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준 런던대 교수 인터뷰 ②] 기업의 책임과 사회적 연대의 양보 없는 충돌… 복지 공동구매, 협상 상대방이 없었다. (⌚8분)
🧭 장하준 인터뷰 (총 2편)
런던대 경제학과 교수 장하준(61)은 주주 자본주의 압박에서 재벌의 경영권을 보호하되 그들로부터 복지국가 재원을 확보해야 한다는 ‘사회적 대타협’을 강조한 학자다. 이 때문에 ‘재벌의 앞잡이’, ‘박정희 추종자’라는 비난도 들었다. 재벌과의 사회적 대타협을 꺼낸 이유는 한국이 복지국가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지난 20여년 우리는 왜 ‘타협’을 보지 못하고 있는 건지 그에게 물었다.

‘노인 빈곤율 1위’ 복지 후진국의 현실.
— 장 교수는 대표적 증세론자다. 이번 대선에서 어떤 후보도 증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국책연구기관 KDI(한국개발연구원)도 ‘보편적 증세’를 주요 정책 대안으로 제시했을 정도다. 증세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지만 누구도 입을 떼지 않는다.
“세금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 많은 사람은 정부가 국민을 돈을 걷어 어디다 태워버리거나 묻어버리는 걸로 생각하는데(웃음), 우리 세금이 우리의 지하철이고, 학교고, 공공 도서관이다. 세율보다 중요한 것은 세금을 어떻게 쓰느냐다. 세율만 중요하다면 부자와 기업은 남미 파라과이에 가서 경제 활동을 해야 한다. 파라과이는 최고 소득세율과 법인세율이 각각 10%에 불과한 나라다. 하지만 가지 않는다. 치안도 불안하고 사회간접자본도 부족하고, 노동자 교육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 법인세율이 30%여도 독일에서 사업하는 게 낫다고 보는 거다.”

— OECD 국가와 비교했을 때, 한국의 GDP 대비 복지 지출은 낮은 수준으로 알려졌다.
“OECD 선진국의 GDP 대비 복지 지출을 비교하면, 아일랜드를 빼고 우리가 15% 수준으로 꼴찌다. 복지가 부실한 결과 한국은 불명예 1위 기록이 많다. OECD 가운데 출산율은 가장 낮고, 자살률은 가장 높으며, 노인 빈곤율도 1등이다. 65세 이상 빈곤율을 보면 프랑스는 3% 수준인데 우리는 45%다. 소득 불평등도 OECD 부자 나라 중 미국, 영국, 이스라엘, 일본 다음으로 5등이다. 복지를 늘리는 게 시급한데도 GDP 대비 세수는 30% 안팎이다. OECD 평균이 34%다. 프랑스, 덴마크, 오스트리아 등 복지국가는 40%까지 된다.
사람들은 세금을 ‘뺏긴다’고 생각한다. 복지 지출은 국민 부담을 늘리는 것이 아니다. 왼쪽 주머니에 있는 돈을 오른쪽 주머니로 옮겨 쓰는 것에 불과하다. 세금이 오르내리는 건 부차적 문제일 뿐 더 중요한 것은 정부가 어디다 얼마나 잘 쓰느냐다. 아울러 복지 지출은 대부분 필요 지출이다. 부모는 어린 아이를 돌봐야 하고(보육·육아 지출), 산업재해를 당해 집에서 쉬는 노동자도 밥은 먹어야 한다(요양·휴업급여 등 산재급여). 직장을 잃으면 재교육도 받아야 한다(실업 급여). 나이가 들면 요양원도 가야 한다(건강보험). 이런 복지는 공공이 하지 않으면 결국 민간이 할 수밖에 없는 필요 지출이다.”


— 보통 미국의 복지 지출은 낮다고 아는데?
“지금까지는 공공 복지 지출을 이야기한 것이다. 개인 스스로 교육·의료·실업·노후보험 등을 구매하는 민간 복지까지 합치면, 미국의 복지 지출 규모는 OECD 국가 중 핀란드 다음이다. 미국의 GDP 대비 의료비 지출은 17%로 OECD 평균(9%)을 훌쩍 뛰어넘는다. 그런데도 미국의 건강 지표는 OECD 국가 중 꼴찌다. 의료비 가운데 상당 부분을 의료보험 회사, 제약 회사가 빼 가고 있다. 복지는 국가가 지출하지 않으면 개인이 각자 부담해야 한다. 공공복지 좋은 점은 공동 구매를 통한 비용 절감이다. 미국처럼 의료가 완전히 사유화한 나라는 수요가 많지 않은 약을 구하려면 개별적으로 병원에서 구매해야 한다.
반면, 공공의료 보험이 어느 정도 보장돼 있는 유럽은 대량으로 구매해 약값을 낮출 수 있다. 국민 입장에서는 세금을 더 내더라도 사회적 서비스를 받는 복지 체계가 더 효율적이다. 최고 소득세율이 50%가 넘고 부가가치세율(VAT)이 25%인 덴마크에서는 높은 세금 수준에 90% 가까이가 만족한다고 응답한다. 세금을 많이 내는 만큼 혜택이 많은 것이다. 우리 국민은 공구(공동구매)에 익숙한데 이미 복지 국가의 원칙과 원리에 동의한 셈이다.”

재벌과의 사회적 대타협, 왜 실패했는가.
— 장 교수는 기존 진보학자들과 달리 재벌 체제를 인정하는 사회적 대타협을 강조했다. 10여 년 전에도 “주주 중심의 내부 구조개혁론보다 사회적 대타협을 통한 복지 확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왜 지금도 사회적 대타협이 이뤄지지 않고 있나?
“글쎄. 학자로서 설득력이 부족해설까.(웃음) 양쪽 모두 사회 의식이 부족했다는 생각도 든다. 기업들은 첫째, 자신들이 국민 피땀 위에서 성장했다는 사실을 망각했다. 우리 사회에 빚을 졌다는 생각을 잊은 것이다. 둘째, 어떻게 하면 내 손에 쥔 이익만 지킬까, 어떻게 하면 내 아들한테 기업을 온전히 물려줄까, 그것만 생각했다. 기업 경영이 국민 경제와 대한민국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고민하지 않았다. 경영권 방어에 몰두해 지분만 체크하거나 포이즌 필*(Poison Pill), 황금주*(Golden Share) 등 꼼수만 만지작댔다.
사회적 대타협은 ‘양보’다. 삼성 같으면 더 먼저 자발적으로 노조를 인정하겠다고 선언하든지, 독일이나 스웨덴 같이 노동자 경영 참여를 보장하는 제도를 도입하든지, 세금을 더 내겠다든지, 더 이상 법인세를 깎자는 이야기를 하지 않겠다든지, 무엇이든 양보 의지가 있어야 타협이 있는 것 아니겠나. ‘우리가 외국에 넘어가면 대한민국은 망한다’면서 내놓는 것 하나 없이 정부와 국민에게 해달라고만 했던 거 아닌가.
주식회사는 그 자체가 사회적 존재다. 사람이 아닌데도, 권리 능력 주체로서 법인격을 부여했다. 유한 책임을 도입해 주주 본인이 출자한 주식 금액 한도 내에서만 책임을 지도록 했다. 19세기 중반 이전에는 식민지를 경영하는 국책 기업을 제외하면 유한 책임이라는 개념은 없었다. 목숨 걸고 사업을 해야 했다. 망하면 채권자들이 찾아와 밥솥까지 뺏어갔다. 결국 기업은 사회와 따로 떼어내 생각할 수 없으며 사회가 만들어 준 것이기 때문에 사회적 역할을 다해야 한다.”
📌 포이즌 필(Poison Pill): 기업이 적대적 인수·합병(M&A)이나 경영권 침해 시도에 대응하기 위해 사용하는 대표적 경영권 방어 수단.
📌 황금주(Golden Share): 보통주와는 다른 특별한 의결권이나 거부권이 부여된 주식. 소수만으로도 회사의 주요 의사 결정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주식.
— 반대로, 재벌 해체나 혁파를 요구하는 쪽은 어떤 점이 부족했나?
“반대쪽은 기업이 사회적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단순히 재산권 싸움으로만 봤다. 기업 정책은 국민 경제 관점에서 넓게 봐야 한다. 주주권에 국한한 소유권 다툼이 우리 사회에 이로운가. (소액주주 운동을 주도했던) 내 사촌형 장하성 교수(전 청와대 정책실장)가 대표적 인물인데, 그렇게 기업 정책을 좁게 보다 보니 무엇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지 고민이 부족했다.
‘삼성 이씨 집안 지분을 다 합쳐도 5% 밖에 안 되는데 어떻게 기업을 3대에 걸쳐 물려주느냐.’ 맞는 얘기일 수 있지만 외국 금융 자본 힘을 빌려 재벌 체제를 분쇄하는 게 과연 우리에게 이로운 일인가. 양쪽이 계속 평행선으로 내달렸던 것이다. 설사 기업 소유권 정의를 확립하는 게 중요했대도 기업의 사회적 역할을 인정하면서 어떤 의무를 부과하고 통제할지 논의가 필요했다. 한쪽은 ‘우리는 지킬 거야’, 또 다른 쪽은 ‘너희를 없앨 거야’ 이런 식으로 나오니 타협은 언감생심이다.”

‘박정희 숭배자’ 비난에도 “사회적 대타협, 여전히 필요.”
— 사회적 대타협이라고 하면 스웨덴 발렌베리 가문 사례가 손꼽힌다. 1930년대 스웨덴 노동계와 재계, 정치계가 계급적 대타협을 이뤘다. 정권이 발렌베리 가문의 기업 지배권을 인정하되 발렌베리 가문은 이윤의 85%를 복지 재원으로 지원키로 했다. 재벌 기업이 사회 안전판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6대째 세습 경영을 하고 있다. 의학, 인문사회·자연과학, 기술, 노동 등 발렌베리 재단이 한 30여개 있다. 이윤의 85%를 재단에 환원한다. 현재 3명이 공동 총수다. 이들 재산은 1000만~2000만 달러 수준이다. 테슬라의 머스크와 비교해 보면 아주 미미한 수준 아닌가. 스웨덴 국민이 발렌베리 세습 경영을 받아들이는 이유다.
그 대신 노동자들도 기업이 시장에 적응하고 계속 경쟁력을 제고할 수 있도록 되도록 구조조정을 받아들인다. 정부는 이들을 재교육시키고, 일자리를 알선해준다. 새 직장 때문에 주거 문제가 발생하면 일시적으로 주택 담보 대출도 해준다. 반드시 이 모델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기업이든 노동이든 내려놓을 것은 내려놔야 타협이 가능하다.”

— 실제 스웨덴 발렌베리가는 삼성의 지배구조 롤모델로 알려졌고, 고 이건희 회장도 발렌베리가와 2000년대 초반부터 친분을 가졌다. 어찌됐든 장 교수의 재벌 대타협론은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그 과정에 많은 비난을 받기도 했다.
“삼성은 발렌베리 가문의 세습 경영 사례로 자신들을 정당화하려 했던 것이고, 그 반대쪽(재벌 해체를 주장하는 쪽)에서는 나를 ‘재벌의 앞잡이’라고 하거나 ‘박정희 숭배자’라며 내 주장을 거부했다. 내 이야기가 정답이라는 것은 아니다. 대타협을 하려면 그만큼 서로 내려놓고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내 개인 투자자가 1400만 명이나 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자꾸 우리 사회 미래가 어두워지고 계층 상승이 가로막혀 그런 것 아닌가. 암울한 현실을 바꿀 길이 없으니 리스크를 개인이 감수하고 직접 주식을 사고 있는 건 아닌가. 주주라고 생각하지만 대부분은 노동자이자 소비자다. 사회적 대타협은 여전히 필요하다.”
“이재명 정부, 기존 복지 담론 대대적으로 전환해야.”
— 조금 결이 다른 질문. 지난해 12·3 비상계엄 사태를 어떻게 지켜봤나?
“참담했다. 난 10살 때 박정희 유신 쿠데타를 겪었다. 홍대 부속 초등학교를 다녔다. 당시 학교 운동장에 계엄군이 텐트를 치고 있었다. 공포스러운 그때 기억이 확 떠올랐다. 82학번이다 보니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도 생각났다. 어떻게 이런 일이 또 일어날 수 있나 무지 창피했다.
난 대한민국이 정말 자랑스럽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태어났을 때 아프리카 가나가 우리 국민 소득의 2배였고 평균 기대수명이 52세였다. 경제 발전이 없었으면 난 10년 전쯤 죽었을 것이다. 독재 하에서 경제 발전이 이뤄졌지만 몇십 년간 싸워 민주화를 쟁취한 나라다. 그런데 갑자기 비상계엄이라니…. 계엄이 아니라 계몽이었다는 헛소리나 하고, 슬프고 참담했다.”
— 힘겨워하는 2030 청년 세대에 메세지를 전한다면?
“기성세대 한 사람으로서 미안하다. 우리 부모 세대도 고생해서 나라를 발전시키고도 다수가 빈곤 속에 있지만, 지금 젊은이들도 희망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인류 역사상 최저 출산율을 기록했다. 당장 생활이 어렵고, 미래 전망이 어둡다 보니 애를 낳지 않는다. 아이 교육비를 생각하면 아득할 수밖에.
우리가 다음 세대를 위해 더 평등주의적인 교육 제도를 만들지 못했다. 복지도 제대로 늘리지 못했다. 대한민국을 선진 수준에 맞게 개조하지 못해 젊은이들이 고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젊은 세대가 희망 있는 나라를 어떻게 하면 건설할 수 있을지 담론을 주도해 나간다면, 복지 사회로 한걸음 나아갈 것이라 생각한다.”
— 새로 출범한 이재명 정부에도 조언한다면?
“계엄 사태를 보며 느낀 건,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민주주의가 국민에게 좋은 것을 줄 수 있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고 생각한다. 자칭 진보 정부라고 하는 문재인 정부의 경우 임기 초 최저임금 대폭 인상을 제외하면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이 없었다.
복지를 제대로 늘린 것도 아니다. 복지 담론을 바꾼 것도 아니었다. 그로 인해 시대에 맞지 않는, 철권 통치를 꿈꾼 자가 틈을 비집고 들어온 것 아닌가. 이재명 정부도 짧은 임기 동안 원하는 목표를 다 달성할 순 없겠지만 기존 복지 담론이라도 제대로 바꿔 미래 희망을 국민들에게 심어줬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