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준 런던대 교수 인터뷰①] “장기 투자와 단기 이익의 충돌, 주주 자본주의가 미국 제조업 몰락 주도… 코스피 주도 성장은 착각, 자본 이탈 막을 국가 전략 필요한 때다.” (⏰13분)
런던대 경제학과 교수 장하준(61)은 국가의 적극적 경제 개입과 국가 주도산업 정책을 강조한다. 선진국은 물론 한국 경제도 국가 보호 정책 없이 성장할 수 없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과거 장하성과 김상조 등 진보 경제학자들이 소액 주주들의 행동주의로 재벌 지배 구조를 개혁할 수 있다고 주장할 때, 장하준은 주주 자본주의 압박에서 재벌의 경영권을 보호하되 그들로부터 복지국가 재원을 확보해야 한다는 ‘사회적 대타협’을 강조했다.
지난 20여 년간 주주 자본주의를 둘러싼 경제학자들의 논쟁은 지난 3일 민주당 주도 상법 개정안이 여·야 합의로 국회를 통과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주주권을 강화한 상법 개정과 맞물려 코스피(KOSPI)는 3년 6개월 만에 3000선을 넘었다. ‘코스피 5000’을 기치로 내건 이재명 정부는 어느 정부도 시도하지 않았던 부동산에서 증시로의 ‘머니 무브’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장하준은 지난 14일 화상으로 진행한 인터뷰에서 “정부가 어느 한쪽으로 쏠려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주식시장, 지속 성장 동력 될 수 없다.”
— 상법 개정안이 7월 3일 여·야 합의로 국회를 통과했다. ‘이사의 충실 의무를 주주로 확대’, ‘전자 주주총회 의무화’, ‘사외이사 명칭을 독립이사로 변경’, ‘감사위원 선출 시 3%룰 보완 적용’이 주요 내용이다. 주주 자본주의를 강화하는 흐름이다. 어떻게 지켜봤나?
“한국 재벌의 횡포가 심하기 때문에 주주권을 일정 정도 강화하는 방향성 자체엔 찬성한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극단으로 가면 문제가 나타나듯 주주권이 너무 세면 탈이 난다. 미국 기업의 경우 주주권이 너무 강해 이윤의 90%를 주주에게 환원한다. 그러면 기업이 투자할 돈이 없다.”
— 코스피(KOSPI) 주도 성장이 가능한가? 주가가 상승해 자산이 늘고 소비도 늘어서 내수 시장이 살아나는 선순환이 가능할까?
“주식 주도 성장이 단기적으로는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불가능하다. 지금 주식 시장은 단기 주주가 장악하고 있다. 영국 같은 경우 평균 주식 소유 기간은 1년에 불과하다. 기업이 장기 투자하면 주주들이 도리어 벌을 준다. 단기 주주 입장에서 자신들은 빨리 돈 벌고 나가야 하는데 왜 쓸데없는 짓을 하냐는 거다. 너무 빨아먹어 기업이 빈약해지면 다른 곳으로 가면 그만 아닌가. 장기적으로 기업은 병이 든다.
찰스 P.킨들버거 교수의 책 ‘광기, 패닉, 붕괴 금융위기의 역사’에도 나오지만 17세기 등장한 이래 주식 시장이 350년 동안 잘 굴러가는 것 같지만 상승장 거품이 꺼졌다가 다시 올랐다가 재차 거품이 푹 꺼지곤 했다. 이런 사이클이 새 영역으로 돈이 흐르는 데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결코 지속적인 성장 동력은 될 수 없다. 주식 시장은 단기적으로 자금 흐름을 바꾼다든지, 잘못한 기업을 처벌한다든지의 역할만 할 뿐이다. 자동차로 따지면 주식 시장은 엔진일 수 없는 것이다. 상법 개정 후 주주 자본주의 강화 흐름에 브레이크를 만들지 않으면 단기 주주 입김에 휘둘릴 수 있다.”

빚내서 자사주 매입? “기업은 무슨 돈으로 장기 투자하나”
— 지난해 말 기준 국내 상장법인 주식을 보유한 국내 개인투자자는 1410만 명이었다. 이 정도면 주식 주도 성장의 가능성을 기대할 수 있는 기반은 되는 것 아닌가?
“1400만 명이라고 하지만 대부분 다 개미다. 거대 자금은 거의 다 외국, 특히 미국 금융 자본이 쥐고 있다. 그들은 우리 일자리나 장기 성장 동력을 걱정하지 않는다. 대한민국 미래와 청년 일자리는 고려 대상이 아니다. 한국 기업과 경제가 약해지면 곧바로 다른 나라로 발길을 돌린다. 현재 주주환원율*이 30%대인데, 이를 75%까지 올려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오더라. 우리 기업은 무슨 돈으로 장기 투자를 할 수 있나?”
💡 주주환원율: 기업이 한 해 동안 창출한 순이익 중 주주에게 현금배당과 자사주 매입 등을 통해 실제 환원한 비율. 한 기업의 주주 친화적 경영 정도를 파악할 수 있다. [(현금배당금+자사주 매입금액)÷연간 순이익]×100.
— 정부는 자사주 소각 의무화와 배당소득 분리과세 도입 등 추가 증시 부양책도 예고하고 있다.
“자사주 소각* 의무화는 큰일 날 일이다. 개악 중 개악이라고 본다. 기업이 자사주를 갖고 있으면 전략적으로 활용할 수 있지만 소각 의무화는 주가 부양 효과만 남는다. 기업 이윤의 10% 이상을 자사주 매입에 사용할 수 없게 하거나 주주환원율을 50%로 제한하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 누군가에게는 대단히 혁명적 얘기겠지만 미국에서도 1982년까지 자사주 매입은 거의 금기시됐다. 당시를 기록한 통계를 보면 0%다. 자사주를 매입하면 경영진이 주가 조작 내지는 배임으로 처벌받기 쉽게 제도가 설계돼 있었다. 현재 논의는 단기적 시각에 갇혀 있다. 기업은 포이즌 필*(Poison Pill), 황금주*(Golden Share) 등 경영권 방어 꼼수만 고민하고 있고, 반대쪽은 그걸 잡겠다고 주주 힘을 강화하자고 한다. 재벌 가문이 자기 권한을 남용할 수 있듯 주주권도 마찬가지다. 기업 성장을 바라는 주주라면, 어떻게 빚을 내서 자사주를 매입하라고 할 수 있는지 묻고 싶다.”
💡 자사주 소각: 기업이 이미 취득한 자기 회사 주식을 시장에 내놓지 않고 전산상 아예 없애서 발행주식 총수를 줄이는 행위. 주식 수가 감소하기 때문에 주당 가치가 상승한다. 주주환원 정책의 대표 수단.
💡 포이즌 필(Poison Pill): 기업이 적대적 인수·합병(M&A)이나 경영권 침해 시도에 대응하기 위해 사용하는 대표적 경영권 방어 수단.
💡 황금주(Golden Share): 보통주와는 다른 특별한 의결권이나 거부권이 부여된 주식. 소수만으로도 회사의 주요 의사 결정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주식.
— 지난 3월 한국은행 보고서(‘주주환원 정책이 기업가치에 미치는 영향’)를 보면 G20 회원국 기업들과 비교했을 때, 한국의 주주 환원은 최하위 수준이었다. 한국 기업 가치는 저평가돼 있고, 주주 환원도 선진국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사실 아닌가? 상법 개정은 단지 이런 비정상을 정상으로 바꾸는 역할을 할 것이라는 목소리도 크다.
“투자자나 주주들은 그렇게 주장할 수 있다. 정부 역할은 여러 사람 이익을 조정하는 것이다. 투자자들과 재벌 이해가 충돌하는 접점을 살펴보면서도 장기 성장 동력과 질 좋은 일자리, 청년 미래 등을 고민해야 한다. 정부가 어느 한쪽으로 쏠려서는 안 된다.”

— 상법 개정을 옹호하는 진영은 이번 법 개정이 한국 기업의 지배 구조를 개선시킬 것이라 기대한다. 상법 개정이 재벌 기업을 개혁할 수 있다고 보나?
“과거 종합식품회사였던 제일제당은 돌연 전자 사업을 하겠다며 삼성전자를 세우고 번 돈을 쏟아부었다. 제일제당 주주 입장에서는 ‘무슨 미친 짓이야’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삼성 반도체는 초기 10년 동안 이윤을 내지 못했다. 주주 관점에서 생각하면 삼성은 10년간 이윤도 못 내는 기업에 돈을 처박는 이상한 기업 집단이다. 핀란드 노키아도 벌목 회사를 하다가 나중에 전자 사업을 했는데 무려 17년 동안 이윤을 내지 못했다. 주주로서는 미치고 팔짝 뛸 일 아닌가. 언제 망할지 모르는 산업에 십수 년 돈을 때려박는 건 주주 권익을 침해하는 행위니까. 하지만 국민 경제 전체를 본다면 기업이 신산업에 진출하고 역량을 집중하는 건 매우 바람직하다. 그런 노력이 경제 발전을 가져온다.
상법 개정 논리는 이제 돈은 벌 만큼 벌었으니까 이윤을 주주와 나눠 쓰자는 것 아닌가. 파이를 잘 나누는 건 좋다. 하지만 한쪽으로 치우치면 결국 단기 주주들이 다 가져간다. 미국처럼 산업 공동화 현상*이 나타난다. 정부가 엄청나게 보호·보조하여 성장한 한국 기업은 재벌 몇 사람의 소유물도 아니지만 주주만의 물건도 아니다. 과거 하루 13시간씩 주말 없이 일하고, 정부가 유치산업 명분으로 보호하고, 고장이 잦아도 삼성·현대 제품 써준 건 한국 국민이다. 한국 경제 발전에 요만큼도 공헌하지 않은 외국 사모펀드나 벌처펀드*(Vulture Fund)에 왜 우리 기업 운명을 맡겨야 하는가? 국민 경제에 장기적으로 좋은 게 무엇이냐는 시각에서 접근해야 한다.”
💡 산업 공동화 현상: 국내 제조업 등 핵심 산업이 해외로 생산기지를 이전하면서 국내 산업 기반이 약화하고 텅 비는 현상.
💡 벌처펀드(Vulture Fund): 부실 기업과 자산 등을 싼 값에 인수한 뒤 구조조정, 경영 개선, 자산 매각 등을 통해 가치를 높인 후 되팔아 차익을 추구하는 고위험·고수익형 펀드.
“주주 환원만 하더니” 보잉·GM의 몰락.
— 주주 자본주의 본산 미국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나?
“한때 유일무이한 비행기 회사라고 일컬어졌던 보잉(The Boeing Company)은 지속적으로 사고가 나고 있다. 자사주 매입과 배당으로 안전한 항공기에 투자할 돈이 없는 것이다. 1976년 현대차가 처음 포니를 생산했을 때 한 해 1만 대를 생산했다. GM(제너럴 모터스)은 480만 대를 만들던 회사였다. 많이 기울었다고 하지만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세계 1위 자동차 기업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현대차보다도 아래에 있다. 작년 GM이 자사주 매입한 액수가 우리나라 모든 기업의 자사주 매입 액수보다 더 컸다. 이미 파산 위기로 정부로부터 구제 금융까지 받은 기업이 정신 못 차리고 계속 자사주를 매입하고, 주주한테 이윤을 환원하기 바빴다.”
— 제조업으로 번성했다가 쇠락한 러스트 벨트(Rust Belt·미 중서부와 동북부의 전통적 중공업 지대) 지지를 기반으로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됐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컸다.
“미국 제조업 쇠락은 ‘주주 자본주의’로 설명할 수 있다. 1980년대 등장한 미 신자유주의 모델은 주주 자본주의로 요약할 수 있다. 기업 이윤을 위해 모든 부문을 외주화하거나 오프쇼어링*(Offshoring)을 가속화하는 것이다. 오랜 시간이 필요한 장기 투자나 연구 개발(R&D) 대신, 단기 이윤을 최대한 확보하여 주주에게 갖다 바치는 것이다. 기업 이윤의 40~50%를 배당으로 나눠주고 40~45%는 자사주 매입을 하는데, 어느 해는 차입까지 해서 주주 환원을 하기도 한다. 어떤 기업은 이윤 2배 규모의 빚을 내어 자사주 매입을 한 경우도 있다. 점점 일자리는 사라지고 국민 불만은 치솟을 수밖에 없다.”
💡 오프쇼어링(Offshoring): 기업이 비용 절감, 효율성 향상, 전문성 확보 등 목적으로 생산, 서비스, 업무 프로세스를 해외로 이전하는 전략.
— “미국 기업은 생산 시설을 해외로 이전하면서 소비자 가격을 낮추고, 임금을 억제해 왔다”고도 말한 바 있다. 미국 기업이 노동자 임금을 쥐어짜서 확보한 이윤을 주주에게 환원하고 있다는 비판이었나?
“그렇다. 1970년대 중반부터 2010년대 말까지 미국 노동자들 임금은 큰 변화가 없었다. 특히 생산직 내지는 서비스업 종사자들의 실질 임금은 거의 오르지 않았다. 노동자 임금을 억제하는 대신 저렴한 물건을 중국에서 수입했다. 또 일반 국민은 빚더미에 빠졌다. 유럽 선진국의 GDP 대비 가계 부채 비율이 30%대라면, 미국은 1970년대까지 50% 정도였다. 2008년 금융위기 임박해서는 90%에 육박했다. 개인 빚과 저렴한 중국 물건으로 노동자 임금을 억제했고, 임금을 쥐어짠 대가로 만든 이윤 대부분은 주주의 몫이었다. 미국 민주당은 이들에게 무관심했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온 게 트럼프다. 미국에 공장 짓고 일자리를 만들어 주겠다고 하니까 투표하러 간 것이다. 물론 트럼프의 진짜 목적은 부자 감세, 복지 삭감에 있었지만….”

트럼프와 협상 땐 “무조건 질질 끌어라.”
— 트럼프 대통령이 ‘관세 폭탄’으로 세계 경제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다. 우리 정부는 통상과 투자, 안보 관련 현안을 총망라한 패키지 협상을 미국에 제안했다. 우리 정부 대응은 어떠해야 하나?
“최대한 협상을 지연하고 지켜봐야 한다. 90일 안에 90건의 협상을 성사시킬 것이라 했지만 영국과 베트남하고만 무역 합의를 이뤘다. 베트남 정부 쪽 사람들을 아는데, 미국과 무엇을 합의했는지 본인들도 그 내용을 잘 모르고 있더라. 나머지 나라들은 버티면 트럼프가 무너질 것이라고 인식하기 시작했다. 우리도 버틸 때까지 버텨서 트럼프 힘이 최대한 빠졌을 때 협상을 시도해야 한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얼마나 중요한 나라인지 미국에 일깨워줘야 한다. 미국의 가장 큰 목표는 중국을 밀어내는 것이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 자산이 필수적이다. 미국은 군용 조선소에서 군함을 1년에 대여섯 대 만들고 상업 조선소에서 10여대 만든다. 1년에 20여대 만드는 나라인데 중국은 1년에 1700~1800대 만든다. 그나마 중국과 경쟁할 수 있는 나라가 700~800대 만드는 대한민국이다. 우리는 우리 강점을 어필해 몸값을 높여야 한다. 대통령 권한대행이었던 한덕수는 미국에 ‘맞서지 않겠다’고 저자세를 보였는데 잘못된 접근 방법이었다.”
— 트럼프의 뜻대로 미국 제조업은 부활할까?
“트럼프가 바라는 만큼 외국이 미국에 투자할 수 없다. 미국의 세계 제조업 생산 점유율은 2차 대전 직후 60%대였지만 지금은 16%로 떨어졌다. 중국 30%, 일본 6%, 독일 5%, 한국 3% 순이다. 미국이 24%까지 높이기 위해서는 일본, 독일, 한국이 자국 제조업 반을 미국으로 옮겨야 한다. 미국이 협박한들 독일, 일본, 한국 정부가 순순히 따를 거라 보나? 앞서 설명했지만 미국 주주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주주들이 기업 이윤 90%를 빼간다. 누가 어떻게 투자를 꿈꿀 수 있나?
애플은 스티브 잡스가 있을 때 배당도 잘 하지 않았다. 대신 연구 개발(R&D)에 대규모 투자해 성장할 수 있었다. 팀 쿡이 들어오고 나서는 빚을 내면서까지 배당하는 회사가 됐고 기술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높은 관세로 미국 기업이 이윤을 많이 낼 수 있지만 배당과 자사주 매입으로 다 빠져나가버리면 소용이 없다. 우리가 과거 보호무역으로 성장할 수 있던 것은 국가가 산업 정책을 통해 기업에 재투자를 강요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그런 시스템이 아니다. 미국 제조업 부활은 실패할 것이다.”
— 트럼프 ‘관세 전쟁’의 후폭풍은 인플레이션 아닐까?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Financial Times) 칼럼니스트 기드온 라흐만은 ‘트럼프는 올 여름이 시원하기를 바라야 할 것’이라고 썼다. 전 세계 에어컨 80%를 중국이 생산하고 있고, 미국이 수입하는 선풍기의 75%가 중국산이다. 그런데 중국과 관세 전쟁을 벌이면 여름을 어떻게 버틸 것이냐고 풍자한 것이다. 단기적으로도 인플레이션 때문에 미국은 버틸 수 없을 것이라 본다.”
— 지난 3월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미국에 31조 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국내에선 산업 공동화 현상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 산업 공동화 현상에 정부와 기업 대응은 어떠해야 하나?
“현대차나 삼성전자는 이미 다국적 기업이기 때문에 많은 생산 시설을 외국으로 옮겼다. 현대차는 미국 외에도 체코, 슬로바키아에 생산 기지가 있다. 삼성도 베트남, 필리핀 등에 생산 기지를 많이 지었다. 이들 기업이 자신들을 한국 기업이라 생각하고 그래도 국내에 눌러앉아 있는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 한다. ‘우린 이제 한국 기업이 아니다’라고 선언하고 국내 사업을 철수하면 우리 산업은 정말 텅 비게 된다. 국내 노동자 기술이 뛰어나지만 슬로바키아나 체코 노동자들도 임금 대비 노동 질이 좋다고 한다. 주주들이 이윤을 더 많이 환원하라고 하면, 현대차 노조와 어렵게 일하느니 슬로바키아에 가는 게 나을 것이다. 한국에 일자리는 사라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현대차 네 마음대로 해라’ 이래도 안 되겠지만 정부와 국민 모두 다각적 사고를 해야 한다. 우리는 주주이면서 노동자이기도 하고, 소비자로서 기업 제품을 구매한다. 주주 입장에서 주가가 오르면 좋은 거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주가를 끌어올리려고 기업은 노동자를 쥐어짜거나 일자리를 줄이는 선택을 할 수 있다. 반대로 나의 일자리만 생각해 모두 무리하게 임금 인상을 쟁취하면 물가 인상을 자극해 다수 국민이 고통을 받을 수 있다.
정부로서는 어떤 산업을 지켜야 하는지 명확한 ‘국가 전략’이 있어야 한다. 개별 기업에 모든 걸 맡겨 놓으면 자기 이윤만 좇는 선택을 할 것이다. 산업 공동화가 본격화할 것이고 더 나아가 산업 생태계가 파괴되어 국민 경제가 급격히 무너질 수 있다. 장기적으로는 탈미(脫美) 전략을 세워야 한다. 트럼프가 정신 나간(crazy) 전략을 쓰고 있을 뿐 바이든·오마바의 경제 산업 정책은 일련의 흐름 위에 있었다.”

명분 좋은 EU 탄소세 장벽… “가난한 나라는 수출 말라는 것”
— 미국 산업 정책이 어떤 흐름 위에 있다는 건가?
“미국은 1990년대 중반 세계무역기구(WTO)를 만들고 북미 자유무역협정(NAFTA)을 체결하면서 새로운 세계 질서를 완성했다고 판단했다. 2000년대 중반부터 균열이 나기 시작했다. 미국 산업이 공동화하고 일자리가 없어지는 등 자유무역 체제 모순이 나타난 거다. 이후 본인들이 주도해 창설한 WTO를 사실상 무력화하는 모습에 다수 국가는 미국 없는 세계 질서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세계 GDP의 25%를 생산하고 있지만 무역을 많이 하지 않기 때문에 세계 무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0~12% 수준이다. 대다수 국가의 제일 큰 무역 파트너는 중국이다. 그런 흐름 속에서 트럼프가 자기 파괴적으로 보호무역으로 치닫고 있으니 우리도 탈미해야 한다는 인식이 전 세계적으로 퍼지고 있다. 제국의 최후 발악에 우리를 포함한 여러 국가들이 더는 말려들지 않을 거라 본다.”

— 과거 주요 선진국들은 관세를 포함한 보호무역 장벽을 통해 자국의 유치산업을 보호하고 육성했다. 장 교수는 선진국들이 성장한 뒤 후발 국가들에게는 자유무역을 강요하며 무역 장벽이라는 ‘사다리’를 걷어차고 있다고 일갈해 왔다. 관세를 무기 삼은 트럼프의 등장은 장 교수에게도 당혹감을 줬을 것 같다.
“상상도 못할 행태를 보여서 그렇지 앞서 설명한 역사 흐름 위에서 보면 그리 놀랍지는 않다. 선진국들은 WTO 체제로 자유무역 질서가 완성됐다고 하면서도 자국 농업에는 엄청나게 보조금을 뿌리지 않나? 그런 건 WTO 규제 대상에서 빼놓는다. 미국뿐 아니라 유럽연합(EU)도 ‘탄소 많이 배출하면 세금을 매기겠다’며 명분 좋게 씨밤*(CBAM)을 내세우지만 달리 말하면 ‘가난한 나라들은 수출하지 말라’는 것 아닌가?”
💡 씨밤(CBAM): 탄소국경조정제도. Carbon Border Adjustment Mechanism의 약자. 탄소 배출이 많은 제품이 유럽으로 수입될 때, 그 제품이 유럽 내에서 생산되는 것과 같은 수준의 탄소 비용을 부담하도록 의무화하는 시스템.


— 한 인터뷰에서 “산업 정책을 재정비해 지킬 건 지키고 버릴 건 버려야 한다”고 했는데 한국 정부가 어떤 산업을 지키고 버려야 하는지 기준이 있을까?
“공식이나 기준이 명시돼 있는 것은 아니다. 정부, 기업, 노조, 학계의 중지를 모아 결정해야 할 사안이다. 다만 기술 발전 가능성이 높은 산업과 자동화가 힘든 산업을 지키고 육성해야 한다. 제조업 근간인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산업은 대체가 어렵다. 장인 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가 모방하기 어려운 산업을 살려야 망하지 않는다. 모방이 쉬운 산업은 한때 잘 나가도 금방 따라오기 마련이다. 유럽이 주도하던 조선 산업을 벤치마킹해서 성공한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반면, 반도체 제작 기계와 같이 모방하기 어려운 장비는 네덜란드 등에 의존하는 게 현실이다. 무조건 첨단 기술 육성이 정답은 아니다. 예를 들면 아프리카는 여전히 인구 증가율이 높다. 선진국 시장보다 수요 창출을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아프리카 소비자가 사줄 물건이 하이테크 제품은 아닐 것이다.
장하준은 누구.
- 서울대 경제학과 졸. 영국 케임브리지대 경제학 석·박사.
- 1990년 한국인 최초로 케임브리지대 경제학 교수로 근무. 2022년부터 런던대 경제학 교수로 재직.
- 2003년 군나르 뮈르달 상. 신고전학파 경제학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 경제학자에게 수여.
- 2005년 바실리 레온티예프 상. 경제학 지평을 넓힌 경제학자에게 수여.
- 2014년 영국 정치 평론지 ‘프로스펙트’ 선정 ‘올해의 사상가 50인’ 중 9위.
- 세계적 석학이면서 베스트셀러 작가. 저서 13권이 전 세계 46개국 45개 언어로 번역. 200만 부 넘게 팔림.
- ‘장하준의 경제학 레시피’,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나쁜 사마리아인들’, ‘쾌도난마 한국경제’, ‘국가의 역할’, ‘사다리 걷어차기’ 등이 대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