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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묵적지수] ‘K를 생각한다’의 저자 임명묵 님과 논쟁적 인물과 현상, 이슈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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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카진스키)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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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묵적지수 01. 유나바머

임명묵 님은 슬로우뉴스와 오랫동안 함께한 필자입니다. 묵적지수(묵수)는 춘추전국시대 사상가 ‘묵적(묵자)의 지킴’이라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로 ‘서로 차별 없이 똑같이 사랑하고, 이롭게 하자’는 묵자의 사상적 면모를 잘 보여줍니다. 오늘날 이 고사성어는 때론 융통성이 없어 보이더라도 주장과 소신을 굽히지 않는 행동과 언명, 그런 사람을 가리킬 때 쓰입니다. 명묵 님과의 대화가 그런 것이길 바라봅니다.


명묵적지수 첫 번째 인물은, 그야말로 논쟁적인 인물, ‘유나바머’ 시어도어 “테드” 카진스키입니다. 네 차례에 걸쳐 연재합니다.

테드 카진스키로 밝혀지기 전, 테러리스트 유나바머를 상징하는 FBI 몽타주 이미지.

그(카진스키)의 논문은 뛰어난 대학원생의 수업 과제가 아니라 스스로 연구한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만약 이것이 광인의 글이라면, 장 자크 루소, 톰머스 페인, 카를 마르크스는 거의 제정신이 아닐 것이다.

제임스 윌슨(James Wilson; 정치학자), ‘광기를 찾아서’ (In search of Madness), 뉴욕타임스: 1998. 1. 15.

유나바머의 행동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는 틀렸다: 자신의 아이디어에 관심을 끌기 위해 사람들을 죽인 것은 결국 대다수 사람들이 그와 함께 그 아이디어를 가두게 만들었다. 그것들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사람들에게는 언급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글쎄, 나는 정치적으로 옳바르기보다는 옳은 사람이 되고 싶다. 이제 사람들이 유죄 판결받은 연쇄살인범 테드 카친스키의 [산업사회와 그 미래]를 읽을 때다. 그의 작품은, 그의 행동에도 불구하고,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조지 오웰의 [1984]와 나란히 놓을 만하다.

키스 애블로(Keith Ablow; 작가, 전 정신과 의사), ‘유나바머가 옳았는가?’ (Was the Unabomber correct?), 폭스뉴스: 2015. 11. 27.

시어도어 “테드” 카진스키(Theodore “Ted” Kaczynski; 1942. 5. 22. – 2023. 6. 10.)
혹은 유나바머(A.K.A. the Unabomber) FBI 제공.

민노: 카진스키는 명묵 님에게는 아주 중요한 인물입니다.

임명묵: 카진스키가 설정해 놓은 스텝을 따라가다 보면은 문명을 다 파괴해야 된다는 결론에 고개를 한 번쯤 끄덕이지 않을 수 없는 거죠. 물론 내가 그 선택을 하지는 않겠지만. 그러니까 왜 이 사람이 이런 말을 했는지, 말도 안 되는 말을 한 건데, 그 말도 안 되는 말이 이해되는 그런 지적 존재에 대한 경탄으로서 일단은 관심을 가지게 된 부분이 있고요. 제가 그 시점까지 고민하던 어떤 역사 철학적인 주제와 현대 사회에 대한 문제를 직접적으로 잘 짚었다고 생각했죠.

민노: 그게 5년 전쯤이니까 26살의 ‘앵그리 영맨’ 임명묵을 자극했다?

임명묵: 아, 그렇죠

이미 결정된 미래

민노: 그렇다면 분노의 내용, 그 대상은 무엇이었나요?

임명묵: 분노라기보다는 제가 그때나 지금이나 자주 생각하는 건 역사가 결국 인간의 통제나 자유의지의 작용보다는 훨씬 더 거시적인 힘의 집합으로서 어느 정도 사전에 결정돼 있는 것이 아닌가 라는 관념이었거든요.

민노: 명묵 님은 (이 표현 자체는 싫어할 수 있겠지만) 지리결정론에 많은 영향을 받으셨죠. 특히 [총, 균, 쇠] (1997) 같은 책은 ‘인생의 책’ 중 한 권이죠?

임명묵. 그렇죠. 그러니까 어떤 집단으로서 인간은 개체적인 어떤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냥 자연스러운 어떤 흐름들이 있는데 제가 생각하기에 그 흐름은 인간 집단이 더 고도로 조직화하고 더 많은 에너지를 쓰고, 더 많이 연결되는 방향으로 흘러왔다는 게 제 생각이거든요.

민노: 거기서 인간의 의지는 어느 정도의 역할을 했다고 보세요, 그럼.

임명묵: 거기에 진화론이 작용하는 거죠. 사회 조직과 연결을 고도화하고, 더 많은 힘을 행사하는 어떠한 사회 집단들이 이제 그렇지 않은 집단들을 잡아먹고 거기에 잡아먹히지 않고자 자신들도 생존의 방법론으로서 고도의 조직화와 발전을 채택하고, 그것이 계속 상승 작용을 일으키면서 이를 어떤 개인이나 어떤 특정 집단이 거부하고자 해도 거부할 수 없는 힘이 되는 거죠. 발전을 향한 어떠한 진군이.

민노: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2011)의 결론도 진화 원칙인 자연선택의 시대가 완전히 끝났고, 이제 의식적인 인간의 선택, 지적 설계가 자연선택을 대체하는 시대에 드디어 도달했다는 건데요.

임명묵: 문화진화론이라는 게 있는데, 사회진화론이랑 거의 비슷합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단순히 이제 개체 차원의 유전적 차원으로만 움직이는 게 아니라 어떠한 인간이 공유하는 문화 속에서만 인간의 자아라든가 이런 것들 형성이 되고, 그런 문화들끼리도 이제 계속해서 경쟁하면서 진화한다는 거죠.

민노: 지금 논의가 살짝 퍼지는 것 같아서요. 다시 되돌아가면, 카진스키의 문명 비판, 지금도 젊지만, 더 젊었던 인명묵이 감성적으로 끌렸왔다고 봐도 될까요?

임명묵: 그렇죠. 일단은 앞서 논의를 마무리하자면, 저는 문화진화론을 선호하고, 조지프 헨릭의 [호모 사피엔스, 그 성공의 비밀] (이병권 옮김, 뿌리와이파리: 2019)이나 이런 저자들이요. 그 문화진화론이 2010년대에 많이 발전했는데, 카진스키 선언문은 1995년도인 거죠. 카진스키는 문화보다는 기술 체제라고 했고요. 기술 체제는 가만히 놔두면 자기 증식적인 과정을 거쳐서 계속해서 고도화하고, 기술 체제의 고도화에 복무하는 인간의 활동만 가치를 인정받으며, 결국 인간의 모든 활동은 그 기술 체제의 고도화에 의해서 그 가치라든가 방향성이 규정된다는 거죠.

민노: 정리 하자면, 문화진화론의 영향을 받고 꽤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하던 와중에 선언문을 접하면서 카진스키가 더 와 닿았다?

임명묵: 그렇죠. 그리고 어떻게 1990년대에 이런 선견지명을 가졌지? 그런 놀라움이 있었죠. 자크 엘륄(Jacques Ellul; 1912-1994)라는 프랑스 신학자(이자 철학자, 법학자, 사회학자, 환경운동가; 60여 권의 책, 1000편의 논문, 레지스탕스 활동, 자신의 사상을 ‘기독교 아나키즘’으로 요약. 편집자)이라는 사람이 있는데요. 엘륄이 [기술 체계; Le système technicien]라는 책을 썼고 카진스키는 그 사상을 이제 받아서 자기 나름의 문화진화론을 제시한 거죠.

민노: 카진스키의 어떤 사상적인 어떤 선배 내지는 스승 역할을 프랑스의 신학자이자 철학자, ‘기독교적 아나키스트’가 한 거네요.

임명묵: 그렇죠.

민노: 문화진화론에 경도된 26살의 임명묵이 우연하게 범죄에 관한 책을 읽다가 카진스키를 만났고 카진스키의 선언문을 한 번 더 정독하게 됐고, 문화진화론의 맥락 속에서 ‘이 선언은 굉장히 미래를 예견한 혜안을 담았군!’그랬다는 거죠. 좀 감정적으로 와 닿았다? 피부에 마음에 와 닿았다? 맞나요?

임명묵: 그렇죠. 그리고 감정적으로 와닿게 된 계기는 이제 ‘앵그리 영맨’으로서 얘기를 좀 하자면, 어쨌든 제가 이제 미국의 정치적 올바름이나 뭐 그런 논의를 굉장히 안 좋아하는 편인데요.

민노: 마침 최근 캐콜드 님과 지난 주에 그 얘기 했는데요.

좌파 비판

임명묵: 카진스키 선언문이 당대 미국 사회의 신좌파적 경향성을 아주 강도 높게 비판하거든요.

12. ‘정치적으로 옳지 않다’라는 용어에 대해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은 도시 빈민가의 보통 흑인이나 아시야계 이민, 학대받는 여성, 장애인이 아니라 소수의 운동가들이다. 그들 중 다수는 ‘억압당하는’ 집단에 속해 있지도 않거니와, 오히려 사회의 특권 계층 출신들이다. ‘정치적으로 옳은’ 운동은 안정된 봉급의 직장을 갖고 있는 대학 교수 사이에서 든든한 지지를 얻고 있으며, 그들 대부분은 중상 계층 이상의 가정 출신인 백인 이성애주의자들이다.

시어도어 카진스키, [산업사회와 그 미래], ‘열등감’, 워싱턴포스트: 1995. 9. 19.

216. 일부 좌파는 테크놀로지에 저항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테크놀로지에 저항하는 것은 그들이 아웃사이더일 경우에 한해서이며, 테크놀로지 체제가 비좌파에 의해 통제되는 경우에 한해서이다. 만약 좌파가 사회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그래서 좌파가 테크놀로지 체제를 언제든 쓸 수 있는 도구로 만든다면, 그들은 그 때부터 열광적으로 테크놀로지를 이용하고 테크놀로지의 발전을 지원할 것이다. 좌파주의가 역사에서 끝없이 반복해 왔던 그 패턴 그대로의 행동이다. 러시아 볼셰비키가 아웃사이더였을 때는 검열과 비밀 경찰에 대해 격렬히 저항했고, 소수 민족의 자율권을 외쳤다. 그러나 자신들에게 권력이 넘어오자마자 볼셰비키는 더 철저한 검열을 실시했고 짜르 치하에서의 비밀 경찰보다도 잔인한 비밀 경찰을 창설했다. 그리고 소수 민족에 대단 억압도 짜르 시대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미국의 경우, 몇십 년 전 대학에서 좌파가 소수였을 때, 좌파 교수들은 열렬히 학문의 자유를 주장했다. 그러나 오늘날, 좌파가 주도권을 쥔 대학들에서 좌파들은 나머지 모든 사람으로부터 학문의 자유를 빼앗고 있다(이것이 바로 ‘정치적으로 옳은’ 운동이다) 똑같은 일이 좌파와 테크놀로지 사이에도 벌어질 것이다. 일단 테크놀로지를 자기 통제하에 넣고 나면, 좌파는 테크놀로지를 이용해 나머지 모든 사람을 억압할 것이다.

시어도어 카진스키, [산업사회와 그 미래], ‘좌익주의의 위험성’, 워싱턴포스트: 1995. 9. 19.
도널드 트럼프 (출처: Duncan Hull, CC BY)

민노: 그러니까 맥락으로 트럼프 당선에 일조(?)했다고 평가되는 고학력, 경제적으로는 여유 있는 전문직 종사자에 말단 노동자의 노동권이나 여권, 외국인 인권에에 관해 쿨한 얘기를 하는 것 같지만 정작 자기 자신의 삶의 모습은 이기적이고, 자신에게 속한 기득권을 당연시하는…

임명묵: 2018년에 ‘선언문’을 처음 읽었을 때의 상황을 다시 한 번 떠올려 보면, 트럼프 당선의 그 충격적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 이것저것 살펴보던 과정에서 미국의 좌파(리버럴)에 어떤 비판적 의식이 점점 쌓여가고 있었는데 카진스키가 신랄하게 비판하죠. 좌파주의는 자신의 열등감, 패배의식 그리고 사회 주류의 도덕률에 대한 과잉되고 부정적인 심리 상태의 집합이고, 그런 것들을 이제 추구하는 수단이 이제 대리 만족적 활동이 좌파 활동이다.

민노: 민주당스러운 좌파를 비판한 거예요, 아니면 정말 사상적인 좌파를 비판한 거예요?

임명묵: 카진스키가 말한 좌파는 19세기 노동운동 전통의 좌파가 아니라 대학가 백인 중산층의 어떤 정체성 운동의 의미로서 좌파라는 말을 썼다라고 언급합니다.

27. 현대 좌파 중에서 대단히 중요하고 큰 영향력을 지닌 한 분파가 지나치게 사회화되어 있으며, 그들의 지나친 사회화에 의해 현대 좌파주의의 방향이 결정된다고 우리는 주장한다. 지나치게 사회화된 좌파들은 흔히 지식인이거나 아니면 중상 계층 출신들이다. 대학 지식인들이 우리 사회에서 가장 고도로 사회화된 분파를 구성함과 아울러 대부분의 좌익세력을 이루고 있음을 주목하라.

29. 지나치게 사회화한 좌파가 사회에 저항하는 척하면서 사실은 거기에 집착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예를 하나 들어보자. (중략) 그들은 흑인 아버지를 ‘책임감 있는 아버지’로 만들고 싶어하며, 흑인 갱단을 비폭력주의자로 만들고 싶어한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바로 산업-테크놀로지 체제의 가치들이다. 체제는 사람이 어떤 음악을 듣는지, 어떤 옷을 입는지, 어떤 종교를 믿는지에 관해서는 일체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 사람이 학교를 다니고, 존경할 만한 직업을 갖고 있으며, 신분 상승의 사다리를 오르고, ‘책임감있는’ 부모이며, 비폭력주의자인 한에 있어서는 말이다. 지나치게 사회화된 좌파는, 그 자신은 격렬히 부인하겠지만, 흑인 남성을 체제에 통합시키고 싶어하며, 흑인 남성으로 하여금 체제의 가치를 수용하도록 만들고 싶어한다.

시어도어 카진스키, [산업사회와 그 미래], ‘과잉 사회화’, 워싱턴포스트: 1995. 9. 19.

임명묵: 좌파는 패배의식과 열등감 그리고 과잉 사회화의 산물인데 산업기술 시대의 모든 인간은 모두 이런 심리 상태를 내포하고 있다는 게 카진스키의 진단이죠.

민노: 그렇다고 카진스키가 보수주의를 옹호한 거는 아니잖아요.

임명묵: 그렇죠. “보수주의자는 바보들이다”라는 문장이 있을 정도니까요.

50. 보수주의자는 바보들이다. 그들은 이미 썩어 가는 전통적 가치관에 묶여 있으면서도 여전히 테크놀로지의 발전과 경제 성장을 열광적으로 지지한다. 한 사회의 테크놀로지와 경제의 급격한 변화는 사회의 다른 부문의 급격한 변화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으며, 그런 급속한 변화는 필연적으로 전통적 가치들을 붕괴시킨다는 자명한 사실을 보수주의자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다.

시어도어 카진스키, [산업사회와 그 미래], ‘사회 문제의 근원’, 워싱턴포스트: 1995. 9. 19.

민노: 카진스키는 보수주의를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 봤다?

임명묵: 아니요. 미국적 맥락에서 종교나 가족과 같은 보수적 가치가 있잖아요. 그런데 보수주의자들은 자본주의를 엄청 신봉하죠. 그래서 자본주의와 기술 문명의 진화를 용인하면 보수주의가 지키려는 전통과 보수적 가치는 다 쓸려나갈 텐데 그 두 개를 같이 지지한다는 건 바보 같다는 거죠. 너는 바보고 천지다. 하지만 좌파들을 좀 더 명확한 공격 대상으로 삼고 있기는 하죠.

민노: 좀 더 명확한 공격 대상은 좌파다?

임명묵: 그렇죠. 좌파는 현대 기술 문명에서 느끼는 어떠한 무력감을 대중운동의 형태로서 발산하면서 그 무력감을 잠시나마 잊어버리는 몸부림 치는 애들이라는 거죠. 자신들의 어떠한 사회 주류의 윤리관을 주로 소외된 계층에 투사하는 거고요. 여기서는 에릭 호퍼(Eric Hoffer, 1902–1983)라는 미국 사회철학자의 논의가 카진스키에게 영감을 줬죠.

‘거리의 사상가’ 에릭 호퍼

에릭 호퍼는 비록 거대한 사상사적으로 체계 있는 학적 이론을 설정하지는 못했지만, 그리고 수다한 후계자를 기르지도 못했지만, 그는 “우리 시대의 수백만의 사람들, 특히 혼돈과 좌절 속에서 무엇이 참된 삶의 길인지를 분간하지 못했던 그러한 사람들에게, 삶의 의지가 가지고 있는 고귀한 가치를 일깨워 주었고, 죽음보다는 삶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이며, 기다림보다는 스스로 나서서 맞이하는 태도가 얼마나 인간다움의 의지 있는 생활의 태도인가를 가르쳐준 가장 실질적인 생의 사상가”로서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위에서 인용한 말은 에릭 호퍼를 CBS TV에서 최초로 인터뷰한 에릭 세브라이드가 시청자에게 그를 소개한 말 중의 한 구절이다.

진덕규, 에릭 호퍼의 생과 [대중운동론], 기독교사상 1976년 4월호(통권 제214호)

민노: 에릭 호퍼는 카진스키에게 어떤 영향을 줬을까요?

임명묵: 에릭 호퍼는 캘리포니아 부두 노동자로 일하면서 에세이를 많이 쓴 사람이잖아요. 호퍼의 에세이 중에 [맹신자들] (The True Believer: Thoughts On The Nature of Mass Movements, 1951., 이민아 옮김, 궁리출판: 2011)이라는 책이 있는데, 나치즘이나 파시즘, 좌파 운동 등의 각종 대중운동은 모두 자신에 대한 불만족과 권태감을 느끼는 인간들이 그걸 잊고자 하는 행동이다라는 글을 쓰죠.

민노: 꽤 설득력이 있는 지적이네요, 지나놓고 보니.

222. 좌파, 특히 과잉 사회화된 부류들은 에릭 호퍼의 책 [맹신자들] (The True Believer; 1951.)에서 말하는 바로 그 의미에서의 ‘맹신자’들이다. 그러나 모든 맹신자들이 좌파와 동일한 심리적 특성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가령 나치 맹신자는 좌파 맹신자와는 확실히 다른 심리적 특성을 갖고 있을 것이다. 하나의 사회 문제에 대해 한마음으로 전념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으므로 맹신자들은 혁명 운동에 유용한 구성원이 될 수 있으며 어쩌면 필수적인 구성원일지도 모른다. 이때 제기되는 문제는, 우리가 다룰 수 없는 사람들도 혁명에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테크놀로지에 항거하는 혁명에 참여하는 이들 참된 신자들의 에너지에 어떻게 고삐를 채울 수 있을지 전혀 확신이 서질 않는다. 현 단계에서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맹신자의 열정을 오로지 테크놀로지 파괴에만 국한시킬 수 없을 경우, 맹신자를 혁명에 끌어들이는 일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라는 것이다. 만약 그가 또 다른 이상에 몰두하게 된다면, 그는 그 이상을 추구하는 수단으로서 테크놀로지를 이용하려 할 것이다(문단 220, 221을 보라).

시어도어 카진스키, [산업사회와 그 미래], ‘좌익주의의 위험성’, 워싱턴포스트: 1995. 9. 19.

임명묵: 그래서 카진스키가 그러니까 이런 좌파들의 통제 욕구가 결국 자신의 윤리관을 모든 인간에게 철저히 강제하는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고, 결국엔 모든 것은 허가와 금지의 문제로 돼버릴 거고, 인간의 자율성은 점점 더 숨막히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게 그냥 단순히 좌파들이 설쳐서가 아니라 산업 기술 문명의 본질이 그렇다라고 하는 것이죠.

민노: 이걸 지금 민주당, 공화당 문제로 환원하면 민주당도 희망은 없다. 아니 오히려 더 문제다?

임명묵: 그렇죠. 이렇게 번역해도 돼요. 민주당이 더 문제고, 애초에 공화당도 희망은 없다.

민노: 카진스키의 비관적 전망은 우리나라를 비추는 어떤 프리즘으로도 일정하게 유효하다고 보세요.

임명묵: 단순히 일국적인 차원이 아니라 전 세계적인 차원이라고 생각해서요.

긍정적 생의 경험, ‘권력 과정’을 제거하는 기술 체제

민노: 카진스키가 말하는, 기술 체제가 인간에게 제거하는 건 어떤 거죠.

임명묵: 마틴 셀리그먼(Martin Seligman; 1942년 생)이 긍정심리학의 대가로서 세 가지 층위를 얘기하는데 하나가 쾌락이고, 두 번째가 몰입이고, 세 번째가 의미죠. 인간은 단순히 도파민이나 받으면서 쾌락에만 몰두한 존재가 아니고, 뭔가에 몰입해서 뭔가를 걷어냈을 때 성취감이 중요하고, 그 성취감이 이제 자신의 삶에 의미 있다고 여겨질 때 어떤 긍정적인 경험을 한다는 건데 카진스키가 보기에는 인간이 그런 긍정적 경험을 할 수 있는 것들이 기술 체제에 의해서 제거되고 있다는 거죠.

긍정심리학의 선구자. 마틴 셀리그먼.

민노: 긍정적 경험을 기술 체제가 제거한다?

임명묵: 그 긍정적 경험이 바로 ‘권력 과정’이라는 건데, 가치 있는 목표를 충분한 노력으로 획득했을 때 느껴지는 어떤 성취감이 카진스키가 말한 권력 과정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텐데요. 그 권력 과정을 인간이 느낄 수가 없게 됐다는 거죠. 왜냐하면, 이제 풍요로워지고 인간이 이제 어지간하면 쉽게 살 수 있게 됐으니까. 과거에 인간에게 중요하던 어떤 목표과 거기에 들어 있던 노력들은 사실 아무 쓸모 없게 된 거고요.

민노: 과거라면 무슨 어느 정도까지 과거예요.

임명묵: 산업혁명 이전이죠.

민노: 수렵 채집할 때 그 과거까지 거슬러 올라가요?

임명묵: 수렵채집을 카진스키는 이상적으로 상정하지만, 아마 농경사회까지도 어느 정도는?

민노: 농경까지는 어쨌든 자기가 직접 가꾸고, 심고, 기르고 했다는 건가요?

임명묵: 자신의 삶에 직접적인 원천이 되는 것들을 자기가 직접 노력해서 얻었을 때 인간은 본연의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데 현대 산업사회에서는 그게 그냥 다 주어지고, 너무나 값싼 게 돼버리면서 인간 대다수가 그런 성취감을 느낄 수 없게 됐고, 산업 사회에서 성취감은 정말 소수의 재능 있는 인간만이 누릴 수 있다는 거죠.

민노: 이를테면 창조적인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임명묵: 엄청난 기업인이라든가 권력의 사다리를 올라갈 수 있는 사람이라든가 창조적인 예술가나 뭐 그런 사람들이나 자신의 작업과 충분한 노력을 통해서 만족하는 어떤 걸 느낄 수 있는 거지 대다수 사람은 그냥…

카진스키가 1987년 2월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 테러에 사용한 폭탄 파편, FBI 제공.

민노: 거대한 시스템의 부품이니까?

임명묵: 그런 부품이 되고 그런데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러한 성취감을 지속적으로 느끼지 못하면 권태와 불만족에 시달릴 수밖에 없고, 그래서 인간은 그런 성취감을 느끼기 위한 대리만족 기재를 찾아다닌다는 거죠.

민노: 경제적 수단으로서의 직업 가치가 절대적인 현재로선 연봉이 얼마냐 노동 강도는 어느 정도냐 휴일이 얼마나 기냐 이런 것만 따지는데요. 그럼 자아를 충족하고, 자아를 성취하는 어떤 직업, 카진스키가 얘기하는 인간 스스로 자기 만족감을 충족할 수 있는 그런 직업은 극히 적겠군요.

임명묵: 궁극적으로는 없다.

민노: 없다?

임명묵: 카진스키가 보기에 과학자들도 대리 만족을 위해서 연구하는 거지 무슨 대단한 목적이 있어서 혹은 대단한 삶의 의미나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서, 그런 건 다 환상이다. 그냥 다 대리 만족일 뿐이다.

민노: 이를테면 의사나 교사, 소방관 같은 직업은 보람 있는 직업의 대명사잖아요. 교사는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다음 세대, 내일을 길러내는 사람이고, 의사는 아픈 사람들 상처를 보듬고 상처를 치료해 주는 사람이니까, 소방관은 불 속에서 생명을 건져내는 사람이고요. 이런 직업들도 보람이 없다고 생각했을까요, 카진스키는? 가정적인 질문인데요.

임명묵: 제가 추측 해보자면, 궁극적 차원에서는 가르치는 일이나 인간의 생명을 살리는 일의 어떤 보람도 기술 체제에 종속되면 그 진정한 의미나 가치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을 것 같아요.

민노: 카진스키는 그런 직업의 가치들도 인정하지 않았을 것 같다?

임명묵: 그러니까 개인으로서 존중했을 것 같지만, 전체적으로 평가한다고 했을 때는 결국에는 그들도 자신의 일에 대한 자율성이 없다고 봤을 것 같아요. 카진스키는 자율성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죠. 대리 만족이 아니라 권력 과정을 통해 내가 원하는, 추구할 수 있는 자율성이 있어야 하는데, 현대 사회는 그것의 방법부터 내용물까지 모든 게 기술 체제의 편의와 내적 요구에 의해 종속된다는 거죠.

카진스키의 ‘현실적’ 비전?

민노: 카진스키가 보기에 자기 충족적인 자율적 삶이라는 건 어떤 모습일까요.

임명묵: 그 사람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삶은 그거잖아요. 몬타나주의 오두막에서 사냥하면서 사는 거. 그걸 이상적인 삶이라고 생각한 거죠.

민노: 그러면은 어쨌든 도시 문명 속에서 살면 안 되겠네요.

임명묵: 그렇죠.

민노: 수렵 채집을 해야겠네, 진짜.

임명묵: 아니면 원시 농경을 하든지. 그런 걸 했겠죠.

민노: 그러면 카진스키가 얘기했던 건 몽상적 사회주의자의 이상처럼 들리기도 하는데요. 원시적이고 몽상적인 이상향을 가진 사람이라고 봐도 되는 거예요. 어떻게 평가하세요?

임명묵: 거기에 관해서는 카진스키가 논평하게 있는데요.

민노: 자기 자신에 대해서요?

“우리 삶을 위한 투쟁” 아나코 원시주의 슬로건. 위키미디어 공용.

임명묵: 아니요. 아나코 원시주의(Anarcho-primitivism; 비문명을 지향하는 원시주의)에 관해 평한 게 있는데요. 그 사람들이랑 나를 엮지 마라. 뭐, 이런 글을 썼죠.

민노: 왜? 비슷한데?

임명묵: 그러니까 그 사람들은 원시사회가 산업사회보다 뭔가 풍요했을 거라고 가정하지만

민노: 그때는 오히려 굉장히 살기가 쉽지 않았겠죠.

임명묵: 그렇죠. 카진스키는 그렇게 사는 건 굉장히 어렵고, 인간의 삶에 엄청난 후퇴가 있을 거고, 그런 어려움을 우리가 다 인정을 해야 된다. 그러나 우리가 그럼에도 이런 삶을 추구해야 되는 이유는 그것이 산업 기술 문명에서 노예처럼 사는 것보다는 가치가 있는 삶이기 때문이다라고 주장을 하는 거죠.

민노: 그러면 가정적으로 한 번만 더 질문할게요. 그 가정적 질문이 큰 의미는 없겠지만, 우리가 카진스키를 통해서, 그의 죽음을 계기로 우리의 오늘을 한번 되짚어보자라는 거잖아요. 물론 이 사람이 무슨 이순신이나 헬렌 켈러와 같은 위인은 아니지만요. 세상에 세종대왕만 있는 건 아니니까요. 카진스키도 있고, 빈 라덴도 있고 그런 거니까. 카진스키에게도 현실적인 비전이라는 게 있어요?

임명묵: 카진스키의 현실적 비전은, 선언문 얘기를 좀 더 이야기하자면, 결국에는 기술 체제가 이제 제가 말한 문화진화론적인 경향에 의해서 자기 증식적으로 계속해서 고도화하고, 기술 체제의 인간에 대한 통제가 계속해서 심화하면 인간은 기술 체제 앞에서 정말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된다.

민노: 그러면 카진스키는 문제 제기만 있고, 솔루션은 없는 거 아닌가요?

임명묵: 그래서 이제 많은 사람이 이 산업 기술 체제와 함께 인간의 존엄성도 지킬 만한 공존안을 내고자 한다. 그러나 그건 다 쓰레기다. 불가능하다.

민노: 그게 카진스키의 결론이예요?

임명묵: 그렇죠. 왜냐하면 이제 고도화된 기술 체제가 더 강력한 시스템이니까 하나의 시스템에서 기술 체제가 우리는 인간의 존엄을 위해서 기술 체제를 더는 발전시키지 않을 거야! 라고 하면, 다른 체제가 나타나서 더는 진화를 멈춘 체제를 때려 부술 테니까 의미가 없는 거죠.

민노: 그러면 현실적인 대안으로서 A안만 있고, B안은 없어요?

임명묵: 그냥 유일한 방안은 나의 테러에 모두가 함께…

민노: 동참해라?

임명묵: 이 시스템을 일거에 붕괴시켜야 한다. 그게 주장이죠.

민노; 나(카진스키) 같은 테러리스트가 한 10억 명 정도 갑자기 그냥 전 세계 각지에서 봉기해서 진짜, 다시 되살릴 수 없을 정도로 한 방에 그냥!! 이거 거의 ‘공산당 선언’ 수준인데요.

임명묵: 그렇죠. 그래서 몇십억 명 죽어도 상관 없다. 이런 말까지 하니까요.

민노: 공산당 선언으로 상징되는 마르크스주의는 어쨌든 볼셰비키 혁명이 성공하면서 현실 소비에트의 어떤 이념적인 교조이나 정치 철학으로 작동했잖아요. 그런데 카진스키의 선언문은 이게 너무 계란으로 바위치기도 아니고, 진짜 계란으로 무슨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치기 같은 그런 느낌이 살짝 드는데요.

임명묵: 실제로 그렇죠. 사실은 말도 안 되는 얘기죠. 그런데 제가 카진스키 선언문을 ‘지금 다시 한번 더 읽을 때’라고 말하고 싶은 건, 산업문명을 테러로 일거에 무너뜨리자는 그런 황당한 게 아니라 다만, 현대 문명에 대한 카진스키의 진단은 분명히 우리에게 시사한 바가 크다는 겁니다. 이에 관해선 이어서 이야기하시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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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댓글

  1. 명묵님 페북에서 보고 들어왔다가 홀린듯이 다 읽었네요. 진짜 카진스키가 가진 문제의식과 통찰 자체는 너무 정확해서 섬뜩할 정도네요. 2023년 8월 대한민국에 대입해도 정확하게 진단이 되네요.+

  2. 정신적 아노미 상태나 다름 없는 시대에, 자신의 머리로 스스로 학습하고 대안을 도출하기 위해서는
    언론이든, 주류 지식 시장(학계,기타 매체)에서든, 소위 세간에서 언급조차 잘 안되는 부분들을
    잘 찾아서 공부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런 측면에서 임작가의 논의 속에 다뤄지는 각종 화두들은 가뭄 속의 단비, 그 자체!

  3. 카진스키 책은 읽었지만, 이 인터뷰를 통해 좀 더 그 함의가 정확하게 와닿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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