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캡:콜드케이스] 꼰대와 극우, 그리고 희망 없는 청춘의 난리 블루스. 왜 표현의 자유의 ‘짝말’은 포괄적 차별금지법인가. (⏰16분)
여는 말: 목소리, 욕망, 침묵
이른바 ‘목소리’라는 건 대체로 욕망이다. 그 욕망을 사회화해서 분해하면 그건 대체로 저 예쁜, 저 멋진, 저 따뜻한, 저 사랑스러운 누군가, 무엇을 가지고 싶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나도 거기에 속할 수 있을까. 나도 누군가와 만나서 사랑할 수 있을까. 나도 저 멋진 곳에서 살 수 있을까. 나도 이 경쟁의 필터를 무사히 통과해 일인분 노릇 할 수 있을까…(이건 이미 꼰대가 되어버렸지만, 나 자신의 꿈이자 악몽이기도 하다…)
그걸 어떻게 탓하나. 하지만 자신의 영혼을 갈아 넣어 바늘 구멍보다 작은 ‘능력주의’ 필터를 통과하지 못하면, 그 바람은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물론 위대한 엄빠 찬스의 행운이 있긴 하다. 능력주의 필터든 엄빠 찬스든 소수에게 속한 것이다. 그러니까 대다수 청춘은 낮게 읊조린다. ‘이번 생엔 글렀군.’
그런데 그걸 너무 쉽게 차지한 자들이 있다. 꼰대들. 그걸 다 차지하고 그 에덴에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은 진작에 밀어버렸다. 그러면서 민주화를 이야기하고, 개혁을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부정선거를 외치고, 중국을 입에 올리며 선동한다. 이 기묘한 위선의 선진국에서 태어난 청춘들은 연애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한 채로 관념적 상상 세계에 기반한 신화적 젠더 전쟁을 벌이고, 그 불만과 짜증을 소셜미디어에 지들끼리 쏟아내며 낄낄거린다.
그 낄낄거림을 상상하면 나는 슬퍼진다. 미안하다. 그래, 알았다, 알았어… 자기 책임을 부정할 순 없다. 자기가 싼 똥은 자기가 치워야 한다. 하지만 가장 큰 책임은 이 시대의 구조를 만든 저 위선의 스승, 꼰대들에게 있다. 거기엔 물론 나도 포함이다. 한편으론 그런 낄낄거림이라도 만들어내는 청춘은 그나마 낫다. 아무런 욕망도 없는 침묵 속에서, 혼자 외롭게, 마치 ‘빨강머리 앤’의 조시 파이처럼, 세상을 증오하기 위해 사는 것 같은 청춘이 아마도 훨씬 더 많을지 모른다. 난 그게 무섭다.
문득 떠오르는 문구. 전후 현대 영국의 복지국가에 관한 지침을 제시했다고 평가받는 베버리지 보고서(1942) 서문에 윌리엄 베버리지는 브론테의 소설 속 문구를 인용했다. 나는 그 문구를 잊지 않을 정도로 가끔 떠올린다.
“비참함은 증오를 낳는다.”
각설하고, 이 위선과 모순의 구조 속에서 표현의 자유가 민주주의를 공격하는 우리 시대의 역설, 그 슬픈 풍경에 관해 캡콜드(김낙호 드렉셀대 교수)와 이야기했다.

김낙호의 ‘캡:콜드케이스’ [ep. 34]
표현의 자유 외치는 꼰대,
민주주의 비웃는 청년
질문 정리: 민노
답변 퇴고: 캡콜드
📢 안내 및 알림: 인터뷰는 2026년 7월 29일 밤 11시에서 다음 날 새벽까지 진행했습니다. 질문은 맥락화하고, 캡콜드의 ‘독백 문투’로 정리합니다. 최종 퇴고 과정에는 캡콜드가 참여했습니다.
표현의 자유는 ‘도구’
나를 포함한 먹물들은, 표현의 자유를 무슨 지고지순하고 절대적인 진리인 것처럼 묘사하는 직업병 비슷한 경향이 있다. 중요하지만, 담론 환경의 시대적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 것처럼 느껴진다. 표현의 자유는 그런 게 아니기 때문이다. 표현의 자유라고 할 때의 그 자유는, 누가 나를 침해하지 않는 신체의 자유나 프라이버시의 자유와는 다른 성질을 띤다.
표현의 자유는 사회적 참여(권)으로서의 자유다. 그래서 표현을 자유로 의미 구성할 때 사회적인 조율은 필수적인 선결 문제다. 참여권으로서의 자유는 밖으로 꺼내 놓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혼자서만 읽는 일기와는 다른 것이다. 사회적 조율이 필요하고, 이 자유가 그 자체로 본질적 가치가 아니라 무엇인가 더 큰 가치를 위한 ‘도구’라는 접근이 필요하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건 표현의 자유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항상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점이다. 인권, 과학과 문화, 혁신의 전제로서 경제적 풍요… 그런 목적을 위한 소통 ‘도구’가 표현의 자유다. 표현의 자유 그 자체를 위해서 표현의 자유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좀 더 자세한 이야기가 궁금한 분은 말미에 붙은 박스 기사를 참조하시고, 결론만 간단히 말하자면 표현의 자유는 표현의 규제 없이는 무의미하다. 이런 역설이 표현의 자유의 현실이다. 다만 무엇을 얼만큼 규제하느냐의 질문에 대해서, 뭔가 큰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표현의 자유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부족하다느니 하는 이야기가 나오곤 한다. 그런데 사실은 늘 논의는 넘쳤고 심지어 대략의 합의점도 존재한다. 역사적 학습 속에서 대체로 찾아낸 그 기준이란, 바로 혐오에 대한 선동을 막자는 것이다.

‘차별’이 핵심인 이유
사회적 의미에서 혐오는 그냥 막연하게 감정적으로 밉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특정 인구 집단을 나쁜 놈으로 낙인찍어 그들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하자는 것이다. 개별 행위 여부가 아니라 자기가 선택하지도 않은 소속 때문에 차별적 대우를 받아야 한다면 민주제가 정상적으로 굴러갈 수 없는 노릇인데 말이다.
독일 예를 들자면, 그 나라는 20세기 초중반에 정치적 필요에 의해 유태인, 로마니(‘집시’), 동성애 등에 대한 혐오를 선동하다가 민주제를 스스로 부수고 나치 독재로 타락한 역사가 있지 않나. 그렇기에 구체적인 혐오의 선동은 곧 민주제 자체에 대한 위협이 되어 반헌법적이라는 논리로 규제 대상이 된다.

부당한 차별은 혐오 선동 같은 소통 내용이 일상화될수록 더욱 자연스레 정당화된다. 소통과 실천은 한 몸이고, 혐오의 소통은 혐오의 실천과 밀접하다. 말에서 일상적인 차별이 득세하면, 사회에서 그런 차별이 힘을 얻는 셈이다. 혐오 선동에 대해 국가가 전향적으로 나서서 규제해야 한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합의된 최소한의 지점이고, 계속 줄다리기를 하는 것은 어떤 집단까지를 차별당해서는 안될 범주로 포함시킬 것인가 뿐이다.
혐오 선동에 대한 규제는 혐오를 실천으로 옮겼을 때, 즉 혐오에 의한 차별을 하면 사회가 크게 혼쭐낸다는 근거가 있어야 가능하다. 그래야 애초에 혐오 표현 자체도 조심스러워진다. 예를 들어 미국은 혐오 표현 자체에 대해서는 직접적 폭력 위협이 아니고서는 웬만해선 그대로 두는 편이지만, 그것이 차별적 괴롭힘 등 구체적 위법 행위의 예비 단계라고 판단되면 가중치 처벌을 하는 방식을 취한다. 그게 가능한 이유는 당연하게도, 차별을 금지하는 법규들이 잘 박혀 있기 때문이다. 장애인법, 고용연령차별금지법 등 세부 분야별로 있지만, 가장 큰 줄기로는 1964년 민권법이 있다.

좀 더 진취적으로 접근하자면, 현대 사회는 사람들이 부당하게 차별하고픈 집단을 어떻게든 쉽게 지정해낼 수 있는 세상인 만큼, 내일의 새로운 창조적인 차별을 방지하기 위해 최대한 포괄적으로 정하는 것이 좋다. 늘 ‘나는 동성애자/트랜스/중국계/여성/노인/장애인/특정 지역민 기타 등등은 계속 혐오하고 싶다’라는 목소리가 특정 이익집단에서 한 번씩 계속 튀어나오는 현실이지만, 정치적 의지를 발휘해서 마침내 만들어놔야할 것이 바로 그 ‘포괄적 차별금지법’이다.
혐오의 즐거움
혐오 표현과 표현의 자유라는 문제를 최근에 수면 위로 끌어올린 것은 물론 배재고 야구부 사태다. 사람들은 야구단이 광주 고등학생들에게 던진 표현에 충격을 받았는데, 그런 말이 거리낌 없이 나올 정도로 청소년 문화에 일상화된 수위라는 것이 문제로 지목되었고 사람들은 소싯적 인기 사이트 ‘일간베스트’의 기억을 소환했다.
사실 십수년 전 일베는 주류 미디어에서 노무현 코알라 합성사진 따위로 주로 언급되었지만, 기본적으로는 유머 추천 사이트를 표방하며 혐오를 유머 코드라고 우기는 온라인 하위문화가 핵심이었다. 차별에서 벗어나야 할 도덕적 명분이 부각되는 것을, 오히려 위선자라며 혐오 대상으로 찍어버리는 식으로. 여성, 전라도, ‘씹선비’, 등등. 일베 자체는 몇몇 패륜 지향이 널리 보도되며 사회적 인식이 나빠지며 일반적 관심에서 사라졌지만, 혐오를 즐거움의 코드로 소비한 그 방식은 어디 가지 않았다.

극우들이 구사하는 방식의 혐오 표현이 젊은 세대의 일상에서 오간다고 해서 다들 모두 극우에 경도되기로 결심한 것은 물론 아니다. 한국은 물론이고, 미국조차도 청년층 다수는 국가가 복지 혜택을 확장하는 걸 반대하지 않고, 독재 국가를 동경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문화적으로 기성 세대가 만든 시스템에 대한 불신이 크고, 자신들과 경쟁하면서 부당하게 유리한 조건을 얻어가는 것 같은 옆의 경쟁자를 몰아내야 정의라고 여기며, 이중적 위선보다 차라리 투명한 이기심을 편안해한다.
뭔가 하고 싶지만, 현재 처지는 궁색하니까. 능력을 발휘해서 부자되고 대우받자라는 이념은 주입받았는데 사회적 성공의 문은 갈수록 좁다. 새로운 돌파구는 화제의 트렌드 따라가기조차 버겁다. 부모 세대보다 가난할 것 같은데, 그 부모 세대들이 시스템 자체부터 자기들 유리하게 만들어 놓은 것 같다. 그래 놓고 앞으로는 도덕적 훈계질, 뒤로는 꼼수 총동원. 갑갑한 처지는 냉소를 부르고, 냉소도 웃음이니 문화적 구심점이 되어준다.
기성세대에 반하는 청년 문화는 늘 있어 왔던 기본 패턴이고, 막연한 문화 코드 이전에 사회적 조건이다. 그것의 현재 한국 사회 버전이 바로 민주화 생색내며 온갖 기득권 행사하기에 바쁜 86세대에 대한 반정립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고개를 돌린 반대 방향에 영 불길한 것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이다.

내 기득권 지적받는 것 불편해서 싫고, 다양한 범주의 주체들을 받아들여 공존하는 것 복잡해서 싫고, 내 집단이 아닌 누군가가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짜증나고, 내 불안에 대해 속시원하게 명쾌한 외부의 적을 특정해서 대차게 까고 싶고, 내가 싫어하는 대상을 조지기 위해서라면 기존 시스템 따위에 묶이지 않는 화끈한 응징에 환호하고. 이런 혐오의 즐거움이 국가든 인종이든 성이든 전체주의적 구심점을 획득해 버리면 그것이 극우로 빠진다는 것이다.
어딜 가나 극우는 ‘좌표’ 찍어서 너희들의 적은 얘네들이야, 그런 식으로 선동한다. 그렇게 해야 손쉽게 막연한 분노를 구체적으로 발산시키고 그 동력으로 자기들의 정치 권력을 키울 수 있으니까. 위선적 기득권 세대의 시스템에 대한 불만이 진보적 구심점을 만나서 발생한 프랑스의 68운동이나 미국의 진보시대 같은 것도 있었지만, 오늘날 정교한 무언가를 새로 제안하고 만들어내는 것은 워낙 어렵다.
미국 뉴욕시장 맘다니의 적극적 진보 정책과 그보다 더 적극적인 정책 성과 소통 작전에 주목하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최근에는 생활비 고물가에 시달리는 뉴욕 시민들 대상으로, 시 직영 식료품 할인 점포들을 개시했다. 조건에 대한 불만이 혐오의 즐거움으로 소비되기 가장 쉬운 환경에서, 구체적으로 뭔가를 하나씩 진보시켜 나가는 것의 즐거움을 제공해주니까.

배재고 사태의 ‘비포’와 ‘애프터’
배재고 야구부의 호남 혐오 응원은 사회적으로 문제됐고, 배재고 학생들이 학부모, 선생님들과 함께 광주에 찾아가 눈물을 흘리면서 사죄했으며, 광주고 교장선생님은 감동적인 관용과 어른의 넓은 품을 보여줬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과연 배재고 학생들의 ‘비포’와 ‘애프터’에 변화가 있는지 여부다. 그런 전체 서사가 바로 사회적 교훈이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주류 언론 보도는 사과 이벤트와 함께 빠르게 식어버린다. 당초 주어진 6개월 출장 정지 처벌의 강도가 적절했는지 나는 고교 야구 전문가가 아니라서 모른다. 하지만 그게 사과 이벤트 직후 1개월로 확 줄어버린 것은 별것 아니니 무마하자는 느낌으로 충만하다.
문제가 된 배재고 학생들이 광주의 기념관에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야 봤지만, 그들이 자신들이 했던 행위에 대해 반성했는지, 아니 그 이전에 자신들의 행위가 왜 문제인지 학습이 이뤄졌는지, 그래서 그 후 어떻게 살기로 다짐했는지는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다른 이들이 무엇을 느꼈는지는 더욱 모르겠다.

배재고 학생들 전체에게 시켰다는 특별 ‘역사 교육’ 시간이 그들의 ‘비포’와 ‘애프터’에 변화를 주었을 것이라는 기대가 없다는 점만은 확실하다. 학생 매체 ‘토끼풀’에 의하면 다들 퍼질러 잤다고 하니까. 편집장 문성호는 이렇게 지적한다:
“안타까운 건 이걸 교육의 문제로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교육을 안 해서가 아니잖아요. 5.18에 관해 배우고 시험문제 나오면 다 맞히는데 혐오는 계속되고 있잖아요.”
문성호(토끼풀 편집장)
남이 발끈하는 말을 해서 혼이 좀 났나 보다, 라는 층위에서만 보면 딱 이 정도인 것이다. 나는 배재고 야구부 학생들이 작정하고 호남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시연하기 위해 그런 구호를 외쳤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손쉬운 도발 수단으로, 한창 유행하는 언어를 쉽게 던졌을 가능성이 아무래도 더 크다고 본다.
그러데 문화코드화되어 버린 혐오의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다. 발화자는 또래문화의 가벼운 은어, 농담을 던진다고 여기는데, 나아가 제3자들도 대체로는 그냥 그 정도 이야기인가보다하고 넘어가는데, 호명된 이들은 그로 인해 큰 불이익을 받는다는 것.
그렇기에 사과 이벤트의 눈물이 아니라 ‘애프터’의 변화를 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은어/속어/유행어/밈의 과정에서 소실되는 함의를 구체적으로 직접적으로 풀어내서 직면하게 하는 것이다. 광주에 탱크 (및 연관된 스타벅스) 운운하는 것은 조건반사적 도발을 너머, ‘너네 부모 세대가 군사독재에 대규모 끔살당하고 은폐되고 너네까지도 지금도 두고두고 사회 전반에서 차별당하는 건 완전 쌤통이다 그러니까 누가 감히 민주주의 어쩌고 하며 대들래’라는 ‘뜻’이 담기게 된다는 것부터 상식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렇기에 관련 혐오 발언을 규제하는 것은 무슨 518의 성역화가 아니라, 차별 행위의 현재 진행을 막는 것이기도 하다.

그 행동의 의미가 광주일고 학생들의 부모 세대의 죽음과 상처, 그리고 지역 차별이라는 역사적이며 현재진행형인 고통을 불러오는 표현이라는 걸 제대로 인식하게 하기에는 형식적 학교 교육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던 셈이다. 그렇다면 더 큰 광의의 학교, 그러니까 온 사회의 미디어 환경에서 5.18이라는 과거의 사건으로 상징되지만 지금도 작동하는 호남 차별의 상처를 더 많이 이야기해야 그 행동이 정말 잘못이라는 걸 누구나 인식하게 될 텐데… 그런 게 여전히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과거로 박제한 것 말고, 그 유산으로 현재 발생하고 있는 문제를 직면하는 것은 그 안에 자신의 위치를 돌아보게 만들어서 불편하니까.
이런 사태가 발생하면 항상 더 깊게 차별이라는 것에 대해 배우는 계기로 학교든 사회든 써먹어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각자가 겪어본 차별을 사회적 관점에서 되돌아보게 돕는 것인데 (그런 의미에서 하나의 역설은, 차별에 대한 가장 좋은 교육은 내가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 없는 부당한 차별을 가급적 어릴 때 이미 겪어보는 것이다), 다른 기회에 더 자세히 이야기해보도록 하겠다.
“거기 커피는 아니죠?”
그러나 이런 진지한 논의가 가능하려면, 우선 내 자유가 꼰대들에게 공격당한다는 즉각적 반발심을 자극하면 안 된다. 일례로 한창 스타벅스가 탱크데이 어쩌고 이벤트로 설화에 올랐을 때 대통령이 섣불리 얹는 핀잔의 한마디는, ‘좌표를 찍어서 이념적 정적인 스타벅스를 미워하자’는 또 다른 선동으로 받아들여질 거다. 커뮤니케이션적으로는 낙제보다 못하다. 좋은 목적이었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잘못된 수단, 엇나간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가령 이렇게 했다면 어땠을까.
- 이렇게 맛있는 커피가 혐오에 이용된다는 게 안타깝네요.
- 커피는 잘못이 없는데 말이죠.
- 요즘 커피가 엉뚱한 곳에서 고생한다죠?
스타벅스 혐오 마케팅에 반감을 품고 그걸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젊은 친구들조차 대통령의 ‘한마디’는 자신을 훈계하는 기득권 꼰대의 잘난 척으로 느꼈을 가능성이 크다. 사실 젊은 애들은 스타벅스(혐오 마케팅)를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걸 옹호하는 건 아니라고 해도, 그런 상태에서 세상 말종 취급을 받으면 반감만 생긴다. 기성세대는 스타벅스 혐오 마케팅이 그토록 위험하고 잘못된 사고방식인지를 제대로 알려주지도 않았으니까.

구체적인 역사, 아픔, 상처가 여전히 있음을 드러내야 한다. 정치후진국 미국에 비유하면, 노예제가 없어졌다고 해도, 그 노예제의 수많은 문화적 흔적, 제도적인 불이익이 사라진 건 아니다. 그런 걸 추상적으로 애둘러 버리고, 노예제가 없어졌으니 차별도 없어졌다는 식으로 정리하고 현재의 불평등은 그냥 지금 흑인의 무능이라고, 그게 능력주의라고 뻔뻔하게 나오는 것이 바로 우익의 단골 레퍼토리다.
차별의 조건에 구체적으로 직면하는 것을 불편해하며 추상적으로만 당위로만 이야기하는 방식으로는 모든 것이 소소해진다. 역사로는 대충 배워서 머리로는 알아도, 내가 사는 현재에 적용해 몸으로 마음으로 체화할 기회가 없으면 차별이라는 현실은 쉽게 시야에서 사라진다.
‘어른스러운’ 담론 모델의 실종
합리적 오피니언, 존경할 만한 어른스러운 의견 제시는 인기가 없다. 촘촘한 미디어 환경을 대규모로 수놓는 것은 남은 건 당파적 선동에 익숙한 진영의 목소리뿐이다. 그 목소리는 민주당과 국민의힘으로 나뉘어서 친명, 반명, 친한, 친윤으로 또 세분해서 족보 타령하고, 민주화와 개혁을 내세우며, 사실은 그저 기득권 다툼이 본질은 그런 저열한 투쟁을 벌인다.
그런 싸움의 본질을 아이들은 뻔히 다 들여다본다. 모든 것이 진영 다툼으로 여겨지면, 정작 더 나은 방안을 찾는, 그러니까 표현의 자유 같은 장치들을 열심히 유지해야 할 필요가 애매해진다. 더 추하게 상대를 조롱하기 위한 표현의 자유일까.
사람들은 누구나 아주 좁은 일부 토픽에 대해서만 섬세하고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뇌 경로를 타고, 다른 대부분의 것에 대해서는 직관적으로 넘겨짚는 경로를 타게 되어 있다(인지심리 및 행동경제학자 카네만의 이중 시스템 이론이 바로 이런 이야기다). 우리 사회적 삶에 근본적으로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민주제의 정치 참여 같은 것이 앞의 경로로 처리되면 훌륭한 세상일 것 같지만, 선택은 좀 더 근시안적이다.

점심에는 중국집에서 짜장을 먹을지 짬뽕을 먹을지를 심사숙고하고, 오후에는 어제 지른 반도체 주식이 왜 더 올라야 할지 경제 전문가가 된다. 그만큼 직접적이지 않은 것은, 아무리 실제로 중요함을 인지하고 있다 해도, 직관 경로로 태우게 된다는 것이다.
불행히도, 우리를 일희일비시키는 정치의 많은 부분이 우리의 즉각적 선택, 그러니까 심사숙고에서 벗어나 있다. 그리고 직관적 파악의 과정에서, 일종의 캐릭터 진영 배틀 엔터테인먼트가 된다. 직관이 중심이 되면, 불완전한 지식의 호소력이 강력해진다 (예를 들어 유시민의 ABC론 같은).
비유하자면, 프랑스 소설 ‘어린 왕자’에서 왕자가 최고의 양 그림을 그려달라고 하지 않나. 여러 종류의 양 그림을 그려줘도 불만이다가, 최고의 그림이라고 만족한 것은 바로 그냥 양이 들어 있다고 설명을 붙인 상자 그림이었다.

오늘날 미디어 환경도 그렇게 대충 그럴듯한 상자를 던져 주고, 상자에 자극적인 포장을 한다. 미디어 회사든, 전문가든, 일반인이든 모두가 촘촘히 연결되어 즉각적인 인상과 반응을 북돋는다. 그 상자를 받은 사람들은 포장이 자신들의 ‘정서’에 부합한다는 느낌이 오면 대만족하고, 상자의 내용은 그냥 자기 마음대로 채워 버린다. 그게 바로 매개된 직관의 정체다.
단순화, 도식화가 득세하고, 재미 없는 토론과 합리적인 의견, 복잡한 의견은 따분한 ‘설명충’ 취급을 받는 환경에서 차별의 현재성을 이야기하며, 누구 하나 찍어내는 것이 아니라 모두를 각자 거울 한 번 쳐다보게 만드는 것이 가능할까. 몇 가지 시작점 정도는 말할 수 있겠다.
그래서 어쩌자는 건가
제도적으로는, 혐오와 차별에 대한 표현의 조율을 가능하게 하고 강제성을 지닌 하나의 단단한 기준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포괄적 차별금지법이다. 그것 하나 입법한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당연히 아니지만, 그것 하나 못 만드는 상황에서 뭘 조율할 수 있는 방법은 (매우 바람직하지 않은) 사적 응징 정도 밖에는 없을 것 같다.
실천과 생활의 차원에서는, 말의 함의를 표면화하는 습관을 보급해야 한다. 소셜미디어 상의 표피적인 유행, 문화 코드처럼 되어버린 혐오 발언에 의해 호명되는 이들은 여전히 고통받고 있다는 걸 구체적으로 풀어서 퍼뜨려 줘야 한다. 그런 말을 쓰는 너는 나쁘다라는 삿대질이 아니다. 어떤 표현 안에 담긴 우리 사회 안에서 실재하는 차별을 드러내는 것 말이다. 특히 ‘세상에는 존재하는데 너는 다행히 안 겪은 극심한 차별’에 대해 알려주는 작업을 재미있게 해낼 인재가 늘 필요하다.

한편 이 과정은 막연한 코드 사냥을 지양하고 경중을 세밀화하는 것도 필요하다. 악의적으로 자기들의 비밀결사 놀이를 하는 것이 있고, 그냥 어디서 주워들은 말버릇으로 붙은 것도 있는데 그걸 똑같이 처단하겠다 좌표 찍고 몰려가면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끝으로 다시 한 번 더 강조하고 싶은 건, 소통과 실천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항상 동시에 존재하고, 함께 작용한다. 소통해야 실천이 따라오고, 실천을 위해서 소통해야 하는 게 아니다. 소통이 곧 실천이고 이미 그 만큼씩의 사회적 영향을 남긴다. 행동의 자유만큼이나 책임이 따른다. 그걸 명심하며 표현의 자유를 행사하면 좋겠다.
💡 표현의 자유는 규제를 필요로 한다
표현의 자유 보호에 가장 극단적으로 나서는 사회를 생각해보자. 미국은 표현의 자유를 아주 강하게 보호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수정헌법 1조가 표현의 자유를 특별히 보장하는데, 일반론 서술 너머 아예 자유권을 제한하는 입법 자체를 금지해 버렸다.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 미디어 학계에서 흔히 가르치는 네 가지 이론이 있다.
1. 진리 추구론, 흔한 말로 “사상의 자유 시장”: 모든 표현들이 펼쳐져야 사람들이 그 중 옥석을 가릴 수 있다.
2. 자치론: 민주제는 참여의 가치를 통해야 사회를 운영할 수 있고, 그건 입장의 표현을 필요로 한다.
3. 견제론: 여러 사상이 표출되어야 담론의 장에서 입장들이 서로 견제와 균형을 유지할 수 있다.
4. 자아실현론: 표현하는 사람에게 만족감을 주고, 그런 사회적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사회가 좋은 사회다.
그런데 이들 이론은 모두, 자유로운 표현 이후의 훨씬 더 중요한 작업의 실행을 전제한다. 나쁜 아이디어를 정말 걸러내야 하고, 참여 속에 생기는 서로의 마찰을 해소하며, 견제가 단순한 방해가 아닌 발전적 균형이 되도록 하고, 자아실현을 하겠다며 아무나 어디서나 빤스를 내리지 않게 하는 것. 한마디로 표현의 자유의 목표를 충족하려면 적극적 조율과 관리가 필수라는 말이다. 여기에서 현실적 문제가 발생한다.
먼저 소통을 하고, 그 뒤에 실행한다는 건 관련된 모든 이들의 ‘합리적인 근대성’을 전제한다. 이런 합리적 이성의 가설이 과연 참이었던 시절이 정말 있는지부터가 연구 대상이지만, 적어도 오늘날의 소통 환경은 확실히 그렇지 않다고 본다. ‘소통 후 실천’의 이원화 모델은 지극히 관념적인 구분이고, 실생활에서 소통과 실천은 한 덩어리라서 서로 나뉠 수 없다. 표현을 하면서 스스로의 입장이 강화되기도 하고, 진영이 생겨나며 논리보다 우선시되고, 실천의 방법이 소통을 통한 대중 동원이기도 하다.
그나마 그런 구분을 해내는 경우라고 할지라도, 소통의 합리성만으로 좋은 생각이 실천의 틀로 선택되는 것은 아니다. 공론장은 사회 전체를 아우르는 단일한 덩어리로 이루어지지 않기에 어떤 이들의 소통 조각은 더 힘이 세고, 어떤 조각은 그렇지 못하다. 가령, 미국 건국 시기를 예로 들면, 소위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라고 불리는 이들이 자기들끼리 진행한 토론은 어마어마한 권위를 누렸다. 그걸로 독립전쟁을 결심하고 헌법의 틀을 짜냈으니까. 한편 권력의 주변부에 있던 이들의 우선 의제는 합리적 소통이라 한들 밀려났다. 노예제 폐지라든지.
그렇다면 그 이후로 라디오, TV 등의 매스미디어를 통해 통일감 있는 거대 담론의 시대가 왔으니 뭐가 좀 달려졌을까. 매스미디어 시대 초기에 히틀러가 독일 국민들을 적극적으로 설득해 나치 전쟁범죄의 공범으로 끌어들인 순간부터 이미 충분히 엇나갔다. 매스미디어의 의제로 들어가기 위한 관문만 더 높아졌고, 그나마 미디어의 산업적 측면 즉 상업성이라는 요인까지 만족시켜야 했다. 더욱 더 소수의 통일되고 권위적 오피니언으로 회귀하는 현상이 발생하고.
인터넷의 시대가 오자 처음에는 소통 장의 발전에 대한 여러 희망적인 가능성이 논의되었다. 그런데 그 기술이 원숙하게 정착한 오늘날 정작 벌어진 것은 권위적인 오피니언의 사실상 실종과 함께, 합리적 청중도 함께 사실상 실종되는 일타쌍피다. 선동과 무리짓기, 혐오와 조롱과 차별의 압도적 재미를 이길 수 있는 것은 흔치 않고, 그렇게 생겨난 호응을 상업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주류가 되었다.
표현의 자유를 추구하는 목적을 위해서는, 자유를 제한해서라도 적극적 조율을 추구해야한다는 역설이 바로 현실이다. 그렇다면 누가 어떻게 제재할 것인가. 미국이라는 사회가 찾은 가장 손쉬운 접근은 국가는 규제를 하지 않고, 민간은 알아서 규제하든 어떠든 놔둔다는 것이다. 사실 미국이라고 해도 국가가 아예 규제를 안 하는 것은 아니어서, ‘즉각적 무법 행위 유도’ 같은 엄격한 잣대가 있기는 하지만, 너무 엄격해서 잘 못 써먹는다.
그 대신, 사회적인 압력에 의해서 민간에서 이뤄지는 사실상의 표현 규제는 흔하다. 흑인을 멸칭하는 ‘N단어’를 던지면 직장에서 바로 해고당하는 문화가 그 예시다. 유명한 극우 정치 엔터테인먼트 미디어인 폭스뉴스가 부정선거론 거짓 뉴스를 퍼뜨렸던 2020년 대선 이후, 선거기계 제조사인 도미니언사가 천문학적 배상금을 타낸 것 역시 표현에 대한 제동이 민간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다.
굳이 미국 같은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라도, 웬만한 현대 민주제 사회들은 국가가 직접 표현을 규제하는 범위를 매우 엄격하게 좁혀놓으려고 노력한다. 독일의 경우에는 애초에 헌법에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되 법률에 의한 규제가 가능하게 적시해놨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민주제 자체에 대한 위협 정도의 큰 명분을 내세울 수 있을 때 움직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