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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런 애로노프스키를 생각할 때마다 ‘희랍비극의 숭고함’을 떠올리고는 한다. 비극의 숭고함이란, 강건한 운명에 맞서 싸우는 주인공의 처절한 투쟁을 통해 관객들에게 정화(카타르시스)의 경험을 환기하는 데서 온다. 그러한 의미에서 대런 애로노프스키를 표현할 수 있는 하나의 단어를 꼽자면, ‘무자비’다.

대런 애로노프스키 혹은 무자비

마약으로 인해 몰락하는 현대 인간상을 그릴 때도(레퀴엠, 2000), 필멸성과의 투쟁을 우주의 탄생까지 이끌어나가는 놀라운 삼중주를 구사해 낼 때도(파운틴, 혹은 천 년을 흐르는 사랑, 2006), 무대 위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 자신을 깨달은 후 죽음을 무릅쓰고서라도 링에 오르는 레슬러를 묘사할 때도(레슬러, 2008), 완벽한 캐릭터를 위해 무너져 가는 발레리나를 그릴 때도(블랙 스완, 2010) 그는 물러서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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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로노프스키의 영화들은 무자비하다 (좌측 상단 시계방향부터, 레퀴엠, 파운틴, 블랙스완, 레슬러)

애로노프스키는 엄청나게 강렬한 캐릭터를 길 위에서 달리게 하고, 15톤 덤프트럭 같은 운명을 같은 길에 놓아 치킨게임을 벌이며, 결국은 정면충돌시킨다. 그리고 그 옆을 같이 달리되 눈을 부릅뜨고 그 모든 것을 지켜본다. 그 무자비함이야말로, 그가 관객들을 실어의 경지로 몰고 가는 비밀 중 하나다.

그런 면에서 [노아](2014)를 볼 때는 걱정 반에 기대 반이었다. 성경이라는 텍스트, 특히 구약은 이슬람과 기독교가 공유하는 (전 세계의 근본주의는 거의 다 아우르는) 무시무시한 텍스트이고, 구약의 신은 때때로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방식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 텍스트를 깨지 않는 한에서, 도대체 노아라는 캐릭터는 무슨 수로 운명과 투쟁하고, 고뇌하고, 절망하며, 결국 패배하여 관객을 격동시킬 것인가. 답이 잘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애로노프스키는 신기하게도 그 좁은 길을 달려나갔다. 그의 최고작품이라고 하기는 힘들지 몰라도, 어쨌든 대단한 일을 해냈다.

노아(Noah, 2014)
노아(Noah, 2014)

영화를 보고 나서 기독교도들이 꽤 화를 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성경을 뒤져 영화와 비교해 보았다. 성경 텍스트는 대한성서공회의 개역 성경을 따랐다.

S#1. 창조와 악의 번창 그리고 재창조… 다시 바벨탑 

여호와는 아담과 이브를 지은 후 에덴동산에 거하게 하며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6,17)

이것을 먹은 아담과 이브의 원죄에 대한 증표 중 하나는 가인이 아벨을 살해하고 에덴의 동쪽에 거하게 되는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가인의 자식들이 번성하여 지구를 파괴하고, 악을 퍼뜨리는 것이 영화의 첫 시작이다. 그리하여 여호와는 결국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 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고 말하며 세상을 완전히 날려 버릴 것을 결심한다(창6:7).

그러나 여기서 성경을 읽어 나가다 보면 이상한 점이 하나 있다. 노아는 9장 말미에서 죽는다. 10장은 그의 혈통이 전 세계로 퍼져 나가는 과정을 서술한다. 그리고 11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느냐 하면, 바벨탑을 짓는다. 그 이후 소돔과 고모라 등의 스펙터클한 악행들이 펼쳐진다. 그렇다면, 악인을 정화하기 위해 전 지구적인 말살마저 감수한 여호와의 의도는 실패한 것이 아닐까?

바벨탑. (화가: 대 피테르 브뢰겔 (1526/1530–1569), 위키백과 공용)
구약은 노아의 죽음 뒤에 인간의 악행이 창궐하고, 결국 바벨탑을 짓는 것으로 이어진다.(작품과 화가: 바벨탑, 대 피테르 브뢰겔(1526–1569), 1563년작, 위키백과 공용)

S#2. 노아, 인간은 결국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 것이다 

여기서 설정상의 차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성경에서는 노아를 셋(아담과 이브의 셋째 아들)의 후손이라 하며, 영화에서는 노아가 셋의 유일한 자손이라고 한다. 세계가 가인이 저지른 원죄에서 자유로워지려면, 노아의 후손들만이 새 세상에 남아야 한다. 그리하여 창세기에서는 “곧 그날에 노아와 그의 아들 셈, 함, 야벳과 노아의 처와 세 자부가 다 방주로 들어”간다(창7:13).

그런데 영화에서는 세 자부가 아닌 셈의 처 일라 만이 방주에 타며, 일라는 어렸을 때 겪은 부상으로 인해 아이를 가질 수 없다. 즉, 홍수는 피하였으나 인류는 결국 멸망할 운명이다. 노아 일족의 번성을 약속한 거대한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이는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라”고 약조하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성경 말씀(창7:1, 창9:1)과 배치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영화 초엽에서, 그리고 계속 반복되는 선악과의 이미지를 떠올릴 필요가 있다. 인류의 진정한 원죄가 여기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인류의 탄생 자체가 원죄를 품고 있다. 노아가 며느리를 찾으러 가인의 후손들 사이로 들어갔다가, 현실에 절망하고 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노아는 자신이 아무리 셋의 자손이라도, 인간은 결국 이 세계를 다시금 지옥으로 만들 수밖에 없음을 알아버린 것이다. 돌아온 그는 부인에게 말한다. 셈은 여인을 탐하고, 함은 질투가 심하고, 당신은 아이들을 위해 어떠한 어리석은 짓도 저지를 수 있으니, 우리 역시 그들과 다를 바가 없다.

영화 노아의 한 장면 (© MMXIV Paramount Pictures Corporation and Regency Engtertainment (USA), Inc. All Rights Reserved.)
영화 노아의 한 장면 (© MMXIV Paramount Pictures Corporation and Regency Engtertainment (USA), Inc. All Rights Reserved.)

이렇게 보면, 셈이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일라를 아내로 맞은 것도, 함과 야벳이 배필을 구하지 못한 것도, 결국에는 신의 뜻이 된다. 노아의 가족과 감시자들에 대한 신의 축복은 동물을 보존하여 인간이 없는 유토피아로서의 에덴을 재구성하기 위한 것이지 노아의 자손만을 번성시키기 위함은 아니다. 노아도 자신이 여호와에게 선택받은 것이, 이 일을 수행할 수 있는 자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노아의 선택은 많은 목숨을 구하기 위함이 아닌, 인간을 절멸시키겠다는 여호와의 뜻에 기반하고 있으며, 방주에 진입하고자 하는 두발가인 군과 노아의 전투가 처절한 것은 이 때문이다.

영화 노아의 한 장면 (© MMXIV Paramount Pictures Corporation and Regency Engtertainment (USA), Inc. All Rights Reserved.)
영화 노아의 한 장면 (© MMXIV Paramount Pictures Corporation and Regency Engtertainment (USA), Inc. All Rights Reserved.)

도움을 청하는 모든 인간의 목소리가 사라진 후, 노아는 불을 켜고 우주의 근원에 관해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 끝은 다음과 같다. 셈과 일라가 나와 어머니를 묻고, 함이 셈과 일라를 묻어주어라. 함이 죽으면 야벳이 함을 묻고, 세상의 마지막 인간이 되어라.

S#3. 인간은 다시는 번성해선 안 된다 

그러나 이러한 노아/여호와의 계획은 실패해야만 한다(지금 글을 쓰는 나나 읽는 사람들이 그 반증이다.). 그리하여 그 “어떠한 어리석은 짓도 저지를 수 있”는 어머니가 아이들의 행복을 위해 므두셀라 할아버지를 찾아간다. 간청을 들은 므두셀라는 일라의 배에 축복을 내려 회임이 가능한 몸을 만든다. 일라는 갑자기 정욕이 일어 방주에 타기 전에 일단 관계부터 가지고, 아니나 다를까, 셈의 아이를 가진다.

영화 노아의 한 장면 (© MMXIV Paramount Pictures Corporation and Regency Engtertainment (USA), Inc. All Rights Reserved.)
영화 노아의 한 장면 (© MMXIV Paramount Pictures Corporation and Regency Engtertainment (USA), Inc. All Rights Reserved.)

그러나 임신 소식을 들은 노아는 노호한다. 인간이 다시 번성하여 지구에 악을 퍼뜨리게 된다면, 저 많은 사람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헛되이 죽어야만 했던 것인가. 왜 신의 뜻을 거슬러 악의 씨앗을 다시 퍼뜨리려 하는 것인가. 신의 뜻이 인류의 절멸이라면, 번식이 가능한 모든 여지를 없애야만 하고, 그것은 노아의 책무가 된다.

노아는 신의 뜻을 따르기 위해 며느리에게 말한다: 아들이면 살려 두겠지만, 딸이라면 죽일 것이다. 분노하여 그 이유를 캐묻는 부인에게 노아는 이렇게 답한다. “그것이 정의롭기 때문이오(it’s just).”

이렇게 애로노프스키스러운 극단적 몰락의 환경이 갖추어지고, 고뇌와 투쟁의 시기가 찾아온다. 그러나 인류는 살아남아 바벨탑을 지어야 하므로(…), 노아의 위업은 실패해야만 하고, 아이는 딸이어야 하며, 정화된 지구에 안착해야만 한다. 결국, 절망한 노아는 하늘을 바라보며 말한다. 못 하겠습니다.

S#4. 노아가 다시 얻은 선택권과 떠오르는 무지개 

결국, 노아는 여호와의 명령을 실현하는 데 실패하고야 만다. 감독은 여기서 또 하나의 트릭을 사용하는데, 무지개로 언약의 증거를 삼는 장면(창9:17)과 노아가 농사를 지어 포도주를 담가먹는 장면(창9:20)의 순서를 바꾸는 것이다.

영화에서 절망한 노아는 집을 떠나고, 해변가 동굴에서 죽어라고 포도주를 퍼마시고, 벌거벗은 채 잠이 든다. 그리고 나중에 며느리 일라가 찾아온다. 그녀는 노아에게 묻는다. 왜 집을 버리고 혼자 나와 이렇게 술만 자시고 계십니까. 노아는 말한다. 나는 창조주의 뜻을 저버렸고, 가족도 저버렸다. 아이를 죽이지 못하였으니 심판을 원하신 여호와의 계획을 망쳤고, 아이를 죽이려 하였으니 가족도 저버렸다.

그러나 일라는 그 말을 부정한다. 그 분은 당신께 선택의 여지를 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영화는 첫 장면과 다시금 공명한다. 아담과 이브에게는 열매를 따 먹을 수 있는 능력과 이를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고, 이들은 열매를 먹을 것을 선택했다. 노아에게는 인류를 절멸시킬 수 있는 능력과 이를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고, 그는 인류를 다시 시작할 것을 선택했다. 그리하여 그는 집으로 돌아가고, 자신의 자손을 축복해 주며, 그 축복의 순간에 비로소 무지개가 떠오른다.

“내가 너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창9:12,창9:13)

S#5. 그 누구도 신의 뜻을 알지 못한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당장 성경을 아주 문자 그대로 읽는 사람들이 분노할 만한 포인트가 뭔지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 영화에 대해 무작정 ‘성경과 다르다’며 비판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은 절멸이 아니”며 “모세는 배덕자가 아니”라며 소리를 친다면, 나는 이들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가정 하나를 잊고 있다고 말해 줄 수 있다.

그 누구도 신의 뜻을 알지 못한다(아들 이삭을 불태우러 가는 아브라함이 그러한데(창22:1~14), 천사나 여호와의 말씀이 정말 여호와의 말씀인지에 대해 아브라함은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는다. 여기 비하면 수혈을 거부하는 여호와의 증인들은, 정말 양반이다.). 그래서 사실 이 영화에서 신의 뜻이 명시적으로/객관적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몇 번 있는지 찾아보는 것은 중요한 감상 과정 중 하나다.

내가 찾은 것은 세 가지인데, 1) 방주를 지을 숲이 생겨나는 과정이 그 첫째이고(방주를 지으라는 것은 불변의 가정이다), 2) 죽음을 맞은 감시자들이 다시 여호와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 그 둘째이며(노아의 자손들만을 방주에 태워야 하므로, 또한 불변의 가정이다.), 3) 노아가 자손을 축복할 때 무지개가 떠오르는 것이 그 셋째이다.

그리고 셋째의 무지개는 노아가 알고 있었던, 그리고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정당화의 근거로 작동하는 신의 뜻이, 사실은 노아의 선택을 거쳐 선택된 자손의 융성이었음을 나타낸다고 볼 수도 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영화는 성경의 텍스트와 크게 배치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영화 [노아]는 성경을 훼손하는가

결과적으로 감독은 굉장히 까다로운 (그리고 민감한) 텍스트를 돌파해 나가는 데 따르는 제약을 돌파했으며, 그 과정에 자신의 스타일에 맞추어 강렬한 주인공이 운명과 대결하는 과정을 심어내기까지 했다. 하지만 영화 언어상의 한계가 있다는 주장은 정당할 수 있다. 성경의 스펙터클, 원문훼손을 금하는 경전으로서의 자격 등의 제약은 굉장히 강건한 것이고, 나 자신도 그것을 구현하는 과정에서 살짝 고개를 갸웃할 만한 부분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성경 말씀을 훼손했다고 말한다면, 글쎄…… 그것은 자신 혹은 교회 목사님/성당 신부님/이슬람 회당의 사제님이 해석해 주신 대로의 신의 뜻을 영화 속에서 원형 그대로 보기를 원하는 욕심 아닐까? 그런 분들은 VHS로 틀어주는, 성우가 에코 잔뜩 먹인 목소리로 감동 차게 성경말씀 읊어 주는 나레이션 있는 영상물을 보는 것밖에는 답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텍스트는 찾아보면 산처럼 나올 테니, 계속 확인하고, 계속 울면 된다. 굳이 걸작을 통해 그 목소리를 듣고 싶다면 세실 드밀 감독의 [십계]나 [왕중왕]을 보면 된다. 받아들일 생각도, 숙고해 볼 여지도 없을, 그리고 [블랙 스완]의 애로노프스키라는 경고장까지 떠 있는 영화를, 굳이 돈까지 내고, 인생의 두 시간여를 낭비하며 볼 이유가 없다.

게다가 그분들이 평점까지 깎는데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이런 무용한 일에 인생을 낭비하기를 바라시지 않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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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댓글

  1. 마지막 평점 깎는 게 무슨 뜻인가 하고 별점 주는 곳에 가봤더니 국내 사이트에서 영화 평점이 낮은 편이로군요.

    네이버영화 6.3/10
    다음영화 5.6/10

    해외 반응은 어떤가 하고 찾아보니

    로튼토마토 81% out of 100%
    IMDb 7.6/10

    상대적으로 높아요. 그냥 비교하자면 그렇다는 겁니다.

    국내평은 사실 저것보다 훨씬 더 낮을 것 같은 게 개봉 전에 영화도 안보고 9점 10점 줬던 사람들 때문에 버티는 것 같아요. 지금은 1점이 엄청 많고요. 본문 내용처럼 반성경적이라는 평도 많고요. 개봉전 별점 빼면 한 2-3점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2. 참으로 교만하기가 그지없는 글이다..
    마치 이글을 쓴 자기 자신은 하나님의 온전하신 계획과 뜻, 그리고 성경말씀과 시대적 상황들,나아가 이렇게까지 역사적인 사실(성경은 바로 인류의 역사이다)을 인본주의적 시각으로 왜곡시키고 변질시켜 버린 그런 불순한(?) 감독의 의도마저도 정확히 알고 있는 것처럼..그리고 그런 숨겨진 의도조차도 찾아내는데 발군의 능력을 가진 사람처럼 대단히 화려하게(?) 현학적으로 글을 써놓았는데..참으로 실소를 금할 수가 없다..

    또한 너무나도 유한하고 무지한 인간중심의 인간적인 관점이고 지극히 근시안적인 시각의 글이다.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시고 역사의 주관자이시며거룩하고 흠없으신 분으로 너무도 죄와 악을 미워하시는 지금도 살아계신 그 하나님의 우리 인류에 대한 크신 사랑이나 하나님 그분에 대해서,혹은 신.구약성경의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일관되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들과 가장 기본적인 뜻 조차도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체로 그저 자신의 알량하고 피상적인 지식만으로 성경 말씀과 하나님께 정면으로 대적하는 차라리 만들지 않았던 것이 더 나았을 이런 영화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것 조차도 자신이 그 얼마나 영적으로 무지하고 우매하다는 것을 스스로가 드러내는 글이란 말인가..

    성경말씀과 하나님을 운운하며 성경 몇 구절 인용해가며 아무대나 갖다 붙이면 다 글이 되는것이 아니다 차라리 아무 소리 말고 조용히 있는편이 오히려 자신의 무지를 감추는 것이리라..
    자신의 머리로만으로, 아니면 자신의 지식으로만 영원무궁하시고 광대하신 하나님을 알고자 한다거나 성경말씀들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단언컨데 영원히 하나님과 말씀들과 그 뜻에 대해서 절대로 알지 못할 것이다. 2천여년에 걸쳐 성령의 감동에 의해서 약 40여명의 저자들에 의해서 기록되어진 이 성경말씀은 오로지 성령님께서 도와주시고 지혜를 주시고 감동을 주셔야만이 비로서 온전히 이해가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마지막의 마지막인 지금
    우리 믿는자들을 구원하시고 죄와 악을 심판하러 우리 주님께서 곧 오실 이때에..
    미혹케하는 악한 영들이 최후의 발악을 하는 가운데 참으로 믿는자들이라면 깨어 있어야만 하고 어리석음과 무지로 더 이상 미혹의 영들에 의해 부화뇌동하지 말고 자신의 죄와 허물을 깨닫고 철저히 통회하며 자복해야만 할 때인 것이다..

  3. 그리스도인, 마지막의 마지막 시대를 이렇게 손수 보여주시는 군요. 죄와 허물을 깨닫고 철저히 통회하며 자복합니다. ps. 황대리님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4. 성경에서 노아가 방주를 만드는건 인간을 말살하고자 한게 아니었습니다. 근데 이 영화가 그부분을 완전히 다르게 꼬아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니 노아와 신을 인간을 말살하고자하는 주체로 만드는거죠.
    영화이니 성경분문과 다르게 이야기가 나올수 있겠지만
    크리스찬인 지인들이 반 기독교적이라고 하던군요. 그냥 좀 다른게 아니고…
    신학을 하셨던 분들이 그렇게 이야기하는건 몇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 영화 보지는 않았지만 모티브를 따서 결국은 성경과 관계없이 산으로 이야기가 가는 내용인거 같아요.
    저도 기독교인이니 이야기만 들어도 반 기독교적인건 맞는거 같습니다만…
    그거야 표현의 자유니 그렇다 치더라도

    근데 아이러니한건 이 영화 광고를 기독교 사이트에서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반기독교적인데 기독교인들 보게해서 수입올릴려고 하는 얄팍한 수법 아닐까요?
    영화 내용보다 광고 방법이 참 아이러니입니다.

  5. 글쓴이의 글에 의하면, 수 천년동안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전설과 신화같은 얘기들이지만-를 한 없이 무지한, 고작 40명의 사람이 기록한 문서가 성경이군요…..

  6. 정말 소름끼치게 무서운 개독이네요.
    이런 개독들이 많으니 우리나라 개독들이 그렇게 개욕을 쳐먹는거지…

  7. 영화도 안보고 1점 찍는 개독들도 많아요.
    당신 개독들이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 ㅋㅋㅋ

    그리고 개봉전에는 별점 못찍습니다. 무식한 개독님아..

  8. 여러분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믿는것 입니다.
    교회를 나가라는 말이 아니고..
    예수님을 믿는 것,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교회를 다닌다고 모두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한국 교회가 욕을 덜 먹었겠죠.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아예 배척하지 마시고
    예수님을 꼭 믿으세요

  9. 댓글란이 왜이래;;; 무명 / 애로노프스키 영화가 보는 동안 힘들고, 보고 나면 허… 해지고 하니 당장 좋아하고 사랑하는 영화라고 말하고 평점 빵빵 때리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이 영화는 그의 전작들을 보고 감탄한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좀 말랑하기에 평점이 더 낮을 수도 있음요.
    그리스도인 / 글과 영화에 대해 말하지 않고 왠지 페니텐치아데를 외치기에 바쁘신 것 같은데, 아마 다른 데서도 그러시고 다니리라 믿습니다. 귀찮아서 C,V 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이런 무용한 일에 인생을 낭비하기를 바라시지 않을 것 같습니다.
    김현숙 / 노아가 인간을 말살하기 위해 방주를 짓는다 하지만, 그것은 영화의 내용과 다릅니다. 노아는 실제로 함의 아내를 찾아 주려 두발가인의 진영으로 가거든요. 다만 거기서 인간의 원죄를 깨달았고, 그래서 인류의 절멸이 신의 명령이라 믿은 것입니다. 인류를 절멸이 하나님의 의도였다는 것도 영화와 다릅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뜻이 인류의 절멸이었다면, 자기 명령을 무시하여 지구의 리셋을 무의미하게 만든 배덕자인 노아는 지옥불에 불타야죠, 그런데 신은 그와 후손을 축복하고, 앞으로 번성하며, 홍수도 다시 일으키지 않겠다고 약조합니다(무지개 뜬다구요 -_-). 몇 가지 차이가, 표면적으로도 명백하게 드러나 있는 영화 속 신의 뜻마저도 왜곡하여 듣게 했다면, 그리하여 신과 노아를 사이코패스라고 철썩같이 믿어버리게 했다면, 그냥 영화를 보신 다음에 정말 그 ‘몇 가지’가 정말로 영화 속에 잘 드러나 있는지 확인해 보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만약 그 정도의 해석에 대한 소문만으로도 영화가 보기 싫을 정도로 혐오스러운 것이라면, 말미에 적은 두 편의 영화 보시기 바랍니다. 비웃는 게 아니라, 진짜로 대단한 걸작들이고, 강력하게 추천하는 영화들입니다.
    그리고 .기독교 매체는 영화사의 명령을 받고 광고를 싣지 않습니다. 인정할 수 없는 이단적 내용에 대한 광고를 싣는 것이 신자의 분노를 산다면, 억만금을 받고서라도 게재하지 않았을 겁니다. 기독교매체 대상 광고가 영화사의 장삿속이라고 하신다면, 그 장삿속에 호응하여 광고를 걸어 준 매체 담당자들의 믿음은, 대체 얼마나 부박한 것일지요.
    믿음 / 구약의 신과 신약의 예수가 얼마나 다른지는 아시고 하시는 말씀이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이 분들 비판하시는, 비판하고 싶으신 분들께 말씀드립니다 / 개독이나 무지 같은 단어로 이들을 재단하는 것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종교적 삶 때문에 영화를 영화 내용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들이 바라본 반기독교적인 요소들이 실제 영화에서도 그렇게 표현되었는지 꼼꼼이 확인하고 제시하여 남을 설득하고 논쟁하는 단계에 이르지 못한 것이야 아쉬운 일입니다만, 이 분들이 통성기도한다고 교회에서 소리지르는 자들이나 입에 거품물고 십자가로 사람 때리는 광신도도 아니잖아요.

  10. 호모사피엔스, 인간이 창작한 예술마저도 신의 이름으로 재단하려는 자들은 도대체 뭘까요?

  11. 영화평론이 넘 좋습니다.
    감독의 의도가 인간의 선택이었다고는 하지만,
    저는 하나님의 긍휼이 묻어나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노아가 인간들의 악함을 보고, 스스로도 그들중 하나라고 여기고, 인간 멸절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기는 부분이 있는데, 정말 인간의 악함을 깨달은 사람은 그런 반응이 나오는게 사실입니다. 인간이 스스로를 그런 존재로 볼수 있다는 거가 정말 대단한 거지요.

    인류가 계속 번성하는 것을 막고자 하는 노아는 손녀딸들을 죽여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 하지만, 결국 그들을 향한 긍휼 때문에 실패합니다! 하나님 역시…. 심판받아 마땅한 사람들을 한번더 용서하시는 분이지요.
    노아가 하나님뜻을 어기고 손녀딸을 살린게 아니라 손녀딸을 본 순간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느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합니다.

    ( 감독의 의도가 아닌 크리스찬으로서의 제 생각임 )

    위의 평론하시는 분 말처럼.. 노아의 자손은 계속 노아가 기대했듯이 죄를 저지릅니다.
    인간은 그런 존재이지요.

    하지만, 노아의 방주가 예표한 예수님이 있습니다. 노아의 방주에 탔던, 인간의 죄인됨을 알았던 노아가 구원받은 것처럼,

    심판을 피하려면, 예수라는 방주에 타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가올 심판과 심판대상이 나라는 죄인임을 아는 사람만이 예수라는 방주에 탈수 있겠지요. 선택된 노아와 가족처럼…

  12. 종교영화는 아니니까 성경과 같을 필요는 당연히 없지요. 그렇긴 합니다만 신자가 아닌 사람들이 하느님에 대해 오해하게 만들 여지는 충분하게 있는 영화입니다. 인간이 결국 악하게 될 것을 아시면서도 결국 노아를 살려주셨고, 정의로 심판하시기 전에 친아드님이신 예수님을 보내셔서 자비로 세상을 구하고자 하십니다. 개독 개독 욕하는 것이 이해는 갑니다. 지행합일이 되지 않으니 그게 바로 하느님 욕보이게 되는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두발가인일족이나 두발가인이 하는 행동과 사고에서 제 모습을 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무섭고 두렵습니다. 저는 아직 입술로만 그리스도교인이니까요. 그런 면에서 영화는 그리스도교인인 제게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참 어려운 주제를 나름 잘 풀고자 한 노력도 엿보이고 한계성도 보이긴 했습니디만… 요는 무엇인가? 하느님께서는 자비로우신 분이라는 것. 마지막 기회를 예수님을 통해 주셨다는 것이고, 방주로 불러모으셨듯 지금도 예수님이라는 방주로 부르고 계시다는 점입니다.
    ps 한 가지. 이 영화 말고도, 타락천사가 인간을 동정하거나 조력자로 묘사하는 경우가 있는데,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타락천사가 바로 악마이며, 우리를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존재입니다. 천사에게는 두번째 기회를 주지 않으셨지만 인간에게는 몇번의 기회를 새로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 기회도 이제 마지막을 치닫고 있습니다. 흔히 말세다 말세다 하지 않습니까? 지금이 바로 말세입니다. 마지막 말, 세상 세.

  13. 성경에 대해 무지한 상태서 굳이
    이런 내용을 쓴 저의는?????
    최소한 성경내용을 찾아보고 알아보고서
    쓰시지
    머리가 딸리면 쓰지를 마세요
    억측한 내용들로 가득하네

  14. 성경에대해 너무 무지 하시면서이런글을 씀으로 스스로 무지하다는 것을 알린 꼴이 어버렸군요.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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