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고(LEGO)는 덴마크를 대표하는 기업 중 하나다. 레고의 대표 제품은 플라스틱 블록 장난감이다. 장난감이라고는 하지만 아이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레고를 갖고 노는 어른도 많다. 신제품이 출시되면 수십만 원을 들여 구매하고, 희귀한 모델은 웃돈을 얹어 사기도 한다. 레고를 활용해 작품을 만드는 레고아트까지 나왔다. 레고사 전체 판매 수익의 10%가 어른용 레고에서 나온다고 한다. 물론 어린이용 레고를 사는 돈도 어른 주머니에서 나온다.
#1. 레고의 역사
레고는 주식회사가 아닌 개인 가문 소유 기업이다. 20세기 초 대공황의 먹구름은 덴마크의 시골 빌룬드에 있는 목수에게도 드리워졌다. 하지만 목수는 이렇게 생각했다.
‘시대가 암울할수록 사람들은 장난감을 원하지 않을까?’
상식적으로 불경기에는 생필품을 제외한 물품의 소비는 오히려 줄지 않나 생각할 법도 한데 실제로 불황에 장난감 매출은 증가한다고 한다. 경기가 어려워지면 과거에 대한 향수가 커져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퇴행 현상’이 는다고. 마케팅 전문가도 놀랄 혜안이자 콜럼버스가 흐뭇해할 낙천적 역발상의 대가다.
솜씨 좋은 목수였던 결단력의 사나이 올레 키르크 크리스티안센(Ole Kirk Christiansen)은 1932년 목공소를 접고 나무를 깎아 장난감을 만들어 팔기로 했다. 장난감 공장으로 업종을 전환하면서 ‘크리스텐센 장난감’이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레고, 전설의 시작
사업이 조금씩 자리가 잡히자 크리스텐센은 자신의 이름보다는 뭔가 제대로 된 ‘브랜드’가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지역지에 집에서 담근 포도주 한 병을 상품으로 내걸고 장난감 회사의 이름을 공모했다. 거기서 당선된 이름이 레고(LEGO)다. ‘잘 놀다’라는 뜻의 덴마크어 ‘LEG GODT’의 앞 글자를 따서 지었다.
누구의 아이디어였냐고? 바로 크리스텐센 본인이 낸 아이디어다. 공모전 주최자가 우승자가 된 다소 민망한 상황에서도 크리스텐센은 “역시 내 아이디어가 최고야!” 감탄하며 상품인 와인으로 축배를 들었다나 뭐라나. 당시에는 몰랐지만, 나중에 보니 라틴어로는 ‘레고’가 ‘조립하다’라는 뜻이었다고. 크리스텐센은 무릎을 치며 자신의 선견지명에 감탄했다는 후문이다.
초기의 레고 공장에는 7명이 옹기종기 앉아 나무 장난감을 만들었다. 깐깐한 성격의 올레 크리스텐센은 ‘최고의 품질로 만들어야 괜찮다는 소리 듣는다’며 직원을 닦달했다. 그 덕에 레고는 품질 좋은 장난감으로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올레에게는 네 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중 셋째인 고트프레드는 이미 12살부터 생산라인에서 일하며 직접 장난감 디자인도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레고는 목각 비행기, 동물, 곰돌이 인형까지 닥치는 대로 모든 종류의 장난감을 생산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2대 경영자가 된 고트프레드는 1963년 경영 혁신을 위해 ‘LEGO(잘놀기)의 열 가지 원칙’을 공표했다. 앞으로 레고는 이 열 가지 원칙을 기준으로 제품을 기획하고 생산하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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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GO(잘놀기)의 열 가지 원칙’
- 놀이의 무한한 확장성
- 남녀 모두 즐기는 놀이
- 모든 연령대가 즐기는 놀이
- 일 년 내내 갖고 놀기
- 건강하고 조용히 놀기
- 오래 갖고 놀기
- 발전, 상상력, 창의력을 키워줄 것
- 레고가 많아질수록 가치가 커질 것
- 추가 구매가 가능할 것
- 작은 것 하나하나 최고의 품질을 구현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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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수가! 일 년 내내 조용히, 그것도 오래 갖고 논다고? 이것은 모든 부모가 원하는 꿈의 장난감이 아닌가? 이렇게만 된다면야 우리 부모님께도 사드리겠다.
그래 블록이야!
고트프레드는 레고의 모든 제품을 하나하나 살폈다. 꼼꼼히 봐 가며 열 가지 원칙에 가장 적합한 제품을 골랐다. 그게 바로 당시에는 별 인기 없던 블록 장난감이다. 고트프레드는 블록 장난감이야말로 자신의 발표한 열 가지 원칙에 가장 부합하는 제품이라 판단했다.
신임 경영자는 경영학의 고전인 선택과 집중 전략을 펴는 동시에 글로벌 마케팅에 박차를 가했다. 얼마 안 가 레고는 덴마크를 넘어 유럽시장에 빠르게 퍼지기 시작했다. 화재로 공장을 한번 태워 먹은 후, 1947년부터는 기존의 나무 블록과 함께 플라스틱 제품도 함께 생산했다. 그 덕에 생산 물량이 크게 늘었다. 지금은 레고가 없는 아이를 찾기 어렵다. 레고는 아이들이 가장 받고 싶은 선물 목록에 빠지지 않고 이름을 올린다. 통계에 따르면 전 세계 인구 1인당 86조각의 레고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1989년 레고 블록 제작의 특허권이 종료됐다. 블록 시장의 유일한 공급자였던 레고를 위협하는 경쟁자가 속속 등장했다. 중국의 코코 토이, 캐나다의 메가블록 같은 경쟁사는 한층 싼 값에 비슷한 제품을 내고 있다. 그래도 레고의 아성은 흔들리지 않는다. 품질에서는 한치의 타협도 없다는 창업주의 정신이 그대로 살아있기 때문이다.
고트프레드가 주창한 ‘레고의 10가지 원칙’이 말하듯 레고는 철학이 담긴 장난감이다. 레고는 그냥 한번 갖고 노는 장난감이 아니다. 만드는 사람의 상상력에 따라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무한한 변화의 가능성을 담고 있다. 레고를 활용해 예술 작품까지 만든다. 강한 브랜드를 중심으로 레고는 영화, 게임, 레고랜드 테마파크, 아동복, 경영 컨설팅까지 사업의 가지를 넓히고 있다.
레고는 강력한 브랜드와 충성도 높은 고객, 세계적 판로 덕에 공동마케팅 최고의 파트너로 꼽힌다. 레고의 중장비 세트에는 다국적 에너지 기업인 로열 더치 쉘(Royal Dutch Shell)의 로고가 찍혀나간다. 원유 시추를 위해 사정없이 땅에 구멍을 내는 통에 환경 운동 단체의 단골 공격 대상인 기업이다.
환경 운동계의 큰언니 그린피스는 로열 더치 쉘의 노란 조개 모양 로고가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의 장난감에 찍혀 나가는 걸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다며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레고는 환경단체의 반발에 못이겨 쉘과 맺은 기존 계약이 종료되면 더는 갱신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종료 시점은 밝히지 않았다. 설마 영구 계약인 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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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레고와 다국적 에너지 기업 쉘의 관계 청산을 끌어낸 그린피스의 캠페인 동영상이다. 레고 블록을 이용해 쉘이 북극에 초래하는 환경 오염을 비판하고, 쉘과 레고의 파트너십 청산을 요구한다. 현재(’17년 7월 4일) 조회 수 800만을 넘겼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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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제품 출시 때마다 라이선싱(특허사용계약)으로 특정 주제 세트를 내는 것도 레고가 자주 쓰는 공동 마케팅 기법이다. 스타워즈, 배트맨, 마인크라프트, 인디애나 존스 등은 출시와 동시에 매진 기록을 세울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나는 해리포터 레고를 갖고 있다.
재미있는 사실 하나! 레고는 금호타이어나 미셸린을 앞지르는 타이어 제조사이기도 하다. 레고 제품에 들어가는 자동차용 미니 타이어를 매년 3억 개가 넘게 생산하고 있으니 말이다.
#2. 여자 과학자 레고?
2014년 1월 어느 날, 레고 본사에 편지가 한 통 날아왔다. 이메일이 아니다. 요즘 받기 어렵다는 손편지였다.
친애하는 레고사에게,
내 이름은 샬롯이에요. 저는 7살이고, 레고를 좋아해요. 하지만 레고에 남자 사람이 많고, 여자 레고는 별로 없다는 점이 마음에 안 들어요. 오늘 가게에 갔다가 레고를 봤는데 여자는 핑크, 남자는 파랑으로 돼 있었어요. 여자들은 다 집에 앉아있거나, 바닷가에 가거나, 쇼핑을 하고 직업이 없었어요.
하지만 남자들은 모험을 하고, 일하고, 생명을 구하고, 직업도 있고, 상어랑 수영도 했어요. 여자 레고를 더 많이 만들어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모험도 하고 재밌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오케이?!?
고맙습니다.
샬롯으로부터
일곱 살짜리 샬롯 벤자민의 편지는 SNS를 통해 퍼지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왜 성차별에 대해 훨씬 더 많이 노출된 어른들은 그걸 몰랐을까? 거기다 레고라면 성평등 지수 상위에 꼽히는 덴마크 기업 아닌가? 화들짝 놀란 레고는 대변인을 통해 재빠르게 마침 여성 전문가 시리즈를 구상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그리고 그해 여름 곧바로 여성 과학자 시리즈를 출시했다. 티라노사우루스 뼈대 앞에 확대경을 들고 있는 고생물학자, 천체망원경을 만지고 있는 천문학자, 플라스크를 들고 있는 화학자, 이렇게 세 명의 여성 과학자로 구성된 시리즈였다.
레고에는 아이디어 제안 사이트가 있다. 다음번 레고 시리즈로 개발 됐으면 좋겠다 싶은 아이디어를 올리는 것이다. 아이디어 중 1만 표 이상의 지지를 받은 레고는 한정판으로 제작해 판매한다. 여성 과학자 시리즈는 2014년 8월 출시 일주일 만에 매진됐다.
레고 팬들의 소장 아이템으로 등극한 여성 과학자 시리즈는 엘렌 쿠지만(Ellen Koojiman)이라는 지구화학자가 제안한 것이다. 엘렌은 스웨덴 자연사 박물관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여자 과학자의 관점에서 레고 여성 과학자 시리즈가 대체적으로 자신의 제안을 잘 구현했지만, 아쉬운 점이 있다고 했다. 화학자 미니 피규어가 보호장갑을 착용하지 않았고(세상에나!), 화장을 했는데, 화학자는 샘플에 감염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연구소에서 화장은 하지 않는다고 했다.
여성 과학자의 다음 시리즈도 대기 중이다. 샬롯의 바람 중에 “모험을 하면서 재밌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부분을 반영한 여성 모험가 시리즈다. 이미 1만 표를 모았고 레고에서 제작을 공식 검토 중이다. 지금까지 나온 샘플은 한 손에 워키토키를 들고 시베리안 호랑이를 관찰하고 있는 야생 동물학자와, 유적지에서 삽과 붓을 들고 해골을 살피는 고고학자, 나침반과 망치를 들고 특이한 암석구조물을 살피고 있는 지질학자, 이렇게 셋이다.
스웨덴 백화점의 장난감 코너에 가봤다. 장난감 인형 상자에는 남자아이가 다정한 눈으로 아기 인형을 안고 있었다. 쭉 뻗은 팔보다 큰 총을 들고 진지한 표정으로 표적을 겨냥하는 여자아이가 모델인 장난감 총 상자도 있었다. 남자와 여자가 같이 인형의 집을 갖고 놀거나, 사이 좋게 다림질을 하고 청소기를 돌리는 광고도 있다. 한국의 마트에 가면 ‘남아 완구’라는 코너가 있다. 총, 로봇, 조립식 완구 등이 쌓여있다. 반면 여아용에는 인형과 인형의 집이 가득 쌓여있다. 하지만 어릴 적 나처럼 공룡을 좋아하는 여자아이도 있을 수 있지 않은가?
스웨덴의 양성평등은 도가 지나쳐 ‘남자아이가 남자다운 놀이를 못 하게 한다’는 의견도 있다. 여성은 전통적으로 남성의 영역이라 여겨지는 곳에 진출하는 것이 자유롭지만 남성의 경우는 어렵다. 예를 들어 여자 산타는 되지만 남자 요정은 안되는 식이다.
스웨덴 친구 베릿이 네 살배기 딸 아멜리아가 만들었다며 레고 모형을 사진으로 보내왔다. 아멜리아의 세상에서는 아기가 탄 유모차를 아빠가 끌고 있었다. 아기가 먹는 젖병도 아빠 옆에 있다. 엄마는 아기 옆에서 헬리콥터를 몰고 있다. 한국 사회라면 그 반대 상황을 예상할 것이다. 아멜리아야, 너희 엄마의 직업은 생물학자란다. 엄마에 대한 의존도가 높을 수밖에 없는 네 살짜리 스웨덴 아이의 세상에서 이미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은 찾아보기 어렵다.
2016년 6월 출시된 레고 신제품에는, 뒤늦긴 했지만, 휠체어를 탄 피규어가 포함되었다. 아이들은 장난감을 통해 세상을 배운다. 아이들의 놀이 속 세상이 현실을 반영했으면 좋겠다. 세상엔 완벽한 존재만이 아닌 다양한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 다름이 우열의 기준이 되지 않는다는 것, 놀이 가운데 모두가 소중하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
난 그래서 바비보다 레고가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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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필자의 책 [북유럽 비즈니스 산책] B컷(책에 포함되지 않은 원고) 중 하나입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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