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52시간 이슈가 지난해 11월 갑자기 언론에 한두 번 보도되더니 쟁점으로 등장했다. 반도체 인프라 구축이나 세제·금융 지원 등 칩스법 논의가 뒤로 밀리고 있어 매우 안타깝다.”

반도체 산업을 지원하는 칩스법 등을 발의했던 김태년(민주당 의원)이 3일 국회 토론회에서 짧게 푸념했다. 진짜 중요한 쟁점이 파묻혔다는 이야기다.

이게 왜 중요한가.

  • 노동시간은 진보 진영의 핵심 어젠다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민주당의 유력 대선 주자가 그걸 포기하려는 상황이다. 집토끼를 뒤에 남겨두고 산토끼를 잡으러 가겠다는 전략이다.
  • 삼성전자의 위기가 과연 52시간 규제 때문일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삼성전자가 절박하게 요구하는 이슈도 아니다. 받아주면 좋고 설령 안 되더라도 치명적인 규제는 아니다.
  • 민주당 내부에서도 반발과 우려가 크다.
  • 조선일보가 “너무 변해서 낯설다”고 할 정도로 파격적인 선택이다. 이재명(민주당 대표)의 의도도 결국 이재명이 달라졌다는 메시지를 주려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

삼성 민원으로 시작된 이재명의 우클릭.

  • ‘반도체 특별법 노동 시간 적용 제외 어떻게’ 토론회의 진행자는 이재명이었다.
  • 이재명은 “반도체 산업에 국한한다는 전제 하에, 연구 인력 중 연봉 1억5000만 원이 넘는 고액 연봉자의 경우, 본인 동의가 있으면, 한시적으로 주 52시간 적용을 제외해보자는 제안은 합리적이지 않느냐”며 경영계의 주장에 힘을 실어줬다.
  • 이재명은 지난해 11월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간담회에 참석한 기업인들과 ‘화이트칼라 이그젬션’(White Collar Exemption·특정 고연봉자에게는 근로기준법상 노동시간 제한을 적용하지 않는 제도)을 논의했다. 김태년의 지적은 ‘주 52시간제 적용 예외’를 띄운 이재명에 대한 우회적 불평일 가능성이 있다.
  • 같은 당 의원 김원이도 “사실 반도체 특별법 몸통은 전력망, 용수, 도로, 폐수 처리 등 어마어마한 비용이 들어가는 인프라 구축이다. 그동안 이 문제를 기업에 떠넘겨 왔는데 (반도체 특별법은) 정부가 책임을 지겠다는 것”이라며 “지금은 (주 52시간제라는) 꼬리가 몸통을 흔들고 있다”고 꼬집었다.
  • ‘주 52시간제 적용 예외’는 삼성 민원이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야당 간사 김주영(민주당)도 “주 52시간제 논의 시초는 지난해 11월 11일 삼성전자 대표가 화이트칼라 이그젬션을 이야기한 것”이라며 삼성 측 요구였음을 시사했다. 김주영은 경총 간담회에 배석해 노동시간 유연화 반대 입장을 밝힌 인사로 알려졌다.
  • 이재명은 “이것은 특정 기업 이야기가 아니다. (삼성은) 대표 기업이니까 토론회에 나온 것”이라며 김주영을 막아섰다.
  • 이날 토론회는 경영계와 노동계에서 4명씩 나와 찬반 토론을 펼쳤다.

찬성 주장: 시간 말고 ‘프로젝트’ 단위로 가자.

  • 왜 연구 개발 노동자는 주 52시간 예외 대상이어야 하는가. 경영계 논리는 다음과 같다.
  • 반도체산업협회 전무 안기현 : ‘시간’을 기준으로 연구 개발을 하면 성과가 나기 쉽지 않다. 제조·생산과 연구의 특성은 다르다. 연구 개발은 창의력과 문제 해결 능력이 중요하다. 시간으로 제약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원천 기술이 취약해 경쟁국보다 더 열심히, 더 많이 일해야 한다.
  • SK하이닉스 R&D담당 부사장 김재범 : 현재 AI 핵심 부품으로 주목 받는 HBM(고대역폭메모리) 반도체는 대표적 고객 맞춤형 제품이다. 고객 요구가 다양해 신속한 대응이 경쟁의 핵심 요소다. 뛰어난 연구원들의 귀중한 시간을 더욱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 추격자와 기술 격차를 벌리려면 쫓아오지 못할 더 빠른 속도로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
  • 삼성글로벌리서치 상무 김태정 : 현재 삼성전자 전체 직원 90%가 출퇴근 시간이 자유로운 1개월 단위 선택근로제를 활용한다. 주 52시간 연장 근로 준수 측면에서, 업무량 조절에 어려움이 있다. 월 초에는 늦은 시간까지 실험이 가능하지만 월 말로 갈 수록 남은 근로 시간이 부족해 출근하지 못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고객이 납기일을 당겨 달라고 요구하면, 관리자는 (직원의 초과 근무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다.

    목표한 성능과 수율 확보를 위해 연구 개발 인력의 실험 검증이 많이 요구 된다. 하지만 근로 시간 제약으로 인해 검증 횟수가 줄면서 완성도 저하 우려가 있다. 2021년 근로 시간 정산 단위가 1개월에서 3개월로 확장됐지만, 11시간 연속 휴식 제도 준수가 어려워 도입하지 못하고 있다. 이 제도로 인해 늦은 시간까지 실험·검증하기 어렵다. 본인 선택에 따라 3일 집중 근무 후 나머지 이틀을 여유 있게 근무하는 방식도 불가능하다.
  • 성균관대 반도체융합공학과 교수 권석준 : 반도체 시장 상황은 수시로 바뀐다. 대만 TSMC에도 비상대책반이 있다. 지진이 발생하는 것을 대응하기 위해서다. 우리의 주 52시간제처럼 경직적이면, 집중적 인력 투입은 어려울 것이며 지진 복구도 불가능할 것이다. 대만 파운드리 기업 TSMC가 삼성과 경쟁할 때 박사 급의 연구 개발 인력을 3교대로 돌리며 24시간 체제를 가동했다. 이러한 ‘나이트호크 프로젝트’에 대만 노동계도 우려했지만, 실제 큰 성과가 있었고 과실을 노동계와 공유했다.

    노동 시간 초과 시 사용자 형사 처벌이라는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시간이 아닌 미션과 프로젝트에 초점을 맞춘 유연성이 필요하다. 다만 노동자 건강과 작업을 보호하기 위해 노동자의 프로젝트 진·출입 시간을 정확히 측정하고 성과를 투명하게 공개할 수 있도록 사측이 정보를 충분히 공유해야 한다. 그런 논의 과정에 노조 대표들이 참여할 필요가 있다. 정기적으로 초과 근무 정산이 필요하며, 노동자 건강과 삶의 질을 보장할 수 있는 자체 지원을 마련해야 한다.

반대 주장: 근로기준법 흔들기, 개구멍을 정문으로 만들 건가.

  • 노동계 반발은 거셌다. 특히 SK하이닉스 노조 측은 자신들이 주 52시간 초과 노동이 필요하지 않은 이유 그 자체라고 했다.
  • SK하이닉스 이천노조 부위원장 정광현 : 노동 시간 제약 때문에 기술력 제고가 쉽지 않다? 동의할 수 없다. 반증이 SK하이닉스다. 우리는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킥’(kick·상황을 특별하게 만드는 핵심 요소)이라 할 수 있는 HBM을 미국 엔비디아에 지속적으로 공급하고 있다. 우리는 특별연장근로를 도입하지 않고도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췄다.

    SK하이닉스는 2018년부터 유연근무제 중 선택근로제를 시행하고 있다. 자율성과 책임에 기반한 기업 문화 형성 등 일하는 방식 변화로 창의성과 만족감이 상승하면서 업무 효율성이 증가했다. 그 결과가 HBM 반도체다. 현재 제도로도 충분하다.
  • 화성 SK하이닉스지회 수석부지회장 김영문 : 현 근무 체계가 생산성을 떨어뜨린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유연근무제 도입 후 전체 근로자들의 주 평균 근무시간은 43시간이다. 그럼에도 HBM 같은 제품으로 많은 영업이익을 가져왔다. 주 최대 52시간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법이 있기 때문에 시스템적으로 제어가 되고 있다. 그나마 일하는 사람의 건강과 안전을 지킬 수 있는 것이다.

    현재 연구 개발직 근로자들은 출퇴근 시간에 구애 받지 않고 필요에 따라 늦게 일하고 격주 1회 쉴 수 있는 해피 프라이데이 제도를 사용하고 있다. 40시간이 넘는 근무 시간에 대해서는 조기 퇴근과 같이 본인 스스로 결정하여 업무를 종료한다. 그런다고 생산성이 떨어지지 않는다. 노동 시간 한도를 법으로 정하지 않으면, 밤샘 작업이 며칠 이어져도 어느 누구도 쉬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일하는 본인도 워크홀릭에 빠져 과로에 노출된다. 주 52시간 상한을 풀면, 연구직뿐 아니라 비연구직인 제조, 나아가 협력업체까지 연쇄적으로 풀린다. IT산업 전반에 확산될 것이다.
  • 전국삼성전자 노조위원장 손우목 : 주 40시간 이내로 노동한 노동자보다 52시간 이상 노동한 노동자의 산업 재해 발생 확률이 4배 이상 높다. 삼성전자는 국회를 찾아가 TSMC 사례를 들고 과로를 정당화했지만, 그 사례들은 2년 동안 12차례 연장 근로 한도를 위반해 벌금형 처분을 받은 불법 사례였다.

    대만 전자산업노조도 한국의 반도체 특별법 근로 시간 예외 적용 조항을 반대한다. 한국 기업이 자신의 무능에 따른 경쟁력 부족을 근로 시간 제도 탓으로 돌리고 있다고도 비판했다. 장시간 노동은 혁신을 가져오지 않는다. 오히려 숙련된 인력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게 중요하다. 이를 위해선 더 나은 노동 조건이 제공돼야 한다. 인력 충원과 체계적 근무 환경 개선이 우선이다.
  • 연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권오성 : 연구라는 직업은 시간 투입과 결과가 정비례하지 않는다. 일과 직장에 대한 자긍심에 근거한 자발적 동기 부여가 더 중요하다. 삼성전자는 모든 기업이 동일하게 준수해야 하는 근로 시간에 옆문을 뚫으려 한다. 근로기준법에 개선이 필요하다면, 사회적 합의 기구 등을 통해 개정안을 논의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특정 기업을 위해 근로기준법에 균열을 내는 시도에 동의할 수 없다. 아무리 금칠을 해도 개구멍이 정문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평가와 전망: 삼성만을 위한 법, 합의된 제도에 균열을 만든다.

  • 이날 토론회는 이재명이 좌장을 맡아 경영계와 노동계의 이견을 조정하는 자리였다.
  • 현재 정부·여당이 ‘윤석열 내란’ 사태에 휩쓸려 중도 민심을 대거 잃은 데 반해, 유력한 야당의 대선 후보가 갈등을 완화하고 접점을 찾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은 평가할 만하다. 이재명은 “당사자 간 이해 관계는 쉽게 조정되지 않는다. 대화와 토론을 하되, 권한을 가진 사람이 최종 결정하고 책임을 지면 되는 것”이라고 했다. 특검이나 수사가 아닌 정책과 법안을 정쟁의 중심으로 끌고 온 것도 긍정적이다.
  • 보수 신문도 호응하고 있다. 조선일보는 4일 “민주노총 등 지지 세력이 아니라 나라와 국민을 위해 주 52시간제 개혁의 결단을 내리기 바란다”고 했다. 동아일보도 “이재명의 태도 변화는 우리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는 장애물을 제거하고 신성장 동력의 불씨를 점화할 기회가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 진보 진영에서 이재명 지지세가 확실한 만큼 중도·보수에도 손짓하는 우클릭 행보는 계속 될 것으로 보인다.
  • 그러나 삼성의 민원을 이유로 온 국민이 적용 받는 노동시간 상한제에 옆 구멍을 뚫는 퇴행은 ‘꼼수’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앞서서도 토론과 설득 없이 경제 기조를 ‘기본사회’에서 ‘성장’으로 급선회한 것에 국민은 고개가 갸웃했다.
  • 권오성은 이재명 면전에서 “반도체만 연구하나. 바이오와 IT는 연구 안 하나. 전체 연구직 근로자의 재량 근로를 위한다면, 국회나 경제사회노동위원회를 통한 사회적 대화도 가능할 것”이라며 “민주당은 사회적 대화를 통해 근로기준법 안에서 (사회 요구를) 안착시키는 노력을 해야 한다. 특정한 몇몇을 위해, 개별 기업의 근로시간을 위해, 제도에 균열 내는 건 정도가 아니다”라고 꼬집었다.
  • “개별 기업을 위해 법을 고치는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게 학자로서 부끄럽다”는 비판을 곱씹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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