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아주 오랫동안 미국에 유학 중이었다. 그리고 지난 6월 7년 만에 고국을 찾았다. 7년 만에 만난 캡콜드 혹은 김낙호는, 겉으로 보기엔, 약간 살이 찐 것 빼고는, 변한 게 없어 보였다. 하지만 매일매일이 전투 같았을 유학생활의 고단함은 숨은 그림 찾기처럼 굳이 보려 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법이다. 이제 그는 내가 보기엔 어엿한 대학교수지만, 그는 자신을 미국 대학에서 일하는 “외노자(외국인 노동자)”라고 일축했다. 그게 캡콜드 스타일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캡콜드는 내가 오랜 시간 동안 그 글을 읽고, 사회 현안에 관해 대화한 그 모든 사람을 통틀어 가장 똑똑한 사람 가운데 한 명이다. 그래서 이 인터뷰의 컨셉은 ‘캡콜드에게 무엇이든 물어보세요’다. 나는 인터뷰어지만, 무엇보다 ‘미디어’에 관심이 있는 독자 입장에서 그에게 이것저것을 물었다.
저널리즘이 처한 문제 상황과 그 한국적 특수성, 디지털 미디어, 특히 페이스북이 지배하는 모바일 환경 속에서 제정신으로 살아남는 법에 관해 그에게 물었고, 캡콜드가 추천하는 미드와 만화도 궁금했다. 세 시간 남짓의 첫 번째 인터뷰로는 부족해 네 시간 가까운 인터뷰를 한 번 더 해야 했다. 그 두 번의 인터뷰에서 그가 가장 강조한 건 ‘개그 본능’. 하지만 나는 그 개그의 정체를 여전히 모르겠다. 그게 또 여전히 그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캡콜드의 개그 본능이 무엇인지 궁금한 분들은 이 미궁 같은 인터뷰,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잘 따라오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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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 6. 17 (강남구청, 어느 작은 까페)
- 2017. 6. 23 (수지구청, 역 근처 샌드위치 가게)
- 인터뷰이: 캡콜드(김낙호), 인터뷰어: 민노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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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소개.
블로거 캡콜드, (만화와 미디어) 비평가 김낙호.
– 오프라인 정체성은 대학교수고, 문화비평가 김낙호인데, 또 다른 한편에서는 블로거 캡콜드다.
PC 통신 시절에 아이디(ID)가 필요하고, 한 번 정하면 못 바꾸기 때문에. 당시에 다들 인디언 이름처럼 나를 가장 잘 표현해주는 닉네임을 정했고, 그게 나에게는 캡콜드(capcold), “완전 썰렁”이다. 캡콜드와 김낙호는 역할의 차이는 아니고, 외부 세계에서 요구하는 격식(가령 종이신문에서 기고를 요청할 때는 김낙호)의 차이에 불과하다.
개그에 관하여
– 본인을 굉장히 재미있는 사람, 개그 본능이 충만한 사람으로 ‘주장’하는데.
내가 재미있는 사람은 아닐 수 있다. 왜냐하면, 재미는 상대방이(혹은 상대방도) 느껴야 하니까. 하지만 개그 본능은 오롯이 나만의 것이다.
– 오롯이? 개그는 자신만의 세계 같은 것?
그렇다. 내가 연구하는 언론학, 문화 비평, 특히 만화 비평 등은 내 개그 본능에서 파생한 것일 뿐이다.
– 개그 스타일은 썰렁 개그?
(내가) 개그를 했는지 (상대방, 독자가) 한참 지난 뒤에야 깨닫게 되는 것.
– 얼마나 나중에?
5초 뒤가 될 수도 있고, 5년 뒤가 될 수도 있고.
– 개그의 본질은 뭐라고 보나.
익숙한 것을 소재로 가져와서 그것에 담긴 상투적인 의미·이미지를 완전히 깨고, 그 새것을 다시 익숙하게 만드는 행위. 내가 하는 여러 말장난은 여기에 속하는 개그다.
– 예를 들면.
예를 들어 지나가다가 이런 버스 창문을 발견한다. “수원 의양 안양”이라는 안내를, 그냥 당연하다는 듯 “나는 수원의 왕이 아니야”(마지막을 귀엽게 읽어줘야만 통한다)로 해석해주는 식이다.
– 독자들 평가 중에는 이런 게 있다. “캡콜드 똑똑한 건 알겠다. 그런데 웃긴지는 모르겠다. 인공지능이 쓴 글 같다.” 나도 아주 공감하고, 동의하는 평인데, 본인은 어떻게 생각하나.
칭찬으로 생각한다. (어떤 점에서) 간단히 진영이나 사람을 중심으로 두고 쓰지 않고, 어떤 현상, 이슈의 운동원리나 작동방식을 중심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한다.
– 예를 들면.
‘어떤 식으로 사람‘들’이 갈등해서 이 모양이다’ 라든지. 한 명의 주인공으로 두는 게 아니라, 여러 갈등하는 주체들의 역학 자체를 설명하려고 노력한다. 긴 글을 쓸 때는 갈등하는 주체들의 다양한 역할과 그 역학에 접근하려 노력하고, 짧은 글을 쓸 때는 단도직입적으로 그런 역학이 존재한다고, 핵심만 논리를 펼치고 끝내는 경우가 많다.
– 긴 글의 대표는?
슬로우뉴스에 쓴 세월호 문제 해결을 위한 4단계 접근법 (2014. 8. 25)
– 짧은 글의 대표는?
블로그에 올린 비트코인에 대한 짤막한 메모 (2013. 11. 28)
– 중간 글의 대표?
한국일보 칼럼인 ‘헬조선’의 정치적 효능감 (2015. 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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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콜드 추천 미드 (TV 애니 포함)
1. 더 와이어 (The Wire, 2002-2008)
“미국 도시 생활의 모든 문제가 단순화되지 않고, 빽빽이 엮여 있다. 도시 사회학 교과서.”
2. 왕좌의 게임 (Game of Thrones, 2011-)
“정의롭기만 하면 죽는다. 중세 판타지의 탈을 쓴 현대 정치학의 교과서.”
3. 커뮤니티 (Community, 2009-2015)
“장르에 대한 심오한 이해. 인간에 대한 냉소적 애정.”
4. 퓨처라마 (Futurama, 1999-2013)
“SF에서 기대할 수 있는 모든 소재와 내용을 개그로 녹여낸 희대의 애니메이션.”
5. 어드벤처타임 (Adventure Time, 2010-)
“아동 모험 활극의 탈을 뒤집어 쓴, 성장과 관계와 상상력 그 자체에 대한 속 깊은 코미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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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론장과 캐릭터 그리고 삼국지
– 우리 사회에 공론장은 존재하는가. 우선 ‘공론장’의 개념은 뭔가. 교수스럽지 않게 중학생이 이해할 만큼 쉽게 설명하면.
하버마스가 체계화한 공론장의 개념은 사적인 생활 체험과 공적인 체계 사이를 연결하는 소통의 장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저 공적 사안을 도마에 올리는 것만으로는 공론장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한국에서는 흔히 공적인 문제를 사적으로 해소하려고 하든지 공적 사안을 사적인 잡담으로 소화하곤 한다. 가령 대표적으로 포장마차 좌담은 공론장이 아니라, 공적 담론을 오락화한 것이다.
– “포장마차 좌담”은 왜 공론장이 아닌가? 이미지와 인상비평에 치우치긴 하지만, 솔직하고 생생한 서민의 담론인데.
그런 긍정적인 속성은 인정하지만, 거기에서 끝나버리는 게 문제다. 모든 것을 ‘캐릭터’화한다. 공적인 정치 현실을 삼국지화한다.
– 우리 삶을 바꿀 수 있는 정책, 제도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정치인들을 영웅화, 스타화한다?
영웅화든 악마화든 상관없다. 그리고 자기 자신은 그 캐릭터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예를 들어 아이돌 A와 B가 서로 싸우는 것처럼 이야기하지, 자신이 그 이야기의 캐릭터(‘배역’)로 등장하지는 않는다.
– 대중은 정치인, 연예인에게 자신의 욕망(소망)을 투사하고, 정치인과 연예인은 이 욕망(소망)을 대리하며, 이것은 정치의 영역에 한정하면 간접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절차적 원리 아닌가.
그걸 ‘정책’으로 하지 않고, 캐릭터로 한다는 게 문제다.
– 그 뿌리는 뭘까.
그렇게 캐릭터로 이야기하는 게 재미있으니까. 그런데 여기에서 언론은 그 흐름을 견제하고 공적 함의와 제도적인 논의로 끌고 와야 하는데, 여론에 편승하는 쪽으로 콘텐츠를 만들어 왔다.
– 나꼼수 류의 정치 엔터테인멘트에 대해선 어떻게 보나.
재밌는 오락이다. 사람들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기에는 꽤 효과적이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그것만으로 정치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건 아니고, 특히 자신의 삶과 제도 정치를 연결하는 공론장 역할을 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 “나꼼수를 통해 현실정치에 관심을 두게 됐고, 눈을 떴다.” 이런 분들 많다.
딱 관심까지다. 그 관심 다음에 채워야 하는 것은 자신의 생각이다. 자신의 생활 현실과 정치를 연결하는 과정은 스스로 공부하고, 성찰을 통해서 채워야 하는데, 순간의 통쾌함으로 덮어버리면, 당장 기분은 좋지만 길게 보면 오히려 공허해진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 그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더 자극적인 통쾌함, 가령 음모론과 상대방에 대한 악마화에 빠진다.
– ‘악마화’란?
상대는 악의를 가지고 나를 절명시키려는 재앙이며, 내가 당하지 않으려면 상대방이라는 적을 절멸시켜야 한다는 사고 체계 혹은 서사.
– 악마화를 가장 빈번하게 또 가장 잘(?) 구사하는 곳은?
일베. 지금은 오유도 꽤 비슷하지만.
– 기성 매체들 중에선?
조선일보가 갑인데, 악마화만으로 설명하기 부족한 기술력이 있다. 조선일보는 상대방을 물리쳐야 한다기보다는 상대를 노예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에 가깝다. 악마화보다는 노예화. 가령 노조를 대하는 태도, 세월호 집회 시민들을 다루는 방식… 나(조선일보)의 철학과 세계관을 따라야 잘 살 수 있다는 태도, 내(조선일보)가 하라는 대로 해야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데, 왜 깝죽거리냐는 태도.
– 악마화 이야기는 팟캐스트, 특히 나꼼수 이야기하면서 나왔던 이야기이기도 하다.
자기 맘에 안 들면 모두 ‘적’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문재인 팬덤에 꽂힌 몇몇 지명도 있는 팟캐스트조차 현대적 정당정치를 전혀 모르는 것처럼 다른 모든 정당은 멸망시켜야 할 존재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 팟캐스트가 열혈 문 지지자의 인식을 확대 강화하고,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고 일부에선 평가하는데.
그렇다고 생각한다. ‘이론적 근거’라고 하기는 내용이 너무 부실하지만, 그런 인식을 강화하는 것은 맞는 것 같다. 이론도 아니고, 근거도 아니며, 확신만 강화하는 셈이다.
– 팟캐스트의 영향력은 앞으로도 유지될까.
그렇다. 미국 사례를 봐도, 90년 중반 이후 극단적인 토크 라디오의 진행자들이 여전히 백만장자로 떵떵거린다. 빌 오라일리, 글렌 백, 러쉬 림보 등등.
– 전부 보수 혹은 극우로 분류되는데.
미국 사회문화를 관통하는 지난 20년간의 경향성을 거칠게 요약하면, 진보는 코미디(풍자), 보수는 분노다. 대중 정치담론의 정서를 그렇게 가져갔다. 문화를 느끼는 방식에 나오는 차이라고 생각하는데, 진보는 사회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지적인 우월감을 표현하고, 강력한 표현의 자유를 내세웠다. 보수 쪽에선 만들어진 ‘소외감’ 위에서 그것을 대신 통쾌하게 풀어주는 것, ‘사이다’스러움에 주목했다. 정치도 썩었고, 언론도 리버럴이 장악했으나 이제는 내가 나왔다는 식으로.
다만 최근에는 특히 월가 점령 시위 이후 좀 섞이는 트렌드가 있는데, 진보 성향의 버니 샌더스가 지난 미 대선에서 분노의 흐름에 편승해서 바람을 일으킨 측면이 진보(코미디, 풍자)가 분노의 코드를 활용한 예로 보인다. 샌더스는 민주당 경쟁 후보 힐러리 클린턴과 기성 정치권을 꽤 악마화했다. 그리고 얄궂게도 그 끝에는 우익 트럼프의 당선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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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콜드 추천 기사, 방송보도
1. 노동OTL (한겨레21)
“기자들을 현장에 보낸다는 건 이런 의미다.”
2. 사회계약 다시 쓰자 (경향신문)
“지적으로 완성도 높은 기획. 경향신문의 망한 홍보력으로 인해, 파장은 제한적.”
3. 세월호는 끝나지 않았다 (한겨레21)
“자료의 추적에서 남다른 지속성과 깊이.”
4. ‘팩트체크’ (JTBC 뉴스룸)
“숙제하는 언론.”
5. 조세도피처의 한국인들 (뉴스타파)
“국제 협력 프로젝트에 뒤처짐 없이 한국 맥락을 캐낸 좋은 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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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기성 언론에 관하여
– 한국 기성 언론에 대해 총평하면.
한편으로는 지사적인 전통이 강하고(예: 한겨레의 ‘덤벼라 문빠들’ 소동, 조동의 선거 기간 중 ‘문재인 망국론’), 다른 한편으로는 사업적 성공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것. 멀게는 자전거 선물, 가깝게는 특종 가로채기가 생각난다.
뉴스룸
– JTBC 뉴스룸은 어떻게 보나.
손석희가 부상시켰으나 손석희를 넘어서진 못했다. 손석희가 지닌 저널리즘의 사회적 역할론은 잘 수행하고 있지만, 특종 가로채기(가령, ‘성완종 특종’ 가로채기) 등으로 대표되는 저널리즘의 전문성 측면에서는 개선 여지가 많아 보인다.
– 이명박, 박근혜 9년간 지상파(특히 MBC, KBS) 방송 뉴스의 저널리즘적 가치는 사실상 소멸했다. 그 와중에 ‘뉴스룸’은 보도 부문에서 일종의 ‘대표성’을 획득한 것으로 보이는데, 현재 구도는 얼마나 유지될 것으로 보나.
홍석현 회장에게 이득이 되는 동안은 현재의 독립적 기조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손석희를 자르지 않을 것이고, 손석희가 자기 저널리즘 규범에 따라 지금처럼 뉴스룸을 이끌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본질에서 재벌 지배구조이기 때문에 오너에 대한 견제 장치가 없다.
– 손석희가 스스로 원하지 않는 상황(스스로 어떤 이유로든 은퇴하는 것)은 별론으로, 손석희를 쫓아내기는 굉장히 어려운 것 같은데, 아니 현재로선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데, 그런 상황이 있을 수 있다고 보나.
충분히 있을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손석희가 축출된다면, 그 상황이 ‘삼성을 비판해서 잘릴 것이다’ 정도로 단순하지는 않을 거고, 그보다 치명적인 상황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런 상황이 올 경우에 저항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
– 저항할 방법이 없다는 건, 중앙 미디어의 ‘오너’ 그룹이 시청자와 독자를 무시하고 갈 것이라는 이야기인가.
소비자 저항 정도로는 실질적인 저항력을 발휘하기 어렵고, 적어도 기자가 사장을 직선하는 정도의 제도가 정착해야 저항력이 생긴다. 그렇다고 또 사장 직선제가 절대 선이라는 건 아니다.
한경오 (사태)에 관하여
– 최근 ‘한경오 사태'(문 지지자와 한경오의 갈등 상황) 이야기를 잠깐 해보자. 일단 ‘한경오’는 묶어서 총평이 가능한가.
기본적으로는 한경오를 하나의 그룹으로 묶기는 힘든데, 그래도 묶는다면, 지명도에 비해 돈과 조직이 약하다는 것. 조중동의 상대자로 사람들이 이야기하지만, 기본적으로 두 그룹은 체급이 다르다. 그리고 조중동은 논조가 기득권 수호의 방향으로 통일돼 있지만, 한경오는 그 논조도 이슈에 따라 서로 다를 때가 많다.
– 한경오를 비판하는 쪽에선 1) 386 2) 명문대 3) 폐쇄적인 지식인 그룹 4) 선민의식을 가진 기자 집단 등등의 코드를 비판하는데. 이런 시각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그런 시각도 기자 집단을 마치 삼국지의 한 진영처럼 바라보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 이런 시각은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지는 않나. 선민의식을 가진 기자 집단이 ‘작당’ 한다는 것이 한경오를 비판(?)하는 포인트인데.
정말 그들이 보는 것처럼 작당하고 있는가. 한경오라는 묶음 자체가 하나의 카르텔로 묶여야 하는가. 상호 경쟁자들인데.
– 가치 평가의 차원에서 사람들(특히 열혈 문 지지자)이 한경오를 한 그룹으로 묶어 마치 ‘구시대의 유물’처럼 비판, 비난하는데.
적으로 바라보면 모두 한 가지로 보인다. 우리 편은 다양한 개성과 세밀한 이슈로 묶여 있어 섬세하게 바라봐야 하지만, 적, 타자화하면 그 대상을 하나로 단순화하는 심리적 경향이 존재한다.
– 한경오를 ‘적’으로 인식하게 된 혹은 인식하게 한 계기는 뭘까.
적폐를 청산하려는 욕망이, 언론계의 적폐를 만들어낸 것에 가깝다고 본다.
– 언론계의 적폐는 조중동, 최소한 조동 아닌가. 한경오가 적폐라는 건 좀 억지 같은데.
‘기성 정치는 모두 썩었어’라는 인식과 마찬가지로 ‘기성 언론은 모두 썩었어’라는 인식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 그 직접적 계기, 이벤트는 뭐였을 것으로 판단하나.
문재인의 선거운동에 대한 감정적 애착. 문재인의 앞을 가로막는 것으로 느껴지는 순간, 그것이 언론일 때 ‘모든 언론은 썩었다’는 프레임이 작동하는 것.
– 가령, 경향의 지지율 보도 오류(이른바 ‘팔사오입’)나 선거 초반 안철수의 높은 지지율 보도를 (문재인을 적대하고, 안철수에 옹호적인) ‘명백하고, 객관적인’ 편향의 증거로 보기도 하는데.
의도가 있고, 카르텔이 있다는 일관된 서사에 끼워 넣기의 결과일 뿐이다. 현실적으로 저널리즘 실무에서 오류 가능성은 늘 존재하고, 꽤 많이 발생한다.
– 경향의 오류는 의도한 결과라기보다는 전문성의 부재로 보인다.
전문성의 “부재”라고 하기엔 표현이 좀 강하고, 전문성의 “부족”이라고 생각한다. 의도로 보기엔 동기가 너무 부족하다. 얻을 이익이 없다.
– 결과적으로 문재인은 넉넉하게 승리했고, 대통령이 됐는데. 왜 (일부) 문 지지자에게는 승자의 여유가 없을까.
아직 승리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아직도 우리가 방심한 틈에 저들이 노무현을 죽였다. 그리고 그 죽음을 주도한 세력 중 하나가 바로 ‘한경오’라는 인식이 있을 것이다. ‘등 뒤에서 칼을 꽂았다’는 이야기를 한다. 앞에서 싸우는 미운 놈보다 등 뒤에서 칼을 꽂는 ‘배신자’를 더 미워할 수밖에 없는 거다.
– 그런 인식은 정당하다고 보나.
그 심정은 이해하지만, 지금까지 제시된 근거는 매우 약하다.
– 앞으로 근거가 마련될 수도 있는 건가.
그럴 가능성은 대단히 희박하다. 가령, ‘굿바이 노무현'(한겨레21 커버스토리, 경향신문 사설)이라는 제목의 언론보도가 있었고, 일주일 즈음 후에 비극적 서거가 있었다. 두 가지를 이어서, 마치 해당 언론들이 고 노무현 대통령을 죽으라고 종용한 것 처럼 ‘잘못’ 기억하는 일이 생긴다.
하지만 찾아보면 해당 글들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과문 이후, 노무현이라는 구심점이 없어진 이후에도 민주 진보세력이 재편할 방안을 고민하자는 것이었다. 당시 사건 전개 상황에 대한 헐거운 기억이 만들어낸 착시가 심하다고 평가한다.
한겨레에 관하여
– 한겨레에 관해 이야기해보자.
너무 성장하지 않았다. 많은 좋은 실험을 해왔는데, 몇 년 단위로 ‘리셋’됐다. 90년대 말 ‘정론지’ 캠페인은 선언으로 끝났고, 버티컬 미디어 실험도, ‘훅(HOOK)’ 같은 오피니언 전문지 실험 등도 모두 실험으로 끝나고, 리셋되는 경향이 있다. 또 다른 약점으로, 데스크가 반과학, 생태주의, 민중주의에 매몰된 원고 선별력을 보여줄 때가 많다.
– 반과학은 (나쁜 줄) 알겠는데, 생태주의나 민중주의가 나쁜가.
생태주의 자체가 나쁘다는 게 아니라 한겨레 편집자가 생태주의를 옹호하기 위해 반과학 입장마저 용인하는 잘못된 태도를 지칭한 것이다. 또한, 민중이 옳다는 규범적 전제에서 현상이나 이슈를 판단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민중도 잘못할 수 있는데.
– 예를 들면.
육각수 이야기(반과학), 정희진의 갠지스 강 사례가 대표적이다. 왜 여성학자 정희진이 강의 생태주의를 잘 이야기할 수 있다고 데스크가 판단하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생태주의적 메시지를 위해서 정희진이라는 권위나 반과학을 밀어주기한 꼴이다.
한편, 한겨레21에서 대안학교 제도를 긍정적인 모습만 밀어주기 한 것이 민중주의의 오류를 보여주는 사례로 생각한다. 일반적인 대안학교의 어려움, 교사의 지위 문제, 학력 인정 문제 등을 도외시하고, 행복한 모습만을 강조해서 보여줬다. 부패한 제도권 교육에 오염되지 않은 민중의 자생적 교육을 강조했다고 생각한다.
경향에 관하여
– 경향
좋은 특집 기획이 장점인데, 홍보력이 꽝이다. 지속력도 꽝. 의제를 끌어가는 힘이 안타깝게도 약하다.
– 경향이 (경영상) 위험하다는 루머가 많았는데.
경향의 ‘히트작’이 없다는 게 경영 악화 루머와 연결되는 문제라고 본다. 5년 전에 ‘사회계약을 다시 씁시다’와 같은 좋은 기획, 획기적으로 평가할 만한 기획이 있었음에도 누구도 알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조선일보가 별것도 아닌 “자본주의 4.0″을 의제화했던 역량, 그 집요함, 그런 걸 경향에서는 발견할 수 없었다. 심지어 특집기사가 조금만 지나면 언론사 홈페이지에서 제대로 검색조차 안 된다. 하나 더 덧붙이면, 오피니언 필자 선정이 의아할 때가 있다.
– 한겨레 칼럼도 가끔 ‘뜨아(!)’ 할 때가 있다.
외부 기고에 대한 데스킹이 지나치게 소극적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한겨레는 필자 그룹의 폭이 경향에 비해서는 넓고, 다양하다.
– 한겨레, 경향의 가까운 미래…
우선 반드시 고치지 않으면 망조가 될 요인들이 있다. 한겨레는 더 강력한 데스킹이 필요한데, 과학적 사실 여부, 의도하지 않은 사회그룹 폄하(예: 한겨레 토요판에서 꼰대적인 시각을 마치 억눌린 가장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처럼 표현하는 기사가 나오는 경우) 등을 전문적으로 잡아낼 수 있도록 체제를 고쳐놔야 한다.
– 지금 이야기한 내용이 캡콜드, 김낙호라는 고급 독자 혹은 미디어 평론가에게만 중요하고, 생존, 특히나 ‘히트 상품’ 제조와는 크게 관련이 없는 이야기 같기도 한데.
과학적 팩트가 틀리면, 기사 전체 내용이 그냥 틀린 거다. 팩트에서는 물러섬이 있어선 안 된다.
– 특정 과학 기사를 지칭하는 것인가.
전혀 아니다. 오히려 정작 과학 섹션의 기사는 품질이 좋은데도, 여타 섹션 기사의 과학성이 매우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즉 사회란이고, 오피니언란이고, 모든 기사 영역의 과학적 사실에 관한 팩트체크를 이야기하는 거다.
– 경향은.
홍보력을 키우지 않으면, 자사 콘텐츠의 원활한 재포장을 이뤄내지 못하면, 밑 빠진 독에 물 붇기다. 기자들의 열정 노동으로 지속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니다. 거꾸로 말하면, 현재는 열정노동으로 유지되는 것에 가까워 보인다.
– 오마이뉴스에 대해선.
거칠게 말해, 데스킹이 아직 있는지 궁금한 지경이다. 초기에는 시민기자의 글과 프로 기자의 데스킹 협업이 트레이드마크였는데, 현재는 같은 사안에서 논조와 취재 깊이가 널뛰기하는 경우가 상당히 있다.
– 오마이뉴스의 근미래.
오마이는 핵심 논조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합의하는 새로운 장치를 마련하고, 실험해야 할 것 같다. 교통정리가 하나로 되지 않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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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콜드 추천 만화(웹툰)
1. 드래곤볼
“소년 만화가 줄 수 있는 모든 재미의 공식을 아무렇지도 않게 녹여 놓고 시치미를 떼는 히트작.”
2. 불의 검
“대하 순정 사극의 완성형. 구질구질한 인연, 장쾌한 스케일, 인간에 대한 희망. 약간 과장에서 이야기하면 만화계의 박경리(토지) 같은.”
3. 멋지다 마사루
“작가도 한 번밖에 성공해내지 못한 변칙적 개그 코드.”
4. 팔레스타인
“표층적 갈등의 오랜 반목과 탄압의 맥락을 캐내는 심층 저널리즘으로서의 만화.”
5. 송곳
“거대한 선악 대결이 아닌 자질구레한 존엄을 위해서도 얼마나 치열하게 싸워야 하는지 보여주는 섬세한 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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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시대에 미국에서 ‘외노자’로 살기
– 아직도 믿어지지 않지만, 트럼프가 대통령이다. 미국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살기, 어떤가.
참 애매한 것이, 핵심은 직업 안정성이기 때문이다. 바깥에서 보는 것처럼 안정적이지 않다. 특히 정치 상황에 따라 취업 비자가 흔들릴 수 있음을 보여줬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 교수로선 어떤가.
외국인 노동자로서 미국 내부 사회 현실을 반영하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학생들을 가르쳐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트럼프 지지하는 가정의 자식이 40%를 차지하는 학교라는 공간에서, 이민자 제도, 정치 혐오, 총기 자유 등의 이슈에 대해서 어떻게 큰 싸움 나지 않지만 또 본질적 문제는 회피하지 않고 해결방안을 논하는 합리적 방향으로 수업의 논지를 이끌어 갈지 고민하는 매 시간이 고통이다.
– 미국 교수보다 한국 교수하기 어렵나. 왜 한국이 아닌 미국에 살기로 했나.
한국에서는 행정 관련 일들이 더 많이 교수에게 부과되는 경향이 있어서. 반면, 그 외에 연구 부담이나 수업 부담 등은 거기서 거기다. 그런데 한 가지 미국이 나쁜 점이 있다면, 개그를 치기 위해서는 더 많이 궁리해야 한다.
– 왜?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라서?
다양한 문화적 맥락을 함께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영어는 부차적인 문제다.
– 미국에 외노자로 살아왔고, 앞으로 살아갈 건데. 어떤 마음인가.
프로 운동선수가 외국 리그에서 뛰는 것 정도의 마음이다. 내게 더 적절한 기회가 있다고 판단한 곳에 녹아들어 그곳의 경기에 열중할 뿐, 어떤 사회 전반에 대한 비교나 감정적 애증에 입각해서 자리를 선택한 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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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재밌게 본 드라마
1. 빨간머리 앤 (2017, 캐나다)
“[브레이킹 배드]의 작가가 재해석한 빨간머리 앤.”
2. 초인가족 (2017, 한국)
“한국의 그저 그런 중산층 가족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약간 순박하지만, 기본적으로 신랄한 풍자 코미디.”
3. 콰르텟(2017, 일본)
“통속적 비극과 낙천적 인간관계와 미스터리 스릴러를 녹여낸 사중주 악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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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과 ‘미완의 프로젝트’
– 페이스북에 대해서
인터넷이 특정한 단일 기업의 사회관과 수익모델에 의해 통제받는다면 바로 지금 페이스북의 모습이다.
– 그럼에도 페이스북의 순기능을 우선 이야기해보면.
이용자 차원에서 더러운 꼴을 덜 본다. 가령, 참수 비디오를 누군가(알고리즘과 담당 하청직원)가 삭제하니까. (– 그게 순기능인가…)
–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며, 결국은 믿고 싶은 것만 믿는 ‘확증편향’을 페이스북은 구조화하는 것 같다.
이미 인터넷 전반에서 나타나고 있었던 현상이, 속도와 규모의 면에서 한층 강해졌다고 생각한다.
– 확증편향의 원인은 무엇으로 생각하나. 미디어적 환경(예: 페이스북), 정치적인 제도와 관습, 사회·경제·문화적인 원인이라든지.
다 같이 작용하지만, 미디어적인 요인이 다른 요인들을 더 촉진하는 것으로 판단한다. 가장 중요한 요인은ㅡ 공적인 사안을 해결하는 절차 자체가 복잡해지는 것이기는 하다. 가령, 화장실을 하나 만들 때, 예전에는 구덩이 하만 파도 되었지만, 지금은 주변에 어떤 건물들과 띄어서 만들어야 하는지부터 칸막이를 어떻게 정해야 하는지까지(장애인, 남녀 등) 고려하는 것이 당연하다.
세상이 그런 식으로 고려해야 하는 게 많아지니까, 사람들이 자신들의 긴밀한 관심사 바깥의 것에 대해서는 그냥 아예 여러 가지 고려하는 것을 포기하게 된다. 그 대신 내가 이미 원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즉 세상에서 가장 편한 길을 택한다.
– 특별히 한국만의 특수성이랄까, 그런 요인이 있을까.
굳이 찾자면, 진영적 사고가 좀 더 강하게 작용하는 점이 있는 것 같다. 어떤 식으로 어떻게 문제를 풀지 고민하기보다, “우리 편 이겨라”로 가는 것. 달리 말해, 문제 해결 중심이 아니라 사람 중심으로 가는 것 말이다.
– 삼국지라고 이야기했던, 스타 중심의 의식구조 이야기로 돌아가는 것 같다. 87년의 위대한 역사도 있고, 97년 IMF의 아픔도 극복했으며, 또다시 2016년 촛불 혁명도 있었다. 민도가 높은 국민이다. 그런데 왜 그럴까.
권력을 민중으로 되돌린다는 차원에서는 굉장히 잘 발달해 있다. 그런데 그래서 시민들이 잡은 권력으로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지, 어떤 문제를 해결할지에 대해서는 ‘빈 구석’이 많다.
– 왜 빈 구석이 많을까. 민도는 높은데.
국어는 잘하는데, 수학은 잘하지 못하는 학생에 비유할 수 있다. 가장 단적으로 나타나는 사례가, 노조 혐오라고 본다. 문제해결적 관점에서 보자면, 노동자와 사용자 사이의 갈등을 어떻게 해소해야 할까. 사용자 측이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으니 노조가 힘을 길러서 당사자 간 힘의 균형 속에서 문제의 사회적 해결을 찾는 것이 정석이다. 그런데 노조가 싫고 빨갱이고, 뭐 그런 편견과 선입견 속에서는, 문제 해결이 요원하다.
– 미디어가 선동가 역할을 했고, 이 선동은 정·경·언 삼위일체의 합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책임을 시민 개개인에게 돌리기는 어렵지 않나(부당하지 않나).
정작 시민들이 정치, 언론, 기업 권력을 제대로 견제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 모두 썩었다는 서사의 냉소에 빠진 측면이 있는데, 견제는 지켜보면서 잘할 때 밀어주고, 못할 때 말리는 것으로 결국 더 좋은 역할을 유도하는 것이다. 잘하면 무관심하고 못 하면 무턱대고 냉소와 비난만 보내면, 견제의 효과가 사라져버린다.
– 합리적인 독자를 전제하는 것이 잘못 아닌가. 그런 독자는 현실 세계에서는 없지 않나.
‘로망’이다. 인간은 합리적이고, 합리적인 소통을 통해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나갈 것이라는 근대적 로망.
– 하버마스가 여전히 ‘계몽은 미완의 프로젝트’라고 했던 지적이 연상되는데.
학문적 키워드를 빼고 이야기하면, 당연히, 거의 그렇다.
– 독자들은 점점 더 소셜미디어 구조 속에서 ‘원하는’ 정보만을 포식하는 경향이 강해진다 보는데, 그 과정에서 ‘필요한’ 정보와 불일치가 점점 심화하는 것 같다.
음식으로 비유하면, 몸이 단 것을 좋아하게 되어있다고 해서 그저 설탕만 퍼먹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면 단백질이나 비타민은? 그래서 우리 사회는 건강 캠페인을 하고, 영양사 같은 전문 직종을 만들고, 사회적으로 노력을 투여해서 균형 잡힌 식단을 유도한다. 단 것을 추구하는 신체를 개조하지는 못해도, 적어도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제대로 된 영향 균형을 이루도록 노력을 한다.
정보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사회적 제도에 대한 정보와 사람들이 원하는 정보 사이의 균형. 어쩔 수 없지만, 캠페인을 통해서, 기술적 장치를 통해서, 균형 잡힌 정보 식단의 필요성을 인식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뉴스 정보에 대해서도 자신이 상태를 되돌아 볼 수 있도록 일종의 영양성분표가 필요하다.
독자가 자신의 앎에 대해, 그리고 필요한 정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알아야 하는데, 정보에 대해서는 그런 지식을 얻을 길이 부족한 상태다.
– 쉽게 말해 리터러시가 부족하다는 이야기 같은데.
조금 다른 것이, 해독 능력보다는 자기 필요 지점에 대한 가이드다. 물론 리터러시 문제도 있기는 한데, 지난 10년여 넘는 기간의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 방향의 문제는 비판적 읽기의 우산 아래 여하튼 미디어를 불신하라고 가르친다는 점이었다.
어떤 정보를 신뢰할 수 있는지를 교육하지 못하고, 냉소를 키웠다. 신뢰할 부분에 대한 가이드가 없고 모든 것이 어차피 다 동일한 쓰레기면, 그 중에서 편하고 재밌는 것, 자극적인 것을 자연스럽게 선택하게 된다.
– 한편, 저널리즘의 예능화, 긍정적인 의미로는 대중화는 ‘대중의 눈높이’로 바라보려는 노력으로선 긍정적인데.
그것으로 끝나버리면 안 되는데, 거기에서 끝나버리는 게 문제다. 좀 더 심층적인 정보, 실제 데이터, 사설과 반론 등이 큰 덩어리로 연결되어 총체적 상황 파악을 돕는 방향으로 가야 하는데 예능 자체에서 끝나버린다.
그 결과 어떤 인상만 형성하고, 그냥 끝나버린다. 예를 들어 ‘썰전’ 하나면 보더라도, 해당 홈페이지에 가면 프로에서 언급된 내용에 대한 근거 자료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 사람들이 했던 이야기에 대한 팩트체크도, 심화하는 자료도 없고, 그냥 썰전이라는 정치쇼를 그 자리에서 소비하는 것으로 끝나버린다.
–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나.
없는 것보다는 낫다. 하지만 그것만 남용하면 심층 내용이 없고 목소리만 높이는 불균형이 초래될 따름이다.
– 연예상품보다 정치, 저널리즘 상품의 위상이 추락하고, 그 부피가 (‘숨막히는 뒷태’류의 가십성 콘텐츠를 빼면) 급속하게 작아지고 있다는 게 문제인 것 같다.
이 논점에 대해서는, 몇 년 전부터 사용하는 동그라미 세 개짜리 그림이 하나 있다. 수용되는 뉴스(= 사람들이 찾아서 읽는 뉴스),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뉴스(= 필요한 뉴스), 생산이 가능한 뉴스. 이 세 개의 동그라미가 겹치는 조건 아래에서야 비로소 고품질 뉴스가 탄생할 수 있다.
각각을 등한시하면 아무도 안 읽어서 사그라지거나, 별 의미가 없거나, 지속해서 만들어낼 방법이 없거나. 연예상품으로서의 저널리즘은 생산과 수용은 충족하되, 사회적 요구는 등한시하는 사례다.
소위 ‘대안 미디어’의 미래
– 슬로우뉴스를 포함한 “디지털 네이티브 미디어” 이야기를 해보자. 존재와 생존의 필요는 구별되어야 하지만, 자신의 존재를 고민하는 건 점점 배부른 소리가 되어 가고, 생존 그 자체가 점점 더 문제가 되는 환경에 처한 것 같다.
생존을 위한 한 가지 방안은, 비용을 줄이고 효과를 늘릴 수 있는 방향으로 여러 조직이 협력 관계를 만드는 것이다. 지역 거점 대학의 미디어 관련 학과, 지역 시민사회, 지역 미디어 등이 비영리 공익 뉴스룸으로 협동하는 방식이다.
학교는 학생들에게 실무교육 기회를 줄 수 있고, 시민사회는 공론을 키우고, 지역 미디어들은 보유한 채널에 유용한 콘텐츠를 공급받는 윈-윈이 될 수 있다.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어렵지만, 미국의 위스콘신 탐사저널리즘센터가 좋은 참조사례다.
– 지자체나 국가의 역할은.
지원하고는 무간섭을 유지하도록 해야 한다. 지역사회 공론장을 만드는 것 자체가 지자체의 성과로 간주되어야 한다.
– 지원의 기준, 기성의 성과를 계량화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는데.
척도를 만드는 것이 결국 학계에서 해결해줘야 할 일이다.
– 뉴스통신진흥법의 한시적 지원제도였지만, 계속 연장되는 연합뉴스에 대한 천문학적인 국가 지원, 어떻게 보나.
문제는 지원금을 받는 것 자체보다는, 그 지원금으로 다른 언론사보다 더욱 공익적 활동을 하는 모습이 부족한 것이다. 연합뉴스에 대한 지원을 끊기보다는, 연합뉴스가 다루는 뉴스의 방향을 다른 언론사가 하기 어려운 기초적이고 돈이 안 되는 일들에 집중하게 하는 게 필요하다. 각 지역 정치 단위의 활동에 대한 정밀한 모니터링이라든지.
뉴스 콘텐츠의 판매 역시 영리성 판매보다는 크리에이티브커먼스(CC) 같은 자유로운 재활용의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본다. 또한, 돈 주는 사람으로부터의 독립체제를 만들기가 중요하다. 지난 정권들 와중에 공영방송으로서 KBS, MBC의 지배 구조에 대해서는 논의가 많았지만, 연합뉴스의 지배구조는 그동안 공론화가 부족했다.
끝으로
– 지금 개인적인 ‘화두’는 뭔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불편한 정보를 스스로 찾아보고 자발적으로 삼키도록 북돋을 수 있을까. 온갖 미디어 기술도, 산업도, 내가 편한 것만 찾아보도록 짜여 있다. 그와 반대로 “내가 이런 정보를 모르고 있구나”를 자극받고 스스로 균형을 찾아 나설 수 있도록 유도하는, 마법의 기술력이 필요하다. 기술로서의 기술일 수도 있고, 대화법일 수도 있고, 언론의 기획 전략일 수도 있다.
– 해법은 얻었나.
약간의 기술, 약간의 규범… 결국, 칵테일 요법일 수밖에 없다. 최근 한가지 접근 사례는 뉴욕타임스가 만든 그래픽 퀴즈인데, “당신이 생각하는 지난 5년간의 물가상승률을 그려보라”는 식이다. 정답을 누르면 자신이 그려본 추세와 실제 추세가 적나라하게 비교된다.
사람들이 자신이 실제 알고 있는 지식수준을 스스로 인식할 수 있도록, 채근하지 않고, 알아서 직면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에 더 필요한 것은 퀴즈가 더 재미있어야 하고, 주변에 자랑하고, 도발할 수도 있어야 한다.
– 사회적인 정의의 실현, 민주주의의 실현과 ‘지식’은 비례한다고 보나.
비례는 아니지만, 필요조건이라고 본다. 물론 그것만 있다고 정의가 실현되는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그것이 없으면 정의 실현이 일시적으로는 가능하더라도 지속은 불가능하다.
– 현재 지속 가능한 개혁과 정의를 위한 ‘사회적 자본’으로서 시민의 지식 축적 수준은 어느 정도로 평가하나. 인상평일 수밖에 없겠지만, 그 한계에서 말한다면.
굳이 이야기하면, 구슬이 서 말인데 그것을 못 꿰고 있는 상황 같다.
– 누가 먼저 바늘을 들고, 실을 보태야 하나.
언론과 학계다. 그런데 가장 일을 방기해왔다.
– 굳이 책임을 따지면, 시민(일반 독자)보다는 언론과 학계에 책임이 있다고 보나.
그렇다. 바로 그런 일을 하라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 교차점에 있는 나 같은 사람은, 복도에서 벽 보고 두 손 들고 벌서야 한다.
– 끝으로 독자에게.
특종과 단독에 현혹되지 말고, 천천히 숙고한 뉴스를 읽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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