연에는 일곱 나라가 참여했는데 최근에는 참가국이 50여 개국으로 늘었다. 방송시간이 세 시간으로 정해져 있다 보니 참가국 전체가 방송에 나오기는 어렵다. 예선을 거쳐 본선에는 25팀 정도가 경연에 참여한다. 단일 노래 경연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프로그램이다.
유로비전 60주년을 맞은 2015년 방송은 전 세계적으로 6억 명이 시청했다고 한다. 올해도 자체 집계로 3억 명가량이 라이브로 시청했다고 한다. 전 세계 인구의 약 10%가 보는 셈이다. 우리 가족도 그 10%에 기여했다. 스포츠를 제외하고 가장 많이 보는 프로그램이란다.
진행방식은 단순
진행 방식은 단순하다. 나라별로 대표가 나와 노래를 한 곡씩 부른다. 이때 투표를 하는데 자기 나라에는 표를 줄 수 없다. 본선 전 리허설에는 나라별 배심원단이 사전 투표를 한다. 따라서 본선 전에 50%의 투표가 이뤄지는 셈이다. 여기에 공연 후 시민들이 참여하는 공개 투표 결과를 합산한 것이 나라별 점수가 된다. 본 경연을 마친 후 문자메시지나 전화, 유로비전 앱을 통해 투표할 수 있다. 한 나라가 총 10개국에 점수를 줄 수 있다. 1등은 12점, 2등은 10점, 나머지는 1~8점까지다. 카운트다운을 하며 투표를 종료한 후에는 50여 개의 참가국 전체와 이원 생중계를 하며 나라별 점수를 발표한다.
시민 참여 결과는 판정단 결과와는 판이하게 다를 때도 있어 끝까지 순위를 예측할 수가 없다. 이때 나라별 선호도나 친밀도를 알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이 주로 이웃나라에 후한 점수를 준다는 점이다. 2016년 유로비전 호주 대표로 한국계 임다미(Im Dami)가 출전해 2위를 차지했다. 호주가 줄곧 1위를 지키고 있었지만 시민 투표에서 엄청난 점수를 받은 우크라이나가 막판 뒤집기로 우승을 차지했다. 직전 해인 2015년 유로비전에 우크라이나 내전으로 참석하지 못한 데 대한 동정표도 어느 정도 작용했을 것이다.
사실 스웨덴과 덴마크, 노르웨이는 평소에 서로를 못 깎아내려 안달이다. 덴마크 사람들은 스웨덴 사람보고 아둔하다 놀리고, 스웨덴 사람은 덴마크 사람들은 말할 때 뜨거운 감자를 입안에 넣고 말하는 것 같다고 비웃는다. 노르웨이는 기름 빼고 나면 별 것 없다며 질투 섞인 눈으로 본다.
하지만 서로 앙숙지간으로 보이던 세 나라도 유로비전에서 만큼은 서로에게 후하다. 숫자로 말한다 했던가. 점수를 보면 나라에 대한 호감도가 보인다. 노래 실력이 어느 정도 비슷하다면 더 좋아하는 나라에 점수를 주지 않겠나? 2015년 유로비전 본선에 오른 북유럽 국가는 노르웨이와 스웨덴이다. 핀란드와 노르웨이, 덴마크 모두 스웨덴에 최고점을 주었다. 노르웨이에도 다른 나라에 비해 후한 점수를 주었다.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은 서로 자전거로 국경을 건널 수 있을 만큼 가까운 나라다. 셋이 같이 있으면 아웅다웅 하지만, 더 큰 무대에 나가면 늘 노르딕 또는 스칸디나비아로 하나가 된다.
라이브 + 새 노래 + 최장 3분 + 16세 이상
본 경연 전 두 차례의 예심과 리허설이 벌어지는 일주일을 유로비전 주간이라고 한다. 이때 매일 밤 유로 클럽이라는 나이트클럽 파티가 벌어진다. 유로비전 출전 국이 각각 주제를 정해 파티를 열고 유로비전 참석자와 스테프, 지인 등을 초대한다는데, 이 정보를 입수한 순간부터 머리 속이 복잡해졌다. 어떻게 하면 저 파티에 초대를 받을 수 있을까. 노래는 늦었고 작곡가에게 국적 제한이 없다니 이제부터라도 작곡을 배워야 하나.
우승자가 결정되고 나면 바로 다음 개최국에서 행사 준비를 시작한다. 경연 장소를 정하는 게 제일 큰 일이다. 일정 규모 이상의 콘서트장과 숙박시설을 갖춘 곳이어야 한다. 콘서트 관람객만도 많게는 4만여 명이 오고, 행사 몇 주전부터 나라별 관계자와 기술진이 와서 사전 준비를 하기 때문이다. 행사 중계를 보면 비용이 엄청나게 들 것 같은데 전 세계 수억 명이 보는 행사다 보니 후원사가 줄을 선다. 또한, 개최국으로서는 관광지로 자국을 홍보할 수 있는 엄청난 기회라 정부에서도 발 벗고 나서 행사를 돕는다.
축구 경기에 준하는 치열한 경쟁 열기 탓에 규정도 엄격하다. 일단 참가자는 라이브로 노래해야 한다. 반드시 사람이 노래를 해야 하며 연주곡 만으로는 참가할 수 없다. 한때는 자국어로만 노래해야 하는 규정도 있었다. 지금은 인공어나 스와힐리어까지 등장하고 있다. 가사에는 정치적, 상업적 메시지를 담을 수 없다. 욕설은 물론 안된다. 직전 해 9월 이전에 발표된 곡은 인정하지 않는다. 공연 시간은 최장 3분이다. 1973년까지는 라이브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의무였지만, 지금은 모두 사전 녹음한 연주를 쓴다. 무대에는 최대 6명까지 오를 수 있다. 살아있는 동물은 무대에 오를 수 없다. 공연자의 최소 연령은 16세다. 16세 미만은 주니어 유로비전(Junior Eurovision)이 있다.
유로비전 참가자는 나라별로 방식을 정해 선정한다. 스웨덴은 매년 2월 유로비전 참가자를 결정하기 위해 멜로디 페스티벌(Melodifestivalen)을 연다. 예선전과 패자부활전을 거쳐 10~12팀이 결선 경연에 오른다. 매년 다른 도시에서 벌어지는 멜로디 페스티벌은 북유럽의 긴긴밤 어둠을 이기는데 큰 역할을 한다.
남녀평등을 의식적으로 지향하는 나라인지라 2015년에는 재미있는 규정이 추가되었다. 본선에 올라가는 팀의 절반은 여성 작사가 또는 작곡가의 곡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만하면 남성들이 차별이라고 나설 만도 한데, 정작 유순한 스웨덴 남자들은 별 불만이 없어 보인다.
아시아 대륙 안에서 우애를 다지고 이해를 넓히는 차원으로 유로 비전의 아시아 버전도 고민해 볼만 하다. 비슷하게 아시아 송 페스티벌(Asia Song Festival)이 있기는 하다. 매년 한국에서 하는데 경연이 아니라 축제라 나라별 인기 가수가 나와 공연을 하는 데서 그친다. 참가국도 적고 참여 가수도 아이돌 중심이다.
같은 아시아라고 해도 우리는 서로에 대해 잘 모른다. 베트남의 국민 가수는 누구인지, 말레이시아에서는 어떤 노래가 인기인지 매년 조금씩 알아가면 어떨까? EU처럼 공동체까지는 아니더라도 아시아 안에서 서로에 대한 호감과 관심을 키워갈 수 있지 않을까? 전 연령대가 함께 볼 수 있는 경연을 아시아가 공동으로 중계하고 시청자가 참여해 투표도 하는 이벤트가 있으면 좋겠다. 대중의 수요는 물론 아시아 시장을 향하는 기업에게도 좋은 기회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이해가 모두 맞아떨어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