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셜코리아 칼럼] 당신의 퇴직연금은 노후 보장용으로 설계되지 않았다. 퇴직연금 20년…이제 나침반을 다시 잡아야 한다. (이재훈/사회공공연구원 연구실장) (⌚9분)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당시, 미국의 대표적인 확정기여형(DC) 퇴직연금인 401(K)와 개인퇴직계좌(IRA)에서 1년 새 2조 달러가 넘는 자산이 증발했다. 주식 비중이 높았던 펀드들은 30% 이상 손실을 기록했고, 퇴직연금 전체 손실액은 4조 달러에 육박했다. 2020년 코로나 팬데믹 때도 충격은 반복됐다. 그나마 양적 완화 조처 등으로 더디게 회복했지만, 은퇴를 앞둔 이들은 막대한 손실액을 만회할 수 없었다.

📌 확정기여형 퇴직연금(DC):
회사가 매년 노동자의 임금 1/12 이상을 퇴직연금 계좌에 적립하고 근로자가 직접 운용 방법을 정해 퇴직금을 쌓는 제도. 투자 손익은 근로자에게 귀속.
사업자는 ‘무위험 고수익’
퇴직연금은 투자위험뿐 아니라, 시장위험이라는 구조적 한계를 안고 있다. 즉, 투자를 잘하고 못하고가 아니라, 시장의 불안정한 변동성과 불확실성에 그대로 노출되는 구조다. 노동자의 ‘노후소득 보장’이라는 목표와 ‘금융상품 투자’라는 수단 사이에는 근본적인 부조화와 긴장이 존재한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조지프 스티글리츠의 지적처럼 시장은 스스로 위험을 관리하지 못한다. 이러한 목표와 수단 간 괴리를 바로 잡을 수 있는 것은 결국 공적 규제와 개입뿐이다.
지난 2월 6일 고용노동부는 ‘퇴직연금 기능 강화를 위한 노사정 TF’의 공동선언문을 발표했다. 핵심은 두 가지다. 노후소득보장 강화를 위해 기금형을 활성화하고, 퇴직연금 사외 적립 의무화를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이번 선언은 ‘노동자의 노후소득보장’이라는 긴 항해에서 ‘길을 잃지 않는 분명한 나침반’이 될 수 있을까.

노동자는 ‘고위험 저수익’
퇴직연금은 지난 10년간(2015~24년) 매년 평균 약 15% 가까이 빠르게 성장하며 덩치를 키웠고, 어느새 총적립액은 431조 원(24년 기준)까지 증가했다. 한국 국내총생산(GDP)의 16.9%에 달하는 수준이다. 체격은 커졌지만 체력까지 좋아진 것은 아니다. 지난 10년간 퇴직연금 연환산 평균수익률은 2.31%에 불과하다. 같은 기간 평균수익률 6.5%를 기록한 국민연금과 비교하면 초라한 성적이다.
확정급여형(DB)은 수익률과 상관없이 퇴직금과 동일하게 약정된 몫을 보장한다. 그러나 수익률에 따라 급여액이 달라지는 확정기여형은 사정이 다르다. 실적배당형 상품이 상대적으로 수익률이 높더라도, 임금이나 물가상승률을 고려하면 실질적으로 마이너스 수준이다.
📌 확정급여형 퇴직연금(DB)
노동자가 퇴직 시 받을 연금액이 근무 기간과 퇴직 전 임금에 따라 사전에 확정된 제도. 투자 손익은 기업에 귀속.
시장이 상승할 때는 ‘자산 증식의 기회’로 선전하지만, 하락할 때 손실은 가입자 계좌에 반영된다. 확정급여형은 사용자가, 확정기여형은 노동자 개인이 고스란히 손실을 떠맡는다. 반면 퇴직연금 사업자는 수익률이 곤두박질쳐도 수수료를 떼어간다. 퇴직연금 사업자에게 운용 손실이란 수익 감소일뿐, 재무 손실로 이전되지 않는다.
2024년 결산 당시 퇴직연금 사업자의 수수료 수익은 약 1조 7천억 원으로 보고됐고, 2025년엔 약 2조 1천억 규모로 추산된다(연합뉴스). 불과 1년 사이 4천억 가까이 증가한 셈이다. 노동자는 ‘고위험 저수익’에 빠졌지만, 퇴직연금 사업자는 ‘무위험 고수익’을 누린 것이다.
더욱 중요한 변화는 퇴직연금의 구조 자체가 변하고 있다는 점이다. 퇴직연금 도입 20년을 지나면서 확정급여형에서 확정기여형과 개인형 퇴직연금(IRP)으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2014년 70.5%를 차지하던 확정급여형은 2024년 49.7%로 20.8%포인트 줄어들었다. 반면, 확정기여형은 21.7%에서 26.8%로, 개인형 퇴직연금은 7.9%에서 23.1%로 확대됐다. 사용자가 투자위험과 시장위험을 책임지던 구조에서 점차 노동자 개인이 감당하는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퇴직연금 20년 성적표: 정부가 설계, 금융자본이 주도
퇴직연금 초기에는 노동자의 수급권 보호를 위해 주식형 등 위험자산의 투자 한도를 40%로 엄격히 제한했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 퇴직연금의 손실 규모가 작았던 것은 제도 초기라 적립금 규모가 작았던 측면도 있지만(약 6.6조), 대부분(82%) 원리금 보장형으로 운영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익률 제고’라는 미명 하에 안전장치는 하나씩 해체되었다.
특히 박근혜 정부는 ‘퇴직연금 활성화 방안’으로 확정기여형과 개인형 퇴직연금의 위험자산 투자 한도를 70%까지 대폭 허용하고, 주식형 펀드 투자와 실적 배당형 상품을 확대했다. 2018년에는 TDF(타깃데이트펀드: 투자자의 은퇴 시기에 맞춰 주식과 채권 비중을 조절해 운용하는 펀드)를 통해 사실상 100% 주식 투자가 가능한 우회로가 열렸다. 2022년 도입된 사전지정운용제도(디폴트 옵션)는 자동으로 고위험, 고변동성 상품에 편입되는 구조를 만들었다.
또한 기존에는 체불 예방과 수급권 보호를 위해 퇴직신탁이나 퇴직보험처럼 기업이 은행이나 보험사에 퇴직 부담금을 맡기고 이자를 받는 방식이 있었다. 하지만 금융자본 입장에서는 그다지 돈이 안되는 장사였고, 2010년에 폐지됐다. 정부 역시 기업들이 퇴직연금으로 갈아타도록 유도하기 위해 퇴직금 비용에 대한 세제 인정 한도(손금산입)를 축소해 오다 2016년에 완전히 없애버렸다.
보장형 제도에서 시장연동형 투자상품으로 급격히 전환되고 있는 흐름은 노동자의 자발적 선택도, 퇴직연금 사업자 간 건전한 경쟁의 결과도 아니다. 공적연금 축소와 사적연금 확대, 그리고 이를 통해 적립한 대규모 연금 자산으로 금융시장을 활성화하려는 정책 결과의 산물이다. “퇴직연금 제도개선을 위한 최초의 노사정 합의”라는 자찬은, 지난 20년 동안 퇴직연금 제도가 노동자의 동의 없이 일방적으로 추진되어 왔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의무화와 기금화, 갈림길에 서다
그렇다면 퇴직연금 사외 적립 의무화와 기금형 활성화는 공동선언문이 강조하는 것처럼 노동자의 노후소득 강화를 위한 조치가 될 수 있을까. 아니면 기존 흐름의 연장선상에서 노후 임금을 금융시장으로 더욱 유입시키는 경로가 되고 말 것인가.
현재 300인 이상 사업장의 퇴직연금 도입률은 92.1%에 달한다. 반면, 30인 미만 소규모 사업장은 23.2%, 특히 5인 미만 영세사업장은 10.6%에 불과하다. 퇴직연금 사업자 입장에선 시장 규모를 확대하기 위해서는 출혈 경쟁하거나, 중소기업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는 상태다.
하지만 중소기업은 대기업과 사정이 다르다. 국제회계기준(IFRS)을 엄격히 적용받는 상장 대기업은 부채비율을 줄일 수 있고, 다른 대기업들도 법인세 절감 혜택을 받는다. 하지만 중소기업은 만성적인 자금 유동성 압박이 크고, 실효세율이 낮아 세제 혜택 효과는 적다. 부채 비율을 낮춰 주가를 부양하거나 신용등급을 올릴 실익도 크지 않다. 퇴직연금이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은 셈이다.
이런 교착 상태에서 사외 적립 의무화와 기금형 활성화는 퇴직연금 사업자의 이해와도 맞닿아 있다. 사외 적립 의무화를 통해 퇴직연금 유입을 확대하고, 기금형을 통해 영세사업장의 자금을 하나의 기금으로 묶으면 사업의 효율성과 수익 기반을 확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외 적립 의무화, 1년 미만 노동자 적용은 나중에?
이번 공동선언문에 담긴 ‘퇴직급여 사외 적립 의무화’라는 제목 자체가 혼동이 있을 수 있다. 좀 더 명확하게 하자면 퇴직금의 사외 적립 의무화이다. 퇴직연금은 이미 사외 적립되고 있기 때문이다. 확정급여형의 경우 최소 100% 의무 적립 비율이 있지만 임금인상을 반영하지 않거나 미납 등으로 과소 적립하는 문제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는 관리 감독과 집행의 문제이지, 의무화 여부와는 상관없다. 하지만 퇴직금은 사정이 다르다. 장부상으로만 적립해 놨다가 기업이 도산하거나 부도가 나면 퇴직금을 전부 받지 못하는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퇴직금의 사외 적립 의무화는 체불 예방과 수급권 보호 차원에서 필요한 조치다. 하지만 그런 순수한 의도로만 해석하기엔 석연치 않다. 사외 적립 방식을 오직 퇴직연금으로만 한정했기 때문이다. 즉, 퇴직금의 사외 적립 의무화는 곧 퇴직금 폐지와 퇴직연금 도입을 의미한다.
체불 예방과 수급권 보호라는 명분 이면에는 중소형 사업장의 퇴직금을 퇴직연금 상품으로 전환하는 의도가 깔려 있다. 기업은 사외 적립하더라도 이자를 받는 게 아니라 오히려 수수료를 부담해야 한다. 그래서 “정부는 사외 적립 의무에 따른 소규모 사업장의 부담을 완화하기 위해 재정지원 방안을 마련한다”는 내용이 따라붙었다.

결국 퇴직연금으로 전환하면서 부담해야 할 추가 비용, 즉 퇴직연금 사업자의 수수료 수익을 정부가 공적 재원을 통해 지원하겠다는 의미가 포함돼 있는 셈이다. 게다가 퇴직금을 없애고 퇴직연금을 의무화한다면 아직 퇴직금제도를 운영하는 중소형 기업들 대부분은 기업 부담을 줄이기 위해 확정기여형으로 도입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실제 미국의 401(k)나 일본, 영국도 중소사업장은 확정기여형이 지배적이다.
특히 가장 중요하고 오랫동안 방치되고 있는 ‘1년 미만 노동자의 퇴직급여 적용’ 문제는 이번 선언문에 담기지 못했다. 현행 제도는 계속근로기간이 1년 미만인 노동자를 지급 대상에서 원천 배제하고 있다. 하지만 장기근속을 전제하지 않는 초단기 계약, 플랫폼 특수고용 등이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적한 바 있는 ‘11개월 쪼개기 계약’의 편법도 퇴직급여 부담을 줄이려는 얄팍한 꼼수다.
대법원 판례를 보더라도 퇴직급여는 노동력을 제공한 대가로 발생하는 후불(이연) 임금이지, 사용자가 시혜적으로 베푸는 보너스가 아니다. 한 달 일하든 두 달 일하든 제공한 노동의 가치만큼 퇴직급여를 지급해야 한다. 네덜란드, 영국, 덴마크, 독일, 심지어 미국의 401(k)조차 근속 1년 요건은 없고 고용 즉시 또는 월 단위로 비례 적립하고 있다.
같지만 다른 세 가지 기금화 유형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퇴직연금이 노동자의 노후소득 보장을 위한 올바른 궤도로 올려놓을 수 있을까. 실낱같은 희망을 찾아보자면 공공기관 개방형 기금 활성화의 가능성이다. 이번 선언문에는 크게 세 가지 형태의 기금형 퇴직연금을 도입·활성화하겠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첫 번째는 금융기관 개방형 기금이다. 은행, 증권, 보험 등 민간 금융회사가 별도 수탁법인을 설립해 다수 사업장이 참여하는 방식이다. 외형상 기금형이지만, 성격상 시장형 집합운용 모델에 가까운 초대형 계약형 펀드에 불과하다. 장기적 안정성과 집단적 위험 분산을 특징으로 하는 전통적인 기금형과는 완전히 다르다. 지배구조 역시 가입자가 추천한 일부(30% 이상)만 이사회에 참여할 수 있을 뿐이며, 투자 운용의 이해 상충 문제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두 번째는 연합형 기금이다. 복수의 특정 사용자가 연합해 공동 수탁법인을 설립하고, 이를 통해 집합적으로 운영하는 방식이다. 네덜란드, 덴마크 등과 같이 노사 동수로 운영되는 ‘산업별 퇴직연금’이 대표적인 모델이다. 퇴직연금 도입 초기, 민주노총이 대안으로 제시한 방안이지만 당시 계약형만을 고집했던 정부와 퇴직연금 사업자의 반대로 제도화되지 못했다.
연합형 기금은 현행 계약형이나 금융기관 개방형보다 더 민주적인 지배구조를 갖추고,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투자와 자산 운용, 규모의 경제를 통한 비용 절감 등이 가능하다. 특히 기금으로 묶인 산업·업종 내에서 이직하거나 단기 근속을 반복해도 해지할 필요 없이 적립을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실현 가능성은 낮다. 연합형 기금은 안정적인 노사관계와 제도화된 산별교섭 구조를 전제로 하는데, 한국은 거리가 멀다. 게다가 기금의 마중물 역할을 해야 할 규모 있는 사업장은 이미 계약형 체계에 편입되어 있고, 금융계열사와의 거래 관계도 고착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근로복지공단은 30인 미만 중소사업장을 대상으로 중소기업퇴직연금기금인 ‘푸른씨앗’을 운영한다. 3년간 수수료를 면제하고 최저임금의 130% 미만의 노동자와 사용자에게 최대 3년 재정을 지원한다. ©푸른씨앗
세 번째는 공공기관 개방형 기금이다. 공공기관이 수탁법인이 되어 중소·영세사업장의 퇴직연금을 기금으로 묶어 운영하는 방식이다. 현재 근로복지공단이 30인 미만 중소사업장을 대상으로 ‘푸른씨앗(중소기업퇴직연금기금)’을 운영하고 있다. 3년간 수수료를 면제하고, 최저임금의 130% 미만의 노동자와 사용자에게 최대 3년 재정을 지원하고 있다. 민간 퇴직연금 사업자와 달리 이윤을 추구하지 않고, 정부가 재정지원을 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하지만 이러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자체적인 대규모 자산운용 인프라와 역량을 보유한 기관이 아니기 때문에 전적으로 외부 자산운용사에 위탁해 운용한다. 위탁 수수료가 발생할 수밖에 없고 장기적 자산배분 전략 등을 독자적으로 설계하거나 집행하기엔 제약이 따른다.
사실상 유일한 대안: 국민연금공단의 등판
공공기관 개방형 기금의 효과를 극대화하고, 안정적인 수익률을 통해 퇴직연금의 노후소득 보장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국민연금공단이 퇴직연금 사업자로 참여할 필요가 있다. 중소기업퇴직연금기금의 적용 대상을 300인 미만까지 확대하면, 장기 안정적인 기금운용과 체계적인 위험 관리, 그리고 대규모 운용 역량 등이 더욱 중요해진다. 특히 퇴직금의 사외적립 의무화도 공공기관 개방형 기금과 결합했을 때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다.
퇴직연금이 고용노동부 소관 사업이라는 부처별 칸막이만 넘어선다면, 국민연금공단이 퇴직연금 사업자로 참여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국민연금공단이 퇴직연금 사업자로 참여한다는 자체가 퇴직연금제도에 대한 고용노동부의 고유 역할과 지위를 침해하는 것도 아니다.
또한, 다소 생뚱맞지만 지난 1월 송언석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퇴직연금 기금화가 “개인 자산을 국유화”하겠다는 위헌적 발상이라며 반대했다. 하지만 기금형은 개인 자산의 소유권이 국가로 이전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에게 그대로 귀속되며, 이미 국제적으로도 일반화된 모델이다. 예컨대 영국은 중소기업 노동자를 위한 공적 퇴직연금(NEST)이 있고, 네덜란드, 덴마크 등 주요 선진국에서는 기금형의 집합운용 방식이 이미 표준적으로 자리 잡고 있다.
퇴직연금은 금융자본의 이익이 아니라, 노동자의 노후소득 보장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20년 동안 방치한 채 제대로 내딛지 않은 길이기도 하다.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은 ‘노동자의 노후소득 보장’이라는 분명한 나침반을 강조했다. 하지만 이번 노사정선언에도 노후소득 보장을 위한 명확한 경로는 가려져 있거나, 나중 과제로 미뤄져 있다. 가뜩이나 풍랑도 거세고 암초도 많은데, 목표마저 잃은 나침반으로는 안전하게 바다를 항해할 수 없다. 더 이상 표류하지 말고 노동자의 노후를 향해 바른 항로를 잡아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