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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노아]는 성서를 훼손하는가: 성서와 영화 [노아] 비교

나는 대런 애로노프스키를 생각할 때마다 ‘희랍비극의 숭고함’을 떠올리고는 한다. 비극의 숭고함이란, 강건한 운명에 맞서 싸우는 주인공의 처절한 투쟁을 통해 관객들에게 정화(카타르시스)의 경험을 환기하는 데서 온다. 그러한 의미에서 대런 애로노프스키를 표현할 수 있는 하나의 단어를 꼽자면, ‘무자비’다.

대런 애로노프스키 혹은 무자비

마약으로 인해 몰락하는 현대 인간상을 그릴 때도(레퀴엠, 2000), 필멸성과의 투쟁을 우주의 탄생까지 이끌어나가는 놀라운 삼중주를 구사해 낼 때도(파운틴, 혹은 천 년을 흐르는 사랑, 2006), 무대 위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 자신을 깨달은 후 죽음을 무릅쓰고서라도 링에 오르는 레슬러를 묘사할 때도(레슬러, 2008), 완벽한 캐릭터를 위해 무너져 가는 발레리나를 그릴 때도(블랙 스완, 2010) 그는 물러서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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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로노프스키의 영화들은 무자비하다 (좌측 상단 시계방향부터, 레퀴엠, 파운틴, 블랙스완, 레슬러)

애로노프스키는 엄청나게 강렬한 캐릭터를 길 위에서 달리게 하고, 15톤 덤프트럭 같은 운명을 같은 길에 놓아 치킨게임을 벌이며, 결국은 정면충돌시킨다. 그리고 그 옆을 같이 달리되 눈을 부릅뜨고 그 모든 것을 지켜본다. 그 무자비함이야말로, 그가 관객들을 실어의 경지로 몰고 가는 비밀 중 하나다.

그런 면에서 [노아](2014)를 볼 때는 걱정 반에 기대 반이었다. 성경이라는 텍스트, 특히 구약은 이슬람과 기독교가 공유하는 (전 세계의 근본주의는 거의 다 아우르는) 무시무시한 텍스트이고, 구약의 신은 때때로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방식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 텍스트를 깨지 않는 한에서, 도대체 노아라는 캐릭터는 무슨 수로 운명과 투쟁하고, 고뇌하고, 절망하며, 결국 패배하여 관객을 격동시킬 것인가. 답이 잘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애로노프스키는 신기하게도 그 좁은 길을 달려나갔다. 그의 최고작품이라고 하기는 힘들지 몰라도, 어쨌든 대단한 일을 해냈다.

노아(Noah, 2014)

노아(Noah, 2014)

영화를 보고 나서 기독교도들이 꽤 화를 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성경을 뒤져 영화와 비교해 보았다. 성경 텍스트는 대한성서공회의 개역 성경을 따랐다.

S#1. 창조와 악의 번창 그리고 재창조… 다시 바벨탑 

여호와는 아담과 이브를 지은 후 에덴동산에 거하게 하며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6,17)

이것을 먹은 아담과 이브의 원죄에 대한 증표 중 하나는 가인이 아벨을 살해하고 에덴의 동쪽에 거하게 되는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가인의 자식들이 번성하여 지구를 파괴하고, 악을 퍼뜨리는 것이 영화의 첫 시작이다. 그리하여 여호와는 결국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 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고 말하며 세상을 완전히 날려 버릴 것을 결심한다(창6:7).

그러나 여기서 성경을 읽어 나가다 보면 이상한 점이 하나 있다. 노아는 9장 말미에서 죽는다. 10장은 그의 혈통이 전 세계로 퍼져 나가는 과정을 서술한다. 그리고 11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느냐 하면, 바벨탑을 짓는다. 그 이후 소돔과 고모라 등의 스펙터클한 악행들이 펼쳐진다. 그렇다면, 악인을 정화하기 위해 전 지구적인 말살마저 감수한 여호와의 의도는 실패한 것이 아닐까?

바벨탑. (화가: 대 피테르 브뢰겔 (1526/1530–1569), 위키백과 공용)

구약은 노아의 죽음 뒤에 인간의 악행이 창궐하고, 결국 바벨탑을 짓는 것으로 이어진다.(작품과 화가: 바벨탑, 대 피테르 브뢰겔(1526–1569), 1563년작, 위키백과 공용)

S#2. 노아, 인간은 결국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 것이다 

여기서 설정상의 차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성경에서는 노아를 셋(아담과 이브의 셋째 아들)의 후손이라 하며, 영화에서는 노아가 셋의 유일한 자손이라고 한다. 세계가 가인이 저지른 원죄에서 자유로워지려면, 노아의 후손들만이 새 세상에 남아야 한다. 그리하여 창세기에서는 “곧 그날에 노아와 그의 아들 셈, 함, 야벳과 노아의 처와 세 자부가 다 방주로 들어”간다(창7:13).

그런데 영화에서는 세 자부가 아닌 셈의 처 일라 만이 방주에 타며, 일라는 어렸을 때 겪은 부상으로 인해 아이를 가질 수 없다. 즉, 홍수는 피하였으나 인류는 결국 멸망할 운명이다. 노아 일족의 번성을 약속한 거대한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이는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라”고 약조하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성경 말씀(창7:1, 창9:1)과 배치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영화 초엽에서, 그리고 계속 반복되는 선악과의 이미지를 떠올릴 필요가 있다. 인류의 진정한 원죄가 여기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인류의 탄생 자체가 원죄를 품고 있다. 노아가 며느리를 찾으러 가인의 후손들 사이로 들어갔다가, 현실에 절망하고 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노아는 자신이 아무리 셋의 자손이라도, 인간은 결국 이 세계를 다시금 지옥으로 만들 수밖에 없음을 알아버린 것이다. 돌아온 그는 부인에게 말한다. 셈은 여인을 탐하고, 함은 질투가 심하고, 당신은 아이들을 위해 어떠한 어리석은 짓도 저지를 수 있으니, 우리 역시 그들과 다를 바가 없다.

영화 노아의 한 장면 (© MMXIV Paramount Pictures Corporation and Regency Engtertainment (USA), Inc. All Rights Reserved.)

영화 노아의 한 장면 (© MMXIV Paramount Pictures Corporation and Regency Engtertainment (USA), Inc. All Rights Reserved.)

이렇게 보면, 셈이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일라를 아내로 맞은 것도, 함과 야벳이 배필을 구하지 못한 것도, 결국에는 신의 뜻이 된다. 노아의 가족과 감시자들에 대한 신의 축복은 동물을 보존하여 인간이 없는 유토피아로서의 에덴을 재구성하기 위한 것이지 노아의 자손만을 번성시키기 위함은 아니다. 노아도 자신이 여호와에게 선택받은 것이, 이 일을 수행할 수 있는 자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노아의 선택은 많은 목숨을 구하기 위함이 아닌, 인간을 절멸시키겠다는 여호와의 뜻에 기반하고 있으며, 방주에 진입하고자 하는 두발가인 군과 노아의 전투가 처절한 것은 이 때문이다.

영화 노아의 한 장면 (© MMXIV Paramount Pictures Corporation and Regency Engtertainment (USA), Inc. All Rights Reserved.)

영화 노아의 한 장면 (© MMXIV Paramount Pictures Corporation and Regency Engtertainment (USA), Inc. All Rights Reserved.)

도움을 청하는 모든 인간의 목소리가 사라진 후, 노아는 불을 켜고 우주의 근원에 관해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 끝은 다음과 같다. 셈과 일라가 나와 어머니를 묻고, 함이 셈과 일라를 묻어주어라. 함이 죽으면 야벳이 함을 묻고, 세상의 마지막 인간이 되어라.

S#3. 인간은 다시는 번성해선 안 된다 

그러나 이러한 노아/여호와의 계획은 실패해야만 한다(지금 글을 쓰는 나나 읽는 사람들이 그 반증이다.). 그리하여 그 “어떠한 어리석은 짓도 저지를 수 있”는 어머니가 아이들의 행복을 위해 므두셀라 할아버지를 찾아간다. 간청을 들은 므두셀라는 일라의 배에 축복을 내려 회임이 가능한 몸을 만든다. 일라는 갑자기 정욕이 일어 방주에 타기 전에 일단 관계부터 가지고, 아니나 다를까, 셈의 아이를 가진다.

영화 노아의 한 장면 (© MMXIV Paramount Pictures Corporation and Regency Engtertainment (USA), Inc. All Rights Reserved.)

영화 노아의 한 장면 (© MMXIV Paramount Pictures Corporation and Regency Engtertainment (USA), Inc. All Rights Reserved.)

그러나 임신 소식을 들은 노아는 노호한다. 인간이 다시 번성하여 지구에 악을 퍼뜨리게 된다면, 저 많은 사람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헛되이 죽어야만 했던 것인가. 왜 신의 뜻을 거슬러 악의 씨앗을 다시 퍼뜨리려 하는 것인가. 신의 뜻이 인류의 절멸이라면, 번식이 가능한 모든 여지를 없애야만 하고, 그것은 노아의 책무가 된다.

노아는 신의 뜻을 따르기 위해 며느리에게 말한다: 아들이면 살려 두겠지만, 딸이라면 죽일 것이다. 분노하여 그 이유를 캐묻는 부인에게 노아는 이렇게 답한다. “그것이 정의롭기 때문이오(it’s just).”

이렇게 애로노프스키스러운 극단적 몰락의 환경이 갖추어지고, 고뇌와 투쟁의 시기가 찾아온다. 그러나 인류는 살아남아 바벨탑을 지어야 하므로(…), 노아의 위업은 실패해야만 하고, 아이는 딸이어야 하며, 정화된 지구에 안착해야만 한다. 결국, 절망한 노아는 하늘을 바라보며 말한다. 못 하겠습니다.

S#4. 노아가 다시 얻은 선택권과 떠오르는 무지개 

결국, 노아는 여호와의 명령을 실현하는 데 실패하고야 만다. 감독은 여기서 또 하나의 트릭을 사용하는데, 무지개로 언약의 증거를 삼는 장면(창9:17)과 노아가 농사를 지어 포도주를 담가먹는 장면(창9:20)의 순서를 바꾸는 것이다.

영화에서 절망한 노아는 집을 떠나고, 해변가 동굴에서 죽어라고 포도주를 퍼마시고, 벌거벗은 채 잠이 든다. 그리고 나중에 며느리 일라가 찾아온다. 그녀는 노아에게 묻는다. 왜 집을 버리고 혼자 나와 이렇게 술만 자시고 계십니까. 노아는 말한다. 나는 창조주의 뜻을 저버렸고, 가족도 저버렸다. 아이를 죽이지 못하였으니 심판을 원하신 여호와의 계획을 망쳤고, 아이를 죽이려 하였으니 가족도 저버렸다.

그러나 일라는 그 말을 부정한다. 그 분은 당신께 선택의 여지를 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영화는 첫 장면과 다시금 공명한다. 아담과 이브에게는 열매를 따 먹을 수 있는 능력과 이를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고, 이들은 열매를 먹을 것을 선택했다. 노아에게는 인류를 절멸시킬 수 있는 능력과 이를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고, 그는 인류를 다시 시작할 것을 선택했다. 그리하여 그는 집으로 돌아가고, 자신의 자손을 축복해 주며, 그 축복의 순간에 비로소 무지개가 떠오른다.

“내가 너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창9:12,창9:13)

S#5. 그 누구도 신의 뜻을 알지 못한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당장 성경을 아주 문자 그대로 읽는 사람들이 분노할 만한 포인트가 뭔지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 영화에 대해 무작정 ‘성경과 다르다’며 비판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은 절멸이 아니”며 “모세는 배덕자가 아니”라며 소리를 친다면, 나는 이들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가정 하나를 잊고 있다고 말해 줄 수 있다.

그 누구도 신의 뜻을 알지 못한다(아들 이삭을 불태우러 가는 아브라함이 그러한데(창22:1~14), 천사나 여호와의 말씀이 정말 여호와의 말씀인지에 대해 아브라함은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는다. 여기 비하면 수혈을 거부하는 여호와의 증인들은, 정말 양반이다.). 그래서 사실 이 영화에서 신의 뜻이 명시적으로/객관적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몇 번 있는지 찾아보는 것은 중요한 감상 과정 중 하나다.

내가 찾은 것은 세 가지인데, 1) 방주를 지을 숲이 생겨나는 과정이 그 첫째이고(방주를 지으라는 것은 불변의 가정이다), 2) 죽음을 맞은 감시자들이 다시 여호와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 그 둘째이며(노아의 자손들만을 방주에 태워야 하므로, 또한 불변의 가정이다.), 3) 노아가 자손을 축복할 때 무지개가 떠오르는 것이 그 셋째이다.

그리고 셋째의 무지개는 노아가 알고 있었던, 그리고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정당화의 근거로 작동하는 신의 뜻이, 사실은 노아의 선택을 거쳐 선택된 자손의 융성이었음을 나타낸다고 볼 수도 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영화는 성경의 텍스트와 크게 배치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영화 [노아]는 성경을 훼손하는가

결과적으로 감독은 굉장히 까다로운 (그리고 민감한) 텍스트를 돌파해 나가는 데 따르는 제약을 돌파했으며, 그 과정에 자신의 스타일에 맞추어 강렬한 주인공이 운명과 대결하는 과정을 심어내기까지 했다. 하지만 영화 언어상의 한계가 있다는 주장은 정당할 수 있다. 성경의 스펙터클, 원문훼손을 금하는 경전으로서의 자격 등의 제약은 굉장히 강건한 것이고, 나 자신도 그것을 구현하는 과정에서 살짝 고개를 갸웃할 만한 부분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성경 말씀을 훼손했다고 말한다면, 글쎄…… 그것은 자신 혹은 교회 목사님/성당 신부님/이슬람 회당의 사제님이 해석해 주신 대로의 신의 뜻을 영화 속에서 원형 그대로 보기를 원하는 욕심 아닐까? 그런 분들은 VHS로 틀어주는, 성우가 에코 잔뜩 먹인 목소리로 감동 차게 성경말씀 읊어 주는 나레이션 있는 영상물을 보는 것밖에는 답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텍스트는 찾아보면 산처럼 나올 테니, 계속 확인하고, 계속 울면 된다. 굳이 걸작을 통해 그 목소리를 듣고 싶다면 세실 드밀 감독의 [십계]나 [왕중왕]을 보면 된다. 받아들일 생각도, 숙고해 볼 여지도 없을, 그리고 [블랙 스완]의 애로노프스키라는 경고장까지 떠 있는 영화를, 굳이 돈까지 내고, 인생의 두 시간여를 낭비하며 볼 이유가 없다.

게다가 그분들이 평점까지 깎는데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이런 무용한 일에 인생을 낭비하기를 바라시지 않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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